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3 #시라는별 74 

내 수의를 
- 최승자 

내 수의를 한올 한올 짜고 있는 
깊은 밤의 빗소리. 

내가 이승에서 어질러놓은 자리, 
파란만장한 자리
없었을 듯, 없었을 듯, 덮어주고 있구나. 

점점 더 드넓어지는 
이 일대의 물바다, 
그 위에 이제 새로이 구중궁궐
깊은 잠의 이불을 펴리라. 


최승자 시인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읽고 났더니 그의 시들을 더 많이 읽고 싶어  1993년작  『내 무덤 푸르고』와 2010년작『쓸쓸해서 머나먼』을 대출했다.『내 무덤 푸르고』를 먼저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어둡고 절망적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랑』에서도 느꼈듯 역시나 도발적이고 매력적이다.

53편의 시들 중 <내 수의를>이라는 시가 오늘 눈에 띈 것은 요양원에 계신 늙은 어미를 보고 온 탓이고, 얼마 전 내 어미가 20년도 훨씬 전에 준비해 놓은 수의를 살펴본 탓이다. 시인은 ˝깊은 밤의 빗소리˝를 자신의 수의를 짜는 소리로 들었다면, 내 어미는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제법 값 나가는 수의를 주문했더랬다. 20년 전인지, 30년 전인지 기억이 까마득한데, 그때 어미랑 나눈 대화만큼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ㅡ 아직도 날아다닐 만큼 팔팔하신 분이 수의는 어쩌자고 준비하셨대?
ㅡ 이년아, 내일을 모를 것이 인간 목숨이란다. 그라고 내 수족 멀쩡할 때 준비해 둬야재. 맨날 철딱서니 없는 니년이 언가이(어지간히) 준비해 놓을기가.
ㅡ 뭐.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재. 
ㅡ 니는 그래서 안 된다. 준비해둬서 나쁠 것 없다. 그라고 수의를 준비해 두면 장수한다 카더라.
ㅡ 하이고. 엄마 허우대 보면 그런 거 준비 안 해 둬도 엄~~청 오래 살겠거마는. 
ㅡ 못된 년. 엄마한테 하는 말 뽄새 좀 보래. 암튼, 이리 준비해둬서 내사 맘이 편하다. 운제 죽을지 몰라도 마, 한시름은 놓았고. 한 사흘 아프다 죽으면 딱 좋겠구만. 칩지 않은 날에.

사흘 후면 엄마의 여든아홉 번째 생일이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옛말을 증명하듯, 늙은 어미는 기력이 떨어진 몸으로도 오른손에 포크를 쥐고 케익을 찍어 드셨다. 천천히 씹다가 빨다가 하면서 기어이 목구멍으로 넘기셨다. 한 사흘 아프다 죽는 소망은 어그러졌지만,
춥지 않은 날에 ˝깊은 잠의 이불˝을 펴고 눈을 감겠다는 듯이. 나의 어미도 최승자 시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시인처럼 정신분열증을 앓거나 정신병원을 들락거리진 않았지만, 인생의 고난과 고통과 고독이 그것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지 않는가. 세상 모든 이들에겐 제 삶의
무게가 가장 무거운 법이다. 내 어미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마음에 병이 들면 몸도 덩달아 병이 드는 법이다. 시인을 시를 통해, 시쓰기를 통해 병중에서 일어서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섰다. 눈물겹게도 말이다.​

​마음은 오랫동안 病中(병중)이었다. 
마음은 자리 깔고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마음은 病하고만 놀았다. ​​

詩혹은 詩쓰기에 대해 이제까지 나
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나는 바라고, 믿고 싶다. 
詩 혹은, 시쓰기가 내 마음을 病中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을.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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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3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3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1-03 06: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의 사진을 보니까 좀 슬프네요 ㅜㅜ 울컥 했습니다. 마음의 병도 몸의 병도 없었으면 좋겠네요~!

행복한책읽기 2022-01-03 22:48   좋아요 2 | URL
또 우는 새파랑님. 지가 이래저래 님을 울리는군요. 죄송죄송. 무병장수는...흠. 겁나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1-03 08: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따님과 정겨운 대화 더 많이 나누시길요.
어머님과의 대화 왜 이리 정겹게 읽히는지...^^
수의를 찬찬히 들여다 보긴 처음인 것 같아요.
암튼 우리 행복한 책읽기님 매일 매일 행복하시길요♡

행복한책읽기 2022-01-03 22:50   좋아요 2 | URL
저희엄마가 욕쟁이셨어요. 저한테만요. 그땐 참 싫었는데 나이 드니, 엄마의 화법이 구수하게 와닿는거 있죠.^^ 나무님의 행복 기원에 힘 받아, 행복 따러, 주우러, 만들러 다녀야겠습니다. 고마워요~~^^

페넬로페 2022-01-03 10: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수의 준비해두셨어요.
근데 전 지금부터 결심합니다.
그 어떤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늙으려고요~~

행복한책읽기 2022-01-03 22:55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어머님도 그러셨군요. 저는 그렇게 오래된 수의가 빛도 안 바래서 깜놀했어요. 울엄니 진짜 좋은 수의를 했나 보네, 감탄했다는^^;; 집착하지 않고 늙기. 저요저요!! 저도 동참할게요. 페넬로페님 옆에 불어 있어야쥐^~~^

scott 2022-01-03 11: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죽는 소망이라뇨 ㅠ.ㅠ
저희 두 할머니는 매일 죽는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셨지만 두분 모두 100살 바로 코 앞에 두고 잠든 채
우리모두 삶의 짐을 이고 지고 살고 있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열쉼히!!^^

행복한책읽기 2022-01-03 22:5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scott님. 그 말 저희 엄마도 언젠가부터 달고 사셨어요. 할머니 두 분 모두 장수하셨다니. scott님 완전 귀염 받는 손주였겠어요. 부럽부럽. 이 순간을 열쉼히~~~^^

프레이야 2022-01-03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흘 후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수의를 보니 20년인지 30년인지 전부터 생의 마무리를 생각하신 그 마음에 찡합니다. 수의 장만하면 장수한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저희는 부모님도 저도 수의 장만 생각도 못했는데 몇 달 전 시아버님 입관 때 수의를 처음 보았어요. 팔을 만졌는데 수의 촉감이 까칠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울아빠도 일주일 후면 생신이라 ㅎ
하루하루 맛난 거 즐겁게 먹고 좋은 생각하며 살기로 해요^^

행복한책읽기 2022-01-03 23:02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님 아버님도 겨울동자시군요. 하필이면 엄동설한에 태어났다고 엄마는 불만이 많으셨어요.^^;; 하루하루 맛난 거 즐겁게 먹기. 좋은 생각하며 살기. 새해 덕담 착 달라붙습니다. 저도 아버님 생신 미리 축하드려요. 많이 좋아지셔 가족들에 둘러싸여 환한 미소 지으시기를요.^^

mini74 2022-01-03 18: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 말투같아서 좀 놀랬어요. 어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행복한책읽기 2022-01-03 23:04   좋아요 2 | URL
앗. 말투가 비슷한가요. 미니님 언박싱 영상서 목소리 듣고 저랑 고향이 비슷한 동네인가보다, 짐작했다는 ㅋ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2022-01-11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2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