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는데 꼭 정해진 독법이 있는건 아니다. 피카소의 화집으로 색칠공부를 하건,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스타인벡 소설로 영어공부를 하건, 그건 독자의 권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서란 저자와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모든 대화가 그러하듯 이 대화에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서로간에 정해진 규약, 프로토콜이 존재하는데, 이 프로토콜을 무시하는 독서란 제대로 된 독서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꼭 노력한다고 되는 일만은 아니다. 특히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책의 경우 일정 정도의 배경지식이 요구되는데, 짧은 시간에 배경지식을 쌓을 수는 없는 일이니 제대로 된 독서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대개는 배경지식이 없는 책은 아예 손에 들지 않는 편인데, 간혹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되는 책들이 생긴다. 

미안해서 하는 소리다. 나같이 모자란 독자를 만나, 제 뜻을 맘껏 전달하지 못하는 작가에게 미안해서 말이다. 미시사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는 찬사도, 그 방법론적 혁명도 역사학에 무지한 독자에게는 그저 이해하지 못할 외국어 같이 다가올 뿐이다(서문은 주눅들기 딱 좋다). 16세기 이탈리아 사회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을 방대한 사료들도, 그저 난수표 같은 어지러움으로 남을 뿐이다. 어쩌겠나. 세상의 모든 책들이 제 짝인 독자만을 만나는건 아니니까, 너무 날 나무라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는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저자에게 감사한다.

아마 나 뿐만은 아닐게다. 학술적으로 파고들면 꽤나 전문적인 서적인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꽤 대중적으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재밌다". 물론 재미의 요소는 다양하다. 헤겔을 읽으면서도 깔깔거리는 사람이 있으니 무엇을 재밌어 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혹자는 추리 소설과 같은 전개를 마음에 들어할 수도 있겠다.(이렇게 말하면 에코의 책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소설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무엇보다 매료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 책의 주인공 메노키오라는 인물 그 자신이다.

도메니코 스칸델라, 혹은 메노키오. 그는 대단한 영웅도 아니었고, 이름을 남길만한 큰 업적을 세운 바도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방앗간 주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이 촌로의 삶에서 남다른 점이라고는 "종교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라는 사실 뿐이다. 이마저도 마녀 사냥이 횡행했던 시대에 그다지 "남다르다"라고 할만한 삶의 궤적도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즈부르그는 종교 재판 기록과 서신 등 남겨진 기록을 통해 메노키오라는 이 인물이 가졌던 생각과 주장을 입체적으로 다시 살려낸다. 그 결과 우리가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보다 훨씬 더 큰 우주를 품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물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인류 역사상 나타났다 사라져간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싸고 자는 삶을 살다가 갔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오만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16세기의 한 촌로가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색다른 세계관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세계관을 견지해 나간 방식이다. 몇 차례의 종교 재판은 그에게 지배적인 질서를 내면화하고 순응하며 살아갈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는 반복적으로 교회의 규율을 벗어나고, 결국 화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이건 하나의 '선택'을 뜻한다. 메노키오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기를 선택한 것이다. 왜일까?

메노키오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교회와 성경이 가르친 세계와 자신이 두 눈으로 관찰하는 세계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는 이 불일치 속에서 새로운 설명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물론, 종교적 세계관에 한 발을 담그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접목시킨 그의 사고는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못 되며, 또한 온전히 그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나온 생각도 아니었다.(메노키오는 금서로 분류되던 책을 여럿 읽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메노키오가 그 자신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였으며, 심문관들 앞에서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제가 생각한 것들입니다.(p.127)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신적 권능(심문관들은 신적 권능의 대리인들이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는 한 개인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언명을 내놓기 수십년 이전에,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당대의 지식인 계층과 교류도 없었던 한 시골 방앗간 주인의 입에서 우리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 스스로 사유하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거듭 강조하듯 메노키오는 당대의 보편적 인물상이라기보다는 매우 예외적인 인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메노키오의 주장을 근거로 근대의 성립을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가 이후의 시대에 보편화될 사유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메노키오의 선택,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 앎에의 욕구가 밝아오는 인간 이성의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고 이해한다.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가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다. 세계가 절대자에 의해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혼돈 속에서 스스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메노키오 자신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이 예외적인 인물의 출현은 어떤 의식적이고 지적인 연구 활동이나 학풍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구전 문화와 인쇄물로 보급된 지배 계급의 기록 문화의 접점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말이다. 진즈부르그가 이 책의 제목을 <치즈와 구더기>로 정한 이유도 여기 있는게 아닐까? 거시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하지만 언제나 기술된 역사의 이면에서 실제로 세상을 움직여온 기층 민중 문화의 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보여주려고 말이다.

그게 바로 내가 메노키오라는 인물에게, 그리고 이 책에 매혹당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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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강
- 은희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하얀 입김이 떠도니 이제 계절은 완연히 겨울로 향하고 있다. 제 잎을 떨궈내는 저 나무들처럼,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또 한 겹의 나이테를 두를 시간이 다가온게다. 새해와 함께 시계 초침 넘어가듯 째깍 하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순환이 끝나는 겨울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하는 계절임에는 분명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리던 20대의 마지막 나날들이 엇그제 같은데, 이제 나도 어느새 서른 하고도 셋의 나이가 된다. 

되돌아보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때는 오히려 20대의 중반이 아니었나 싶다. 정작 서른을 맞이하는 순간은 덤덤하게 지나갔고, 여전히 나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막상 이 나이가 되니 서른이라는 나이를 두고 떨었던 지난날의 호들갑이 의아스러워 지기까지 한다. 서른이 되면 더 이상 열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줄 알았던가? 무릎까지 처지는 다크 서클이나 이마에 새겨진 주름, 살짝 벗겨진 머리, 불룩 나온 뱃살 등으로 상상되던 "중년"이 시작될 거라 믿었던가? (오, 이런. 뱃살은 나왔구나) 아니다. 사실 미래를 앞당겨 비관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하릴 없는 나날은 아니었다. 다만 그 때의 나는 그 빛나던 젊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청춘의 시간들을 "서른"이라는 나이를 거울 삼아 뽐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흘러, 이제 나는 정.말.로 삼십대가 되었다. 이십대 때 상상하던 것처럼 청춘이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분명 그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나도 변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변했으니까. 익숙한 듯 하면서도 삶은 항상 그렇게 새로운 고민들을 던져준다. 그 고민들은 힘겨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행복한 고민들이다. 조금 건방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민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가 바로 나라는 존재,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눈 앞의 현실에 매몰되어 더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게 아닐까 두려움이 문득 찾아오곤 한다. 이럴 때가 바로 책을 집어 들 때다. 문학이란 자고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위한 간접 경험의 보고 아니겠는가.

<서른 살의 강> 이라는 단편집은 그렇게 내 손에 흘러 들어왔다. 작가들이 그리는, 조금은 극단적이겠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 혹은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은희경, 김소진, 전경린, 성석제, 양순석, 이병천, 차현숙, 박상우, 윤효, 이 9명의 작가가 그리는 서른은, 불행히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아니, 내가 느낌 감정은 차라리 당혹스러움에 가깝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이토록 아팠던가? 나의 무던한 서른은 그저 유예된 이십대의 끝자락에 불과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이건 그저 '소설' 속 이야기에 불과한건가.

공감하지 못하는 아픔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면,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점은 그 아픔의 유형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편집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의 배치 순서도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글을 번갈아 보도록 되어 있어 양 성(性)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렇게 보니, 서른의 아픔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는 자기만 아픈 것 같고 자기만 못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모두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얼마만큼씩은 공유하고 있는 아픔인 셈이다. 직접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 담긴 남성 작가들의 글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이(남성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이다) 하나 같이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서른의 사랑이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음을,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행복해 지기에는 서로에게 얽힌 관계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그 사랑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다. 사실 이들은 많이 아파하지도 않는다. 미처 아프기도 전에, 이들은 체념할 뿐이다. 그저 쓸쓸히, 사랑은 끝났다고 중얼거리듯 말이다.
 
오히려 여성 작가들의 주인공들은 더 많이 아파하면서도 오히려 희망적이다. 통념상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지만,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이게 꼭 삼십대여서인지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직 독립된 존재로 홀로 서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이 아픔은 차라리 깨달음에 가깝다. "아버지" 혹은 "가정"에 예속된 존재였던 여성이 진정한 "나"를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를 더 많이 사랑해" 라는 선언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처럼 50이 되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아닌 셈이다.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은 듯 체념하는 남성과, 아직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여성. 30대를 바라보는 이 관점의 차이는 결국 삶의 자세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누가 자신의 인생을 확신할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아직은 되돌아보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정점을 지나 노쇠한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시간의 켜가 쌓이는 만큼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나에게도 저런 아픔이 찾아오더라도, 그 아픔을 '나'라는 존재를 더욱 나아가게 하는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내 앞에 놓인 서른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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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

만화는 언제나 금방 읽힌다. 이 책을 읽는데 걸린 시간도 기껏해야 20여분 남짓. 하지만 책을 그냥 덮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정독. 다시 20여분이 흐른 후에, 역시나 남는 이 착잡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송희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표지에서 얼핏 느낄 수 있는 그림체 역시 내가 호감을 가질 타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집어들게 한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착잡함이었다.

아마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책을 구성하는 3개의 막 제목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가로막힘(Blocked)", "이야기하기(Telling)", "봄(Seeing)". 거칠게 정리하자면 "단절되고 억압된 현실과, 그것을 직시하는 깨달음, 그리고 발화를 통한 치유와 극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끝끝내 착잡함이 남는 까닭은, 치유와 극복의 과정에 비해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표제작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의 가슴을 만지던 담임 선생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연인과의 관계 진전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남자친구는 "미안해"라며 그녀를 끌어안지만, 그건 "이해심 많고 공감해주는 남자친구"라는 판타지가 아니라 또 다른 회상 - 이번에는 가해 - 으로 연결된다. 그 역시 고등학생 때 자취방에 놀러온 옆집 어린 여자아이를 더듬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처, 그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을 더듬던 남자를 기억하는 또 다른 그녀의 상처. 현실은 "미안해", "괜찮아" 식의 사죄와 용서의 맞물림으로 해소되기엔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가 그 복잡한 얽힘 속의 한 부분 - 가해든 피해든 - 이라는 깨달음은 고통스럽다.

이 고통스러움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편함과 맞닿아 있다. 근엄한 척 하는 남자 지식인들의 속물스러움처럼, "그게 뭔지 몰랐어"의 남자들은 그저 "나쁜 놈" 하고 욕해버리고 말기엔 나와 너무 가까이 있다. 그 저열함과 그 가식과.. 그 부끄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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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지음 / 이순희 옮김 / 부키 / ★★★★★

책을 읽은건 6월 말 즈음이었는데, 리뷰가 늦다보니 묘하게 시류를 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이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도서' 목록에 포함된 덕분이다. 군대에서 서적 검열을 한다는 사실 자체야 그닥 새삼스러울게 없었다만, 일단 이런걸 그리 자랑스럽게 보도자료를 내놓는다는게 웃겼고(정권 코드 맞추랴 생색 내랴 바쁘신 국방부 관계자께 경의를!!), 둘째로는 도서별 불온서적 선정 이유가 웃겼다. 예를 들면, 삼성 왕국을 비판한 책은 "반자본주의"라서 안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이 책은 "반정부, 반미"라서 안된단다. 종종 얘들은 이렇게 어이 없는 자충수를 둔다. 별 실효성도 없는 일을 벌이느라 보다 중요한 비밀, 자신들이 공공이 아닌 몇몇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실토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게 다 무식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제발 이 책이라도 읽고 (들키면 쪽팔릴테니 다른 책 커버 씌워서 보도록)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삼성이 자본주의 기업의 한 양태(사실, 오히려 반자본주의적인 "세습" 집단이지만)에 불과하듯, 신자유주의 역시 자본주의 사회가 취할 수 있는 정책 중 하나일 뿐이다. 인류 역사라는 지평에서 볼 때 그리 길지 않은 자본주의의 역사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다양한 경제정책들이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저마다의 경제 정책들이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릿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장하준 교수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신자유주의는 부를 이루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 신자유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의 눈에 이 책이 불온하게 느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몸 바쳐 일하는 바로 그 '누군가'의 거짓말을 들춰내고 있으니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자체는 낯설지 몰라도, 그 정책들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특히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IMF 가 강요한(사실, 이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이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 제반 정책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골자를 이룬다. 해고와 감원을 손쉽게 하는 노동 시장 유연화 정책과 전면적인 상품/금융 시장 개방, 전방위적으로 벌어진 기업 인수 합병과 공기업 민영화 등은 한국 사회를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은 사건들이었다. 그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삶의 기반을 파괴당해 극빈층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해고의 위협에 마음 졸이며 허리띠를 졸라 맬 것을 강요당했다. 고통 분담이라는 미명 하에 말이다. 그 때도 그랬다. 위기를 벗어나 더 부유해 지려면 어쩔 수 없다고.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장하준 교수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를 증명하는 근거는 바로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선진국들 자신의 역사에서 나온다.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선 나라들의 공통점은 산업 발전 초기에 어김없이 극단적 보호주의 정책과 정부 개입으로 경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유럽의 제반 국가들은 물론이요, 오늘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강요하는 첨병인 미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 국가들은 자국의 산업이 상대적으로 열악할 때는 보호 장벽을 높게 쳐서 산업 육성을 이끌었고, 반대로 상대적으로 강해졌을 때는 어김없이 자유무역 쪽으로 돌아섰다. "요컨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p.119)"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 교수는 전세계적인 무역 자유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부유한 나라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규정한다. 보호 무역이라는 사다리를 딛고 부유해진 나라들이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 차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자유 무역은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해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 버렸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한 80년대 이후 세계 경제 현실은 이를 분명히 증언한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본산인 시카고 학파를 경제 전면에 내세웠다가 재앙에 가까운 경제 몰락을 경험했다. 한 때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리웠던 신흥 공업국들도 80년대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경제 성장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새롭게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등장한 중국은 강력한 무역 장벽을 보유한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물론 전면적인 자유무역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더 많은 시장과, 따라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부의 비결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 시장이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리는 것처럼 물 반 고기 반의 황금어장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미 이 시장은 몇몇 강력한 포식자들에 의해 선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은 이들의 홈그라운드이다. 이들의 높은 기술과 막대한 자본이라는 홈 어드벤티지에 맞서 가난한 나라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값 싼 노동력과, (운이 좋은 경우는) 천연자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당연히 일방적인 경기가 진행된다.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의 값 싼 노동력과 풍족한 자원의 혜택을 맛보는 동안,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저개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의 실상이다. 사실상 방점은 '공정한'이 아닌 '경쟁'에 찍혀 있다고 봐야한다. 공정을 가장한 경쟁이야 말로 가난한 나라로부터 부를 착취해 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자, 동시에 그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된다. 신자유주의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기존의 불평등한 질서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세계 질서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각 국가와 사회 단위 곳곳으로 스며들어 불평등의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서 피착취의 입장에 서게 되는 가난한 나라의 지배 계급이 되려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나서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의 사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권력이 군사 정권으로부터 시장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그 흐름은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후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변용과 좌절, 재구성의 역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김영삼이 외치던 '세계화'라는 구호와, 재벌 기업들이 일제히 기업 로고를 새로 만들며 무한 경쟁을 외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해고를 '세계 수준'으로 쉽게 만들어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려던 노동법 개정 시도는 97년 초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으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변변한 방어 장치도 없이 무작정 개방한 금융 시장은 한국을 국제적 투기 자본의 놀이터로 만들어 외환 위기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외환위기는 다름 아닌, 한국의 지배 계급이 시도하던 신자유주의적 질서 재편이 실패한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외환 위기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더욱 가속했다. IMF 를 필두로 한 외부의 힘이 한국의 지배 계급이 스스로는 극복하지 못한 두 가지 장벽, 전근대적인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자 한 지배 계급 자신(특히 재벌들)의 저항과 노동 계급의 저항을 일거에 무너트리며 질서 재편을 강제한 덕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재벌이 무너지고 몇몇 기업들이 외국 자본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한국의 기득권 세력에게 이건 사실 그다지 큰 손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87년 이후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한 노동 계급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체념에 가까운 심정으로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한 것은 그들이 잃은 것을 훨씬 넘어서는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시대적 과제(87년이 남겨준)에는 비교적 충실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렇기에, 최초의 민주적 정권 교체는 사다리 위쪽의 권력 지형에 변화를 가져았을 지언정, 사다리 아래의 사람들에게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팍팍한 현실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한 쪽에서는 '잃어버린 10년' 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사실상 그 10년은 정치 엘리트 간의 밥그릇 위치 외에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더욱 공고해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한나라당이냐 민주당이냐 (혹은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냐 진보신당이냐) 하는 선거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자리잡은 이 신자유주의라는 틀을 어떻게 깨어버릴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와 나는 만나고 다시 어긋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조목 조목 비판하는 장하준 교수의 논리는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이론적 무기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철저하게 자본주의 경제학이라는 프레임 안에 머무를 뿐이다. 그의 관심사는 아마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보다 공정하면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해주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찾는데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모색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저자가 담보하지 못하는 고민은, 그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에게 관세 등의 장벽을 통해 경제적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다소 나이브하다. 이윤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그와 같은 '윤리적' 요구를 통해 통제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국내의 기득권 세력에게 순순히 기득권을 양보하기를 요구하는게 씨알도 안 먹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 모르겠다. 촛불은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건 이 책이 채워주지 못하는,그리고 아직은 그 어느 책도 채워 주지 못하는 내 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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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웅
- 귀도 크노프 지음, 이동준 옮김 / 자작나무(송학) / ★★★★

사실, 내가 원했던건 이게 아니었다.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던건 영화 <아버지들의 깃발들(Flags of our Fathers)> 이었고, 영화의 주 소재라고 할 수 있는 아래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보다 깊이 있게 풀어나가는 글을 원했다. 국가가 국민을 전쟁으로 동원하기 위해 어떻게 "영웅"을 만들어 내는지, 사람들은 왜 영웅에 열광하는지, 그 상징 조작의 과정에서 사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의 실제 내용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저기서 얻은 단편적 지식들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 <전쟁과 영웅> 이라는 제목이 책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니, 일단 여기서 별점 하나는 까먹고 들어가야겠다.



이와지마 섬의 스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들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은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역사를 만든 사진>을 책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찾아보니 저자로 나와 있는 귀도 크노프(Guido Knopp)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며 저널리스트다. 하지만 그의 저서 목록에도 이 책에 대한 정보는 없고, 정확히 어느 다큐멘터리를 옮긴 것인지도 잘 검색되지 않는다.(그의 주 관심사는 히틀러와 제 3 제국이다) 현재로서는 책의 정확한 정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적어도 이 책의 원제목은 <전쟁과 영웅>이 아니라는 거다. 이 제목은 번역되면서 국내 출판사가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히도 <전쟁과 영웅>이라는 키워드로 묶을만한 내용은 겨우 두어 개의 장에 불과하다.

하긴 이 책에 실린 16 개의 꼭지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하긴 하다. 이들을 한 권의 책으로 경계 짓는 기준이 주제가 아닌 컨셉(?)인 탓이다. 각 장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유명한(?) 사진을 화두로 삼아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 나간다. 사건의 성격이 제각기 다른 만큼 초점을 맞추는 부분도 제각각이다. 때로는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속 인물들의 후일담을 쫓기도 하며, 때로는 사진에 담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문에 나처럼 제목에 낚여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과 같은 내용을 기대했다간 다소 어리둥절 해지기 쉽상이다.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책보다는 방송, 그것도 시리즈물에 더 적합한 컨셉으로 보인다.

덕분에,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는 독자마다 크게 다를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느슨한 역사 다큐멘터리이니 뒷담화 읽듯 재미로 읽어 나가도 무방할 것이고, 필이 꽃히는 특정 에피소드를 파고 들어도 좋겠다. 아니면 이 참에 (맥은 좀 빠지지만) 책의 컨셉에 맞춰 '사진과 진실' 이라는 주제를 따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경우들만 보더라도 사진의 역할은 극과 극을 오간다. [사이공의 처형 집행인]이나 [벌거벗은 베트남 소녀] 와 같은 사진들은 사람들이 체감하지 못했던 전쟁의 참혹성을 각인시켜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고, 거꾸로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처럼 가짜 진실을 유포해 전쟁으로 국민들을 동원하고자 하는 국가의 상징 조작에 이용되기도 한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기록한다는 통념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러한 다면성은 흥미를 돋군다.


Vietnam.gif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놀라 도망치는 베트남 소녀
책에서는 이 때의 화상으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는, 이제는 중년의 여인이 된 이 소녀를 인터뷰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진은 피사체에 반사된 빛을 렌즈를 통해 모아서 필름 혹은 다른 형태의 매체에 기록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물리적 과정은 너무나 즉각적이고 자명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믿음의 주된 근거도 여기에 있다. 물론 사진의 역사를 보면 종종 조작이 사례들이 등장한다. 가짜 피사체를 모델로 세우고 고의적으로 흐릿하게 찍은 고전적인 사례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산물까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사례들은 적지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조작의 사례들도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조작은 정황 증거나 양심 선언 등으로 조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런 사례들은 사진의 신뢰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최소한 조작한 사진만 아니면,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조작이 사진이 보여주는 진실이라는 문제를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 단순화시킨 셈이다.

허나,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은 그러한 믿음을 뒤엎는,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조작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 경우 사진 자체는 아무런 변형을 겪지도, 연출해낸 장면을 찍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사진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지 "않는"가이다. 문자와 대비되는 사진의 시각적 선명성은 사람들의 시선을 오직 보여지는 피사체로만 집중시킨다.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요구에 코끼리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사진은 사진에 찍힌 피사체로 자연스럽게 주제를 한정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진은 세 가지 차원에서 극도로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첫째, 순간을 기록함으로써 전후의 맥락을 생략하며, 둘째, 프레임 밖의 모든 것을 생략하고, 셋째, 프레임에는 담겼어도 공개되지 않는 모든 사진들을 생략한다.

즉, 우리가 보는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의 반영이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고도의 판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판단은 종종 미학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규정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결국 문제는 사진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가 아니다. 사진은 그 성격상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우리는 사진이 "어떻게" 주관적이냐의 문제로 접근을 해야한다. 사진을 그 자체로만 평가할 수 없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실의 전달이 아닌 다른 목적이 개입된 사진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사례에서는 국가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수구 언론이 그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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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자 <중앙일보> 2면. ⓒ중앙일보


결국 사진의 진실이라는 문제도 윤리의 문제로 돌아간다.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진실이란 없다.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 사진 또한 주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사진을 통해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역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로 보장될 수 있는 성질이라기 보다는 사진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의 윤리 의식을 강화할 때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는 사진가의 윤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진을 보도하고 유통하는 언론의 도덕성은 더 많이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다. 부도덕한 정권의 언론 장악 기도를 막아야 하는 이유도, 도덕적으로 건강한 언론을 키워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낙관론에 기대기엔 돌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ps. 사실 별점은 3개 반이다. 내 기준으로 3개는 좀 박하고, 그렇다고 4개는 좀 너무 후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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