건축은 반역이다
함인선 / 서울포럼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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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을 깨는 잡종의 외로움

 미술관련 서적을 주로 내는  열화당에서 나온 지오폰티의 『건축 예찬』은 건축에  대한 유려한 산문이지만 우연히 서점에서 고르게 된  『건축은 반역이다』란 책은 조금은 불온하면서도  유머스럽고,  유머스러우면서도  비감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의 서문 끄트머리는 이런 비장한 글로 채워져 있다. <기질 때문이었는지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는 항상 '타자',  '비주류'였고 우상을  깨는 쪽이었다. 원래 잡종 교배를  통해서  우성인자가 유전되는 법, 만일 외로움만 견딜 수 있다면  잡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잡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말에  밑줄을 긋고 나는 그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강이 워터프론트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가 두터워야 하며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한강의 강변은   도시고속도로라는 바리케이트가 쳐  있어  쉽게  접근을  할 수 없으며 그 배후는 모조리 아파트가 장벽을 치고 있어  또 한  번 접근이 좌절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바리케이트'라는 표현. 바리케이트란  주 지하시다시피 '어떤 곳으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장치'. 건축물이 바리케이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재밌지만 끔찍하기도 하다. 몇 해  전 국회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산의 아파트 군단이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도심을 보호하는 바리케이트의 전략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고 한다. 인간 방패막이, 참으로 재치있는(?) 발상이다. 변두리는 중심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해야 한다는 파시스트의 한심한 유머 감각이다.

  <그 어떤 분야도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특히 건축은  그것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 즉 당대의 과학 기술과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에 절  대적으로 의존한다. 건축을 이런  하부구조의 차원으로 해체하여 말하면  항상  듣는 것이  "그게  무슨 건축이냐?"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고상한(?) 건축 아카데미즘은 건축을 건축으로만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아카데미즘과 마찬가지로 건축  아카데미즘 역시 '권력으로서의 지식체계'   에 다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가 밝혔듯이 '  순수지식(pure  knowledge)',  즉  권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참된 지식이란   없다. 건축 아카데미즘이  오로지 건축적인 것만을   가지고  건축을  말하겠다는 것은 폐쇄적인 자기완결성을 무기로 독점적이고 배타적 지위를 누려보겠다는 권력  지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 비단 건축만 그럴 것인가. 시로써만 시를 말하겠다는 문학주의, 철학으로써만 철학을  말하겠다는 철학주의  또한 권력지향의 또다른 형태가 아니고 무어랴.  원전이라면 그 앞에서 껌뻑 죽는 기지촌 지식인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전문용어 속에 학문적 성과를 가두어 두려는 학자들,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글을  아카데미즘의 포기  선언쯤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리는 지식인들, 특정의 장르에 대한 고집스런 집착을 마치 지고지순한 문학애쯤으로 알고 있는 문학가들에게 <나는 건축을 건축 밖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라는 건축가 함인선의 발언은  권장해볼 만한 화두.

             자본의 논리, 인간의 논리

  기하학엔 인정사정이 없다. 그래서 기하학은 한 점과 한점을 있는 최단의 거리가 우회의 경로를 가는 곡선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없다. 인간을 짓밟지 않고, 추억을 망가   뜨리지 않고, 전통을 깡그리  부수지 않고, 한 점에서 한 점으로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다. 우리의  근대가 놓친  것은 바로 그런 구불구 불한 우회의 길이  오히려  빠른 길일  수 있다는 역설의 진리. 

 <여행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좋은 도시들을 보고 또 부러워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고향인 서울, 그 중에서도 강북을 사랑한다. 그런데   나의  서울 사랑은 서울이 잘  나고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600년의  역사 도시, 북한산, 남산, 관악산이 만드는  육경축(軸)과 한강의 수경축(軸) 운운하는 입 발린 서울 예찬을 들으면 사실 나는 역겹다. 그러  한 천혜의 물리적   환경이나 역사성을 망가뜨리는 데  기여를 한 이 땅의 건축,  도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그런  얘기는 여자를  겁탈한 후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것 못지  않게 뻔뻔스럽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의 적절한 표현대로 한강의 아파트 군단이나  강변도로 그리고 고수부지는 강과 인간과의 '스킨쉽'을 가로막는 바리케이트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에  대해 미학적이고 정서적 인  배려를 배부른  자의 사치쯤으로  생각하는 한 근대화가  갈  수 있는 길은 뻔하다. 남들은 수십년 걸린다는 신도시를  단 사 년 만에  뚝딱 해치우는 저돌성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근대화는  맹탕 사기다. 그것은 지은 지 백년도 안 되는 다리와 건물을 허물 수 있는 기적, 그 기적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기적이다. 몇 년간의 건축 현장 경험이    있는 함인선은 건설업자들의 저돌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유능한 현장소장으로  어여삐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이 외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목숨값과  안전시설 비용, 부실공사와  공기맞추기, 상극적인   두 변수를 두루뭉수리로 잘 섞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엄동설한에 콘크리트를 굽는다든가 목숨값을 치를   각오를 하고   돌관작업을 강행하는 상황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군사작전일 따름이다. 이럴 때 건축의 예술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들은 빨리 시공하는 데 거추장스런 장애일 따름이며,  임기 내에 치적을 쌓아야 할 나리들과 하루  바삐 자신의 성공을 현시해야  하는 졸부들의 공 분(公憤)을 살 만한 짓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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