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서민 지음 / 다밋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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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민의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은 유쾌하게 읽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에 담긴 메시지가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말하는 방식의 의외성이다. 의사라면 의사에 걸맞은 폼을 잡아야 하겠지만 저자는 전혀 권위적인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책의 캐주얼한 어법은 우리나라의 의사들이 얼마나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고발해준다.

 
서민 역시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의 저자 멘델존처럼 환자를 실습대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실습이 필요하다면 굳이 환자들의 항문에 손을 넣을 필요가 없다. 똑같은 인간인 학생들 역시 직장(直腸)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학생들끼리 서로 직장검사를 한다면, 서로간의 유대감도 얼마나 커지겠는가." 라고 말할 때 저자는 심각한 내용을 심각하지 않은 어법을 빌어 말하고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탈모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매스컴에서 대머리의 선행사례를 대대적으로 보도할 필요가 있으며, 방송사나 신문사 등에서도 기자를 뽑을 때 일정 비율 이상을 대머리로 뽑아야만 진정한 탈모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머리가 지배하는 세계가 대머리의 우월성을 역설한다면,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뽑고 대머리인 척 위장을 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겠는가." 라고 그는 말한다. 정상과 비정상,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과의 구분이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의 문제, 즉 권력의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가볍게 터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대중서적이다.
 
채식주의나 성장 클리닉 등의 문제점, 호르몬제, 비타민제 복용이나 헬리코박터 박멸 등의 문제에 대해 이 책은 객관적인 의사 입장에서 설명해 주기도 하고 제왕절개나 피임 등의 문제점과 우리가 가진 잘못된 의학상식을 하나하나 짚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을 준다거나,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의약품을 계발했다는 내용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이른바 '음모론'을 제기한다. 의사의 이해관계와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모종의 공모가 생길 수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비타민이 몸에 좋다, 어떤 약이 혈압강하에 좋다, 어떤 약이 헬리코박터를 박멸하는 데 도움이 된다, 라는 식의 발언들도 이런 식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결국 의학에 관련한 기사들을 일백 프로 신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의료계의 문제를 의료계 밖에서가 아니라 의료계 내부에서 당당히 고발하고 있다. 이런 그의 내부 고발은 그가 '기생충에 기생해서 사는 기생충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내과의사나 외과의사보다는 기생충학자가 병원의 이해관계나 권력으로부터 훨씬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료계의 문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 전력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은 쉽게 말해 의사와 병원의 '비하인드 스토리'쯤 될 것이다.
 
이 책은 의료계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씌어진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의학지식을 설파하고 있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의사에 대한 친근감을 불러온다. 퇴근 후에 가볍게 한잔할 수 있는 친구처럼 의사가 친근하게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책을 읽고 나면 저자 '서민'의 이름이 더욱 '서민'적으로 다가온다. 솔직한 고백과 서술이 갖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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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 어느 의사의 고백
로버트 S.멘델존 지음, 남점순 옮김, 박문일 감수 / 문예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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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사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의 저자 로버트 멘델존은 소아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로 한때 현대의학의 열렬한 신자였다. 오랜 의사 생활을 통해 현대의학이 온통 부조리와 허구와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현대의학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는 현대의학이 인류에게 해만 끼치는 공적이며, 수많은 광신도들을 거느린 죽음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의 책은 왜 현대의학을 믿을 수 없는가, 왜 현대의학을 배척해야 하는가, 그 이유들을 소상하게 나열하고 있다. 첨단 의료란 멋진 것이고, 그 기술을 가진 명의에게 치료받으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심지어 의사들이야말로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말한다. 대체 이러한 불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현대의학에 대한 멘델존의 불신은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책은 그가 어떤 병원의 외래병동 소장으로 있을 때의 경험을 소개한다. 그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아이엄마에게 "아이에게 배변훈련을 시키고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한 후, 네 살이 되도록 배변훈련을 받지 않은 남자아이들에게 방광경 검사를 받도록 했다고 한다. 방광경 검사는 중장년의 방광암, 전립선암, 자궁암 등의 검진에 이용되는 검사로 일종의 내시경을 요도에서 방광 내에 삽입해 방광 내부의 이상 여부를 조사하는 검사인데, 이 검사를 네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행한다는 것이 가혹하다고 생각하여 그는 의사들에게 배변에 관련한 질문을 하지 않도록 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비뇨기과장으로부터 그는 이런 불평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실은, 자네가 (배면에 관한) 질문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내 전문의 실습생 교육계획이 엉망이 되게 생겼어. 실습생이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매년 정해진 수만큼의 방광경 검사를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1년에 150회 정도는 해야 하는데, 그 검사를 중지하는 바람에 할당량을 채울 수 없게 돼서 실습생들이 몹시 곤란해하고 있어."
 
환자를 보호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대학병원에서는 의학실습생의 자격증 확보를 위해 건강검진이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이른바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온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란 교환 당사자간에 정보가 불균형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성은 시장에서의 공정한 거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특히 의료정보에 있어서 일반인들의 상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주사를 맞으라면 맞아야 하고, 약을 먹으라면 먹어야 하고, 검사를 하라고 하면 해야 한다. 권위적인 의사들에게 일일이 그 이유를 따져 물을 수도 없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의료비만 잔뜩 지출하고 병은 제자리걸음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멘델존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의사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의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의사의 인간성을 짐작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전문지식이 있는지도 알 수 있으므로 일석이조라는 것이 멘델존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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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 할인행사
정윤철 감독, 조승우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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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고 흥미로운 게임을 위하여
  -영화 <마라톤>에 대한 단상


180킬로그램의 맘모스씨와 48킬로그램의 모기씨와의 씨름 한판, 결과는 뻔하다.그러나 일본의 스모 챔피언과 한국의 씨름 챔피언의 한판승부에는 관객들이 몰릴 게 뻔하다. 누가 이길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경기 결과를 짐작할 수 없으면 없을수록 그 경기는 흥미진진한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과가 뻔한 게임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소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정상인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다. 생각해보자. 수족이 불편한 사람과 같은 조건에서 경기를 치르면 수족이 멀쩡한 사람이 승리할 게 뻔하지 않은가. 결과가 거의 100퍼센트 확정적이라는 말이다. 이런 경기는 흥미도 없을뿐더러 이런 경기를 두고 공정한 게임이라고 말할 수가 없? 그러나 조건이 불리한 이들에게 ‘어드벤티지(advantage)’를 준다면 게임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힘이나 체력에서 열세에 있는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공해줌으로써 그들이 힘과 체력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과 승부를 겨룰 때,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 보자는 것 사회보장의 원리다. 누가 이길지 모르는 ‘결과의 불확정성’만이 공정하고 흥미로운 게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둑을 둘 때 하수는 몇 점을 놓고 둔다거나 힘센 어른이 팔씨름에서 아이의 손목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장애인, 그들은 사회적 소수다. 그들과 똑같은 출발점에 서서 경기를 시작하겠다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을 하자는 것과 다름없다. 이럴 때,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라면 마땅히 정부가 나서서 장애인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장애인 특별법’ 등을 만들어 그들에게 사회적 어드벤티지를 주어야 한다. 
 
 영화 <말아톤>에서도 엄마 경숙은 두 형제 중 장애가 있는 형 ‘초원’을 편애한다. 편애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 엄마는 형이나 너나 똑같이 사랑한단다. 하지만 형은 너와 다르지 않니? 그러니 엄마는 너보다는 부족한 형에게 더 많은 어드벤티지를 주는 것이란다. 그러나 동생은 엄마의 편애가 불만이다. 왜 형에게 주는 것을 나에게 주지 않지. 형만 자식인가. 난 대체 뭐야. 형에게 어드벤티지를 주는 것은 알겠어. 그러나 엄마는 너무 심한 거 아냐.
 
전철을 타도 노약자 보호석이 있지 않던가. 노약자 보호석은 그들을 동정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해야 힘있는 사람들과 약자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것이 ‘노약자 보호석’에 함축된 논리다. ‘초원’에 대한 엄마의 지극한 정성은 곧 약자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과보호, 즉 너무 많은 사회적 약자에게 어드벤티지를 주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또 다른 장해요인이 될 수 있다. 경숙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초원에게 사사건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과보호는 개인의 자기결정능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어드벤티지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적은 어드벤티지가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게임이 보다 정의롭고 흥미롭기 위해서는 사회적 소수와 약자를 위하는 보다 적극적인 제도적 장치의 보완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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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케이노 + 토네이도 + 폭풍과 대재앙 : 디스커버리 콜렉션 - 다우리 다큐멘터리 3종 세트 할인
Various 감독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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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의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지진 해일 '쓰나미'로 동남아 국가들이 한바탕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쓰나미'가 해안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우연히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사람은 '쓰나미'가 몹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영화 <볼케이노>에서 시뻘건 용암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물론 영화의 무대인 LA 시민들로서는 용암이 아름답게 보일 리 만무하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파도 역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 절박한 상황에 놓인 뱃사람들에게는 그런 규모의 파도는 결코 반가울 리가 없다. 폭설이 쌓인 풍경도 아름답다. 그러나 제설차 운전자에게 폭설이 반가울 까닭이 없다. 가없이 뻗어나간 산맥은 아름답다. 그러나 조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없는 산맥은 그 자체가 죽음의 공포다.
 
은하계의 길이는 빛이 10만 년을 달리는 길이, 즉 10만 광년이라고 한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달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10만 광년은 얼마나 먼 거리일까. 어떤 과학자는 우주의 규모가 400억 광년이라고도 하니 우리의 일상적 상식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바닷가의 모래알 한 알에도 못 미치는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얼마나 작고 사소한 존재인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하지만 자연과 우주의 웅장함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 우주적 스케일과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할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미적인 감정을 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한다. 엄청나게 크고 위대한 것 앞에서 인간이 압도당할 때, 느끼는 아름다움이 바로 숭고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볼케이노>에서처럼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용암의 불덩이를 숭고의 감정으로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용암에 좇기는 사람은 용암 앞에서 겸손할 수가 없다. 용암 앞에서의 겸손은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영화 <볼케이노>에서의 LA 시민들에게 용암은 극복의 대상이지 미적인 관조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용암의 뜨거움으로부터 LA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먼저 용암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LA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자연을 인간의 의지 아래 복종시키자면 과학자들을 불러와야 한다. 오, 대자연의 위대함이여, 신의 신성한 뜻이여, 라는 숭고의 노래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시인과 신앙인이 필요하다.
 
숭고의 감정은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과학적 동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용암과 태풍의 위협으로부터 내 한 목숨을 살려야겠다는 감정에서 숭고미는 싹틀 수가 없다. 거대한 산을 바라보면서 '이 산을 개발하면 대단한 돈을 벌 수 있겠군'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도 숭고의 감정은 생겨날 수가 없다. 속세의 문제를 떠나서, 자잘한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볼 때, 숭고의 감정은 생겨나는 것이다. 대자연의 위대한 모습을 보면서도 내게 어떠한 감흥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너무 이해관계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가.
 
감독:믹 잭슨. 출연:토미 리 존스, 앤 헤치. 제작: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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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들 - 완전 무삭제판, 태원 5월 할인행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이클 피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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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사랑을 증가시킨다
 영화<몽상가들>에 대한 단상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하자. <혁명은 사랑을 증가시키는가, 전쟁을 증가시키는가.> 스탈린주의자들 같았으면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 전쟁을 증가시키는 것이 혁명의 전략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장사치들을 내친 예수에게나 이라크를 초토화시킨 부시에게나 모두 명분은 있었다. 심지어는 남대문시장에서 삥을 뜯는 조폭들에게도 ‘시장의 평화와 질서’라는 명분은 있다. 파시스트들에게 명분은 그들의 밥줄이나 다름없다.     
 
다음 질문 하나? <섹스는 사랑을 증가시키는가, 전쟁을 증가시키는가> 성의 억압은 정신질환을 유발하며, 사회적으로는 비민주주의적 인간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빌헬름 라이히 같으면 섹스는 사랑을 증가시킨다고 할 것이요, 일부일처제에서의 사랑이야말로 신께서 허용하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주의자들은 섹스는 전쟁을 증가시킨다고 할 것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영화 〈몽상가들>을 통해 이렇게 답하고 있는 듯하다.“난  잘 모르겠다.”
 
만약에 베르톨루치가 “우리가 성을 해방시킨다면, 만약 우리가 성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한다면, 에로스를 단죄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세포라 할 수 있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파괴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라이히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면 영화 <몽상가들>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성담론의 도덕적 허구성을 내파시켜 버리는 좀더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몽상가들>이 보여주는 화면을 보라. 화면은 미학적으로 잘 짜여져 있고, 도어즈나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은 파괴의 열정으로 울부짖지도 않는다. <몽상가들>을 두고 뉴스위크의 제니퍼 배럿 기자가 로마에 있는 베르톨루치 감독을 전화로 인터뷰했을 때, 베르톨루치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체국이 할 일이다.“ 영화가 꼭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교훈론자들에게 멋들어진 한 방이다.
 
성의 해방이 곧바로 정치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은 겉으로 보면 그럴싸해 보인다. 리버럴하고 래디컬하니 폼도 나 보인다. 저렇게 급진적 주장을 할 때에는 뭔가 그럴싸한 논리가 내장되어 있겠지. 아마도 문제가 있다면 일상성 속에서 굳어진 나의 한심한 도덕률일 거야. 일급논객들이 아닌 바에야 이런 래디컬한 논리 앞에서는 웬만하면 꼬리를 내리고 투항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성적 리버럴리즘은 성적 방종과 이념적 명분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이런 허우적거림의 극단을 우리는 곽영주 감독의 영화 <밀애>에서 보았다. 라이히의 저서 속에서는 성의 해방이 정치의 해방으로 이어졌는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의 성의 해방은 한 가정의 풍비박산으로 귀착되기 일쑤다.
 
영화는 이런 현실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뿐이다. 리안 감독의 영화 <아이스 스톰>에서는 이혼을 앞둔 미국중산층 부부의 ‘스와핑’이 결국 아들의 감전사로 귀착된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 <쥬드>에서는 사촌간의 결합을 죄로 여겼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엄혹한 도덕률을 뛰어넘어 결혼을 했던 두 주인공들이 어린 자식들의 자살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을 보여준다. 임상수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도 부부의 일탈은 결국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귀착되어 진다. 이런 영화들에서처럼 성적 일탈은 죄다, 죄는 형벌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교훈을 읽는 이들에게는 이 영화들보다 더 좋은 도덕 교과서는 없을 것이다.
 
이런 교과서들을 집어던진 세대들이 프랑스의 68세대가 아닌가. 68세대들은 말한다. 그것이 도덕이라면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당신의 도덕이 나에게 부도덕일 수 있다. 사랑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우리가 인민을 학살했는가. 우리가 월남의 정글에 레이팜탄을 쏘았는가. 그들은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생각하면 우리는 섹스를 하고 싶어진다.
 
성은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생식을 위한 도구이어야 한다는 도덕적 엄숙주의자들에게 영화 <몽상가들> 속의 테오와 이자벨은 이만저만한 사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젊고 싱싱하며, 죄를 모른다. 사실 죄는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욕망에는 죄가 없다. 단지 그들의 욕망을 단죄해달라는 체제와 구조의 요구만이 있을 뿐이다. 욕망이 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적 요구가 죄를 만드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씨, 당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한 명의 우편배달부가 되어 버린 셈이군요.)
 
테오와 이자벨의 성적 일탈은 치밀한 논리적 사유의 결과물은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20대의 피끓는 청년들일 뿐이다. 그들의 성적 일탈은 몸의 요구이지 이념의 요구가 아니다.  혁명을 리드하는 것은 과학적 이념일지 몰라도 현실의 혁명은 몸에 끌려간다.
 
몸은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존재의 휘발을 요구한다. 에로스의 충동이란 ‘너’에게로 흡수되어서 깨끗하게 ‘나’를 잊겠다는 죽음에의 충동, 곧 타나토스의 충동이 아니던가. 그러나 누구에게나 현실은 있게 마련이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사랑으로 까맣게 타죽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사랑’을 향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 거리가 만드는 것이 ‘놀이’요 ‘유희’다. 사랑의 미학적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죽음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을 놀이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테오와 이자벨은 한 마디로 ‘잘 논다’. 그들은 영화 속 대사와 장면들을 외우고, 서로에게 문제를 내 정답을 풀지 못하면 가차없는 벌칙을 내린다. 사랑과 놀이에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예의도 없다. 테오는 게임의 벌칙으로 이사벨과 매튜의 섹스를 지시하고, 이사벨은 테오에게 자위할 것을 명령한다. 또 이사벨과 테오는 남매임에도 벌거벗고 나란히 잠을 잔다. 그들은 전혀 심각하지 않다. 심각한 얼굴은 파시스트의 표정이다. 조롱하는 자는 심각하지 않다. 놀이하는 자는 삶을 생각하지 죽음이나 죽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세상의 율법과 규칙들이 놀이를 방해하는가. 너무 많은 금[線]은 놀이의 재미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이다. 68세대 이전의 프랑스를 생각해보시라. 테오와 매튜의 일탈은 68세대 이전의 프랑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통렬한 조롱일 뿐이다.
 
만약 테오와 매튜에게 충분한 권력이 주어졌다면 그들의 저항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성적 일탈은 그들 나름대로 저항의 한 방식이다. 성이란 가장 사적인 공간을 요구한다. 그 사적인 공간에서마저도 공권력이 지배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오만도 이만저만한 오만이 아니다.
 
사적인 공간의 주인은 나다. 내가 그 공간의 주인이다. 나는 당신과는 다르다. 나와 다름이 당신을 만들고 당신과 다름이 나를 만든다. 68세대들은 기성세대와 그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었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든 그것은 ‘타인의 취향’일 뿐이다. 당신의 취향이 나와 세계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의 일탈은 사랑스럽다. 그 믿음의 용량을 키워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나는 베르톨루치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몽상가들>이 사랑스런 이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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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7-0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그저께 울 동네 DVD대여점 총각은 '몽상가들' 아직 안 나왔다고 했는데...이런이런....암튼, 초면에 감사함다. 퍼가겠슴다. 꾸벅

싸이런스 2005-07-05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영화 좋은 글 감사...저도 추천하고 퍼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