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렸다
정보라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주로 로맨스소설을 출간하는 파란미디어 출판사에서 ‘새파란상상’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했다. 대여점 위주의 여러 권의 무협/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작품성이 있고, 서점에서 팔리는 책들.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 식으로 자유도가 높고, 주로 단 권 위주로 구입의 부담을 줄이면서 표지나 편집 등에서 더 신경을 쓴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현재 박상의 야구 소설인 『말이 되냐』, 문영의 『아이, 뱀파이어』, 신진우의 『게이트』 등이 출간됐다.

  『문이 열렸다』는 정보라 작가의 작품이다. 정보라 작가는 2008년 중편 「호」로 제3회 디지털 작가상 공모전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고, 장르 잡지 『판타스틱』 2009년 봄호에 「죽은 팔」과 2010년 2월호에 「암살」을, 웹진 크로스로드 2010년 2월호에 「사랑, 그 어리석은」을 게재했다. 또한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환상문학단편선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 단편 「은아의 상자」를 수록했고, 전자책 『방문』을 출간하기도 했다. 작가이기 이전에 번역가이기도 한데, 『계피색 가게들』, 『모래시계 요양원』, 『창백한 말』, 『구덩이』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필진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문이 열렸다』는 이색적인 두 존재가 조우해서 만들어내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남자는 달을 조심해야 하는 늑대인간이다. 그리고 그 늑대인간이 우연찮게 가로등에서 만나게 된 여자 역시 평범한 여자는 아니다. 특이한 두 존재가 부딪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구조를 중심으로 볼 때, 이 소설은 달달한 로맨스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분명 그 점이 작가가 의도한 소설의 중점적인 면이기도 하고, 충분히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이다. 남녀가 티격태격하면서 서로 가까워지고 돕게 되는 부분들은 재미있다. 이런 환상적인 요소가 섞인 달달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다만, 잘 쓰여진 소설임에도 아쉬운 부분들이 없잖아 있었다. 일단, 이 소설은 작가 후기에도 나온 것처럼 단편으로 쓴 글이 계속 이어져서 나오게 된 장편이다. 즉, 처음부터 장편을 구상하고 나온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구조상 문제가 발생한다.(그래서 마치 연작 소설집 같은 느낌도 든다.) 장편이 가지는 미학, 즉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계획되어 적절히 암시와 복선이 들어가고, 퍼즐처럼 맞아떨어져가면서 독자를 압박하는 재미가 부족하다. 흔히 잘 쓰인 장편소설은 먼저 구성에서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야기가 단절감을 가진 상태로 장마다 넘어가고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는 장의 연결들이 어색한 것도 있고, 소설 전체가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느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핵심 갈등이 독자에게 빨리 전달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로 집약된 움직임이 소설 전체를 관통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때그때 사건들과 인물들과 상황을 툭툭 던져놓는 느낌이 강하다. 그 점이 이 소설에 몰입도를 떨어트리고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이야기의 흥미를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사건들이 우연적으로 이어지고 해결책도 우발적으로 나오는 느낌이 강하다. 앞에서 복선이나 암시로 깔아두었다면 독자가 당황하지 않고 납득할만한 해결책들과 장면들이 당황스럽게 갑자기 나오는 느낌이 강하다. 그것을 단지 인물의 대사 등으로 약간의 봉합을 하려고 하나, 모든 구성이 그러하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크다. 소설이든 영화든 우연성은 처음의 한 번 정도로 족하고 그 뒤에 대부분의 사건이나 상황들은 우연성에 기대면 독자는 몰입할 수가 없다. 소설 속 세상에는 엄연히 개연성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처음 맞수의 만남 말고도 그 뒤의 일들 역시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컸다. 주인공은 계속 상황에 끌려다니다가 막판에 싸움 역시 활약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미리 준비하고 또 주인공 역시 의지를 갖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는 결실이 아니라, 계속 애매모호한 사태 속에 휘둘리다가 김새게 끝나는 느낌이었다. 이것을 처음부터 플롯을 짜서 연계가 되어서 주인공의 힘과 상성들이 앞에서 암시가 되다가, 주인공의 어떤 의지와 행동이 짜맞춰 들어가면서 결실을 맺었다면 독자는 그 구성이 맞아떨어지는 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이야기가 정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런 쾌감을 얻을 구석이 거의 없어서 이 점이 전체 구성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의 설정들이었다. 이 소설은 일반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국내에서 잘 쓰이지 않는 늑대인간이라는 소재를 다룬 것부터 인상적인데, 거기에다가 달걀귀신이나, 고장난 가로등 등 특이한 설정들이 뭉쳐 있다. 이럴 경우 이 설정들을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지 않으면 독자들은 제대로 작품에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다. 먼저 늑대인간은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설정이다. 국내 설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설정을 그냥 등장시키고 독자들에게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은 조금 불친절한 면이 있다. 소설의 근원이 되는 주요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독자는 도대체 어떻게, 왜, 주인공이 늑대인간인지, 또 늑대인간이어야 하는지, 납득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점보다 더 아쉬운 점은 영화나 소설에서 어느 정도 특성이나 능력이 설명된 늑대인간과 다른 ‘달걀귀신’이나 ‘고장난 가로등’에 대한 설정이다. ‘달걀귀신’은 한국적인 귀신 설정이지만, 이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문 편이다. 그렇다면 작품 내에서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든 상황을 통해서든 이 달걀귀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 두마디 대사를 빼고는 거의 설명이 없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늑대인간은 인간이 보름달이 뜰 때 변신한다는 단순한 설정이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달걀귀신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마치 평범한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귀신으로 변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것이 원래 있는 설정인지, 없는 설정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근간이 어떻게 되었든, 이 소설에서 정의내리고 있는 설정을 독자에게 알려서 납득시킬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읽는 내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워가며 읽기 때문에 이야기를 재미있게 따라가서 읽기가 힘들었다. 귀신이라면 이미 죽은 사람인 건지? 그런데 어떻게 낮에도 존재하고 노동을 하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은 어찌 되었든 인간의 근간이고, 육체 관계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고 생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허상에 불과한 존재들인 것인지? 그렇다면 이 모든 사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일단 설정을 이해할 수 없고, 특성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글에 몰입할 여지가 적었다. 인물들이 피와 살을 갖고 있는 생동감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보다는 특성을 갖고 있는 기호들이 대사를 치고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감정이 잘 전달되지도 않고, 상황들이 절실하게 다가오지도 않는 면이 있었다. 환상적인 설정들은 그만큼 모호해질 수 있다. 실제 질량감을 가진 느낌이 아니라, 신기루 같은, 허깨비 같은 느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환상적인 설정들이 중첩되어서 나오다보면 독자들은 어디에 발을 딛고 서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고장난 가로등이 어째서 존재하는지, 무슨 이유를 갖고 있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변화될 것인지에 대한 어느 정도 독자가 실체를 잡을 수 있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 그냥 허공에 떠 있는 아지랑이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문’이 열린다는 개념에 대해서도 실체가 드러나는 설명 없이 그냥 현상만을 나열하고 끝날 뿐이라면, 독자는 결국 읽고 나서도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그냥 이상한 일들이 쭉 일어나는 기묘한 꿈과 다를 바가 없다. 꿈에서는 그 현상들에 대한 어떤 설명도 설정도 필요 없으며, 꿈이기 때문에 그냥 쭉 펼쳐지고 개연성이 없어도 되고 이야기도 이상한 지점에서 끝나도 무방하다.) 즉, 환상적인 설정들을 사용하더라도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지게 하는 게 의도가 아니라면, 실체가 잡힐 수 있게 독자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질량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런 시도는 딱 한 번 자동차로 가로등을 들이받는 장면뿐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가로등이 실제 물리력을 가해도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반발력을 통해 자동차가 부서진다는 것. 보통의 힘으로는 가로등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 등의 설정을 알게 되면서, 가로등이 실제 존재하는 것 같은, 무게감을 얻게 된다. 단편이라면 한 두 번의 시도 끝에 환상적인 결말로 맞아도 여운을 느끼고, 다양한 설정들을 독자가 생각하면서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예를 들자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어쩌면 다음 생에」 같은 단편을 떠올릴 수 있다. 어느 날 주인공의 눈에만 보이는 난쟁이가 나타나고, 이 난쟁이의 키를 재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시도를 함으로써, 독자에게 그냥 단순한 망상이라기보다,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타인도 관측할 수 있을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여러 행동을 통해 질량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재미가 발생하고, 이야기의 무게감을 준다.) 하지만 장편은 독자가 생각할 시간이 많고, 좀더 명확한 이야기를 바라게 된다.
  설정들이 좀 더 풍성하게 설명될 필요성이 있었고, 그로 인해 상황이나 인물들이 더 명확하고 선명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은 인물들이나 등장하는 사물, 현상 등이 실제로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거나, 평행 세계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나 생각이 들기 힘든 면이 크다. 그만큼 많은 설명이나 상황 등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붕 뜬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보편적이라서 설명이 필요 없는 설정이 아니라, 웬만한 독자들은 다 낯설게 느껴질만한 설정이라면 그것에 실체를 부여하는 작업은 독자를 그 세계로 초대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문장에 무리가 없고, 전개가 빠른 편이라 가독성이 좋은 작품이었다. 달달한 측면도 마음에 들었고, 초반에 만남이나, 가로등, 주인공이 귀신을 보면서 겪는 괴로움, 쥐와 관련된 이야기 등은 인상적었다. 전체 구성이나 설정에 대한 아쉬움만 해결되었다면 더욱 즐겁게 읽고 남들에게 추천하고 다닐만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장편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작가의 단편은 항상 일정한 퀄리티를 가진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만큼 이 작가의 다음 장편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 이번 작품의 아쉬움은 가볍게 상쇄할 만한 좋은 작품일 것이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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