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9 #시라는별 56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흐려지겠습니다. 
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 

한낮에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한 돌풍이 불어와 
천둥 번개가 칠 수도 있겠습니다. 

한밤중에는 
전국에 걸쳐 화창한 날씨를 보이겠습니다. 
남동부 지방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  3권 58장에서 다음 문장을 만났다. 

˝당신에게 쓰는 이 길고도 긴 편지가 마침내 끝나 가네. 글을 더 줄일 시간이 없어 이렇게 긴 글을 남길 수밖에 없겠군.(프랑스어) 치열했던 수많은 날들을 보낸 후 드디어 휴식이 찾아왔지. 가을의 시작이야. 균형의 종착점인 아침이 밝아오고 있어. 현재는 영원히 내일이지. 나는 텔레비전을 켰어. 졸린 얼굴의 기상 캐스터가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극심한 기온 강하와 불규칙한 집중 호우가 예상된다는군. 심보르스카가
떠올랐어. 비록 대부분 지역에서 해를 볼 수 있겠지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우산이 여전히 유용할 거라고 했지. 나에게는 물론 필요 없지만.˝ (3권 374쪽)

심보르스카? 올해 3월에 내가 읽은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 그랬다.  

『나는 고백한다』 에는 저런 식으로 불쑥불쑥 여러 작가와 문학 작품이 등장하곤 한다. 아는 이름들을 만나면 오랜 시간 못 만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고백한다를 읽는 곁가지 묘미들 중 하나이다. 올해 쉼보르스카 시집『검은 노래』 를 읽지 않았다면 저 단락을 스쳐지나고 말았을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 극심한 추위와 지독한 폭우로 세상이 얼어붙거나 물에 잠겼다가도 어느 순간 해가 쨍! 모습을 드러내며 대지를 데우거나 말린다. 날씨는 나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무심히 흐른다.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도 해는 뜨고 안개도 끼고 비구름도 몰려오고 돌풍도 불고 천둥번개도 친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고별사로 이만한 당부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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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9-09 07:3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살아 있다면 우산이 필요한 거죠?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구절이네요~ 이 페이퍼는 <나는 고백한다>를 얼마나 풍성하게 읽으시는지 추측이 가능하네요~ 이 책은 배경지식이 있으면 더 재밌고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01   좋아요 2 | URL
우산을 퍼나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ㅋ 툐툐샘은 고백한다를 어찌 읽을지 아주 궁금궁금. 1권 첫 부분에 슈테판 츠바이크 고문서 등장했었잖아요. 플친들 아니었다면 이 작가 모르고 살았을지 몰라요^^;;

새파랑 2021-09-09 08: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좋아하는 책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만날때의 그 기쁨이란! 책읽기님의 최애 작품이 맞네요. 시가 예술이네요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03   좋아요 3 | URL
근데. 모르는 작가와 음악과 미술품과 지명이 훨~~~씬 많더라죠. 이 직가분 집안 배경이 짱 부럽게 좋더군요^^

막시무스 2021-09-09 09: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산은 챙기겠지만 내일만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월욜부터 어제까지 희비의 쌍곡선이 드라마틱했네요!ㅎ 행복한 하루되시구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05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 낼 아니 오늘 날씨 좋답니다. 제가 하늘에 전보쳤어요^^ 희비의 쌍곡선을 타셨다면 어질어질하실테니 코 주무세요~~~^^

초딩 2021-09-09 1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 해가 쨍 함을 흑백 서진으로 멋지게 담았네요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06   좋아요 2 | URL
멋지죠. 저 사진 딸이 찍어준 거예요.^^

scott 2021-09-09 12: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그런데 왜 그걸 알아내려고 그 많은 시간을 쓰는 건지.
당신은 야단법석을 떨고, 우린 살지.-메리 올리버 「잘 가렴, 여우야」중에서
[나는 고백한다] 작가가 이작품에 무려 7년동안 매달렸다고 하는데
읽다가 놓쳐버린 의미들이 많은 것 같아 저도 여전히 옆에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행복한 책읽기님 가을 햇살 처럼 오늘 하루 풍성하고 따사롭게 ^.^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08   좋아요 2 | URL
아니. 5독하셨는데도 여전히 끼고 계시다니. 역쉬 scott님 👍 저도 한동안 손을 놓지 못할 듯해요^^ 메리 올리버 시 고맙습니다. 바득바득거리지 않고 살기^^

희선 2021-09-09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씨는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흐리기도 맑기도 하겠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전날엔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다가도 이튿날엔 해가 쨍하기도 하니... 살아 있어서 우산이 있어야겠네요 그건 다행인지... 그 소설에선 다른 글을 많이 말하는가 봅니다 아는 게 나오면 반갑겠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10   좋아요 2 | URL
네. 이 소설엔 아주 많은 책과 음악과 미술품이 등장해요. 바이올리두요. 희선님도 꼭 보심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