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야기를 할 때 이니셜을 쓰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가 언제 그랬어, 하는 식의 항변을 친구로부터 받기가 십상이다. 내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일지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보려고 했던 것만을 말하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내 친구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니셜을 쓰는 것은 안전한 일이다. 더 안전한 방법이 없을까?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 그러니까 하나의 픽션을 구상하면 문제는 손쉽게 해결된다. 친구들이 “너 그거 내 얘기 한 거 아니야”라고 따지고 들면, 그거 픽션인데 왜 성화를 대고 난리야, 라고 가볍게 응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약간의 죄의식만 감수하면 이런 방식의 말하기는 교묘하지만 재미있는 데가 있다. 하지만 픽션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픽션은 그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자(일단은 그를 예술가라고 하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르다. 게으른 자는 고작 이니셜을 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H

H가 신림동 고시촌 근방에서 <스피노자의 안경>이라는 안경점을 할 때의 이야기다. 다소 현학적인 간판이 제법 문화적인 친구의 이목을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곳은 안경을 맞추러 온 고객들보다는 시간을 죽이러 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트로츠키 자서전과 황지우, 송찬호, 이진명, 최승자의 시집은 안경점에 꽂혀있을 목록치고는 이례적인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런 이례적인 아이템이 사람을 끌어 모았는지도 몰랐다. 확실히 그곳엔 이례적인 아이템이 즐비했다.

먼저 H의 외모를 보자. 한때 문학청년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그의 깡마른 체구, 존 레논을 연상시키는 길고 풍성한 머리칼, 대학생들의 철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피노자의 저서 <에티카>, 그 옆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음악 씨디들은 범상한 안경점과 <스피노자의 안경점>을 확연히 구분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스타일리쉬한 그의 성품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준 것은 그의 노란색 오토바이였다.

H는 그 오토바이를 폼나게 부릴 줄 아는 친구였다. 고시생들로 북적거리는 신림동 골목길을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노란색 오토바이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머리의 사람이 아니라 몸의 사람이다.>

한때 문학에 심취했던 이력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는 머리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H는 오토바이는 단순한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지붕이 없는 사람들의 철학”이라고 했다. 나는 <지붕이 없는>이라는 대목에 방점을 찍었다.


H의 물침대 매트

몹시 추웠던 날, 그의 옥탑방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두 사람이 몸을 비틀기에도 불편할 정도의 몹시 비좁은 방이었다. 개 발에 주석편자라던가, 물침대 매트라면 한갓진 교외의 모텔방에나 어울릴 법한 소재라는 것이 내 상식이었으니, 물침대 매트는 그 방의 규모나 분위기에 비해 지나치게 럭셔리한 것이었다. 더구나 싱글로 사는 그에게 물침대는 분명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손님 대접을 한답시고 내게 물침대 매트를 양보했다. 뱀을 밟을 때의 느낌이 그럴까. 쿨렁쿨렁, 몸을 뒤챌 때마다 이상한 탄력이 등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몸을 뒤챌 때마다 꼬루루룽 하는 물소리가 잠을 방해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맨바닥을 청하면서 물침대 매트를 양보했다. 그는 물침대 매트로 오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 내가 이렇게 눌러주면 얘(물침대 매트)는 꼭 이렇게 답해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한 사내의 몸에 반응하는 창부처럼 물침대 매트는 적당한 비음을 내질러 주고 있었다.

몸의 외로움에 답해주는 물침대 매트! 그것은 어쩌면 사치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요청과 부름을 외면하는지. 내가 그 겨울, H보다 더 외로웠다면 물침대의 언어를 알아들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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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북쪽 문학과지성 시인선 236
박용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오, 즐거운 학교




왕후박 나무에 바람이 드니
내 몸은 비를 밝힌다
멋쟁이 나무들……

속이는 것들 천지간에
머리 굴리는 것들 천지간에
비를 아는 정치
태양을 읽는 국가
새를 보는 상인들

후후후……

단 오 분 일지라도
나무에 드는 아버지
단 오 분일지라도
바람에 물드는 아저씨
격렬한 강물을 몰아쳐
내 귀의 가뭄을 적시는
소낙비를 아는 학교

후후후……

눈치보이는 것들 천지간에
속보이는 것들 천지간에
왕후박나무 가지 사이
탱자나무
이팝나무 잎사귀 사이
바람에 드는

나무 귀신의
오전과 오후

내 몸에
왕후박나무가 드니

후후후……
― 박용하, 「내 몸에 바람이 드니」


바람? '바람'은 수굿하지 못하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쏘다닌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니 기웃기웃 시선을 낭비할 밖에. 바람이 쏘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나뭇가지에 머물고 때론 처마 밑에 윙윙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바람은 다시 떠난다. 그 바람이 왕후박나무에 들었다. 왕후박나무는 흔들린다. 존재의 중심이 흔들거린다.

'왕후박나무'라고 발음해본다. 좀 고집스럽고 뚝심 있어 보이는 어감이다. '탱자나무', '이팝나무'도 발음해본다. 강퍅한 어감이다. 굳이 그 느낌의 성(性)을 따지자면 남성. 자, 남성인 왕후박나무에 바람이 들었다. 어쩔 것인가.

바람이 든 존재는 혼자를 견디지 못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지만 때로는 혼자라는 사실에 마음이 춥다. 지긋지긋하면서 막상 그리운 것도 사람 아니던가.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함께 하고 싶은 이율배반을 누구나 조금쯤은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 고독이 더욱 고독답고 내 행복이 더 행복답기 위해서도 누군가가 필요하다. 왕후박나무는 비에게 슬쩍 팔을 뻗친다. 비를 밝힌다.

왕후박나무의 밝힘, 왕후박나무의 바람기를 손가락질하면 일견 도덕적일 듯도 싶다. 그러나 상식엔 위험이 따르는 법, 왕후박나무의 불륜을 한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논리에도 헛점은 있기 마련. 나무가 비를 밝히는 것은 N극이 S극에 끌리듯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억압하는 데에 문명의 억압적 본질이 있다. 나무가 비를 밝힘으로 해서 나무는 더 크고 무성한 나무의 미래가 된다. 인간이 인간을 밝힘으로 해서 인간은 더 깊고 우람한 인간의 가능태가 된다. 인간의 바람기, 인간의 밝힘증이 배워야 할 것은 제 존재를 충만·증폭시켜가는 왕후박나무의 바람기다. 어떤 논리의 도움을 입어 단순한 탕진과 소모를 변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탕진과 소모 이상의 그 무엇을 찾는 노력을 얕볼 수도 없다. 비를 제 몸에 힘껏 빨아들여 스스로의 키를 하늘까지 닿게 하려는 왕후박나무의 바람기는 권장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타기(唾棄)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한 몸이 한몸을 그리워하고, 왕후박나무가 비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솔직한 것은 없다. 속고 속이는 것들 천지간에 그런 그리움만큼 솔직한 언어도 없다. '비를 아는 정치', '태양을 읽는 국가', '새를 보는 상인들'의 세상에서 그리움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영화 '파니핑크'를 아는가.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의 회원인 파니와 흑인 동성애자 오르페오, 그들의 우정은 눈물겹다. 적어도 파니와 오르페오에게 있어선 이념이나 도덕은 거추장스럽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포용하면 그뿐이다. 그들의 우정 앞에서 인간이 어떠어떠하다는 규정은 오히려 속될 뿐이다. 그렇다고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타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특정한 가치의 우월이 특정한 가치의 배제를 의미할 수는 없다. 내 존재의 순일무잡(純一無雜)함을 내세우며 타인의 행태를 함부로 재단(裁斷)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신영복이 그랬던가. 흠이 있는 도자기를 깨부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냐고. 공감이 가는 말이다. 단일 민족인 우리들은 이방인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데에 인색하다. 나와 이념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데에 인색하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산다고 하지만, 무엇이 의리이고 무엇이 의리가 아닌지에 관한 합리적인 타협과 모색점을 찾는 데에는 서툴다. 그럴수록 同樂(happy together)은 힘들다. 예술가는 일방통행식으로 독존(獨存)하는 논리에 흠집을 낸다. 예술가가 어떤 정치(精緻)하고도 체계적인 부정의 논리를 준비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그는 직관의 힘으로써 독존의 논리의 억압을 감지한다. 중요한 것은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공존의 논리다.

다시 시로 돌아가서, '태양'을 읽는 국가란 어떤 국가일까. 도덕이란 족쇄로 함부로 民의 욕망을 옥죄는 국가,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폼을 잡고 국민을 교화하겠다는 에너지로 충만한 국가, 그런 국가는 아닐 것이다. '새를 보는 상인'들은 어떤 상인들일까. 똑같은 기능의 상품을 단지 외양만 바꿔 출시하는 상인들, 교묘한 이미지 광고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상인들, 겉으로는 공익, 공익 하면서도 속으론 사익, 사익하는 상인들, 그런 상인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감히 꿈꾼다. 비를 아는 정치, 태양을 읽는 국가. 새를 보는 상인을.시인으로 하여금 그런 세계를 꿈꾸게 하는것은 바람.바람은 새 세상을 꿈꾸게 한다. '여기'엔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곳'에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바람은 인다. 그러나 바람은 '여기'와 '이곳'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은 아니다. '여기'와 '이곳'을 껴안고 초월하는 것에 바람의 힘은 모아져야 한다. 그런 바람은 기특한 바람이다. 왕후박나무엔 지금 그런 바람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 왕후박나무에 들어가신다. 근엄한 얼굴의 아버지가 왕후박나무에 들어가신다. 들어가셔선 온몸에 온통 바람이 든다. 아저씨도 바람에 물이 든다. 왕후박나무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더 이상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않으신다.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것도 아니시다. 아버지와 아저씬 몸소 행복을 실천해 보이신다.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엄마와의 사랑을보여주신다. 아줌마와 아저씨와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말씀이 아니라 그런 광경이리라.

이반 일리치던가, 학교는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교는 죽지 않았다. 죽었으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을 거다.(물론 간섭, 그 자체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간섭하는 자가 간섭당하는 자를 충분히 고려했느냐, 간섭하는 자의 평가의 잣대가 타당성 있는 원칙 아래에서 준비된 것이냐 하는 질문에 간섭하는 자 스스로 사려깊은 성찰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죽은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여고괴담'류의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에게 '이거다'하는 영감을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작금의 학교는(이를 영화의 제목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건조한, 습기 없는, 딱딱한 교훈만을 생산한다. 학생들의 귀가 마른다. 그런데 학교에 바람이 들었다면 어떨까. 그 바람이 격렬하게 강물을 몰아쳐 학생들의 메마른 귀를 적신다면 어떨가. 오, 즐거운 학교. 학생들의 메마른 귀를 적셔주는 학교, 학생들에게 행복을 설교할 것이 아니라, 행복의 실천을 통해 행복을 보여주는 학교, 6월은 호국(護國)의 달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초록의 계절임을 가르쳐주는 학교, 현충일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선열들이 희생해 간 날을 기리는 날이니, 그분들의 뜻을 기리면서 현충일을 즐겁게 보내라는 다소 뜻밖의 종례를 해줄 수 있는 학교, 放學을 배움[學]을 놓는다 [放]는 뜻으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이해한 학생들이야말로 방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겁니다,라는 신나는 정의를 내려줄 수 있는 학교, 주기율표를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를 푸는 것도 소월의 시를 암송하는 것만큼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교, 공부만 하면 바보가 된다,라고 가르치면서도, 사실은 공부만 해도 즐거울 수 있음을 가르쳐 줄 수 있는 학교, 나의 의견으로써 너의 의견을 대체해야겠다고 으름짱을 놓지 않는 학교, 아, 그런 학교, 그런 아버지, 그런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언니, 누나, 형, 이모부, 고모부, 선생님, 수위 아저씨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후후후……. 한 번으론 부족해서 또 웃는다.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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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은 인간이 즐겨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음과 양,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선과 악, 정신과 육체, 분석과 직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그러나 질서는 무수한 개별자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다. 칼금을 긋듯 딱 잘라 구분해버릴 수 없는 세계의 다양성 앞에서 인간은 현기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획정리를 하겠다는, 그리하여 세상의 어지러움을 어떤 식으로라든 이겨내야겠다는 인간의 강박관념이 무수한 이분법을 만들어 냈으리라.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불이(不二)를 설파하였던가. 만법귀일(萬法歸一), 결국은 하나라는 말씀이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새는 창 밖으로 날아가고 나무는 가지를 출렁여 그 새의 흔적을 말해줄 뿐. 하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인 '나'만 해도 그렇다. '가시나무새'가 아니더라도 내 속엔 내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나' 중에서 아주 그럴싸한 나를 선택해서 나이고 싶어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그런 나를 유일한 나로서 승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간판을 내걸고 드러내고 싶은 '나'는 결국 무수한 '나'의 억압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하나의 음성과 칼라로 수렴되는 '나'일 때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하지만 억압했던 '나'는 언젠가 기필코 돌아온다. 누르면 누를수록 그것은 더 맹렬한 분출의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억압하고 싶어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본다. 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맹렬하게 분출하는 어두운 '나'를 억압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어떤 후배에 대한 나의 비난도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리라. 누군가의 앞에 나서고 싶은 자기현시의 욕망이 내 안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후배를 비난함으로써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억압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모습 속에서 읽어낸, 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나'를 껴안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도덕을 껴안아 포옹하지 못하는 '도덕만을 위한 도덕'의 표정은 매서우리만치 비정하다. 그렇다면 내 아내에게서도 현숙(賢淑)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약간의 퇴폐가 그녀를 아름답게 할지도 모를 일. 세계의 이중성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주의, 일절의 퇴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순수주의는 파시즘으로 표정을 바꿀 위험이 충분히 있다.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가 아니던가. 내 안의 드라큘라, 내 안의 콰지모도, 내 안의 그림자를 또 다른 나로서 인정하는 데엔 관용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미성년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그러나 부인한다고 해서, 억누른다고 해서 내 안의 괴물이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억누르고 참아내는 인내는 결국 신경증을 부를 뿐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식으로 리바이벌한 영화, '황야의 7인 The magnificient Seven'에서 총잡이로 분한 찰스 브론슨은 '겁장이가 전장터 한 가운데로 스미는 법'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그러나 내 안의 겁장이를 부인하지 않고 의식하는 나는 쉽사리 만용의 총부리를 타인의 심장에 겨누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음울한 인간 곁에는 반드시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 밝은 영혼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어떻든 내 아내와 내 벗들과 나의 모순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리라.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둘이 아니고 승(僧)과 속(俗)이 둘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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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 시장에 관한 6가지 질문
이정전 지음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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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장의 효율성 생산성은 만능인가


'바로 이 책이다.'싶은 책이 있지요.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제게는 바로 이 책이 그런 책이었습니다. '시장을 보는 눈, 시장이란 무엇인가, 시장의 기능, 의사수렴 방법으로서의 시장, 상벌체계로서의 시장, 시장에 대한 논쟁, 시장과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은 가능한가, 시장의 팽창이 과연 사회의 위기를 초래하는가' 등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목차만 보면 다소 딱딱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정독한다면 이 책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책은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다소 길지만 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만을 생각하는 기업의 행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온갖 비열한 수단들이 총동원되는 재벌기업 사이의 이전투구는 또한 어떠한가? 결국 이러한 행태들 때문에 영리행위에 대한 천대와 혐오감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시장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이 되기는 예나 다름없다.

미국에서 자주 인용되는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1970년대 후반, 세계굴지의 기업인 포드 자동차 회사는 서민을 겨냥한 주력품목으로 핀토(Pinto)'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이 차는 충돌시 연료탱크가 폭발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포드사는 이 차의 양산을 강행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결함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면서 왜 그랬을까? 경제학에 무수히 언급되는 '합리적 계산' 때문이었다. 즉 결함을 가진 차를 회수해서 교정하는 비용이 사고가 났을 때 보상에 소요되는 비용보다 더 크다는 계산이 이미 나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경우 돈보다 인명을 앞세우는 선택을 했다면 분명히 기업은 손해만 볼 뿐이다. 단순히 손해를 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잘 알려진 대로 그때나 지금이나 포드사는 제너럴 모터(GM) 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마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윤 극대화나 경쟁에서 이기기 해서는 치명적 결함을 가진 차라도 계속 파는 것이 합리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합리성을 특히 강조하는 경제학이나 신자유주의 이론은 포드사의 결정을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기업의 합리적 행위가 결국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그런데도 자동차 회사의 이런 부도덕한 합리적 영리추구 행위는 계속되었다. 포드의 경쟁사인 GM사도 합리적 계산 아래 치명적 결합을 가진 자사제품을 판매했다. 최근에 와서 미국의 한 법원이 이런 관행에 쐐기를 박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 포드사의 사례가 많이 인용되는 이유는 흔히 나타나는 부도덕한 기업 행태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소위 '기술적 합리성'은 어떤 문제점을 지니는가, 기업이 추구하는 생산성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합리성은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이어야 하는가 등 한번쯤은 깊이 성찰해보아야 할 '화두-생각거리'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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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시
보르헤스 / 우석균 옮김
-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에게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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