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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들 - 완전 무삭제판, 태원 5월 할인행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이클 피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혁명은 사랑을 증가시킨다
영화<몽상가들>에 대한 단상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하자. <혁명은 사랑을 증가시키는가, 전쟁을 증가시키는가.> 스탈린주의자들 같았으면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 전쟁을 증가시키는 것이 혁명의 전략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장사치들을 내친 예수에게나 이라크를 초토화시킨 부시에게나 모두 명분은 있었다. 심지어는 남대문시장에서 삥을 뜯는 조폭들에게도 ‘시장의 평화와 질서’라는 명분은 있다. 파시스트들에게 명분은 그들의 밥줄이나 다름없다.
다음 질문 하나? <섹스는 사랑을 증가시키는가, 전쟁을 증가시키는가> 성의 억압은 정신질환을 유발하며, 사회적으로는 비민주주의적 인간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빌헬름 라이히 같으면 섹스는 사랑을 증가시킨다고 할 것이요, 일부일처제에서의 사랑이야말로 신께서 허용하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주의자들은 섹스는 전쟁을 증가시킨다고 할 것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영화 〈몽상가들>을 통해 이렇게 답하고 있는 듯하다.“난 잘 모르겠다.”
만약에 베르톨루치가 “우리가 성을 해방시킨다면, 만약 우리가 성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한다면, 에로스를 단죄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세포라 할 수 있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파괴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라이히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면 영화 <몽상가들>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성담론의 도덕적 허구성을 내파시켜 버리는 좀더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몽상가들>이 보여주는 화면을 보라. 화면은 미학적으로 잘 짜여져 있고, 도어즈나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은 파괴의 열정으로 울부짖지도 않는다. <몽상가들>을 두고 뉴스위크의 제니퍼 배럿 기자가 로마에 있는 베르톨루치 감독을 전화로 인터뷰했을 때, 베르톨루치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체국이 할 일이다.“ 영화가 꼭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교훈론자들에게 멋들어진 한 방이다.
성의 해방이 곧바로 정치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은 겉으로 보면 그럴싸해 보인다. 리버럴하고 래디컬하니 폼도 나 보인다. 저렇게 급진적 주장을 할 때에는 뭔가 그럴싸한 논리가 내장되어 있겠지. 아마도 문제가 있다면 일상성 속에서 굳어진 나의 한심한 도덕률일 거야. 일급논객들이 아닌 바에야 이런 래디컬한 논리 앞에서는 웬만하면 꼬리를 내리고 투항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성적 리버럴리즘은 성적 방종과 이념적 명분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이런 허우적거림의 극단을 우리는 곽영주 감독의 영화 <밀애>에서 보았다. 라이히의 저서 속에서는 성의 해방이 정치의 해방으로 이어졌는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의 성의 해방은 한 가정의 풍비박산으로 귀착되기 일쑤다.
영화는 이런 현실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뿐이다. 리안 감독의 영화 <아이스 스톰>에서는 이혼을 앞둔 미국중산층 부부의 ‘스와핑’이 결국 아들의 감전사로 귀착된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 <쥬드>에서는 사촌간의 결합을 죄로 여겼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엄혹한 도덕률을 뛰어넘어 결혼을 했던 두 주인공들이 어린 자식들의 자살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을 보여준다. 임상수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도 부부의 일탈은 결국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귀착되어 진다. 이런 영화들에서처럼 성적 일탈은 죄다, 죄는 형벌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교훈을 읽는 이들에게는 이 영화들보다 더 좋은 도덕 교과서는 없을 것이다.
이런 교과서들을 집어던진 세대들이 프랑스의 68세대가 아닌가. 68세대들은 말한다. 그것이 도덕이라면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당신의 도덕이 나에게 부도덕일 수 있다. 사랑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우리가 인민을 학살했는가. 우리가 월남의 정글에 레이팜탄을 쏘았는가. 그들은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생각하면 우리는 섹스를 하고 싶어진다.
성은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생식을 위한 도구이어야 한다는 도덕적 엄숙주의자들에게 영화 <몽상가들> 속의 테오와 이자벨은 이만저만한 사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젊고 싱싱하며, 죄를 모른다. 사실 죄는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욕망에는 죄가 없다. 단지 그들의 욕망을 단죄해달라는 체제와 구조의 요구만이 있을 뿐이다. 욕망이 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적 요구가 죄를 만드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씨, 당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한 명의 우편배달부가 되어 버린 셈이군요.)
테오와 이자벨의 성적 일탈은 치밀한 논리적 사유의 결과물은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20대의 피끓는 청년들일 뿐이다. 그들의 성적 일탈은 몸의 요구이지 이념의 요구가 아니다. 혁명을 리드하는 것은 과학적 이념일지 몰라도 현실의 혁명은 몸에 끌려간다.
몸은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존재의 휘발을 요구한다. 에로스의 충동이란 ‘너’에게로 흡수되어서 깨끗하게 ‘나’를 잊겠다는 죽음에의 충동, 곧 타나토스의 충동이 아니던가. 그러나 누구에게나 현실은 있게 마련이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사랑으로 까맣게 타죽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사랑’을 향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 거리가 만드는 것이 ‘놀이’요 ‘유희’다. 사랑의 미학적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죽음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을 놀이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테오와 이자벨은 한 마디로 ‘잘 논다’. 그들은 영화 속 대사와 장면들을 외우고, 서로에게 문제를 내 정답을 풀지 못하면 가차없는 벌칙을 내린다. 사랑과 놀이에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예의도 없다. 테오는 게임의 벌칙으로 이사벨과 매튜의 섹스를 지시하고, 이사벨은 테오에게 자위할 것을 명령한다. 또 이사벨과 테오는 남매임에도 벌거벗고 나란히 잠을 잔다. 그들은 전혀 심각하지 않다. 심각한 얼굴은 파시스트의 표정이다. 조롱하는 자는 심각하지 않다. 놀이하는 자는 삶을 생각하지 죽음이나 죽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세상의 율법과 규칙들이 놀이를 방해하는가. 너무 많은 금[線]은 놀이의 재미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이다. 68세대 이전의 프랑스를 생각해보시라. 테오와 매튜의 일탈은 68세대 이전의 프랑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통렬한 조롱일 뿐이다.
만약 테오와 매튜에게 충분한 권력이 주어졌다면 그들의 저항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성적 일탈은 그들 나름대로 저항의 한 방식이다. 성이란 가장 사적인 공간을 요구한다. 그 사적인 공간에서마저도 공권력이 지배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오만도 이만저만한 오만이 아니다.
사적인 공간의 주인은 나다. 내가 그 공간의 주인이다. 나는 당신과는 다르다. 나와 다름이 당신을 만들고 당신과 다름이 나를 만든다. 68세대들은 기성세대와 그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었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든 그것은 ‘타인의 취향’일 뿐이다. 당신의 취향이 나와 세계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의 일탈은 사랑스럽다. 그 믿음의 용량을 키워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나는 베르톨루치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몽상가들>이 사랑스런 이유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