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 함민복 지음 / 풀그림 / ★★★★★ 

올해로 직장 생활 8년차다. 월급쟁이 프로그래머가 수입이래야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높아지면서 수입도 같이 늘었다. 수입이 늘었다는건 단지 월급통장에 찍히는 급여액이 늘었다는 산술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소비에 능숙해지고, 또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사고(책도 그렇고), 더 맛난 음식을 찾고, 더 맵시나는 옷을 입으려 하는게 그 증거이다. 어김없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물론 소비가 죄악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가지는 비가역적 속성이다. 아이러니 같지만 가진게 많을수록 버리기가 힘들어진다. 지금보다 '덜' 벌었을 때 사는게 힘들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지금 예전만큼 벌어서 먹고 살라고 하면 암담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도 일종의 중독이다. 중독된 사람을 통제하기는 쉽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 풍요와 편리함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어찌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으며 우선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작가의 존재 양식 역시 그/그녀의 의식을, 작품을 규정할 것이라고. 함민복 시인의 글이 주는 다른 종류의, 다른 깊이의 울림은 거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강화의 작은 어촌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시인의 삶에 군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난하지만, 그에게 가난은 결코 결핍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잉여를 남기지 않는 마음, 자연이 자신에게 허락한 만큼만 지니고 사는 간결함에 가깝다. 그의 글도 그만큼 담백하고 청초하다.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국밥 한 그릇의 온기가 이리 넉넉하게 느껴지는건 그 국밥 한 그릇의 의미를 시인이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밥벌이를 말하더라도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의 위대함"이 어쩔 수 없이 "난 이 정도 벌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식의 오만함을 풍기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의 밥벌이는 겸허함,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집 앞 고욤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뻘에 들고 나는 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리고 이웃의 술잔을 받아들며 보내는 시선에도 항상 겸허함이 묻어난다. 제 한 몸 먹고 사는게 저가 잘나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비로서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고맙고, 또 미안하다.

종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이듯, 다양한 글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한 사회의 의식세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수도권 거주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작가군이 한국 문학을 주름잡고 있는 현실에서 함민복 시인의 글은 차라리 신선한 청량감을 준다. 아파트 숲 속에서 사는 작가들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라는게 꼭 사는게 힘들다는 넋두리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들, 세상의 체온 같은걸 알려주는 따뜻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매몰되어 있었던 물질의 세계 안에서 나를 일깨운다. 더 갖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는데 물질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왜 책을 읽는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의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 ps. 이젠 벌써 월급쟁이 12년차입니다. 세상에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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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2-0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턴님도 적은 나이가 아니겠군요.
이런 얘기하면 싫어할텐데...ㅋ
미안해요. 저 마지막 말씀만 안 하셨어도
그냥 지나갔을텐데...ㅠ

turnleft 2011-02-06 13:02   좋아요 0 | URL
므허허허허허허허어엉.. ㅠ_ㅠ

사실 나이보다도 일을 12년 동안 했다는게 더 실감이 안 가네요. 앞으로 30년은 더 일해야 한다는 것도 암담하구요 -_-;
 

취미는 독서
- 사이토 미나코 지음 / 김성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

이 책을 구입한건 책의 부제 "21세기 일본 베스트셀러의 6가지 유형을 분석하다!" 때문이었다. 음, 좋아. 이런 유형의 부제는 "훗, 너는 이미 다 간파되었다. 뻔한 녀석 같으니라고"를 강하게 암시하지 않는가. 라는게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째서 저 문장을 그렇게 냉소적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베스트셀러에 대해 갖고 있는 냉소가 선입견으로 작용했을거다.

막상 주문한 책을 받고 나니, 내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번역출판한 곳 이름이 좀 수상하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라니. 책날개에 적힌 역자서문(들어가며) 발췌는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책을 만드는 사람 처지에서는...(중략) 이럴 때 누군가가 좀 알려줬으면 싶기도 하다. 여기에 매우 맞춤한 책이 있다."

라니. 오 마이 갓. 혹시 이거 베스트셀러 만들기 교본 같은 책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를 현혹시킨 부제는 원본에는 없고, 번역출판사에서 넣은 것이다. 이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혼란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자의 의도와 이렇게 어긋나는 책은 처음 본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자 사이토 미나코가 잡지에 연재했던 "백만인의 독서"라는 칼럼을 모은 것이다. 칼럼의 기획 의도를 간단히 정리하면, "어떤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상당수는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건네들은 정보로 하는 말들이다. 그렇다고 뒷담화나 하려고 책을 일부러 사서 보라고 하기 뭐하니, 내가 대신 읽어보고 소감을 말해주겠다." 정도가 되겠다. 베스트셀러들을 유형별로 분류한 것은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편의상(?) 분류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대충 글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대해 맘 먹고 달려들어 분석한 글이 아니라, 대상이 베스트셀러들로 제한된 주관적인 서평집일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몇 권의 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도 보여주지만) 대개의 경우는 "도대체 왜 이런 책이 잘 팔리는거야?"라는 비명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그리고나서 "이래서 팔린게 아닐까?"라는 자문자답을 하는데, 그 답을 유형별로 분류한게 6가지가 나온거다. 때문에 이 유형 분류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이렇게라도 이해해줘야지"라는 비아냥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책은 상당히 재밌다. 너무나도 일본어스러운 문체와, 저자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시니컬한 말투를 보고 있으면 계속 낄낄거리게 된다. 특정 책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꼭 균형잡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날카로운 관점들은 그녀가 결코 가볍게 책을 읽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녀의 시각 역시 하나의 입장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읽으면 상당히 경쾌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 된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일본 베스트셀러 중에는 한국에서도 히트친 책들이 여러 권 있으니, 한국적 상황과 접목해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결론은? 재밌는 책이다. 번역출판사가 전혀 다른 의도로 붙인 부제 덕에 이 책을 사게 됐으니 고맙다고 해야할까. 역자 양반,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본 나고야에서 생활하고 있"다는데, 어째 월급 받으며 살려다보니 대충 아전인수격으로 책 의미를 뒤틀어 번역한게 아닐까도 싶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이런 요소들을 잘 버무린 책을 만들면 베스트셀러가 되겠군!" 이라고 외치는 출판 기획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런 얼빠진 기획자가 있다면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며 말리고 싶다. 이 책은 그냥 한 권의 만담집에 가깝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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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짧은 동거
- 장경섭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 

한 남자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사과를 우적거리며 책을 보고 있다. 그의 너머로 어스름히 보이는 싱크대 앞에서는 펑퍼짐한 몸매의 '그'가 설겆이를 하고 있는게 보인다. 잠시 후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뭐야? 또 깬거야?"라며 다가가 다친다며 깨진 접시를 치우는 '그'의 손을 잡지만, '그'는 남자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고 한 번 째려본 후 다시 설겆이를 계속한다. 남자는 자신이 요즘 소흘했다며 바닷가나 같이 다녀오자며 '그'를 달래려한다. 익숙한 풍경이다. 단 하나, '그'가 바퀴벌레라는 사실만 빼고.

이거 심상치 않은 만화다. 아니, 그저 바퀴벌레가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농담(?)이야 수많은 자취생들이 울궈먹은 레파토리겠지만, 이 농담같은 설정을 존재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이끌어가는 능수능란함은 작가가 보통의 내공을 지닌 이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고수가 나타난걸까.

웹에서 장경섭이라는 이름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실은 그가 창비에서 나온 인권만화 "십시일反"에 참여한 10인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나도 그의 만화를 분명 보았을텐데,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 외에는 10년전(1996년) 어느 독립만화잡지에 실었다는 [장모씨 이야기]가 그의 짤막한 이력의 전부다. 10년 전에도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내공을 일부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두어줄로 요약되는 짧은 이력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아마도, 작가는 많이 방황했나보다. 만화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고민하는 모습은 그의 작품세계 곳곳에서 묻어난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즐거운 나의 방"이나, 미래의 나를 만나는 "히말라야에 가보셨나요"와 같은 단편들을 통해 작가는 만화를 생업으로 삼은 자신의 선택을 끊임없이 반추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으로 봐서는, 그 길었던 갈등의 시간들이 그에게 헛되었던 시간은 아닌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인 성찰과 고민은 그의 속에서 제대로 숙성이 되어 이렇게 진국으로 흘러넘치고 있지 않은가. 오랜만에, 느리지만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작가를 만난 것 같다.

어쨌거나, 다시 '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선 "'그'와의 짧은 동거"에서 처음 느껴지는 인상은, 이것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장모씨가(어느 모로 보나, 장모씨는 작가의 페르소나다) 어느날, 정도를 지나친 외로움에 지쳐 덜컥 바퀴벌레인 '그'와의 공존을 인정해 버리면서 시작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온 싸늘하게 불꺼진 자취방 속에 담긴 그 공허함. 방바닥에 어지러이 흐트러진 잡동사니 사이에 비집고 앉아 있자면 울컥 밀려오곤 하는 그 서러움.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바로 그 외로움에, 장모씨는 그동안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무시했던 타자에게 마음을 연다.

장모씨가 마음을 연 타자가 바로 '그', 바퀴벌레다. 설정상, 만화 속의 사회에서 의인화된 곤충들은 낯선 존재는 아니다. 사람들은 곤충과의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인간'사회의 철저한 타자일 뿐이다. 곤충들을 인간사회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만화는 기본적으로 알레고리로 읽힐 수밖에 없다. 곤충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느 해석이건 그네들이 실제 우리 사회의 "타자"들 중 하나(혹은 전부)를 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들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장모씨가 이중의 의미(개인/사회)로부터 타자인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고, 때문에 타자와의 만남은 개인적인 변화를 넘어 사회적인 함의를 갖도록 확장되게 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중의 타자와의 만남은 간단치 않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 보이는 권력관계(설겆이하는 '그'와 사과를 먹는 장모씨)는 기실 사회가 타자를 대하는 권력관계의 반영이며, 애초에 이 두 동거인(?)들의 관계는 그 권력관계 속에 규정되어 있었다. 타자와의 만남에 필연적인 어긋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변화를 강요받는 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장모씨는 "내가 그의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그를 내 쪽으로 끌여들여 주거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을 뿐이다.

이 권력관계를 뒤집는건 "의수"의 존재다. 장모씨의 여자친구인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함으로써 타자이기를 거부한, 애초부터 적응을 택한 쪽이다. 하지만 장모씨, 그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결국 날개를 펼치고 비행을 시작한다. 본능을 거부하고 공존을 위해 인간에게 맞추고자 했던 '그'와 타자로서의 삶을 당당히 택한 의수. 이 대비 속에서 '그'의 좌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우리가 타자에게 강요하는 선택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말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우리는 그렇게 타자와 스쳐 지나가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잊고 살아가야 하는걸까? 아니다. 비록 슬픈 결말일지라도 타자와의 만남은, '그'와의 짧은 동거는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그'와 의수 모두를 떠나보낸 장모씨는 겨울이 찾아오자(그의 옥탑방에 뽀얗게 눈이 내린 장면 - 눈을 잔뜩 짊어진 나무가지처럼 툭 꺾어지는 스탠드 - 은 인상적이다) 동면에 들어간다. 고치 속에서 그는 벌레의 형상을 하고 웅크린채 겨울을 보낸다. 봄이 되어 고치 밖으로 나온 장모씨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없지만, '그'를, 그리고 의수를 가슴 속에 품은 그의 내면은 탈피를 끝낸 성충처럼 한층 성숙해 있을거다. 그는 더 이상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을거고, 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거다. 타자는 자아의 거울이고, 모든 성찰은 바로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면서 시작됨을 깨달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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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지음 /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 이라는 영화가 있다. 97년에 나왔던 영화인데, 내가 본 건 아마도 99년 정도의 어느 지루한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아직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VHS를 빌려 보던 시절. 영화는 컬트적 매력이 있었지만 내가 그리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던지라 그냥 한 번 흘려 본 정도로만 기억이 난다. [매드니스]에 이어 또 한 번 멋진 호러 연기를 보여준 샘 닐 정도가 인상적이었던 듯.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문득 [이벤트 호라이즌]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순전히 한 시퀀스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벤트 호라이즌 호를 탐사하던 대원 하나가 우주선 중심에 있는 순간이동장치(?)에 빨려들어간다. 다행히 몸에 줄이 연결되어 있어 그를 끌어당겨 꺼내지만, 끌려나온 그는 별다른 외상은 없지만 완전히 넋이 나간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만 한다. 이를 보며 다른 대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그는 저 너머에서 뭘 보고 온걸까." 갑자기 [이벤트 호라이즌]을 기억 너머에서 길어올린 접점은 바로 여기였다.

2차 대전 후 기나긴 참호전에서 돌아온 병사들, 베트남의 밀림에서 돌아온 병사들 중 상당수가 육체적 외상과 별도로 어떤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증세를 호소했다. 전쟁에서 이겼는냐 졌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전쟁 이전과 같은 인격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삶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이 의문과 함께 사람들은 비로서 승리 혹은 패배라는 전쟁의 거시적 결과에서 눈을 돌려 전쟁이 개개인에게 가한 압도적인, 그리고 폭력적인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거칠게 말하면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빌리 필그림이라는 참전군인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이 범상치가 않다. 그는 시간여행을 할 줄 알아서(거창한게 아니라, 한 순간 과거에 있다가 눈을 깜빡하면 현재로 돌아와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동물원 같은 곳에 전시되기까지 한다.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빌리 자신의 정신세계를 글로 옮긴 것이라는걸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빌리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미쳤군.

그런데, "전쟁에서 미쳐서 돌아온 어느 군인의 이야기" 라고 요약하기에 그의 분열된 정신세계가 보여주는 디테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책은 결코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빌리의 시간을 오가는 여정을 쫓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충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외계인에 의한 납치라는 황당한 이야기와 전쟁 경험, 그리고 전쟁 이후의 삶을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직조하면서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탁월함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는거지..."

커트 보네거트는 이 책에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장의 뒤에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라고 읊조린다. 작은 벌레의 죽음부터 폭격에 희생당한 사람들, 주인공 아내의 비극적 죽음까지, 누가 어떻게 죽느냐에 상관없이 그렇게 가는 거란다.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달관의 경지 같기도 하고, 그저 뒤틀린 냉소 같기도 한 이 문장은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진다. 자칫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으로, 망자에 대한 모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거리두기 내지 무감각(?)은 비단 서술자의 태도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을 납치한 외계 종족 트랄팔마도어인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는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아무런 구분을 둘 필요가 없다. 슬퍼할 이유도 없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행복한 순간만을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집중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감각을 지닌 트랄팔마도어인의 입을 빌어 설파되는 이 기묘한 숙명론 혹은 순응주의는 곧 빌리의 그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고 미쳤다고 말한다.

빌리는 정말 미쳤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미쳤다. 사실 이 모든게 빌리의 망상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실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 외계인의 납치니 시간여행이니 하는 빌리의 망상을 말 그대로 망상으로 밀쳐두고, 그가 망상 속에서 외면하고 있을 현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자.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전쟁 후 평범한 삶 속에서 문득 시간여행을 하듯 드레스덴에서 폭격에 불타버린 시체가 눈 앞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건 생존의 문제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처에서 밀려드는 죽음의 홍수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의 생존 전략 말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 중 하나는 이렇다.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지배하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는 일종의 탈색효과다. 영화 [300]에서 탈색된 그래픽이 살육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켰듯이, "그렇게 가는거지"와 같은 시니컬한 유머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독자는 빌리와 같은 생존의 전략을 체득한다. 그리고 그렇게 낄낄거리며 빌리의 좌충우돌 인생을 읽다보면, 어느새 슬그머니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오는게 느껴진다. 전쟁은 거대한 부조리극이고, 인간은 그저 그 안에서 미쳐버린 광대 같은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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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0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에 동의하며 추천했어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세권쯤 읽었는데 이 책은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거든요. 이번 연휴(라고 해봤자 이제 이틀 남았네요. 앞의 3일은 술먹느라 다 써버린 ㅠㅠ)중에 이 책을 읽어봐야 겠다고, 이 리뷰를 보는 순간에는 결심했는데 정말 읽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언제나 전쟁이 개개인에게 미친 영향-말씀하신 것 처럼 전쟁전의 인격을 되찾을 수 없는-이 가장 가슴 아파요. 건물이 폭격되고 무너져내리는 그런 것 보다 전쟁을 겪기 전과 겪고 난 후에 인간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히 미친건 사람이 아니라 전쟁이에요.물론 전쟁을 일으키는게 사람이긴 하지만요.

turnleft 2011-02-05 03:36   좋아요 0 | URL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곤 하는 거겠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력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 비극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미친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고귀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효과도 큰 것 같아요. 전쟁 소설 중 명작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 아닐까요. 전에 [The Things They Carried]를 읽으면서 느꼈던 아이러니에요.

아, 커트 보네거트의 미발표 단편을 모은 책이 또 나왔어요. [While Mortals Sleep]. 한국에는 언제 번역되서 나올까요..
 

푸른 알약
-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 /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 

감기에 걸렸다. 한동안 몸을 좀 혹사시켰다 싶더니, 어김없이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감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다. 잠시 틈을 허락했더니 비집고 들어와 제 것도 아닌 몸을 이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콧물을 훌쩍이며 그 작고 바글바글한 것들(너무 작아 보이지는 않지만)에게 욕설을 퍼붓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병원에서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알약 몇 알에 의지하는 것 뿐이다. 참 무력하지 않은가.

감염. 질병. 죽음.

단어들이 낯설다.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저 단어들. 아니, 어쩌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 그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이다. 일단 시작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무력함,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나의 삶, 존재가 뒤틀려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나의 이 두려움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건 그저 (내 생각에)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내 안의 두려움을 실제 사람에 투사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인간 이전에 어떤 질병의 덩어리, 보균자로 낙인찍고 소외시켜 버린다. 물론, 드러내놓고 배척할 정도로 "교양"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가장 흔한 반응, "이해하는 척하면서 경계하는 쪽"에 속할 뿐이다. 여기서 교양은 이해를 가장한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다.

감기에서 출발해서 너무 건너뛰어 버린 것 같은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쯤에서 귀뜸해 두자면, 이 책은 에이즈 환자와의 사랑 이야기다. Fiction 이 아닌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실제 이야기. 그가 사랑하는 여인 카티는 에이즈 환자이고, 그녀의 아들 역시 에이즈에 감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다. 카티는 프레데릭과 가까워지면서 먼저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고백했고, 놀랍게도 프레데릭은 그런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는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두렵다. 콘돔이 찢어진걸 발견한 날 그는 곧바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그가 감염될 확률은 길가다가 흰 코뿔소를 만날 확률과 같다고 말하지만, 길을 걸으며 뒤에서 코뿔소가 계속 따라오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만화적 상상력이 빛나는 장면이었다. 조용히 뒤따라 걸어오는 코뿔소라니!!) 하지만 그는 코뿔소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그 곳에 코뿔소가 없음을 확인하고 미소지을 뿐이다. 두려움의 근원을 아예 멀리 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를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카티가 있다. 침대에 누운 채 카티가 프레데릭에게 왜 자기를 좋아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왠만한 연인들 사이에 적어도 한 번씩은 오갔을 질문이지만, 카티가 묻고 싶은건 아마 더 깊숙한 질문이었을거다. 두렵지 않냐고.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왜 내 곁에 있는거냐고. 사실, 카티도 두렵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병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마저 감염된다면, 난 정말 죄책감에서 헤어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에게 프레데릭은 대답해 준다. 한 남자 한 여인에게서 발견하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매혹을 느꼈음을.

프레데릭은 친구에게 카티와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맞는 커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따금 20분의 1미리짜리 얇은 고무를 껴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 그렇게 완벽한 반쪽을 만나기가 흰 코뿔소 만나기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을지도. 프레데릭은 카티를 사랑하고, 그게 가장 중요한거다. 두려움은 그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둘 만의 즐거운 대화를 즐기고 있는 표지그림처럼 말이다.

카티와 그녀의 아들은 아마 평생을 치료제와 항생제에 의지하며 질병과 싸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푸른 알약은 결코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의 한 조건이고, 그들은 담담히 그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푸른 알약은 삶에 대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 가득 푸른 알약을 넣고 걸어오는 카티의 얼굴에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건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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