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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catcher(1999)

Director : Lynne Ramsay
Cast :
William Eadie ... James
Tommy Flanagan ... Da
Mandy Matthews ... Ma
Leanne Mullen ... Margaret Anne


햇살이 부드럽게 드는 창가. 한 아이가 창가에 늘어진 반투명한 커튼 속에서 몸을 빙빙 돌리며 커튼을 몸에 휘감고 있다. 슬로우 모션으로 잡힌 아이의 동작은 부드러운 햇살과 어우러져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뜻하지 않게 마주친 이 인상적인 오프닝에 한참 취해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소년의 뒷통수를 팍 때리면서 영화는 급격하게 현실로 튕겨지듯 돌아온다. 아니 이런, 덩달아 나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스코틀랜드의 신예 여성 감독 Lynne Ramsay의 첫 장편영화 Ratcatcher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쩌면 이 첫 장면만으로도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년의 천진난만함과 반투명한 커튼을 통해 보이는 몽환적 세계가 불쑥 튀어나온 손 같은 거친 현실에 깨어지는 모습 말이다. 이 첫 장면부터 이미 암울한 결말을 예상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강렬함은 관객을 영화 속으로 빨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년의 이름은 라이언. 커튼 뒤 세계에서 엄마 손에 끌려나와 (아마도 이혼하여 따로 살고 있는 듯한) 아빠를 만나러 가야 한다. 하지만 이를 원치 않는 라이언은 창문 너머로 운하 옆에서 놀고 있는 제임스를 보고 몰래 도망쳐 제임스에게로 달려간다. 운하 옆에서 서로 밀치고 진흙을 던지며 노는 아이들. 그러던 그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과격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물 속에 라이언의 엎드린 몸이 둥실 떠 있고 제임스는 이를 망연자실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도망친다.

이 죽음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베이스라인이 된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라이언의 죽음은 사고로 간주되지만, 우리는 제임스가 라이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사고사로 알려진만큼 라이언의 죽음은 영화에서 재빨리 잊혀지는데,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건 제임스 역시 금새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고이긴 했지만,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걸까? 이 묵직한 불편함은 영화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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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쨌거나,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감독이 이끄는대로 제임스의 일상으로 돌아가보자. 영화의 배경이 되는 70년대 글래스고우의 한 아파트촌(아마도 저소득층을 위한)의 풍광은 스코틀랜드의 잿빛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하다. 건물 옆으로는 오염되어 짙은 녹색을 띈 운하가 자리잡고 있고, 쓰레기 수거인들의 파업으로 몇 주째 치워지지 않은 검은색 쓰레기 봉지가 여기 저기 쌓여 있다. 그리고, 하늘만큼이나 어두운 사람들. 가난에 쫓겨, 세상에 치여 사는 아파트 주민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피로감이 가득하다.

이 배경은 고스란히 이 지역의 아이들이 그 안에서 뛰놀며 지내는 환경이다. 어른들이 일을 하러 나간 동안(혹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동안) 아이들은 운하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시멘트 도로 위에서 뛰놀거나, 아니면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쥐를 잡으며 시간을 보낸다. 좀 더 나이가 든 아이들은 슬슬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고, 여자아이들을 희롱한다. 이게 제임스가 속해 있는 세계이다. 친구의 죽음을 차치하고도, 그의 세계는 이미 턱없이 암울하고 팍팍해 보인다.

가족이라고 별다른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제임스의 엄마는 강하다. 자식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이유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조차 크게 안아 보듬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고 강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월세를 내지 못해 관리인이 찾아오자 테이블 밑으로 숨을 수밖에 없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녀에게, 매일밤 늦게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드는 그녀에게 제임스는 마음껏 기댈 수가 없다. 거기에 그저 매일 술이나 마시며 축구경기에나 열광하는 아빠, 비밀스런 외출에 몰두하는 누나, 그리고 고자질쟁이 얄미운 동생 등 가족은 소년에게 피난처라기보다 또 다른 전장에 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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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임스에게 위안이 되어 주는 존재는 친구 마가렛-앤이다. 제임스보다 나이가 많은 마가렛-앤은 아마도 제임스에게 기댈 수 있는 엄마를 대신할 존재였을 것이다. 제임스의 아빠가 불량배들에게 상처를 입고 돌아와 엄마를 때릴 때 제임스가 집을 뛰쳐나가 찾아간 곳은 마가렛의 집이었다. 동네 불량스러운 아이들에게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시달리고 있는 마가렛-앤 역시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 제임스에게 의지한다. 마가렛의 집 욕조에서 둘이 들어앉아 서로를 씻겨주며 장난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노출이 가장 심한 장면임에도) 이 영화에서 첫 장면인 커튼 신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천진난만한 유년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욕조'가 제임스에게 가지는 의미는 유별나다. 제임스가 언제나 바라는 소원 중 하나는 욕조가 달린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다. 욕조가 없어 부엌 바닥에 통을 놓고 목욕을 해야하고, 식구수에 비해 턱없이 좁아 서로 끊임없이 부딛혀야 하는 제임스네 가족은 정부에 넓은 주택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그래서, 집안 분위기가 좋아질 때면 제임스가 으례 묻곤 하는 말도 이거다. "그럼 우리 이제 욕조 달린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는거야?" 아마도 이 표현은 가난에서 벗어나는게 어떤건지에 대해 아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소박한 소망은 실현되지 못한다.

대신, 충족되지 않는 모성에의 갈망을 마가렛에게서 찾는 것처럼, 제임스는 버스를 타고 무작정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아직 건축 중인 빈 집에서 이 소망을 간접적으로 충족시킨다. 큰 밀밭에 접해 있고, 방이 세 개에 욕조가 달린 화장실이 있는 집. 그 집에서 제임스는 그저 빈 욕조 안에 드러누워 보고, 변기에다가 소변을 보고, 집 밖의 밀밭을 힘껏 달리다 덤불 속으로 몸을 던지곤 할 뿐이다. 낯선 장소에서 이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는 모습은 담담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얼마나 이런 환경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절절히 보여준다. 때문에 밀밭을 달리는 제임스의 밝은 표정에서 거꾸로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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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믿어버린다고 정말 현실이 그렇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의 아빠가 쥐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고도 쥐가 바다로 갔다고 말한다고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며, 친구 케니가 풍선에 쥐를 매달아 날려보내고 달나라에 가서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고 정말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렇게 상처를 피할 뿐이다. 외피를 두르듯 거짓으로 자신을 감싸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비껴간다. 그게 어른의 방식이다. 제임스가 아빠 몰래 담배를 빨아보고 맥주를 홀짝거리는 까닭도, 그렇게 쉬이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어른이 되고 싶기 때문일거다. 어쩌면, 드러나게 표현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라이언의 죽음도 그렇게 덮으며 살려는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제임스가 애써 외면했던 현실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리고, 애써 비껴 가던 현실이 갑자기 제임스를 조여 오기 시작하는건 케니의 방아쇠 같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풍선에 매달아 날려보낸 쥐가 잘 살고 있을지 물어오는 케니에게 제임스는 신경질적으로 답한다. 그리고 맞받아치는 케니.

"케니, 니가 쥐를 죽인거야"
"너도 라이언을 죽였잖아"


그랬다. 마가렛은 여전히 동네 불량배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고, 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가는건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외곽에 있던 빈 집은 문이 잠겨 더 이상 들어가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제임스가 할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 조사위원을 엉망인 집 안으로 들였다는 이유로 아빠는 "우리가 집을 못 구하면 그건 네 잘못이야"라고 소리치고, 도움을 청하는 마가렛의 절망적인 눈빛을 보면서도 어찌 하지 못한다. 불량배들이 운하에 던져버린 마가렛의 안경조차 꺼내 줄 수가 없다. 지쳐 잠든 엄마를 바라보면서 구멍난 스타킹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을 덮어주는 것 외에는 해 줄 수 있는게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라이언을. 죽였다.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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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atcatcher는 불가피하게 (가장 유명한 쥐잡이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떠올리게 한다. 사나이는 피리 소리로 쥐들을 물 속으로 이끌어 빠져 죽게 했고, 아이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영화 말미에, 쓰레기 수거인들의 파업이 끝나고 군대가 동원되어 주거단지 내의 쓰레기 봉투들을 수거해간다. 그렇게 깨끗하게 치워진 거리는 묘하게 텅 빈 느낌을 주는데, 거리에는 뛰어놀던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쥐들도 사라지고, 아이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 빈 자리만큼 큰 질문이 남는다. 그럼 쥐잡이는 누구였을까. 누가 쥐들을, 아이들을 물 속으로 내밀었는가.

물 속으로 가라앉는 제임스의 모습이 스치고 갑자기 화면은 밀밭을 가로질러 새 집으로 이사가는 제임스 가족의 모습으로 바뀐다. 얼굴 가득 웃을을 띈 채 이사짐을 들고 뒤따르는 제임스의 모습도 보인다. 이건 죽어가는 제임스의 환상일까, 아니면 실제 벌어지는 일일까. 선택의 당신의 몫이다.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모든게 잘 될 거라고, 결국 행복한 결말이 올 거라고. 피리 부는 사나이의 달콤한 피리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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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9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8-2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흔하지 않은 영화군요. 맘에 들어요, 소개!

그나저나 피리부는 사나이... 라고 하니까 괜시리 두근거리네.

내가 기다리는 남자라서요 :)

turnleft 2007-08-29 23:38   좋아요 0 | URL
아니, 여기서는 부정적 의미인데 -_-;
일종의 나쁜 남자 선호 경향?

라로 2007-08-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데,,,

turnleft 2007-08-29 23:43   좋아요 0 | URL
음.. 한국에는 DVD로 소개되지 않은 영화라서.. 듣자하니 부산의 시네마테크 자료실 같은데서 볼 수 있다고는 하더라구요. 굉장히 완성도 높은 수작이라서 진지한 영화단체 자료실에는 비치가 되어 있을 것 같네요.
 

Little Nemo in Slumberland

Winsor McCay 지음

"잠의 나라의 어린 니모"는 1905년에서 1913년까지 New York Herald 와 William Randolph Hearst's New York American 신문 일요일판에 매주 연재되었던 만화(Comic-Strip)다.(1924년 Winsor McCay는 다시 한 번 Nemo를 지면에 되살려내지만, Nemo라는 작품의 생명력은 아무래도 초기 작품에서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Nemo가 처음 신문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1905년은 Comic-Strip 이라는 형태가 처음 등장한 후 10년도 채 안 되었던 시기였는데, Winsor McCay는 Nemo를 통해 그 때까지의 모든 형식적 시도들을 일거에 정리시키고 Comic-Strip의 기본 형태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물론 Comic-Strip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수사는 Richard F. Outcault의 "The Yellow Kid"에게 돌아가지만, "The Yellow Kid"가 열어놓은 세계를 완전히 정착시킨 것은 Winsor McCay와 Nemo의 공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The Yellow Kid"가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사 간의 무리한 경쟁과 상업주의에 물들어 Yellow Journalism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의 유래가 된 것에 비해, "Little Nemo in Slumberland"는 끝까지 꾸준한 작품성을 유지했던 것도 좋은 대비를 이룬다.

오랜 기간 연재되었지만 Little Nemo의 기본적인 구성은 동일하다. Nemo는 꿈 속에서 Slumberland를 여행하면서 온갖 모험을 하게 되고, 마지막 컷에서는 항상 그의 작은 침대에서 잠을 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꿈의 배경인 Slumberland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이다. 그 속에서 왕인 King Morpheus와 Princess, Flip, Imp 등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Nemo의 모험을 이끄는데, 어떤 모험을 했느냐에 따라 Nemo는 마지막 컷에서 울면서 잠에서 깨기도 하고,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꿈에서 깬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혹자는 Winsor McCay가 프로이트보다도 꿈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Little Nemo에서 그려지는 꿈의 세계는 일부 프로이트파 학자들에 의해서 분석되기도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꿈의 세계의 특징을 상당히 잘 짚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Slumberland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Nemo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Nemo는 모든 사건들을 겪는 당사자이지만, 꿈을 예측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건 외부적인 사건들이거나 Flip의 장난의 결과다. 그 외에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이라던가, 갑자기 주변의 사물이 어마어마하게 커진다던가 하는, 어렸을 때 누구라도 경험해보았을 꿈들을 Winsor McCay는 아름다운 그림과 색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아름다운 그림이다. Slumberland는 그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공간이고, 이 상상력은 그의 손을 거쳐 형상화가 되는데, Winsor McCay는 거장이라 불리우는데 손색이 없는 탄탄한 일러스트로 Slumberland를 아름답게 재현해낸다. 아마 Nemo 가 끝까지 일관된 작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구도 Winsor McCay 만큼의 수준 높은 일러스트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끝까지 작품을 직접 만들어내야만 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만화라서 그런지, 국내에는 Nemo 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니모"로 검색을 하면 "니모를 찾아서"에 관한 내용만 잔득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Little Nemo in Slumberland 는 책을 읽는 아이와 어른 모두 충분히 즐거워할만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일러스트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꼭 한 번 봐야할 책이 아닐까도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국내에도 Little Nemo가 정식으로 출판될 날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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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 진짜 신기하네요... 그림이 .. 그런데 이게 오래된건가봐요? 그렇구나...

turnleft 2007-08-07 03:43   좋아요 0 | URL
20세기 초반이니까 거의 100년 전 작품이네요. 으... 100년이라니, 상상도 잘 안 가네요 @_@

Joule 2008-10-04 0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체가 TinTin류의 벨기에 만화 같아요. 오랜만에 아마존에 쇼핑하러 가야겠군요.

(잠시 후)

근데 이거 어떤 버전을 사는 게 가장 좋을까요. 괜히 어설프게 구입했다가 추가 구입할 때 내용 중복되면 마음 아프잖아요.

turnleft 2008-10-04 06:15   좋아요 0 | URL
저도 다양한 판본을 본게 아니라서.. -_-;

최소한 best 류는 사지 마세요. 이게 쭉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best 는 이야기가 전혀 흐름이 생기지 않더라구요. 돈은 좀 많이 들겠지만 전집(The Complete.. 로 시작되는) 쪽을 사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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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Blaue Engel (1930)

감독 : Josef von Sternberg
주연 : Emil Jannings - Prof. Immanuel Rath
Marlene Dietrich - Lola Lola


Synopsis

김나지움 교수인 Immanuel Rath는 학생들에게 매우 권위적이고 엄격한 교수다. 하지만 그의 권위는 외면적인 것일 뿐, 그의 학생들은 그를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 어느날 Rath는 학생들이 Lola 라는 쇼걸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진을 압수한다. 그리고 한 학생으로부터 다른 아이들이 밤마다 Lola가 공연하는 술집 Blue Angel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술집으로 직접 찾아가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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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몰래 보던 Lola의 사진. 바람을 불면
사진에 붙은 깃털이 슬쩍 들려 올라간다.



거기서 Lola를 만난 Rath는 이내 그녀에게 매혹된다. 그는 어리숙하지만 그다운 방법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그녀 역시 자신을 숙녀로 대접하는 Rath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점점 더 Lola 에게 빠져든 Rath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Lola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교수로서의 지위와 사회적 인정을 포기하고 여기저기 공연을 위해 떠돌아야 했지만, Lola 와의 결혼에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계를 위해 계속 쇼걸로 일하는 Lola와 아무런 벌이도 없이 그녀에게 의지해야 하는 Rath의 관계는 이내 역전되고 만다. 그녀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팔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결국 술집의 손님들에게 사진을 팔러 다니게되고, 마침내는 직접 삐에로로 분하여 무대에 서게 된다. 그는 자존심의 상처를 입지만 여전히 Lola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벌이가 넉넉치 못한 삶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날 극단의 단장은 Rath에게 드디어 밥벌이를 할 기회가 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말인즉, Rath가 떠나온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공연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돌아온 교수"와 같은 문구로 홍보를 하면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올 것이고 쇼는 흥행을 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당연히 Rath는 크게 분노하며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의견은 아무런 힘도 없을 뿐 결국 그는 고향 마을로 가게 된다.

자신의 옛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 앞에 삐에로로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선 Rath. 그런데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Lola가 마을에 있던 떠돌이 연주가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는다. 완전히 망신창이가 된 채 무대에 서 있던 Rath는 Lola가 이 떠돌이 연주가와 지분대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남아 있던 이성마저 잃어버린다. 공연 도중 광분하여 소동을 벌이던 Rath는 구속복을 입고 광에 갖히게 된다. 정신을 차린 후 그는 먼지투성이 외투와 찌그러진 중절모를 걸치고 술집을 빠져나오고, 비틀거리며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김나지움의 교실로 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의 상징이었던 교탁 앞에 선 Rath는 교탁을 움켜쥔 채 쓰러져 숨을 거둔다.


유성 영화 시대가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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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Rath 역의 Emil Jannings(왼쪽)과
Lola 역의 Marlene Dietrich


The Blue Angel(원제 : Der Blaue Engel)은 1930년에 제작된 영화다. 당시는 막 유성 영화가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이 영화가 바로 독일에서 두번째인가로(확실치 않다 -_-) 제작된 유성 영화라고 한다.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이 영화에서는 무성 영화 시대의 미덕과 유성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이 선사하는 매력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무성 영화의 미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는 바로 Rath 교수 역을 맡은 Emil Jannings다. 그는 무성 영화 시대부터 유명했던 배우인데, 때문에 대사보다는 연기 자체로 의미 전달을 하는데 능숙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극 중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의 변화를 표출하는 인물인데, 그의 표정과 행동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도 영화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무대에서 Lola가 부르는 사랑 노래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생각하며 부끄러워 하면서도 행복해하는 모습은 압권이다.) 아울러, 주위의 소품이 중요한 메타포로 사용되는데, 이것 역시 무성 영화 시대, 아니 정확히는 연극에서부터 이어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이나 모자, 수염 등 어느 하나 허투루 스쳐 넘길 것이 없다.

반면, Lola 역을 맡은 Marlene Dietrich는 전형적인 유성 영화 시대의 스타다. 사실 그녀의 연기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다. 그녀는 시종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남자들에게 눈웃음을 흘리고 무대 위에 뻣뻣이 서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중요하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무성 영화 시대에는 없었던 강력한 무기가 새로 등장을 한 셈인데, 이 무기를 통해 Lola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관객들에게 각인을 시킨다. 예컨데, Lola가 부르는 Falling in Love Again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Falling in love again
다시 사랑에 빠지는건
Never wanted to
결코 그러려던건 아니었어요
What am I to do?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Can't help it
어쩔 수가 없어요

Love's always been my game
사랑은 항상 나한테는 게임 같은 것
Play it how I may
내가 하는 것처럼 즐겨요
I was made that way
나는 원래 그런걸요
Can't help it
어쩔 수가 없어요

Men cluster to me like moths around a flame
남자들은 불가의 나방처럼 내게 달려들죠
And if their wings burn, I know I'm not to blame
날개가 불에 탄다해도, 그건 내 탓이 아니에요



오! Femme Fatale 이여

dietrich-blue-angel%284394%29.jpg 공연 중의 Lola

여기서 Lola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어쩌면 Lola는 영화 속 요부(Femme Fatale)의 효시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Rath에 대한 Lola의 감정은 모호하다. 그의 친절에 감사하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만, 그녀의 태도는 딱히 사랑이라기보단 "오는 남자 사양 않고, 가는 남자 잡지 않는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지배하며 복종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이 힘이 Rath의 삶을 파멸로 이끈다. 비록 그녀는 자기 탓이 아니라고 노래하지만.

현대의 영화들에서 Femme Fatale은 보통 훨씬 더 적극적인 악역으로 그려진다. 그녀들은 음모를 세우고 미모로 남자들을 엮어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Lola는 Femme Fatale 이라기엔 다소 모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Rath를 유혹하지도 않고, 그의 파멸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행동하고 게임을 하듯 사랑에 빠질 뿐. 하지만, 거꾸로 보면 현대의 Femme Fatale은 어쩐지 괴기스럽지 않은가. 온 몸으로 덮쳐오는(?) 그녀들보다는 무대 위에서 슬쩍 눈짓을 주며 노래를 부르는 Lola의 매력이야 말로 진정 거부할 수 없는 Femme Fatale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무너져가는 구세계

jann2%281118%29.jpg 삐에로 분장을 한 Rath

하지만, Rath의 몰락을 단지 사랑 때문에 파멸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영화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크게 두 종류의 세계가 등장한다. 하나는 김나지움으로 대표되는 권위와 규율, 시간엄수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천국인 술집 Blue Angel 이다. 이 대립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에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일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와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전 세대는 경험하지 못했던 "대중"이라는 강력한 사회적 집단을 만들어냈고, 이들 대중은 기존의 지배 계급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사회의 새로운 주류 집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Rath의 비극은 바로 이 권력 이동의 과정에서 밀려나는 구세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예컨데, Rath가 고향 마을로 돌아와 삐에로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설 때 객석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 동료 교수들과 대중들이 앉아 있다. 무대 위에 선 Rath의 머리에 마술사가 계란을 부딛혀 깨자, 그의 동료 교수들은 모욕이라며 발끈하지만 대중들(노동자의 복장을 한)은 환호한다. 화를 내던 교수들도 주변의 야유에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더 이상 기존 지배층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분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대중 문화의 응집체이다. 영화관은 오페라 극장 들과는 달리 노동자와 귀족들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이 역시 과거의 권위가 무너졌음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감독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이동처럼, 구세계도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세계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Rath의 비극적인 죽음은 바로 구세계에 대한 엄숙한 사망선고이기도 한 것이다.


낯선 영화에서 고전의 향기를 느끼다

기술적으로만 따지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의 영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사실 거의 80년 전 영화다 -_-) 조악하다고도 할 수 있다. 빈약한 조명과 단선적인 편집, 움직임이 거의 없는 카메라 등 오늘날의 "기교"라고 할만한 것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덕분에 플롯의 힘과 배우들의 연기, 세트와 배경의 매력이 담뿍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옛 영화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 영화 The Blue Angel은 그 매력들을 찌~인하게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웰메이드 영화의 매끈함에 식상해진 당신이라면 꼭 한번 챙겨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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