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7 #시라는별 40
도움받는 기분
- 백은선
나는 네게 시를 읽어준다. 제목은 학교야. 이렇게 시작해. 학교에 가면 책상이 없었다. 책상을 찾아 다녔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서, 어떤 날은 화단에서 책상을 찾았다. 책상에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씨발년 죽어. 이런 시야. 너는 음, 소설 같은데 하고 말한다. 나는 빨간불이 켜진 교차로에 서서, 그건 정말 있던 일이야. 그래? 그래서 서사적인가 봐. 네가 말한다.
다시 학교를 읽어본다. 네게 읽어주지 못한 뒷부분도 읽는다. 매일 혼자 벤치에 앉아 있던 얘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해주세요. 종말이 오게 해주세요. 빌고 빈 얘기. 아침이 오는 게 싫어 밤새 깨어 있던 얘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너희가 보낸 발신자 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다. #죽어. 죽어. 죽어.# 문자들. 책상을 찾아 교실 맨 뒤에 놓고 엎드려 있으면, 너희는 키득거리면서 웃었지. 미친년 밤마다 한강에 가서 서 있는데, 그러면 폭주족들이 태우고 다니다가 돌아가면서 한대, 손가락질하면서 까르르 웃었지.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너희는 뒤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 너희는 크게 다 들리게 욕을 했지. 애인은 나를 창피해했다. 나는 슬프고 무섭고 화가 났어.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어. 왜.
나에게만 다른 중력이 작용했어. 세계가 이렇게 파랗고 무겁고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악의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게, 이상했어. 그치. 봉인된 검은 상자들이 내 안에 쌓여. 그 안에 기억들이 켜켜이 썩고 부서지고 지독한 냄새를 풍겨. 어떨 때 나는 단지 상자들로 이루어진 부패 덩어리지.
참 이상하다 그치. 이 시는 발표하지 못할 거야. 나는 자꾸만 중학교 때로 돌아가 그때를 생각한다. 빈집에 돌아오면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읽고 또 읽었다. 영스트리트 스위트뮤직박스 고스트스테이션 고릴라디오 끝날 때까지 라디오를 들었다.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렸을 때
가윗날이 귀 끝을 스칠 때 차가움과 공포
계속 걷다가 걷다가 끝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던 순간. 그렇게 무언가를 건너고 다른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하던 오후의 빛, 칼처럼 꽂혀 있다. 마음.
왜. 너희에게 주고 싶던 한마디.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쓴다. 읽어봐. 기억 나? 책상을 찾아 헤매던 찢긴 그림자. 물에 젖은 여자애. 비명처럼 가벼운 날들.
나는 어쩌면 너를 만나 이것을 다시 읽어줄 거야. 응, 골목을 헤매는 생쥐 같은 심정으로 전부 다시 쓸 거야.
하얀 얼굴과 초록. 정적 속에서 일어나던 살인 사건. 그걸 해결하는 늙은 신부. 펄럭이는 커튼, 가느다란 기도 소리, 피가 빠져나간 몸의 형상. 종이를 펼쳐 적었지. 먼 미래는 없고 기적만 있는 과거들과 표현할 수 없는 길들. 보도블럭의 금들 회색 붉은색 건너뛰며 걷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을 멍하니 보면서 선 캡을 고쳐 쓰며 나는 많은 친구야. 지하철에 앉아 버스 정류장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 매번 새로운 꿈. 매번 똑같은 꿈. 무지와 기억을 탓하며. 조금씩 더 어려졌지.
우물에 대해
들판 한가운데 놓인
우물에 대해
자정에 우물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달이 들어 있고
가늠할 수 없는 찬란과 어둠이 함께 흔들린다
이계의 창처럼 숨 막히게 아름답지
서로 마주 보는 기쁜 마음
모두 죽게 될 거야
백은선 시인과 처음 만났다. <<도움받는 기분>>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라고 한다. 시인의 출생년도를 보고 받은 신선한 느낌 하나. 독자인 나와 거의 2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저자가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것. 그렇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 어머나. 그런 새삼스런 깨달음에 <도움받는 기분>의 마지막 행 ˝모두 죽게 될 거야˝가 내게는 ˝계속 늙게 될 거야˝로 읽혔다. 오마나.
백은선 시인은 1987년생이다. 이 시집은 저자의 첫 시집 <<가능세계>>가 출간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씌어졌다. 시인의 나이 서른부터 서른 중반까지다. 수록작이 총 53편에 불과한데, 페이지 수는 해설을 제외하고 무려 255페이지. 이 시집은 단 네 줄인 <퍼펙트 블루> 를 제외하고 모든 시가 길다. 긴 이유는 ˝소설˝ 같고 ˝서사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전체적인 느낌은 시로 쓴 고발서 같다. 시인은 따질 것이 많고 할 말이 많다. 이제까지는 꾹꾹 누르고 꼭꼭 숨겨 놓고 살았지만 더는 그리 살고 싶지도, 살지도 않겠노라 의지를 표명하듯 ˝씨발년˝ 같은 기억들을 소환한다. 그 기억들은 ˝가윗날이 귀 끝을 스칠 때˝처럼
차갑고 공포스럽다. 그 기억들은 스무 살 성인이 된 내 뒤를 졸졸졸 쫓아다니며 내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슬프고 무섭고 화가˝ 나는 기억을 시인은 왜 불러들일까. 아니. 이런 기억들은 대개가 제 발로 기어들어 온다.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당사자를 약 올리듯 괴롭힌다. 이놈의 거머리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고, 미쳐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든다. 그런 방문이 잦아질 때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너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인지, 너도 살고 나도 살 것인지. 시인은 그 기억들과 함께 살 길을 모색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쓰는 길을. 그 길이 가시밭길이고 방향을 모르겠는 길이어도 어떻게든 쓰고 말 거라고 시인은 다부지게 외친다.
˝골목을 헤매는 생쥐 같은 심정으로 전부 다시 쓸 거야.˝
모든 고여 있는 것은 썩기 마련이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백은선 시인은 ˝봉인된 검은 상자˝에 들어 있는 기억들, ˝썩고 부서지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기억들. 그 부패 덩어리들을 시로 쓴 이야기로 풀어 헤치고 있다. 기억 상실에 절대 걸리지 않는 기억의 응어리를 쪼개고 부수고 흐트려 놓는다. 그런 다음 우물 속 달을 내려다보듯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느 순간 ˝가늠할 수 없는 찬란과 어둠이 함께˝ 흔들리며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서로 마주 보는 기쁜 마음˝이 찾아든다. 그러면 ˝무언가를 건너고 다른 사람이 된다˝는 느낌에 젖을 수 있다. 기억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그 느낌이 ‘도움받는 기분‘이 아니고 무엇일까.
사진은 보름 전날밤과 보름날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