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2 #시라는별 30 

일기 
-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들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2012년 봄에 출간된 <<북항>>은 안도현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가 너무 좋아 내쳐 <<북항>>과 안도현의 문장들 <<고백>>까지 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다.

2012년 문화웹진 <채널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안도현 시인은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사건이 있다기 보다는 매순간 만나는 것들, 아주 작은 경험들이 모두 크고 작은 사건이죠. 문학이라는 것은 작은 경험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인데, 제 경우는 어쩌면 큰 사건 없이 너무 평이하게 살아온 게 약점이라면 약점이 아닐까 싶네요.˝

˝아주 작은 경험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작업. 그 작업을 잘도 그려냈구나 싶은 시가 이 시집의 첫 시<일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별거 없는 하루 일과를 줄줄이 늘어놓고는 마지막 행에서 시인이 외치는 소리.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나를 이루는 것은 크고 굵직한 사건들보다 소소한 일상들이 아닐까. 날마다 반복되는, 고만고만하고 밋밋한 일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찾아드는 저녁처럼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진은 늦은 오후 산책길에 만난 작은 봄꽃들, 죽단화와 콩제비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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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2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님어 올려주신 이 시도 너무 좋네요~ 안도현 시인 책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사진도 너무 봄 느낌이 나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5 12:26   좋아요 1 | URL
안도현 한 권을 권한다면 이 시집보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요^^

scott 2021-04-22 12: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이 포착한 죽단화와 콩제비꽃
이라는 이름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죽을떄까지 몰랐을 꽃이름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안도현 시인은 시를 짓고
행복한 책읽기님은 생명의 움틈을 포착~

좋아요 하트 백만개 눌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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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4-25 12:27   좋아요 2 | URL
scott님 하트 백만 개!! 세상 첨 받아보는 백만 하트. ㅋ 감솨감솨^^

미미 2021-04-22 1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찜합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로 부터 도를 깨우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일기만큼 좋은 도구도 없을것 같구요. 시는 그야말로 궁극이죠!
안도현 시인은 역시 그 둘을 다 알고 계시네요. 박준님 다음은 안도현시인 읽음 되네요ㅎㅎ
사진도 너무 훌륭해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5 12:28   좋아요 2 | URL
미미님께도 역시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먼저 권함요^^

라로 2021-04-22 14: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국단화와 콩제비꽃!! 어쩜 이름을 보고 꽃을 보니까 딱 맞는 이름 같아요!!! 이뿌다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5 12:26   좋아요 2 | URL
그죠. 저도 사물이랑 이름 매치가 절묘하다 했어요^^

붕붕툐툐 2021-04-22 2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웅~ 시 너무 좋네요! 꽃사진도 예쁘고요! 저도 죽단화와 콩제비꽃이란 이름 첨 들었어요. 또 하나 배워가네요. 꽃이름도 참 예뻐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5 12:30   좋아요 3 | URL
저도 이름은 이번에 첨 알았어요. 식물앱이 있으니 전국 아마 전문가들이 알려주시네요. ^^

희선 2021-04-25 01: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별 일 없는 일상이어도 거기에서 다른 걸 보여주는 게 시군요 일상을 반짝이게 한다고 해야 할까 저는 황매화라는 것만 알았는데 죽단화라고도 하는군요 그냥 황매화도 있고 저건 겹황매화라 하네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4-25 12:31   좋아요 4 | URL
오호. 희선님 황매화를 알고 있었군요. 죽단화 황매화 이름과 차이를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일상을 반짝이게 한다‘ 맞아요.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