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판매학
- 레이 모이니헌, 앨런 커셀스 지음 / 홍혜걸 옮김 / 알마 / ★★★★ 

예전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보면 그 기업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삼성이 '인간 경영'을 외친건 삼성이 가장 '비인간적인' 경영을 해 왔다는 뜻이며, 대우가 '탱크정신'을 내걸었던건 가장 내구성이 떨어지는 제품을 만들어 왔다는 뜻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막스 베버가(문득, 길 가다 불심검문에 걸린 친구가 "막스" 베버 책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잡혀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생각난다) 자본주의를 놓고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어쩌구 했을 때, 자본주의의 정체는 이미 뽀록났는지도 모르겠다. 근검? 절약? 이제 다 아는 처지에 흰소리 그만하자.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절제가 아니라 탐욕 아닌가.

물론 탐욕의 역사는 굳이 자본주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탐욕은 사실상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 왔고,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의 직접적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인류가 만들어낸 많은 종교와 사상들은 탐욕 자체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터부시 함으로써, 탐욕의 결과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권력과 결합된 탐욕이 인간의 역사에서 사라져던 적은 없었지만, 윤리적 요구가 최소한 권력의 폭주에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윤리는 더 나은 가치를, 그리고 그러한 윤리가 지켜지지 못하는 현실은 지양해야 할 죄악으로 인식되었으니까. 그렇게, 탐욕에 저항하는 윤리가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지속 가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탐욕과 그 탐욕을 억제하는 윤리 사이의 균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욕망들이 시장을 통해 경쟁함으로써 그 효율성을 획득하는 체제이다. 당연히 이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탐욕이 장려(?)되어야 하는데, 사회의 존속을 위해 탐욕의 억제를 요구하는 윤리와 모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가 그 경제적 토대와 상충될 때 선택의 폭은 넓지가 않은 법이다. 토대를 전복하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그러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의 개념이 희석되는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오늘날 윤리는 기껏해야 개인적 차원에서만 통용될 뿐,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원리로서의 역할은 '법'의 역할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법은 윤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이 '가치'가 아닌 '행위'를 규정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풀어놓은 탐욕이라는 괴물이 먹이감을 찾아 끊임없이 법의 경계를 어슬렁 대더라도, 법은 선을 넘은 괴물의 특정한 '행위'만을 제제할 수 있을 뿐 그 괴물의 목에 사슬을 붙들어 매지는 못한다. 이 책에서 폭로하는 제약회사들의 행위들은 바로 그러한 괴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최소한 '합법'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진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이윤의 수단으로 삼는 것, 그리고 심지어 잠재적인 부작용까지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제 아무리 '합법적'이라 강변할 지라도, 그 비윤리성, 부도덕함까지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다.

제약회 사의 마케팅 기법으로 포장된 10개의 사례들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이 '비윤리성'의 선봉에 서 있는 지식인들의 모습이다. 제약회사들의 마케팅 기법은 크게 두 가지(첫째, 정상적 삶의 과정와 질병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환자, 즉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거나, 둘째, 질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으로 축소시켜 치료의 방향을 약물치료로만 한정하는 방법)로 분류될 수 있는데, 양쪽 모두 제약회사로부터 스폰서를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척 행세하는 지식인들(의사, 교수 등 소위 의약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지식의 권위를 쓰고 담론의 형성과 그 헤게모니 투쟁을 제약회사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의 행동은 모두 합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슷한 사례들이 2009년의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서 관찰된다. 비무장의 시민을 곤봉으로 후려치거나 방패로 내려 찍으면서 합법적 진압이었다고 강변하는 경찰. 사생활이 담긴 e-mail을 검열하고 심지어 공개하면서 영장 받았으니 문제될 것 없다는 검찰. 상대를 모욕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건의 한쪽 측면만을 강조하면서도 거짓은 아니니 문제될 것 없다는 언론.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권리금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며 사람들을 내쫓고 철거를 강행하는 건물주들. 그렇게, 합법적으로들 살아서 행복한가? 정말로 당신 자식들에게 처벌받지만 않으면 어떻게 살든 상관 없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아니다. 이건 나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거리를 보라. 저기 "아니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작은 촛불 하나를 손에 들고, 이 시대에게 윤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합법/불법의 딱지로 가려지지 않는, 양심의 소리다. 이 책의 저자들과, 책에서 소개된, 제약회사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미국의 사례를 가지고 쓰여진 책이지만, 많은 내용들이 국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질병이 소개되고 재정의되는 과정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의 주장처럼 독립적인 전문가 집단은 극히 부족한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책들을 통해 양식 있는 의약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역자가 홍혜걸 씨라는게 나를 꽤 황당하게 했다. 의학 전문 기자 출신인 역자는 황우석 사태 때, 국익을 위해서라면 황우석 씨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도 눈감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윤리 따위 찜쪄먹어도 그만이라는 역자의 태도야말로 이 책과 가장 거리가 먼 태도 아닌가. 어쩐지, 잠실 경기 3루측 응원석에 앉은 롯데 팬마냥 어정쩡한 역자 서문이 눈에 걸리더라니. 번역하면서도 꽤 많이 찔렸을 것 같다.

좋은 책이지만 좀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사례는 다양하지만 결국 제약회사가 마케팅을 통해 질병 자체를 만들어낸단다는 같은 구조니까. 거기에 역자를 잘못 고른 죄까지 더해 별점 하나 감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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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Far Afield
Gunter Grass 지음 / Harcourt / ★★★★★ 

그 날, TV 뉴스는 긴급 속보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알리고 있었다. 화면은 온갖 낙서로 가득한 잿빛 담벼락 주위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는데, 일부는 아예 담 위로 올라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거나 서로 부둥켜 안은 채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감격과 환희에 찬 모습들.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을 뿐,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9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독일로 재통일된다. ‘통일’ 이라고는 하지만, 동독 지역에 속했던 주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사실상 ‘병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병합의 의미는 분명했다. 동독 지역에서 40여년간 고수해 왔던 공산주의 제도와 정책들을 모두 무효화하고, 대신 서독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면화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 통일은 공산주의의 붕괴,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무능하고 부패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민주적이며 부유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시각은 독일 통일을 바라보는 가장 보편적인 관점이다. 분명 역사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보다 최소한 더 유연한, 따라서 더 유능한 체제임을 증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비교우위가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이었음에도, 이러한 평가는 서독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서독인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단순화는 매우 편리한 것이었다. 이 도식을 통해 동독의 몰락이 곧 무능한 체제에서 고통받던 동독인들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졌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모두를 위한 善(심지어 동독의 빈곤까지 떠안은 서독의 희생이라는 주장과 함께)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What he really wants to hear is that we suffered day and night and felt like we were in one of those concentration camps(정말로 그가 듣고 싶어한 것은 우리가 그런 수용소들 중 하나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며 밤낮으로 고통받았다는 말이었다 ). P. 272  
   

물론, 대부분의 동독인들도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점령국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다시 합쳐지는 것은 물론이요, 동독의 일상을 지배했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인들이 통일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벽 붕괴 이후 실제 통일에 이르는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즉 통일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에 이미 동독인들은 통일이 자신들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삶 전체의 해체(winding down)였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기구는 Treuhandanstalt (영역본에는 Handover Trust로 번역되어 있는데, 한국어로는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였다. 이 기구의 목적은 동독의 자산을 사유화 하는 것. 협동농장이나 공장 등 이전에는 “인민(people)”의 소유였던 자산들이 자본주의로 편입되면서 누군가의 사유재산으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이 거대한 이권을 향해 서독은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개인들은 동독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고, 기업들 역시 공장 등의 자산을 인수한 후 자신들의 시스템에 맞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먹는 하이에나 떼처럼, 그들은 무너진 체제를 갈기갈기 찢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책 첫머리에 묘사되었던,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 모여들어 뜯어낸 조각을 기념품으로 챙기거나 팔아치우던 사람들의 모습은 앞으로 벌어질 통일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전조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체된 것은 체제만이 아니었다. 개인들의 삶 역시 그와 함께 해체당했다. 서독인이 인수한 부동산은 ‘재개발’이 되어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으나, 그 곳에 살던 동독인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쫓겨나야만 했다. 어제까지 “인민”의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유화의 과정에서 해고되었고, 저가의 노동 시장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나마 모아두었던 연금과 사유재산 역시 화폐 통합의 과정에서 반토막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공공주택, 노동자 소유의 공장 등)은 ‘사회주의적’인 사고였으며, 통일된 ‘자본주의’ 독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잘못된’ 체제에서 살아왔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사고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된 것이다.

   
  Furthermore, he says, and I agree, that the rules of impending unification demand- in order to justify this move as the victory of capitalism- that not only every product of our devising but also every last Eastern idea be proven worthless(더 나아가 그는 임박한 통일의 규칙들이 – 이러한 변화를 자본주의의 승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들 뿐 아니라, 동독식 사고 하나하나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증명될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P.295  
   

하지만 합병’당하는’ 동독 지역의 목소리는 통일의 환상에 젖어 있는 독일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다시 하나가 된 ‘강력하고 위대한’ 독일에 대한 찬가가 울려퍼질 때, 그 영광된 순간이 동독인들의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95년 귄터 그라스가 독일 통일이 동독인들에게 어떤 삶의 조건들을 강요했는지는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 책 [Too Far Afield(원제 : Ein Weites Feld)] 를 발표했을 때, 독일 사회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 슈피겔 지는 보수적인 평론가로 유명한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이 책을 반으로 찢는 합성사진을 표지사진으로 게제함으로써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훗날 귄터 그라스는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본질적으로 ‘문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미학적으로 무가치하다, 지루하다, 혹은 구동독의 슈타지(Stasi)를 미화했다 등 여러 가지 혹평이 쏟아졌지만, 논쟁의 진영은 독일 통일에 대한 평가를 두고 명확히 갈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철저히 ‘문학적’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이전부터도 존재해 왔다. 다만 귄터 그라스는 문학 본연의 능력을 통해, 즉 타인(동독인)의 시각으로 세계를 조망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의 의미를 “독일 통일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로 단정짓는 것도 일종의 평가절하다. 사실, 통일의 형식에 대한 논쟁이라면 “흡수통일보다는 헌법 개정을 통한 연방제가 더 적절했다”는 짧은 결론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위해서라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통일 이후 불안정한 미래에 신음하는 어느 동독 출신 노동자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할 지언정 문학적으로 그저 그런, 평범한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멀리 둘러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래서 그 의미와 깊이를 잡아내려면 훨씬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눈 앞의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더 긴 호흡으로 독일의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이끈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넘쳐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주인공 Theo Wuttke 라는 인물이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작가 Theodor Fontane 의 삶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통일 공간이라는 좁은 시간대는 Wuttke 의 삶을 통해 20세기 전체로 확장되고, 다시 Fontane 를 통해 한 세기 전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독일의 근대사 전체로 확장되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제로부터 비스마르크,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의 준동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분단과 긴 냉전에 이어 마침내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격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의 간격을 가진 두 인물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겹친다. 시대에 따라 체제가 변하고 정부가 바뀌었지만, 실제 독일을 지켜온 독일인의 삶, 그리고 독일의 문화 유산(cultural heritage)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odor Fontane(1819 - 1898) 

작품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강연에서 Fonty(Wuttke 의 별명)는 Fontane 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한세기 전 독일, 특히 베를린의 시민 사회를 그린 Fontane 의 인물들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대개 구 동독인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독일인들의 표상이다. 문학은 이렇게 웃고 울고 때로 환호하고 때로 분노하는 인간의 삶이 시대와 체제를 넘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청중들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작중인물을 연호하여 이 상상의 파티에 동참한다. 현실에서는 통일이 그들에게 이등국민의 지위를 강요할 지언정, 적어도 이 파티에서만은 그들 역시 독일 시민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초대받은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독일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이다. 통일을 체제의 문제로 바라보는 대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갈 독일 시민으로서의 연대의 문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형식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진정한 통합으로서의 통일을 지향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물론, 통일의 과정에서 더 익숙한 쪽이 다른 쪽을 이끌 수는 있을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면, 그래서 동독의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정복자가 되어 그들을 윽박지르고 갈취하는 대신, 손을 내밀어 그들의 변화를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흔들리는 조각배 위에서 자리를 바꾸는 이들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At any rate, the two of them stood facing each other without a word. No order was given, unless of course my whispered "Go!" was a help: now they began changing positions simultaneously. With small groping steps, which, however, could merely be guessed at from the shore, they moved a shoe's width at a time, at first freehand, their arms still dangling, then joined together, each seizing hold of the other, for the boat had begun to rock, and they were now reeling along with it. Fonty's hands gripped Hoftaller's shoulders firmly, and Hoftaller hung on to Fonty's hips.

What could now be heard from the shore were instructions issued to Hoftaller, which he followed scrupulously because his subject was experienced at changing places in a rowboat. The linked pair pushed and turned clockwise. A solemn, groping dance. Or a ceremony of ritual seriousness. Or an embrace of the sort that is based on the well-known assurance: We're in the same boat.

(어쨌건, 그들 둘은 말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내가 "가요!"라고 속삭인게 들렸던게 아니었다면, 아무런 신호도 없이 동시에 자리 바꾸기를 시작했다. 비록 호수 기슭에서는 그저 추측할 따름이지만, 작은 종종걸음으로 한 번에 신발 하나의 폭만큼씩 움직이면서. 처음에는 빈 손으로 팔을 허공에 내밀었는데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내 하나로 합쳐져 서로를 웅켜잡았다. 그들은 배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Fonty의 손은 Hoftaller의 어깨를 꽉 잡았고, Hoftaller는 Fonty의 엉덩이에 매달렸다.

이제 호수 기슭으로 Hoftaller에게 내려지는 지시들이 들려왔다. Fonty가 배 안에서 자리를 바꾸는데는 익숙했기 때문에, Hoftaller는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연결된 둘은 서로를 밀며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장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춤. 또는 제의적 진지함을 지닌 의식. 또는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네”라는 잘 알려진 확신에 근거한 포옹 같은 것.) P. 340
 
   

그러나 불행히도, 작가의 염원은 실현되지 못한 듯 하다. 오늘날 오씨(Ossi, 구 동독 지역 출신)와 베씨(Wessi, 구 서독 지역 출신) 간의 빈부격차와 갈등은 독일 사회의 가장 큰 불안 요소로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독일은 더 강한 국가가 되었다. 한 때 전범국가로 인류의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의 독일은 유럽연합을 이끄는 중심국가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진정 독일이 추구해야 할 가치일까? 강한 독일, 영광된 프로이센의 재림이라는 환상에 취하기보단, 고통받는 형제와 친구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그것이, 모두가 프로이센의 절대군주 프리드리히 대제를 기리는 동안, Fonty가 친구 프리드리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Katte 를 추모하는 까닭일 것이다. “I still say, my hero is Katte : 여전히 말하지만, 내 영웅은 Katte 라네”(P.623)

당연한 얘기겠지만, 독일의 통일은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에게도 통일은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는가.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 “공산 독재 타도”, “고통받는 북한 민중의 구제”와 같은 익숙한 레토릭이 가져올 미래는 뻔하다. 그 레토릭이 전제하는 흑백논리(자본주의가 옳고 공산주의가 그르다)야말로 통일 후 우리 사회를 야만으로 이끌 광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It looks as though the victory over communism has made capitalism rabid : 마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를 미쳐 날뛰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P. 569) 삼등국민으로 편입되어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할 북한 지역 출신들, 북한 지역 전체를 투기의 장으로 뒤바꾸어 놓을 남한의 자본들, 그 와중에서 통일의 공로를 가로채려 이전투구하는 정치인들. 지금과 같은 대결논리가 횡행하는 이상, 이러한 상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연성이 높은 우리의 미래이다.

따라서, 통일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연대의 정신을 공고히 하는 것이야말로 통일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될 것이다. 한 사회의 수준은 결코 그 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함"을 선호하는 사회일수록 "약한" 사람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사회가 되기 마련이다. 이 사회의 약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 노동자들, 조선족 동포들을 대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가치를 말해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독일 통일을 통해,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아닐까.

이 외에도 너무도 풍부한 작품이라 미처 적지 못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많다. 책 자체도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인데 그 안에 그보다 훨씬 더 큰 사유를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으니, 진지한 독자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책이 되리라 믿는다. 국역본이 없어 영역본으로 읽긴 했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문장이 어려운데다, 독일 역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필요로 하고, 또 Fontane의 작품들이 끊임없이 인용되기 때문이다. 결코 녹록치 않은 작업이겠지만, 이 책은 꼭 번역되어 나와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단언컨대,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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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s
- Art Spiegelman 지음 / Planeta Pub Corp / ★★★★★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이제야 읽었다. 이 작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성완경씨의 <세계만화>를 읽으면서 였는데(기록을 찾아보니 2005년에 읽었구나), 당시에는 국내에는 절판인 상태라 찾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재출간이 되었으나, 일단 손에 잡히는대로 이 곳에서 영어본으로 찾아 읽었다. 예상 외로 책은 얇았다. 하지만, 이 얇은 책 두 권 분량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만 13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책을 읽고 나니 역시 그 긴 시간만큼 깊이 고민하고 만든 작품이다 싶다. 명작은 그냥 명작이 되는게 아니다.

물론, 이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단지 홀로코스트를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독일인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텍스트는 이미 차고 넘친다. 인간에 대한 분노, 이성에 대한 절망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어반복을 위해서라면 굳이 홀로코스트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서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현장들이 더 생생한 분노를 자아낼 테니까. 이 작품 역시 홀로코스트를 증언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그 증언의 중심에 '죽음'이 아닌 '생존'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부제 <A Survivor's Tale(한 생존자의 이야기)> 가 말하고 있듯, 이것은 살아 남은 이의 이야기이다. 저자 아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을 인터뷰하면서 블라덱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기록한다. 당연하 이 기록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이 아닌,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만을 다루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얼마나 치밀하게 학살이 진행되었는가는 그 속의 개인에겐 전혀 중요치 않다. 블라덱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 바로 근처에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아 남았다. 절반은 그의 능력으로, 절반은 운으로. 하지만 그의 능력이라는게 무엇이었나. 빵에 곰팡이가 필 지언정 남에게 주기보다는 나중을 위해 간직하고, 깨끗한 셔츠가 필요해질 것을 예상하고 다른 이의 셔츠를 미리 사 두는 것?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써놓고 보니 "자본주의 생존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건 나만 그런가?) 그의 생존은 생존을 위협한 상대와의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생존은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그를 살린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서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를 비난하는게 아니다. 그건 그가 거대한 폭력 앞에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비난은 응당 그런 상황을 초래한 폭력 자체를 향해야 할 것이다.(다시 한번, 이 문장을 쓰면서 데자뷰를 느낀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한들 그 폭력의 흔적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극단적 폭력에 직면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의식 자체를 뒤튼다. 살아 남기 위해 폭력에 맞서기보다는 가능한 순응하며 최악의 순간을 피하려하고,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폭력의 질서 자체를 삶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성장한 후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군대에서 가혹한 폭력을 당한 신병들이 고참이 된 후에는 똑같은 폭력을 후임병들에게 반복하는 것도, 폭력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뒤흔들어 버리는지를 보이는 또 다른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의 뒤틀림을 대개의 생존자들은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작품 곳곳에서 아버지 블라덱의 증언 외에 그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을 함께 기록하면서 오늘의 블라덱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물건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고, 재혼한 아내를 돈만 아는 여자라고 매도하고, 심지어 반쯤 먹은 시리얼을 반품하는 등, 블라덱의 오늘은 홀로코스트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그에겐 그 생존의 방식이 다른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압도하는 진리며 선(善)이기 때문이다. 살아 남았다는 것이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완고한 세계관 앞에 성찰과 반성의 자리는 없다. 흑인들을 차별하는 것이 유태인들을 차별하는 것과 똑같다는 지적에 "어떻게 흑인과 유태인이 같을 수가 있니?"라고 되묻는 블라덱의 모습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대로 겹친다.

"Here my troubles began(여기서 나의 고난들이 시작되었다)"

2권의 부제로 달린 위의 문장은 바로 저자 아티의 독백이다. 아들에게 "친구? 먹을 것 없이 일주일만 갇혀보면 친구가 뭔지 알게 될거다"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홀로코스트는 살아 남았으나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한 어머니. 어린 소년에게 이러한 가정 환경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상흔은 비단 직접적인 생존자들만의 몫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약물 중독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저자가 다행히 간신히 자신을 추스리는데 성공한 것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 생존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작가가 스스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육신의 상처에 치료가 필요하듯, 정신의 상처에도 적절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치유되지 않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보이는 광기의 상징이 아닌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대신, 자신들이 저지르는 그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력은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올 폭력의 사슬을 연장할 뿐이다. 자신들을 향한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변명은 무의미하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니까. 이 책 <쥐>의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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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타운
- 가브리엘 제빈 지음, 서현정 옮김 / 북폴리오 / ★★★★ 

연애편지라는걸 써 본 적이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연애편지에서 으례 떠올리게 되는 사랑의 찬가들이 민망했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철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면,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깨지고 좀 더 현실적인 사랑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찬가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연애편지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대화로는 전달하기 힘든,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여기 한 권의 책 이야기를 빌려 당신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려 합니다.

당신은 종종 당신의 어디가 좋냐고 내게 묻습니다. 그 때마다 씨익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를 하지만, 글쎄요, 정색을 하고 답한다고 한들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다 라는,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사실, 당신이 지닌 어떤 장점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차라리, 당신이 지닌 어떤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닌 장점과 단점 모두 당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요. 내게 당신은 장단점들의 목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우주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를 묻는 당신의 질문 앞에 나는 더더욱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굳이 우리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수많은 연인들이 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가 스스로 그 약속을 저버리곤 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어떤 이들은 그래서 사랑의 덧없음을 외치곤 합니다. 사랑이 주는 희열과 사랑의 배신이 주는 절망을 생각하면 이 양 극단의 반응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을 좀 더 살펴보면 보다 현명한 이들이 사랑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곤 한답니다. 그런 통찰을 통해 나는 우리의 사랑 역시 더 굳건해질 수 있다고 믿구요. 이 책 <마가렛타운>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먼저 책은 N 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N 은 자신이 조교로 들어가던 수업의 메기라는 학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메기의 본명은 마가렛 타운(Margaret Towne)입니다. 메기는 마가렛의 애칭 중 하나죠. 어느날 N 은 메기와 함께 그녀의 고향 마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 마을의 이름도 마가렛타운(Margarettown) 입니다. 마가렛타운에 사는 마가렛 타운. 이 이름이 가진 중의성은 아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을 겁니다. 어쨌든, 마을 입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덕에 N 은 메기의 고향집에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 집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되죠. 나이가 아주 많은 마가렛 할머니와 퉁명스러운 중년의 마지, 어딘가 음울하고 반항적인 느낌의 10대 미아, 그리고 어린 꼬마인 메이가 그들입니다.

눈치를 챘겠지만, 메기나 마지, 미아, 메이 모두 마가렛의 애칭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특정 나이대의 마가렛이랍니다. 마가렛 할머니는 자신이 본체에 해당하고 삶의 어느 순간마다 자신과 똑같은 다른 마가렛이 나타나 계속 자신과 살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자살해버린 30대의 그레타를 제외하곤 말이죠. 그리고, 하나의 마가렛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질거라는 전설도 들려줍니다. 나이가 많이 들면 모르는게 없어지거든요. 몇 주를 마가렛 타운에서 보내면서 N 은 메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메기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하죠. 메기가 승락을 하자, 정말로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져 버립니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죠? 사실 이 이야기는 N 이 자신의 딸에게 남기는 편지 속에 적은 이야기니까,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어요.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만나 사랑하게된 과정을 로맨틱하게 과장해서 들려주는거야 흔한 일이죠. 요즘 같은 시절에 허위사실 유포죄로 잡혀갈까봐 약간 걱정은 되는군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어떤 은유임은 분명합니다. 메기와 결혼을 하던 날, N 은 메기의 눈 속에서 그 모든 마가렛들을 발견합니다. 귀여운 메이와 까칠해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미아, 퉁명스러운 마지와 깊은 마가렛 할머니, 심지어 자살한 그레타 까지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오늘의 아름다운 신부 메기는 다른 모습의 마가렛들로 변해갈 겁니다. 그걸 알고 있는 N의 청혼은 아마도 그 모든 마가렛을 사랑하겠다는 뜻이었겠지요.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이 연애담은 이제 마가렛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합니다. 결혼 후 골동품점을 차린 마가렛은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갑니다. 그러던 문득 자신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옆 가게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요. 사실 이 남자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사람이에요. 마가렛에게 푹 빠진 것 같지도 않고(그도 아내가 있거든요), 평범한 외모에 배도 살짝 나온데다가 머리까지 벗겨졌지요. 하지만 마가렛은 이 남자에게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남자와 함께 잠자리를 가진 마가렛은 그제서야 왜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끌렸는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건 그 남자가 N 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그 때문이었습니다. 권태. 그녀에게 N 은 계속 똑같은, 변하지 않는, 그래서 지루해진 N 으로만 남아 있었던 겁니다.

마가렛, 아니 그레타는 이 권태로부터 탈출하지 못합니다. 어느날 문득 집을 나가고, 몇 년 후 딸을 데리고 N 에게 돌아오지요. 그리고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레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권태로워야 했는지, 언제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는지,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왜 실패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레타를 비난할 수는 없어요.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N 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건 그녀가 N 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흔히 지금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나 역시도 그래요.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변하는데, 그 사람의 사랑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건 헛된 희망이 아닐까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건 그래서 우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은수도 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거죠.(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토록 분명히 알 수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후에 은수를 돌려보낸 후 상우가 지은 웃음은 비로서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그렇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을 현명하게 이끌도록 노력하는게 아닐까요. 서로의 변해가는 모습을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말이죠.

마가렛의 안에서 여러 명의 마가렛을 발견한 N 의 이야기는 그래서 내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을 수준이 아니라 도시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가렛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신 역시 그럴겁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많은 모습들과, 시간이 우리에게 안겨줄 새로운 모습들까지,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니까요. 내게 주어진 축복은 내게 당신의 그 변화를 함께 할,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나도, 나의 사랑도 그렇게 함께 변해갈 것입니다.

하지만, N 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가렛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 자신이 함께 변화하지 못한 N 의 잘못일 수도 있고, 짜릿했던 흥분으로만 사랑을 기억한, 그리고 기대한 마가렛의 잘못일수도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에 잘잘못을 따지는건 불필요할 일일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건, 사랑이란 결코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아마도 사랑의 서약이란건 그런게 아닐까요. 영원불멸의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말이죠. 그러니, N 이 딸에게 남긴 편지의 한 대목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을 겁니다. "진짜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p. 246)"라는 말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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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18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턴님으로 하여금 연애편지를 쓰게 한 소설이로군요.

나의 어디가 좋아?, 혹은 나를 얼마만큼 좋아해? 는 여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연인에게 묻는 질문인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여자들을 만족시킬만한 답변을 한다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여자의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포기해야 하구요. 어떤 대답도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을거에요.

그래서 차마 묻지 못하는 여자들이 있죠. 상대가 아무리 성의를 다해 대답한다 한들 만족할리 없다는 걸 아니까요.

진짜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
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전 본능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의지라고도 생각하질 않아요.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 겠어요.

turnleft 2011-02-19 03:19   좋아요 0 | URL
음.. 핵심은 "사랑은 변한다"라는 거에요. 첫 느낌도 사랑이지만, 그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질(quality)의 사랑으로 변한다는게 제 생각이고, 거기엔 의지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거죠. 뭐,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금요일 밤은 즐겁게 보냈나요?
 

인간을 묻는다 : 과학과 예술을 통해서 본 인간의 정체성
-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 김용준 옮김 / 개마고원 / ★★★★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어렸을 때 영화 <트루먼 쇼>와 같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안 보이는 곳에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네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말이다. (물론 그게 방송된다고 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그 때는 그저 혼자 생각하고 큭큭댔던 상상이었는데, 어른이 된 후에 <트루먼 쇼>를 보고 나니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게 아니라는걸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내가 특별히 왕자병은 아니었던게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년을 거치면서 비슷한 의식의 변이를 거치기 때문이다.

'생리적 조산설' 이라는게 있다. 인간의 신체 크기 대비 두뇌 용적이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히 커지면서, 뇌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자궁 입구를 빠져나오도록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의 타당성 여부야 어쨌든, 태어날 때 아직 뇌가 충분히 성장해 있지 않은 인간은 일정 기간 동안은 (대개 부모인)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 하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때의 자아는 지극히 제한적인 세계만을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외부의 어떤 존재, 즉 '타자'가 오직 자신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유년기의 자기 중심성은 필연적인 셈이다.(아멜리 노통브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서두에서 주인공은 "나는 신이었다"라고 선언한다. 아, 유년의 자기 중심성을 이렇게 앙증맞게 표현하다니!)

기본적으로 유년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는 방식은 귀납적이다. 내가 A 라는 행동을 하면 B 라는 반응이 온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때 유아는 그것을 하나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경험은 부모로부터 온다.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면, 부모는 아기가 배가 고픈지 혹은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하고 그에 맞는 조처들을 즉각 취해준다. 울음이라는 행동이 욕구의 충족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금 더 큰 후에 만나게 되는 외부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장난감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기대한대로 반응하지 않는건 뭔가가 고장난거다. 간단히 말해 유년의 자아에게 세계란 자신의 행동에 정해진 반응을 보이는 거대한 장난감과 같다.

이러 한 유년의 세계가 무너지는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부모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반응이 올 때도 많다.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아이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또 하나의 '자아'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는 단지 '타자'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자아가 지녔던 신성(神性)의 해체이자,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갈등들의 전조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트루먼 쇼> 류의 상상은 바로 그 경계점에서 나온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는, 유년의 자기 중심성이 남긴 잔상 같은 상상력으로 말이다.

이 유년의 경험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 <인간을 묻는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그대로 따르자면, 하나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에 관한 지식"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식'은 인간 고유의 특성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리고 잘 설계된 기계들은) 경험을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해 나간다. 대부분 생존과 직결된 이들 지식들은 외부 세계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즉 "자연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자아"를 가지며(여기서 자아는 보다 능동적인 의미다), 더 나아가 "자아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저자는 이 "자아에 관한 지식"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인간됨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을 대표하는 과학은 대개 논리와 이성의 영역, 인간적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사실"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 역시 인간이 지닌 지식의 한 종류로서, 지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한계 속에 함께 묶여 있음을 지적한다. 그 어떤 언어도 모든 자연의 논리를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없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이를 증명한다). 과학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모호함과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이며, 과학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온 힘은 바로 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아에 관한 지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이성의 논리, 과학의 이론이 다른 지식에 비해 정확하며, 그러므로 우월하다는 근대적 믿음을 뒤흔든다.

그렇다면,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이 갖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저자가 지적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인간이 이 지식 체계에 가하는 노력의 방향이다. 과학은 하나의 이론체계가 가진 모순과 모호함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탐구가 이루어진다. 이 때 새로운 이론체계는 기존 이론체계의 논리적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기에서 묘수가 번쩍 떠오르듯 새로운 상상력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반면,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다. 인간에게 A 라는 상황에서 반드시 B 라는 행동을 보이도록 요구하는 것이 이 지식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자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A 라는 상황에서 B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C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심지어 D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있음을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모순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이다.

저자는 "자아에 관한 지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문학을 꼽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 삶에서 만나게 되는 딜레마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는 작품들이다. 그 딜레마의 유일무이한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던가, 혹은 독자들을 하나의 교훈으로 이끄려 하는 작품은 그저 통속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딜레마에 처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의 자세이다. 만약 우리가 문학 작품을 "자연에 관한 지식"과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고는 "살인을 하면 결국 처벌을 받는다"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벌>에서 다른 것을 얻는다. 우리는 로쟈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내가 소냐였다면 과연 로쟈를 받아들였을까를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고민들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아에 대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자아들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반응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어떤 도덕적 요청이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이 길은 또한 인간이 "인간다움"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하다.

20세기는 과학의 세기였지만, 동시에 폭력의 세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은 그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능하게한 도구였다. 우리는 히틀러를 비난하고, 스탈린을 비난하고, 부시를 비난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그 독가스를 만들었고, 원자폭탄을 만들었으며, 폭격기와 탱크를 만들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단지 그들이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해서 과학자들은 그들의 작품(?)들이 초래한 그 모든 폭력으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이는 과학이 스스로를 인간 위에 위치지움으로써 초래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이 자기 기만이야말로 저자 브로노프스키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인간에 기반한 새로운 과학 철학의 제시를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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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이미애) 2011-02-17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턴형의 리뷰네요. 으흐
요런 글 좋아요. 문제제기를 하면서 책의 내용과 저자의 시각을 분석하고, 다른 사례 혹은 다른 책들의 내용을 끌어와 더 풍부한 생각을 이끌어 내는 글이요. ^^
비판적인 사고가 잘 드러난 글이네요.

turnleft 2011-02-17 17:12   좋아요 0 | URL
아마 예전에 봤을걸요? ㅋ
전에 닫아 둔 마이 리뷰 글들을 페이퍼로 옮기는 중이에요. 제 글이지만 제가 다시 읽어도 좀 생소하군요;;

가시장미(이미애) 2011-02-18 04:38   좋아요 0 | URL
그래요? ㅋㅋㅋ 처음 보는 글 같은데 ^^;;;
어쨌든, 다시 알라딘에서 리뷰들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제가 리뷰를 많이 못 쓰니, 이렇게라도 대리만족을 ㅋㅋㅋ

요 책은 꼭 읽고 싶었던 책인데 요즘 사두고 읽지 못 한 책이 넘 많아서..
나중에 사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이젠 책을 둘 공간도 부족해서.. -_-;;

그나저나 책 선물하고 싶어요. 읽고 싶으신 책 있으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근데, 해외 배송은 배송비가 비싸나요?ㅋㅋㅋ

turnleft 2011-02-18 08:05   좋아요 0 | URL
해외 배송은.. 비싸죠 -_-;;
책 선물은 뭐.. 일단은 저도 쌓인 책이 많아서요. 4월 정도에 한국 한 번 더 나갈 것 같으니까 그 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볼게요 ㅋㅋ

가시장미(이미애) 2011-02-19 20:20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 그래요.
4월에 또 오세요? ^^
꽃피는 봄에는 제가 꼭 선물을...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할지 그동안 고민 좀 해야겠어요.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