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911 - [할인행사]
마이클 무어 감독, 마이클 무어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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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영화<화씨 911>

형법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사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불법시위에 반감을 품고 시위대에게 곤봉을 휘두른다면 즉각 구속이다. 불법적인 행동에 물리적인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는 오직 국가뿐이다.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주체다. 경찰이나 군대가 동원되어 폭동을 진압하는 것도 '국가'라는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주체도 국가다. 국가가 이렇게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내세우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공익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그러나 교왕과직(矯枉過直)이라 했다.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정도를 넘으면 곧음이 지나쳐 사태를 그르치는 수가 허다하다. 공익도 좋지만 합법적 폭력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국가가 행하는 폭력이 과연 공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인지도 충분히 고찰되어야 한다. 집권세력만을 위한 이익, 사용자만을 위한 이익, 경제력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이익을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공익이 발전한 개념이 국가의 이익, 즉 국익이다.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 국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정치가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언하는 것이 국익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나라에도 전체 국민의 단일한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 전체의 단일한 이익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 계층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 다른 계층에는 손해가 되는 경우는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허다하다.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는 말할 것이다.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말할 것이다.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소수가 손해를 입더라도 그 손해의 보상이 다수에게 커다란 이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소수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도덕의 논리’가 아니라 ‘정치의 논리’요, ‘수의 논리’다.
 
'수의 논리'를 위해서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이다. >라는 문구를 담은 통계자료가 곧잘 인용된다. 파병의 논리도 마찬가지다.  파병으로 인해서 얻는 이익이 파병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얻는 이익보다 작다면 국민들이 찬성할 리가 없다. 과반수 이상의 국민이 찬성하고 있다면 파병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가 곧 파병의 논리다.
 
그러나 영화 <화씨 911>을 이런 식의 국익의 논리가 과연 정당하냐를 묻고 있다. 영화는 이라크 전쟁을 열렬히 지지하는 보수적 성향의 한 가정을 보여준다. 식구 중 많은 수가 군대 간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 집안은 아들을 이라크로 보낸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주검이 되어 돌아 온 뒤 집안은 큰 슬픔에 잠기게 되고 이후 강력한 반전 세력으로 돌변한다.
 
한 개인의 이익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양보되어도 좋다는 것이 '수의 논리'다. 다수에게는 행복을 가져다 주지만 소수에게는 극심한 아픔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정책의 결정에서 항상 소수가 배제되는 사회는 공평하지 못하다. 소수를 배려할 수 있는 사회, 소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사회, 진보된 사회란 그런 곳이 아닐까.
 
감독:마이클 무어. 주연:마이클 무어. 제작: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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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 영화 그림책
로알드 달 지음,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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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꾸는 꿈의 판타지
   -<찰리와 초콜릿공장>


찬 기운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겨울, 콜록콜록 기침을 하시며 탄불을 가는 엄마를 보면 안쓰럽다. 자식들은 생각한다. 이 세상에 갈지 않더라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연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 모든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아프셔도 병원에 한번 못 가시는 엄마를 고쳐줄 수 있을 텐데, 언제나 쌀이 바닥나지 않는 쌀통이 있었으면 온가족이 배부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내게는 없지만 꼭 있어줬으면 하는 것이 돈이고 건강이고 행복이고 사랑이다. 지금 내게는 없지만 그런 조건들이 실현될 공간을 누구나 꿈꾼다. 바로 그 공간이 다름 아닌 판타지의 공간이다. 흥부의 박에서 재물이 쏟아지는 공간도 판타지의 공간이고, 심봉사가 딸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곳도 판타지의 공간이며, 춘향이 이몽룡과 재회하는 공간도 따지고 보면 판타지의 공간이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현실의 고통이 깊다. 아이들에게 과자 한번 못 사주는 부모의 마음, 병든 어머니를 치료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안분지족(安分知足), 가난을 편하게 여기고 족함을 알라고 했지만 가난은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쓰라린 현실이요 아픔이다. 현실의 가난은 결코 미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의 빈곤 앞에서는 당장 한줌의 쌀이 시급한 것이지 성인들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병이 깊을수록 회복에 대한 갈망도 커지듯 현실의 고통과 가난이 깊을수록 판타지의 공간에 대한 갈망도 커간다. 판타지는 가난이 꾸는 꿈이다. 없는 것[재물, 빵과 행복 등]을 있게 만들고 있는 것[배고픔, 질병, 불행]을 없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로얄드 달의 원작을 영화화 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의 찰리는 곧 쓰러져 걸 것만 같은 집에서 산다. 초콜릿 하나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찰리네 식구들은 고기도 넣지 않는 멀건 양배추국으로 끼니를 때운다. 치약공장에 다니는 아버지는 실직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약하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찰리네 식구들에게는 어떤 현실적 돌파구가 있을까. 복권이 당첨되는 엄청난 행운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그러나 소망은 소망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꿈이라도 꾸어볼 수는 있다. 꿈꾸는 시간만큼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꿈의 공간이다.
 
‘옛날 옛날에 어떤 바보가 살았는데’로 시작되는 민담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가난뱅이들이다. 그러나 민담은 늘 ‘행복하게 살았단다’로 끝난다. 그들이 행복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착한 마음으로라도 사고싶었던 것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찰리네 식구들은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이다. 배고픔을 아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는 법,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고통의 깊이를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한다. 바로 그것이 찰리네 식구들의 도덕성이다.
 
영화 속의 윌리 웡카의 공장에서는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껌, 아무리 오래 씹어도 단물이 빠지지 않는 껌, 10초마다 색깔이 바뀌는 맛있는 캐러멜, 입에 넣자마자 달콤하게 녹아버리는 작은 깃털처럼 생긴 사탕, 그리고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절대로 녹지 않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을 만든다. 유치하다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꾸는 꿈이고 가난한 자들이 꾸는 꿈이다. 흥부전이 그렇듯이 <찰리와 초콜릿공장> 또한 왜 판타지가 가난한 자들의 문학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감독: 팀 버튼. 주연: 조니뎁, 프레디 하이모어, 헬레나 본햄 카터.  제작: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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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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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리히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책을 통해 기계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공생의 삶을 해치는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원래 제목은 󰡐Energy and Equity󰡑이다.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성󰡑이다. 에너지 과소비로 요약되는 고도 산업 기술화가 자연파괴를 가속화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고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책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다. 어떤 방향이나 장소로도 당장 시속 3-4마일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로 넘어 오면서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낳았고, 인간의 이동성을 산업적으로 규정된 도로망에 얽어맸다.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이 자신의 차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연간 1600시간. 여기에 포함되는 시간은 자동차를 주행과 관해 직접 소비하는 시간뿐 아니라, 자동차 값과 기름값, 보험료와 세금, 교통 위반시의 벌금 등을 내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모으는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렇게 1600시간을 투자해 평균적인 미국인이 달리는 거리는 연간 평균 약 7500마일. 이를 시속으로 환산하면 시속 5마일 정도이니, 인간의 걷는 속도보다 월등한 수준은 아니다. 여기에 사고로 병원이나 경찰, 검찰에서 보내는 시간이나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자동차를 사기 위해 광고를 보는 시간 등을 고려해서 계산하면 자동차의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45%를 수송수단이 소비한다고 한다. 2억 9천만 미국인을 수송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에 사용하는 연료가 13억 중국인과 10억 인도인이 모든 용도로 사용하는 연료를 양적으로 압도한다. 그리고 이 연료의 거의 대부분은 가속을 촉진하는 데 사용한다. 속도를 높이기 위한 에너지의 사용이 지구자원 고갈, 환경공해, 자연파괴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새삼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과소비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고 사회적 불공정마저 초래한다는 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망각은 속도에 비례한다󰡓고 했다.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속도 하나만을 생각해야지 다른 것을 생각하면 위험하다. 운전 중에 속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머리 속은 비워져 간다. 잡생각은 사고를 불러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천히 걷는 자는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를 갖는다.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이란 작품에는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라는 구절이 나온다. ‘미음완보’란 시구절을 읊조리며 천천히 걸음을 의미한다. 천천히 걸을 때만이 우리는 무언가를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맑은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키며 봄이 되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삶의 환희를 만끽하는 <상춘곡> 속의 선비, 정극인을 떠올려 보라. 그는 자유를 호흡하고 있는 자유인이다. 그는 어느 것에도 묶여 있지 않다. 이런 문학작품을 염두에 둔다면 과속, 즉 에너지의 과다한 사용이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는다는 일리히의 주장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서민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저소득층의 소득은 적게 상승하거나 정체해 있는 반면에 고소득층의 소득은 치솟아서 실제로 내가 잃은 것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만큼 살 수 없음을 보고 느끼는 공평한 사회적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감정)을 줄 수도 있다. 에너지 과잉으로 사용하는 자동차에 대한 대안으로 일리히는 자전거를 제시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보행자보다 3-4배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으나, 그럴 경우에 소비하는 에너지는 보행자의 5분의 1로 줄어든다.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균형 잡힌 이상적인 변환기이다. 이 도구를 사용하면 인간은 모든 기계의 효율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다.

자전거는 열역학적으로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가격 또한 저렴하다. 자전거 운행에 따르는 공공설비 비용과 고속도로에 맞춰 설계된 제반 시설의 건설비용을 비교해 본다면 자전거가 훨씬 경제적이다. 이밖에도 자전거의 이점은 많다. 자동차 한 대를 주차하는 장소에 자전거는 18대를 세울 수 있으며, 4만 명의 사람을 1시간 이내에 다리를 건너게 하기 위해서, 전차를 사용하면 일정 폭의 노선이 두개 필요하고 버스를 사용하면 네 개, 승용차라면 12개가 필요하지만 자전거는 단 하나로 끝난다는 것이 일리히가 열거하는 자전거의 장점이다.

일리히는 생산과 소비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고 수단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그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부합하는 방안이 ‘균형’이다. 생태균형, 근본적 독점을 깨는 균형, 배움의 균형, 권력의 균형, 목적의 균형만이 성장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과 생태계를 구할 수 있다고 그는 『성장을 멈춰라』에서 단언한다.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여하라는 말은 결국 도구가 거대하게 성장하는 것을 막으라는 충고다. 물론 기술의 거대화나 대량화는 일단은 경제성을 향상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동력의 생산에 있어서는 물레방아보다는 수력발전소가 그 효율성과 경제성이 월등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대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야기한다. 19세기말까지는 기업체와 과학기술 개발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화학공업과 전기공업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연구개발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전체 산업 분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기업과 한 나라의 사활이 연구개발에 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산업체 연구개발이 중요하게 되었고, 대학·산업체·연구소 등이 한 지역에서 결합되는 거대한 과학기술 단지가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원자탄 개발 계획, 허블 우주망원경 계획, 인간 게놈 계획, 입자가속기 건설 계획 등 거대 규모의 과학이 등장하였다. 즉, 혼자 연구하는 과학에서 수 백 명이 팀을 구성하여 연구하는 과학으로 바뀌었다. 또한 아폴로 우주 개발 계획, 컬럼비아 우주 왕복선 계획, 원자력 발전 계획 등의 거대 기술 체계가 나타났다. 기술체계가 커짐에 따라, 챌린저호 폭발 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 시스템이 잘 돌아가지 않아 발생하는 사고의 규모도 커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고들은 거대복합기술체계의 운영과정에서 불확실한 판단이 내려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자들은 꼼꼼하고 치밀하게 기술의 운용과정을 계산한다고 하지만 기술의 운용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빠짐없이 점검하기는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우주왕복선과 같은 거대기술체계가 일정 기간 동안 큰 사고 없이 운행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일상적이고 안전한 기술이 되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우주왕복선과 같은 거대기술체계는 기술적·조직적 복잡성과 그 속에 내재한 불확실성의 요소 때문에 본질적으로 고위험 기술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술체계는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과 같이 사실상 거의 무한정한 자기 확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거대 기술체계가 자원의 무절제한 낭비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 그리고 이런 거대한 기술체계가 군산학복합체(*군부와 대규모 방위산업체들의 상호의존체제를 군산복합체라 하는데 여기에 대학이나 연구센터와 같은 ‘학문’까지 개입한 거대한 상호의존체계를 말함)라는 형태로 강한 결속을 유지하면서 국가발전이라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환경파괴를 주도했다는 것은 20세기를 통해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 와서 미국에서는 민권운동의 신장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면서 거대체계와 거대규모의 과학기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거대규모의 과학기술체계를 거부하고 소위 적정기술을 추구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와 아울러 거대기술체계의 안정성 문제도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자전거를 새로운 문명의 대안으로 내놓은 일리히의 주장은 ‘적정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볼 수도 있다.

적정기술은 그러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거대규모의 핵발전소 건설과 중앙집중식의 전력공급체계가 문제점이 있다면 이를 지양하고 환경에 부담을 적게 주는 체계로 소규모의 분산적인 태양에너지에 의한 전력 공급체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핵발전소와 같은 거대한 전력공급시스템에서 소규모의 분산적인 태양에너지에 의한 전력공급시스템에로의 전환이 곧 거대기술에서 적정기술로의 전환이다. 오늘날의 자동차 산업도 복잡한 생산조직과 판매 시스템과 연료공급 시스템 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규모의 체계이다. <자동차에서 자전거로>라는 일리히의 주장은 바로 비인간적인 ‘거대기술’에서 인간적인 규모인 ‘적정기술’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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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펭귄이? 허풍도 심하시네 - 르 피가로 기자가 쓴 지구온난화 뒤집기
장 폴 크루아제 지음, 문신원 옮김 / 앨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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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크루아제, 그는 최근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 『사막에 펭귄이?-허풍도 심하시네』(앨피)라는 책에서 "온실효과가 오로지 기온 상승 때문에 나타난다면 빙하는 위에서부터 녹을 것이다. 대기 온도가 5~6도 상승하더라도 현재 평균 영하 33도인 극지방의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 오를 리 없다고 가정할 때, 기후가 온난해지면 오히려 현재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려 빙하는 더 두꺼워질지 모른다. 결국 온난화는 오히려 바다의 해수면을 낮추는 것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한다. 온난화가 심해져도 곧바로 지구에 대재앙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탄소는 모든 생명 유기 조직의 토대며 적어도 식물의 성장을 도와 궁극적으로 대기 속 산소량을 풍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필요하다며 이산화탄소를 변호한다.

 
  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기적 발효를 통해 생겨나는 천연가스인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를 23배나 더 유발하기 때문에 아마존 숲이 부패하면서 연간 10억 톤 가량의 메탄을 배출한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밀림이 오히려 거대한 오염원일 수 있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크루아제는 과학자들이 지구 온난화에 대해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데에는 다른 음모가 있음을 지적한다. 세계기상기구(WMO)가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자기들 조직의 정치적인 이해 관계를 위해 미래의 위협을 좀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 음모론의 실체다. 1986년 챌린저호가 폭발된 직후, 이 사고로 미항공우주국의 예산이 삭감되자 미항공우주국은 기후를 연구주제로 선택해 온실효과 개선 캠페인을 열심히 홍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맥키의 『자연의 종말』은 이상기후를 말함으로써 정부의 예산을 타내겠다거나 이상기후에 관련된 책을 써서 인세를 챙기겠다는 의도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다. 생태계야 어찌되건 오직 인간의 편리만이 제일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버려라,  소박한 삶의 미덕을 회복하라, 자연에 대한 경이의 시선을 회복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왜 이 책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함께 환경분야의 고전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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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종말 - 인간과 과학 총서 21
빌 맥키벤 지음, 진우기 옮김 / 양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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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울컥하는 감정을 느낄 때 풍경은 단순한 사물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풍경에는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경험과 마음이 녹아있다.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속에 베어있는 추억들을 음미한다.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던 개울, 밤나무를 흔들며 놀던 뒷동산, 울적할 때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던 나무그늘에 얽힌 추억들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현한다. 사람은 뼈와 살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풍경으로도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발이란 이름 아래 뒷동산이 불도저에 밀리고 개울이 복개되면 나를 구성하는 추억 속의 한 풍경도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해저를 뚫고 인간의 유전자마저 복제하는 과학기술을 앞세운 도구적 인간[Homo Faber]들은 살아있는 인간의 아픔을 모른다. 톱을 들고 있는 호모 파베르들의 관심은 나무가 보여주는 풍경에 있지 않다. 더구나 나무의 신화와 전설에도 관심이 없다. 나무에 얽힌 추억에도 관심이 없다. 오직 나무의 쓰임새와 재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빌 맥키벤의 저서 『자연의 종말』은 마치 학위논문처럼 저명한 과학자들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지만 때로는 자연을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을 거론하기도 한다. 온난화로 인해 남극의 빙원이 녹고 이로 인해 해수면이 2미터 상승하면 막대한 쌀 생산지인 나일강의 삼각주가 잠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물을 그 효용가치로밖에 볼 줄 모르는 호모파베르의 판단일 뿐이다. “의학적으로 유용한 수백만 종의 식물이 살고 있기 때문에 열대우림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온실효과가 대두되기까지 열대우림의 벌목반대운동에 자주 쓰인 강력한 설득방법이었다. 심지어 다소 급진적인 개혁운동가들로 이루어진 야생보호운동조차도 야생을 보호해야할 이유가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고, 스트레스에 찌든 도시 거주자가 자신을 되찾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연을 존재 그 자체로서 소중히 하라는 충고다.

이 책의 주요 테마는 기후변동이다. 1995년 1,500명의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패널(IPCC : International panel on Climate Change)'은 모든 데이터를 통합한 후 “모든 증거자료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은 지구의 기후에 식별가능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결을 내린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빌 맥키벤은 이미 1989년에 『자연의 종말』을 통해 산업화에 따른 기후 변화와 지구온난화가 불러올 전지구적 위기상황을 일찍이 예고했다. 인류는 불과 지난 100년 동안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25%나 늘렸고, 메탄 역시 두 배 이상 증가시켰으며 이렇게 바뀐 대기가 기온 상승, 산성비, 숲의 변화,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를 불러일으킨다고 맥키벤은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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