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고 열흘쯤 되어서인가, 평상시처럼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대뜸 묻는다.

너 요즘 피곤해 죽겠지?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그 즈음 나는 매일매일이 힘들어서 죽을 맛이었다. 잠이 모자라고 몸은 늘어지고 책 읽을 시간도 인터넷에서 놀 시간도 없었다. 퇴근하고 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시계는 이미 10시, 11시를 가리키고, 씻고 나면 금방 잠자기 바빴다. 문제는, 대체 왜 그런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

 

혼자 편히 살다가 둘이 같이 살려니 당연히 힘들지.

그게 뭐. 혼자 살 때랑 달라진 것도 없는데.

달라진 게 왜 없니?

혼자 살 때도 (자주는 아니지만) 밥 해 먹었고 빨래했고 청소했다. 그렇지만 7시에 집에 들어가서 12시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책 읽고 놀고 인형도 만들고, 하여간 시간은 넘친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더랬다. 애인이랑 같이 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간 해 주는 밥 먹으면서 편히 살던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하던 일 똑같이 하는 건데, 대체 왜 피곤하고 힘든 거냐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물론, 집이 두 배쯤 넓어졌다. (그래서 청소기랑 스팀 청소기를 샀다.) 일주일에 한 번 세탁기 돌리는 걸로 충분했던 빨래는 세 번쯤으로 늘었다. 한 달에 한 두 번 장 보던 게 일주일에 한 두 번으로 바뀌었다. 그건 그렇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게 말이나 돼? 일주일에 두 세 권 보던 책을 두 주가 다 지나도록 한 권도 못 본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이런 얘기를 애인에게 했더니 자기가 악덕 남편이 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집안일 하느라 책 한 권 못 보게 만들었다나. 미안하다고, 너무 애쓰지 말고 편히 지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딱히 애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은 설거지며 청소며 죄다 하고, 스팀 청소기 쓰고 나면 걸레 빨아야 하는 거 모르죠?라고 얘기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걸레도 알아서 빨아놓는 사람이니까. 지금은 살림살이를 세팅하는 단계니까 그럴거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거다, 라고 다독여주는 사람이니까.

 

3주쯤 지나서, 그러니까 전전 주말에 애인네 부모님께서 다녀가신 후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애인 말대로 이것저것 정리가 끝나고 익숙해지니까 그간 갖지 못했던 여유가 조금씩 생긴다. 어머님은 둘 다 일하느라 힘들 거라고 밑반찬을 잔뜩 해다 주셨다. 덕분에 국물 한 가지만 만들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사 때문에 한동안 일찍 퇴근하곤 했던 애인은 다시 야근 모드로 돌아가서 매일 11시가 넘어야 들어온다. 나는 혼자 살던 때와 다름없이 7시에 집에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거나 청소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다. 애인이 12시 전에 들어오면 잠시 노닥거리기도 하고, 더 늦어지면 먼저 잠자리에 든다.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옆에 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고는 매일매일 애인의 얼굴을 본다는 것, 뿐이다. 휴~

 

한 달이 다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 다시 일이 늘어나면 또 꼼짝을 못하게 될 거다. 애인의 옷을 빨아서 깨끗하게 다려서 갖다 주시던 어머님은 빨래 해 주느라고 고생한다. 다림질하기 힘들텐데.라고 하셨다. 거기다 대고 차마 저 다림질 못해요. 셔츠 안 다려주는데요.라고 말할 수 없어서 애매하게 .하고 웃었다. 깔끔하게 다린 셔츠 같은 거, 애인은 바라지도 않을 테고 나도 전혀 할 생각이 없지만, 어머님이 계속 그러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성질 같으면 그런 거 못 한다, 할 시간 없다, 라고 말씀드리면 좋겠구만. 쩝. 필요하면 세탁소에 맡기지 뭐, 라고 생각하고 있다.

 

집안일은, 지금 하고 있는 정도만, 더는 싫다구. 깔끔하고 바지런한 주부같은 거 애초에 포기해버렸으니까. (실은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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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2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 하시느라 참 힘드셨죠 곧 정이드시길 바랍니다 아래 사진 너무 귀여워요

urblue 2006-04-2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

瑚璉 2006-04-2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셔츠는 세탁소로! 제 평소 신조입니다. 의외로 비싸지도 않아요.

날개 2006-04-2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하십니다.. 포기할건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이리스 2006-04-2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은 역시나 현실하고는 먼 이야기인가 봐요? ^^

히피드림~ 2006-04-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 분이 참 가정적이고 탁 트이신 분같아요.보기 좋습니다.~^^

토토랑 2006-04-2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두 동거 시작하고 한달동안은 꼬박꼬박 아침해서 둘이 먹고 다녔답니다. 오 나두 부지런해질수 있군 하고 생각했는데 딱 한달 이더군요 ㅋㅋ
그 이후로는 아침이고 청소고 뭐고...그냥 도저히 못봐주면 하는정도로 살았지요 ㅋㅋ
둘만 있을땐 그래도 되요. 그래도 될때 신나게 어질러도 보고 사세요 ^^;;;

조선인 2006-04-25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직은 약과에요. ㅋㅋㅋ

urblue 2006-04-2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리건곤님, 넵, 셔츠는 세탁소로! ㅎㅎ

날개님, 욕심부려봐야 제 주제에 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냥 편하게 살아야겠죠? ^^

낡은구두님, 애인은, 5월만 지나가면 일찍 퇴근할 수 있을테니까 그때가 되면 자기가 다 하겠다고 합니다. 흑흑.

punk님, 저한테 잘 하려고 무지 애쓰는 것 같긴 한데, 실제 할 줄 아는 건 거의 없답니다. 하나하나 가르치고 있어요. ^^;

토토랑님, 애인네 어머님이 반찬 해 주신 덕분에 겨우 아침을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치만 반찬 떨어지면 바로 빵으로 돌아갑니다. ㅋㅋ
제가 원래 좀 게으르고 어질러진 걸 봐도 치울 마음이 잘 안 들거든요. 그냥 그렇게 살라구요. ^^

urblue 2006-04-2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음? 약과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무섭다구요~~

반딧불,, 2006-04-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사는 것만도 지칩니다.
아이들까지 있으면 정말 돌아요..
일찌감치 못하는 것은 못한다 못을 박아야 서로 편합니다.
에구 애쓰시네요. 힘내시구요.

비로그인 2006-04-25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흐흐
깔끔한 주부는 할래 안할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타고 나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전혀 깔끔하지 않은 13년차 주부올림..^^;;

아영엄마 2006-04-2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나 반가운 제목이던지...동지가 한 명 늘었구나 싶어서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왔어예~^^*(다행히 남편이고 애들도 안 깔끔하게 사는 것에 익숙합니다. 불행이라면 이 세 명이 거기다 더 해서 더 어지럽히는 것이 문제지만...)

클리오 2006-04-25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 초기에는 별로 더 하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지 피곤했어요. 아마도 나 스스로도 두 사람 살이에 익숙해지는 기간인가봐요.. 그리고 셔츠 돈아끼겠다고 집에서 빨고 다림질 해봤는데요, 2000원 정도니 걍 맡기는게 나아요. 집에서 빨면 물빠지고 스타일도 안살아요.. 흑...

울보 2006-04-25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너무 깔끔한것보다는 조금은 어질러진것이 지금보다 나중을 위해서 좋아요,,
처음에 너무 깔끔하게 치우다 보니,,아이가 생기면서 너무 힘들더라구요,이제는 포기하고 살지요 옆지기가 처음에 그렇게 할필요없을테데 할때 말을 들을걸이라고 나중에는 생각했다지요,,이제는 뭐,,조금은 안깔끔해도 그냥 넘기면서 웃어요,,ㅎㅎ

瑚璉 2006-04-2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셔츠, 900원입니다(-.-).
- '셔츠는 세탁소로' 국민운동 위원장

쎈연필 2006-04-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넘 귀여워용
내용도 그렇지만 ㅋㄷㅋㄷ

urblue 2006-04-2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네, 못하는 건 못하는 거죠 뭐. ^^ 아이가 생기면 어떨지 아직은 짐작도 안 갑니다만, 흑흑... 쬐끔 겁나요.

사야님, 푸하하~ 그 말씀이 정답이네요.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안 되겠지요?

아영엄마님, '동지'에요? 히히. 같이 살면 익숙해지겠죠. 애인도 유난히 깔끔떨고 그러는 사람은 아니니까, 양쪽 부모님 오실 때만 조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클리오님, 님도 그러셨군요. 전에 동생이랑도 한 3년 같이 살았는데, 그거랑은 또 다르더군요. 참 이상하지요. 흠.

울보님, 지금은 짐이 별로 없어서 어질러질 것도 없는데 앞으로 살림살이 늘어나면...흠... 그래도 그냥 두죠 뭐. ^^

호리건곤님, ㅋㅋ "셔츠는 세탁소로!" 근데 엄청 싸네요, 900원이라니. 오늘 세탁소 아저씨한테 물어봐야겠군요. 감사.

또마님, 음..('' ) ( ..)

2006-04-26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04-2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거 꿈 안 꿨다구요. 그,그치만 어느 정도라는 게 있잖아요. 흑흑.
속상하실 것까지야. 그거 이뻐요. 제 맘에 쏙 들었으니까 괜찮다구요. ^^

2006-04-26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dan 2006-04-2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동네 세탁소도 셔츠 900원. 체인점 형식 세탁소는 다 그럴걸요?

urblue 2006-04-2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수단님은 그거 어떻게 알아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