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리로 아들을 위대하게 키우는 법
마츠나가 노부후미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이미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한 상태에서

가정에는 그만큼 소홀해지는 자신에게서 실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원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

거의 모든 육아 문제를 아내에게 위임(?)하고 살면서,

쉬는 주말에 조금만 귀찮게 해도 인상을 쓰며 큰소리를 내버리는 아빠로써...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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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이런 스승에게 배우고 이런 스승을 본받기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

그런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참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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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에 쓰던 자료들 사이에서 성격책 한 권을 발견했다.

거의 새것과 다름없었는데, 앞에는 '영희에게 브루닉 신부가' 라는 영어 서명이 있었다.  오래 전 내가 유학 떠나기 바로 전날, 브루닉 신부님이 내게 선물로 주셨던 성경책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 브루닉 신부님은 나의 대학 스승님이다. 아니 단지 스승을 넘어 내 삶의 은인이시다.  신부님이 안계셨으면 나는 아예 대학에 다니지도 못했들지 모르니까.

  아직 우리나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의식이 전혀 없던 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아니, 아리로니컬하게도)내 학교 성적은 좋았고, 나는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내가 고3이 되자 아버지(故 장황록 박사)는 여러 대학을 찿아다니시며 입학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구결하듯 사정하셨지만, 학교측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했다.  어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찿아가 제발 시험만이라고 보게 해 댤라고 부탁을 하셨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고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 고.....

 

  약간 불그스레한 얼굴에 순진하고 맑은 큰눈, 늘 만면에 미소를 띠시던 신부님은 1학년 전공필수인 영문학 개론을 강의하셨다. 그때 나는 서양문학 최고의 고전은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이며, 성경에 관한 지식 없이는

영문학을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신부님은 문학작품을 마치 무슨 모노드라마를 하듯이 온몸으로 연기하시며 강의하셨다. 프란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를 강의하실 때는 온 교실을 누비시며 정말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리고 다니셨고,<라 만차의 사람>이라는 돈키호테에 관한 연극을 소개하실때는 말을 카고 가며 창을 던지는 시늉을 하셨다.  교실 밖에서 나를 보시면 신부님은 두 팔을 벌리면서 "마라아(나의 세레명),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라고 당시 유행하던 패티 김의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신부님은 당시 우리말을 배우고 계셨지만, 이미 환갑에 가까운 나이시라 별로 큰 진전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한번은 강의를 하시다가 문득 한국말에서 제일 발음하기 힘든 두단어는 '교통순경' 과 '욕심꾸러기' 라고 하셨다. 정말 신부님의 발음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웠던지. 철없은 우리는 책상을 치며 깔깔 웃었다. 조금 머쓱해지신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삶의 '교통순경'이다 교통순경이 차들이 남의 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기 차선을 따라 반칙 없이 잘 가고 있는가를 지키듯이,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부나 권력을 좀더 차지하려는 나쁜 '욕심꾸러기'들이 많지만, 지식과사랑,그리고 꿈의 욕심꾸러기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책을 많이 읽고 제데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라, 그리고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러기들이 되어라"

 

  신부님은 성품이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온화한 분이셨지만 나는 신부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서강대학교에서는 체육이 대학4년 내내 교양필수 과목이었는데, 담당이신 고 교수님은 내게 그 과목을 면제해 주시지 않고 체육관까지 와서 견학을 해야 점수를 주겠다고 하셨다.  수업이 있는 본관에서 노고산 밑의 체육관까지는 꽤 거리가 멀고 부분적으로 비포장도로라 사실 내게는 그곳까지 가는 것 자체가 '체육'을 넘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눈이나 비가 올라치면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였다.  그러나 고 교수님은 그렇게 힘들게라도 견학을 하고 페이펴를 써내야 겨우 낙제 점수를 면한 D를 주곤 하셨다.

  그런데 한번은 소나기가 오는 날 체육관으로 오다가 비포장도로에서 넘어져 진흙투성이가 된 나를 보시더니 비오는 날은 오지 않아도 결석으로 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되던해 여름, 일찍 찿아온 장마

때문에 세번 결석한 내게 교수님은 당신이 한 말씀을 잊으시고 내게 가차 없이 FA(서강대학교 특유의 학사 제도로 학점의 두 배수 이상 결석하면 자동으로 F 처리되는 점수)를 주셨다.

  나의 충격은 컸다. 교수님에 대한 원망, 억울함, 부당함,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F라는 굴욕적인 점수를 내 성적표에 담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정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또 한과목 낙제를 하면 다른 과목이 성적이 좋아도 장학금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학칙 때문에 그 학기에 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당시 영문과 과장님이시던 브루닉 신부님을 찿아갔고, 내 이야기를 들이시다가  신부님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셨다. 너무나 화가 나서 얼굴은 빨개지고 말까지 더듬으셨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그건 제 잘못이 아닌데........"

그리고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이제 20여년이 흘렀고, 나는 2002학번 새내기들에게 그때 신부님이 당당하셨던 영문학 개론을 가르친다.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나는 학생들 앞에서 신부님처럼 그렇게 재미있는 모노드라마를 연출하며 가르치지 못하지만, 오랜만에 신부님을 기억하며 새삼 생각한다. '삶의 교통순경' 인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제자들을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단 한 번이라고 진정 제자를 위해 눈물 흘린적이 있는지....

  먼 훗날 지금 내가 가르치는 많은 학생 중에 누군가 단 한 명이라고 지금 내가 브루닉 신부님을 기억하는 것처럼 나를 기억해 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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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님이신 장영희 교수님이 신문에 컬럼으로 쓰셨던 글입니다.

신체장애를 갖고 계시지만 항상 명랑하고 씩씩하게 그리고 감성이 풍부하셔서 정말 닮고 싶은 분입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funnyhappy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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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정말 이런 세상이 오긴 올까...

그리고 오면 과연 행복할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기사네요.

자료출처: http://news.media.daum.net/culture/woman/200705/11/joins/v16699188.html?_right_TOPIC=R6

중앙일보 이나리.김경진.권혁재] 한 기업 홍보팀의 회식 자리입니다. 여자 선배가 말합니다. "요즘 우리 남편 밤마다 손에 약 바르고 비닐랩까지 싸맨 다음 자잖아. 물 일 많이 해 주부습진이 도졌다나."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남자 후배, 버럭 한 소리 합니다. "거, 남자가 그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이어지는 후배의 진지한 발언. "주부습진이라니 마님 걱정되시게 그런 실수를 왜 합니까. 전 고무장갑 안에 면장갑까지 끼고 설거지합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 후배, 요즘 급격히 늘고 있는 '우렁 신랑'이거든요. "집안일은 당연히 내 일"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자"를 외치는 대한민국 신(新)남편. 남자들에겐 눈엣가시, 여자들에겐 '꿈의 반려'인 우렁 신랑들을 만나 보시죠.

글=이나리·김경진 기자 windy@joongang.co.kr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해외 출장 길이었어요. 30대 중.후반 남자 셋이 같이 다녔는데 한참 수다 떨다 보니 우리가 살림 사는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전은 두 번 부쳐야 모양이 예쁘다느니, 셔츠는 팔부터 개야 덜 구겨진다느니. 마주 보며 웃고 말았죠." 결혼 10년차 직장인 이문규(39)씨의 말이다.

중견기업 팀장인 신미혜(가명.36)씨는 '신이 내린 남편'과 산다. "동료들이 제 남편에게 붙인 별명이에요. 청소.요리.쓰레기 분리 수거는 기본, 머리 감고 나오면 수건 들고 서 있다 닦아주기까지 하는 걸요(웃음)." 그것도 결혼 9년째인데 말이다.

'우렁 각시' 설화에 빗대 '우렁 신랑'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대개 맞벌이 가정의 20, 30대 남편들이다. 육아.요리.청소는 물론 공과금 납부나 장 보기, 집안 대소사 챙기기도 아내와 함께한다. 가부장적 남편이 1세대, '말로만 돕기'형 남편이 2세대라면, 우렁 신랑은 3세대 남편이라 할 만하다. 여성개발원 박수미 연구원은 "가사 분담에도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맞벌이라도 손 하나 까딱 않는 남편이 여전히 많은데, 한쪽에선 아내 이상으로 가사에 적극적인 남편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성결대 사회복지학과 신연희 교수는 "젊은 층일수록 부부가 가사와 가정 경제를 공동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몸'과 현실이 이를 안 따라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렁 신랑들은 그 차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이들인 셈이다.

KTX 승무원인 김성곤(30)씨는 맞벌이 아내와 사이에 여섯 살배기 딸을 두고 있다. 김씨는 "업무상 쉬는 날이 많아 아이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안고 다니는 일은 내가 더 많이 했다"고 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바깥일도 하고 돈도 버는 거잖아요. 아내도 똑같이 힘든데 집안일 나눠 하는 거야 당연하죠. 사실 이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우렁 신랑들은 아내에 대한 '서비스'도 특별하다. 회사원 이성호(29)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내의 발을 마사지해준다. "따뜻한 물에 발을 20분 정도 담그게 한 뒤 손에 아로마 제품을 묻혀 부드럽게 마사지하죠. TV 보며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좋아요." 회사원 김대환(31)씨 또한 "피곤에 지쳐 부은 아내 다리를 맥주병으로 밀어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게 낙"이라고 했다.

우렁 신랑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은 어떨까. 김대환 씨는 "우리 부모님은 '남자가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고 했다. 박종규(71)씨는 "43세인 맏아들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밥하고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하지만 혼자 버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며느리가 직장 생활을 잘하도록 돕는 게 길게 봐 현명한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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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근위병... 일단 유니폼이 예술이당~

영세중립국인 스위스가 가장 명예로운 교황 근위병을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긴 하지만, 어찌 보면 영세중립국이기에 다른 나라에서 딴지를 걸지 않기 때문에 가능할 일이기도 할 것 같다.

자료출처: http://news.media.daum.net/foreign/others/200705/07/joins/v16648433.html?_right_TOPIC=R6

 

[중앙일보 조문규 기자]

6일 교황청 바오로 6세 홀에서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신병 38명이 교황과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있다 사진 . 스위스 용병이 교황청을 지켜온 것은 언제부터일까.

1506년부터 교황청을 지켜온 스위스 근위대의 위용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527년 5월 부르고뉴(현재의 네덜란드,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왕 샤를 5세(Charles Ⅴ)가 로마를 침략한 '로마약탈'에서였다. 이 전투에서 근위대는 189명의 근위병 중 147명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끝까지 지켜냈다. 빨강.파랑.노랑의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 복장에 도끼 창을 든 스위스 근위대는 501년 동안 교황청을 지켜오고 있다.

근위대 신병들은 로마약탈 때 교황을 호위하다 목숨을 잃은 것을 기려 매년 5월 6일 충성 서약식을 거행한다. 서약식 때 사용하는 깃발에는 현재의 교황과 스위스 용병군단의 창설자 율리시스 2세, 그리고 사령관을 상징하는 세 개의 방패가 등장한다.

 




현재의 제복은 1548년에 제정됐다. 근위대에 입대하려면 키 174㎝ 이상, 19~30세의 용모 준수한 스위스 출신의 미혼 남자여야 한다. 또 가톨릭 신자여야 하며 수염을 길러선 안 된다. 월급은 1000달러 정도다. 적어도 2년간은 복무해야 하며 25년간 복무하는 사람도 있다. 병력은 사령관을 포함해 장교 5명, 사병 101명 규모다. 스위스는 1859년 스위스인의 외국군 입대를 법률로 금지했지만 교황청 근위대만큼은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스위스는 농사지을 땅이 없는 알프스로 둘러싸인 산악지대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사람 뿐이었다. 그래서 스위스 사람들은 중세부터 주변국에 용병으로 전쟁터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렸다. 싸우지 않으면 굶어 죽으니 이들은 목숨 걸고 싸웠다. 하루라도 빨리 싸움을 끝내야 돈을 벌었기에 전쟁에서도 속전속결이었다.

이러한 스위스 용병의 용맹함이 로마 교황청에도 알려졌다. 추기경 시절 이들 스위스 용병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6월 교황청을 지키는 상비군으로 용병을 파견해줄 것을 스위스에 요청했다. 이에 150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무려 720㎞를 걸어 이듬해인 1506년 1월 22일 교황청에 도착해 임무수행에 들어갔다. 바티칸을 지키는 군대인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들의 공식명칭은 '코홀스 헬베티카(Cohors Helvetica)'이다.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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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비구역 1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1
퍼트리샤 콘웰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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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의 충격적인 벤턴의 죽음 이후 약간은 공황상태에 빠진 나에게 이번 작품은

그래도 벤턴의 호흡이 느껴지도록 쓰여졌다는 점에서 상당히 흐뭇했다.

이미 죽어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웬지 스카페타 시리즈에서는 벤턴의 존재감이란

해리포터에서의 교장선생님 정도의 무게감이랄까~

전작에 이어 늑대인간(?)을 쫓는 스카페타는 이번 작품에서도 그 임무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물론 다른 분들도 지적한 것처럼 너무 많은 상황 묘사로 인해 조금은 호흡이 늘어진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자체에 푹 빠져 있고 있는 콘웰마니아라면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버지니아 법의국장 스카페타로써도 멋진 활약을 보여줬지만, 마지막 경비구역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고~

작품 중간에 보면 1950년대의 경험이 나오는데 아마도 50년대 중후반 태생일 듯, 40대 중반으로 그려지는 작품 속 스카페타와 현재 시점 때문에 약간은 혼란이 빚어지긴 하는데, 아무래도 작품이 쓰여진지 좀 지나서일 것이다.

항상 매력적인 중년 여성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던 나에게는 좀 혼란스럽긴 하다.

아무튼 사설이 길었지만, 즐겁게 주말을 보낼 수 있게 해준 콘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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