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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 영화 그림책
로알드 달 지음, 신수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가난한 사람들이 꾸는 꿈의 판타지
-<찰리와 초콜릿공장>
찬 기운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겨울, 콜록콜록 기침을 하시며 탄불을 가는 엄마를 보면 안쓰럽다. 자식들은 생각한다. 이 세상에 갈지 않더라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연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 모든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아프셔도 병원에 한번 못 가시는 엄마를 고쳐줄 수 있을 텐데, 언제나 쌀이 바닥나지 않는 쌀통이 있었으면 온가족이 배부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내게는 없지만 꼭 있어줬으면 하는 것이 돈이고 건강이고 행복이고 사랑이다. 지금 내게는 없지만 그런 조건들이 실현될 공간을 누구나 꿈꾼다. 바로 그 공간이 다름 아닌 판타지의 공간이다. 흥부의 박에서 재물이 쏟아지는 공간도 판타지의 공간이고, 심봉사가 딸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곳도 판타지의 공간이며, 춘향이 이몽룡과 재회하는 공간도 따지고 보면 판타지의 공간이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현실의 고통이 깊다. 아이들에게 과자 한번 못 사주는 부모의 마음, 병든 어머니를 치료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안분지족(安分知足), 가난을 편하게 여기고 족함을 알라고 했지만 가난은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쓰라린 현실이요 아픔이다. 현실의 가난은 결코 미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의 빈곤 앞에서는 당장 한줌의 쌀이 시급한 것이지 성인들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병이 깊을수록 회복에 대한 갈망도 커지듯 현실의 고통과 가난이 깊을수록 판타지의 공간에 대한 갈망도 커간다. 판타지는 가난이 꾸는 꿈이다. 없는 것[재물, 빵과 행복 등]을 있게 만들고 있는 것[배고픔, 질병, 불행]을 없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로얄드 달의 원작을 영화화 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의 찰리는 곧 쓰러져 걸 것만 같은 집에서 산다. 초콜릿 하나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찰리네 식구들은 고기도 넣지 않는 멀건 양배추국으로 끼니를 때운다. 치약공장에 다니는 아버지는 실직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약하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찰리네 식구들에게는 어떤 현실적 돌파구가 있을까. 복권이 당첨되는 엄청난 행운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그러나 소망은 소망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꿈이라도 꾸어볼 수는 있다. 꿈꾸는 시간만큼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꿈의 공간이다.
‘옛날 옛날에 어떤 바보가 살았는데’로 시작되는 민담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가난뱅이들이다. 그러나 민담은 늘 ‘행복하게 살았단다’로 끝난다. 그들이 행복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착한 마음으로라도 사고싶었던 것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찰리네 식구들은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들이다. 배고픔을 아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는 법,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고통의 깊이를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한다. 바로 그것이 찰리네 식구들의 도덕성이다.
영화 속의 윌리 웡카의 공장에서는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껌, 아무리 오래 씹어도 단물이 빠지지 않는 껌, 10초마다 색깔이 바뀌는 맛있는 캐러멜, 입에 넣자마자 달콤하게 녹아버리는 작은 깃털처럼 생긴 사탕, 그리고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절대로 녹지 않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을 만든다. 유치하다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꾸는 꿈이고 가난한 자들이 꾸는 꿈이다. 흥부전이 그렇듯이 <찰리와 초콜릿공장> 또한 왜 판타지가 가난한 자들의 문학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감독: 팀 버튼. 주연: 조니뎁, 프레디 하이모어, 헬레나 본햄 카터. 제작: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