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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일리히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책을 통해 기계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공생의 삶을 해치는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원래 제목은 Energy and Equity이다.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성이다. 에너지 과소비로 요약되는 고도 산업 기술화가 자연파괴를 가속화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고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책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다. 어떤 방향이나 장소로도 당장 시속 3-4마일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로 넘어 오면서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낳았고, 인간의 이동성을 산업적으로 규정된 도로망에 얽어맸다.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이 자신의 차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연간 1600시간. 여기에 포함되는 시간은 자동차를 주행과 관해 직접 소비하는 시간뿐 아니라, 자동차 값과 기름값, 보험료와 세금, 교통 위반시의 벌금 등을 내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모으는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렇게 1600시간을 투자해 평균적인 미국인이 달리는 거리는 연간 평균 약 7500마일. 이를 시속으로 환산하면 시속 5마일 정도이니, 인간의 걷는 속도보다 월등한 수준은 아니다. 여기에 사고로 병원이나 경찰, 검찰에서 보내는 시간이나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자동차를 사기 위해 광고를 보는 시간 등을 고려해서 계산하면 자동차의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45%를 수송수단이 소비한다고 한다. 2억 9천만 미국인을 수송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에 사용하는 연료가 13억 중국인과 10억 인도인이 모든 용도로 사용하는 연료를 양적으로 압도한다. 그리고 이 연료의 거의 대부분은 가속을 촉진하는 데 사용한다. 속도를 높이기 위한 에너지의 사용이 지구자원 고갈, 환경공해, 자연파괴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새삼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과소비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고 사회적 불공정마저 초래한다는 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망각은 속도에 비례한다고 했다.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속도 하나만을 생각해야지 다른 것을 생각하면 위험하다. 운전 중에 속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머리 속은 비워져 간다. 잡생각은 사고를 불러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천히 걷는 자는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를 갖는다.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이란 작품에는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라는 구절이 나온다. ‘미음완보’란 시구절을 읊조리며 천천히 걸음을 의미한다. 천천히 걸을 때만이 우리는 무언가를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맑은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키며 봄이 되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삶의 환희를 만끽하는 <상춘곡> 속의 선비, 정극인을 떠올려 보라. 그는 자유를 호흡하고 있는 자유인이다. 그는 어느 것에도 묶여 있지 않다. 이런 문학작품을 염두에 둔다면 과속, 즉 에너지의 과다한 사용이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는다는 일리히의 주장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서민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저소득층의 소득은 적게 상승하거나 정체해 있는 반면에 고소득층의 소득은 치솟아서 실제로 내가 잃은 것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만큼 살 수 없음을 보고 느끼는 공평한 사회적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감정)을 줄 수도 있다. 에너지 과잉으로 사용하는 자동차에 대한 대안으로 일리히는 자전거를 제시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보행자보다 3-4배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으나, 그럴 경우에 소비하는 에너지는 보행자의 5분의 1로 줄어든다.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균형 잡힌 이상적인 변환기이다. 이 도구를 사용하면 인간은 모든 기계의 효율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다.
자전거는 열역학적으로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가격 또한 저렴하다. 자전거 운행에 따르는 공공설비 비용과 고속도로에 맞춰 설계된 제반 시설의 건설비용을 비교해 본다면 자전거가 훨씬 경제적이다. 이밖에도 자전거의 이점은 많다. 자동차 한 대를 주차하는 장소에 자전거는 18대를 세울 수 있으며, 4만 명의 사람을 1시간 이내에 다리를 건너게 하기 위해서, 전차를 사용하면 일정 폭의 노선이 두개 필요하고 버스를 사용하면 네 개, 승용차라면 12개가 필요하지만 자전거는 단 하나로 끝난다는 것이 일리히가 열거하는 자전거의 장점이다.
일리히는 생산과 소비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고 수단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그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부합하는 방안이 ‘균형’이다. 생태균형, 근본적 독점을 깨는 균형, 배움의 균형, 권력의 균형, 목적의 균형만이 성장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과 생태계를 구할 수 있다고 그는 『성장을 멈춰라』에서 단언한다. 도구의 성장에 한계를 부여하라는 말은 결국 도구가 거대하게 성장하는 것을 막으라는 충고다. 물론 기술의 거대화나 대량화는 일단은 경제성을 향상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동력의 생산에 있어서는 물레방아보다는 수력발전소가 그 효율성과 경제성이 월등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대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야기한다. 19세기말까지는 기업체와 과학기술 개발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화학공업과 전기공업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연구개발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전체 산업 분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기업과 한 나라의 사활이 연구개발에 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산업체 연구개발이 중요하게 되었고, 대학·산업체·연구소 등이 한 지역에서 결합되는 거대한 과학기술 단지가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원자탄 개발 계획, 허블 우주망원경 계획, 인간 게놈 계획, 입자가속기 건설 계획 등 거대 규모의 과학이 등장하였다. 즉, 혼자 연구하는 과학에서 수 백 명이 팀을 구성하여 연구하는 과학으로 바뀌었다. 또한 아폴로 우주 개발 계획, 컬럼비아 우주 왕복선 계획, 원자력 발전 계획 등의 거대 기술 체계가 나타났다. 기술체계가 커짐에 따라, 챌린저호 폭발 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 시스템이 잘 돌아가지 않아 발생하는 사고의 규모도 커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고들은 거대복합기술체계의 운영과정에서 불확실한 판단이 내려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자들은 꼼꼼하고 치밀하게 기술의 운용과정을 계산한다고 하지만 기술의 운용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빠짐없이 점검하기는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우주왕복선과 같은 거대기술체계가 일정 기간 동안 큰 사고 없이 운행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일상적이고 안전한 기술이 되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우주왕복선과 같은 거대기술체계는 기술적·조직적 복잡성과 그 속에 내재한 불확실성의 요소 때문에 본질적으로 고위험 기술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술체계는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과 같이 사실상 거의 무한정한 자기 확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거대 기술체계가 자원의 무절제한 낭비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 그리고 이런 거대한 기술체계가 군산학복합체(*군부와 대규모 방위산업체들의 상호의존체제를 군산복합체라 하는데 여기에 대학이나 연구센터와 같은 ‘학문’까지 개입한 거대한 상호의존체계를 말함)라는 형태로 강한 결속을 유지하면서 국가발전이라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환경파괴를 주도했다는 것은 20세기를 통해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 와서 미국에서는 민권운동의 신장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면서 거대체계와 거대규모의 과학기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거대규모의 과학기술체계를 거부하고 소위 적정기술을 추구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와 아울러 거대기술체계의 안정성 문제도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자전거를 새로운 문명의 대안으로 내놓은 일리히의 주장은 ‘적정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볼 수도 있다.
적정기술은 그러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거대규모의 핵발전소 건설과 중앙집중식의 전력공급체계가 문제점이 있다면 이를 지양하고 환경에 부담을 적게 주는 체계로 소규모의 분산적인 태양에너지에 의한 전력 공급체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핵발전소와 같은 거대한 전력공급시스템에서 소규모의 분산적인 태양에너지에 의한 전력공급시스템에로의 전환이 곧 거대기술에서 적정기술로의 전환이다. 오늘날의 자동차 산업도 복잡한 생산조직과 판매 시스템과 연료공급 시스템 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규모의 체계이다. <자동차에서 자전거로>라는 일리히의 주장은 바로 비인간적인 ‘거대기술’에서 인간적인 규모인 ‘적정기술’로의 전환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