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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북쪽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36
박용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오, 즐거운 학교
왕후박 나무에 바람이 드니
내 몸은 비를 밝힌다
멋쟁이 나무들……
속이는 것들 천지간에
머리 굴리는 것들 천지간에
비를 아는 정치
태양을 읽는 국가
새를 보는 상인들
후후후……
단 오 분 일지라도
나무에 드는 아버지
단 오 분일지라도
바람에 물드는 아저씨
격렬한 강물을 몰아쳐
내 귀의 가뭄을 적시는
소낙비를 아는 학교
후후후……
눈치보이는 것들 천지간에
속보이는 것들 천지간에
왕후박나무 가지 사이
탱자나무
이팝나무 잎사귀 사이
바람에 드는
나무 귀신의
오전과 오후
내 몸에
왕후박나무가 드니
후후후……
― 박용하, 「내 몸에 바람이 드니」
바람? '바람'은 수굿하지 못하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쏘다닌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니 기웃기웃 시선을 낭비할 밖에. 바람이 쏘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나뭇가지에 머물고 때론 처마 밑에 윙윙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바람은 다시 떠난다. 그 바람이 왕후박나무에 들었다. 왕후박나무는 흔들린다. 존재의 중심이 흔들거린다.
'왕후박나무'라고 발음해본다. 좀 고집스럽고 뚝심 있어 보이는 어감이다. '탱자나무', '이팝나무'도 발음해본다. 강퍅한 어감이다. 굳이 그 느낌의 성(性)을 따지자면 남성. 자, 남성인 왕후박나무에 바람이 들었다. 어쩔 것인가.
바람이 든 존재는 혼자를 견디지 못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지만 때로는 혼자라는 사실에 마음이 춥다. 지긋지긋하면서 막상 그리운 것도 사람 아니던가.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함께 하고 싶은 이율배반을 누구나 조금쯤은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 고독이 더욱 고독답고 내 행복이 더 행복답기 위해서도 누군가가 필요하다. 왕후박나무는 비에게 슬쩍 팔을 뻗친다. 비를 밝힌다.
왕후박나무의 밝힘, 왕후박나무의 바람기를 손가락질하면 일견 도덕적일 듯도 싶다. 그러나 상식엔 위험이 따르는 법, 왕후박나무의 불륜을 한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논리에도 헛점은 있기 마련. 나무가 비를 밝히는 것은 N극이 S극에 끌리듯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억압하는 데에 문명의 억압적 본질이 있다. 나무가 비를 밝힘으로 해서 나무는 더 크고 무성한 나무의 미래가 된다. 인간이 인간을 밝힘으로 해서 인간은 더 깊고 우람한 인간의 가능태가 된다. 인간의 바람기, 인간의 밝힘증이 배워야 할 것은 제 존재를 충만·증폭시켜가는 왕후박나무의 바람기다. 어떤 논리의 도움을 입어 단순한 탕진과 소모를 변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탕진과 소모 이상의 그 무엇을 찾는 노력을 얕볼 수도 없다. 비를 제 몸에 힘껏 빨아들여 스스로의 키를 하늘까지 닿게 하려는 왕후박나무의 바람기는 권장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타기(唾棄)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한 몸이 한몸을 그리워하고, 왕후박나무가 비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솔직한 것은 없다. 속고 속이는 것들 천지간에 그런 그리움만큼 솔직한 언어도 없다. '비를 아는 정치', '태양을 읽는 국가', '새를 보는 상인들'의 세상에서 그리움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영화 '파니핑크'를 아는가.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의 회원인 파니와 흑인 동성애자 오르페오, 그들의 우정은 눈물겹다. 적어도 파니와 오르페오에게 있어선 이념이나 도덕은 거추장스럽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포용하면 그뿐이다. 그들의 우정 앞에서 인간이 어떠어떠하다는 규정은 오히려 속될 뿐이다. 그렇다고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타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특정한 가치의 우월이 특정한 가치의 배제를 의미할 수는 없다. 내 존재의 순일무잡(純一無雜)함을 내세우며 타인의 행태를 함부로 재단(裁斷)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신영복이 그랬던가. 흠이 있는 도자기를 깨부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냐고. 공감이 가는 말이다. 단일 민족인 우리들은 이방인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데에 인색하다. 나와 이념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데에 인색하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산다고 하지만, 무엇이 의리이고 무엇이 의리가 아닌지에 관한 합리적인 타협과 모색점을 찾는 데에는 서툴다. 그럴수록 同樂(happy together)은 힘들다. 예술가는 일방통행식으로 독존(獨存)하는 논리에 흠집을 낸다. 예술가가 어떤 정치(精緻)하고도 체계적인 부정의 논리를 준비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그는 직관의 힘으로써 독존의 논리의 억압을 감지한다. 중요한 것은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공존의 논리다.
다시 시로 돌아가서, '태양'을 읽는 국가란 어떤 국가일까. 도덕이란 족쇄로 함부로 民의 욕망을 옥죄는 국가,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폼을 잡고 국민을 교화하겠다는 에너지로 충만한 국가, 그런 국가는 아닐 것이다. '새를 보는 상인'들은 어떤 상인들일까. 똑같은 기능의 상품을 단지 외양만 바꿔 출시하는 상인들, 교묘한 이미지 광고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상인들, 겉으로는 공익, 공익 하면서도 속으론 사익, 사익하는 상인들, 그런 상인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감히 꿈꾼다. 비를 아는 정치, 태양을 읽는 국가. 새를 보는 상인을.시인으로 하여금 그런 세계를 꿈꾸게 하는것은 바람.바람은 새 세상을 꿈꾸게 한다. '여기'엔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곳'에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바람은 인다. 그러나 바람은 '여기'와 '이곳'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은 아니다. '여기'와 '이곳'을 껴안고 초월하는 것에 바람의 힘은 모아져야 한다. 그런 바람은 기특한 바람이다. 왕후박나무엔 지금 그런 바람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 왕후박나무에 들어가신다. 근엄한 얼굴의 아버지가 왕후박나무에 들어가신다. 들어가셔선 온몸에 온통 바람이 든다. 아저씨도 바람에 물이 든다. 왕후박나무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더 이상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않으신다.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것도 아니시다. 아버지와 아저씬 몸소 행복을 실천해 보이신다.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엄마와의 사랑을보여주신다. 아줌마와 아저씨와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말씀이 아니라 그런 광경이리라.
이반 일리치던가, 학교는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교는 죽지 않았다. 죽었으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을 거다.(물론 간섭, 그 자체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간섭하는 자가 간섭당하는 자를 충분히 고려했느냐, 간섭하는 자의 평가의 잣대가 타당성 있는 원칙 아래에서 준비된 것이냐 하는 질문에 간섭하는 자 스스로 사려깊은 성찰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죽은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여고괴담'류의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에게 '이거다'하는 영감을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작금의 학교는(이를 영화의 제목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건조한, 습기 없는, 딱딱한 교훈만을 생산한다. 학생들의 귀가 마른다. 그런데 학교에 바람이 들었다면 어떨까. 그 바람이 격렬하게 강물을 몰아쳐 학생들의 메마른 귀를 적신다면 어떨가. 오, 즐거운 학교. 학생들의 메마른 귀를 적셔주는 학교, 학생들에게 행복을 설교할 것이 아니라, 행복의 실천을 통해 행복을 보여주는 학교, 6월은 호국(護國)의 달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초록의 계절임을 가르쳐주는 학교, 현충일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선열들이 희생해 간 날을 기리는 날이니, 그분들의 뜻을 기리면서 현충일을 즐겁게 보내라는 다소 뜻밖의 종례를 해줄 수 있는 학교, 放學을 배움[學]을 놓는다 [放]는 뜻으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이해한 학생들이야말로 방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겁니다,라는 신나는 정의를 내려줄 수 있는 학교, 주기율표를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를 푸는 것도 소월의 시를 암송하는 것만큼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교, 공부만 하면 바보가 된다,라고 가르치면서도, 사실은 공부만 해도 즐거울 수 있음을 가르쳐 줄 수 있는 학교, 나의 의견으로써 너의 의견을 대체해야겠다고 으름짱을 놓지 않는 학교, 아, 그런 학교, 그런 아버지, 그런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언니, 누나, 형, 이모부, 고모부, 선생님, 수위 아저씨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후후후……. 한 번으론 부족해서 또 웃는다.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