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22
- Joseph Heller / Simon & Schuster / ★★★★★

믿을 수 없다. 이런 소설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이렇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반짝반짝 재치가 넘치며, 말도 못하게 웃긴,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안타깝고, 숨막히게 긴장감이 넘치며, 분노로 열통이 터지게 하는, 그러면서도 잔잔한 미소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하는 책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올해 최고의 책을 넘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명작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바로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명작에는 무릇 진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겐 이 책은 너무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초반부의 좌충우돌은 멍청하고 산만한 인물들이 벌이는 반복적인 농담들로 가득해 그저 쓴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블랙 유머로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초반의 다소 느슨한 전개가 단박에 깨지는 볼로냐 폭격 장면 이후부터,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유머들이 돌고 돌아 뒤통수를 치듯 다시 등장하면서 정교한 플롯이 드러나고, 몇몇 장면들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밀도를 보이며 읽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가벼움의 형식은 얄팍함의 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가벼움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애초부터 의도된 표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가벼움의 중심에 Catch-22 가 있다. 책 속에서 Catch-22 의 정의는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상황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모든 합리적 결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하는 순환논리의 함정을 지칭함을 깨닫게 된다. Catch-22 의 상황은 책 전체에서 반복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 Yossarian의 부대에서는 미친 사람만이 조기 퇴역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조기퇴역 신청을 했다는 것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 순환논리에 따르면 그 누구도 조기퇴역을 할 수가 없다. Yossarian의 결혼 신청을 받은 여자는 Yossarian 이 미쳤기 때문에 그와 결혼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데, 자기와 결혼하려고 한다니 미친게 틀림없다고 답하는 식이다. 물론 결혼은 불가능하다.

얼핏 듣기에는 억지 농담 같지만, 의외로 이 순환 논리의 틀은 견고하다. 겉으로는 명제와 명제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식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명제 자체가 권력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증명하기도, 반증하기도 어려운 이들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명제가 참임을 선언하는 권력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그래서 이 권력관계에 순응하는 한, 이 순환 논리의 고리 안에 발을 담그면 벗어날 방법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순환 논리 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안, 이 함정(catch)을 놓은 이들은 본래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합리와 설득을 가장한 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폭력과 공포를 동원하는 억압 체제에서야 굳이 그러한 메카니즘이 필요치 않다. 오히려 형식적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보다 세련된 지배의 기술이 공고화한 곳에서 비로서 이러한 함정들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이 책이 전통적 악역인 추축국이 아닌 승전국 미국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한채 순환 논리의 덫에 걸려 우왕좌왕하다 희생된다. 자본과 권력과 권위의 신성동맹은 부패하고 멍청하며 관료적이지만 오직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승자가 되어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칭 현대 민주주의의 본산이며 유럽과 세계를 구한 정의의 국가 미국의 맨얼굴 아니었는가.

저들 신성동맹이 우리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의미"의 그물망은 무겁다. 국가, 민족, 자유, 정의 같은 "거대한 의미"들은 "작은" 개인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체계를 우리에게 심어 놓는다. 정색하고 그 체계에 맞서 싸우다간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신, Yossarian 은 슬쩍 몸을 틀어 내리누르는 "의미"의 무게를 비껴간다. 가벼움으로 "의미"의 무게를 희석시킨다. 이렇게 "의미"들의 오오라를 벗겨내자, 작은 개인들의 모습만이 남는다. "의미"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의 비열함과 위선. 그들 때문에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 이 부조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Yossarian 의 외로운 투쟁 - 살고 싶다는 희망, 타인을 죽이지 않고도 내가 살 수 있는 가능성에의 모색 - 은 그 어떤 "의미"들보다 고귀하고 진중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벼움의 전략은 우리에게 그닥 생소하지가 않다. 이 책이 선보이는 가벼움의 형식이 2000년대 한국 문학을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박민규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온 일련의 젊은 작가들은 가벼움을 무기로 빠른 속도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드라마로 치자면 정극 대신 시트콤의 형식이 대세를 이룬 셈인데, 형식은 가벼워졌지만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작품 속 껄렁껄렁한 주인공들이 멍청함을 가장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희화화를 통해 사회와 제도가 강제하는 규범을 무력화 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의 지배질서가 보다 "합리적"으로 변하고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으로 보인다. 군사독재에 맞섰던 80년대의 한국문학은 비장한 결의와 거대담론의 "무거움"을 채택했었고, 자본의 지배가 공고해지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어가던 90년대의 한국문학은 사회적 맥락을 잃고 개인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한 과도기를 거쳐, 2000년대의 작가들은 "가벼움"이라는 전략을 통해 주어진 의미체계에 저항하며 동시대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와 이성이 만들어낸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그것들을 조롱하고 탈주하는 해방된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Yossarian 처럼 말이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거대한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면, 그게 바로 Catch-22 라고 생각하면 된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폭력을 쓸 수 밖에 없었는데, 폭력을 썼기 때문에 쫓겨나야 한다는 순환 논리가 먹히는게 바로 이 곳이다. 돈이 없어 돈을 벌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에게, 억울하면 돈 벌라는 말로 화답하는 것이 이 곳이다. 정작 분노해야 할 이들은,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외쳐야 할 이들은 엉뚱하게 합법이니 불법이니, 국익이 어쩌니 하는 논쟁에나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주어진 의미체계에 순응하는, Catch-22 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니, 무려 4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이 소설 <Catch-22> 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시대에 질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대신, 그대, 이 책을 읽어라. 그래서, 그대들을 옭아매는 꼰대들의 세상에 반기를 들지어다.

탈주하라, 그대. Yossarian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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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2-2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본적이 없는 책인데 솔깃하네요.

turnleft 2011-02-23 13:04   좋아요 0 | URL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으니까 그걸로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

무해한모리군 2011-02-24 08:44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쓱 담아 두었어요 ㅎ
 



위험한 동화
- 아흐멧 알탄 지음 / 이난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뱀의 몸을 한 채 첫날밤마다 신부를 잡아먹는 왕자. 처녀는 마흔 겹의 옷을 입고 왕자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왕자에게도 옷을 벗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뱀이 마흔 번의 허물을 멋자,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본래의 왕자가 나타나 진정한 사랑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어렸을 때 들어본(아마도 읽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야 아마도 좀 무서운, 하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행복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위험한 동화>는 이 책 전체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서 베린이 주인공 "나"에게 뱀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동화가 왜 "위험"한지, 그리고 이 동화가 전체 스토리와 갖는 연관성을 따져보면, 이 책은 위 동화의 현대적 해석이라 부를만하다. 물론 이는 아흐멧 알탄이라는 한 개인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터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작가 한 개인을 넘어 그 사회,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해석으로서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마광수나 장정일의 소설들이 당시 한국 사회의 한 징후를 포착해내며 아이콘이 된 것처럼 말이다.

어딘가 잘 정리된 논문 또는 책이 있을 것 같은데, "사랑"의 개념이 시대와 함께 변해온 것은 분명하다. 예컨데, 근대가 "개인"을 탄생시킨 이래, 사랑은 개인의 권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기능해 왔다. (오늘날까지도 종종 통속극 등에서 활용되고 있듯이) 전근대의 유물인 규범과 질서에 맞서 사랑을 쟁취하는 개인의 이야기는 근대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랑은 불가침의 이상향, 절대적 가치를 지닌 미덕으로 숭배되어 왔다. 그러니, 이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의 시대이기도 한 셈이다.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시련이 대립구도를 이루며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야 마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시대.

그러나, 현대사회의 성립은 낭만적 사랑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 버린다. 파편화된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한 개인은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한다. 가면 속의 개인은 고독하다.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과연 날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기는 할까. 서로의 진심은 가면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끊어진 소통의 자리에는 앙상한 성애만이 남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몸부림. 그것이 현대인의 사랑을 규정한다.

소설 속 베린은 끊임없이 "나"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왕자가 허물을 벗듯이 가면을 벗고 진실한 자신을 내보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나 가면 속에서 드러난 얼굴이 또 다른 가면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면을 벗겨야 상대의 본모습이 드러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왕자가 얼마나 많은 허물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면, 과연 처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칫 나 혼자만 발가벗은채 이 위선의 게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가면을 벗는 손짓을 더욱 느리게한다.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의 소용돌이, 그것이 현대인의 사랑인 셈이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으라 말하는 이 동화는 정녕 "위험한" 동화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마, 이 소설에 대한 보다 깊은 분석은 90년대라는 콘텍스트 안에 놓인 터키 사회를 함께 바라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직 남아있던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가 현실 속에서는 끊임없이 배반당하면서 사람들이 느꼈던 당혹감과 혼란을 적절히 짚어내었기에 사회적 이슈가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90년대 한국 사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노골적 성애 묘사가 사회적 금기에 균열을 내면서 본질을 벗어난 논쟁만 유발했다는 점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읽어내기 좋은 텍스트지만, 아무래도 2009년에 읽기엔 조금 뒤처진 소설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디지털 시대의 사랑은 또 다른 느낌일테니 말이다.

ps. 이 책의 초판 인쇄일을 보고 조금 놀랐다. 97년. 오르한 파묵의 노벨상 수상과 함께 국내에 잠깐 불었던 터키 소설 열풍에 재출간되었거니 했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터키어를 전공하고 터키 소설을 번역해온 역자에겐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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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 

서점만 가면 널리고 널린게 여행기지만, 유재현의 여행기는 분명 그 중 빛나는 군계일학 중 하나다. 낯선 풍경이나 신기한 유물, 에피소드에 매몰되지 않고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를 조밀하게 읽어내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그만의 색깔은 일정한 독자층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고, "유재현 온더로드"라는 이름의 시리즈물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그 시리즈의 네번째 결과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쿠바를 담은 <느린 희망>에 이어 두번째 읽는 그의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럽다. 정작 그 자신은 길 위에서 길을 잃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네팔, 그리고 티벳, 홍콩까지. 그가 둘러본 아시아의 오늘은 여전히 참담하다. 독재 정권의 폭압이나 자본의 전횡, 아니면 전제 군주의 전근대적 폭력까지, 아시아의 민중들이 응당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는 저들 기득권층의 폭정 아래 질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짚어내는 저자의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다. 이 날선 목소리가 10여년간 뒷걸음질 친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목도하면서 그가 느끼는 절망과 아픔 때문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는 않는다. 하지만.

난 도대체 이 여행의 목적을 모르겠다. 부제로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책 속에선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그 나라에 도착했다라는 간략한 서술 이후, 이내 정치적 상황이라던가 역사적 배경과 같은 설명으로 건너뛰어 버린다. 이 설명들이 유용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들은 책상머리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지식들 아닌가. 저자가 그 나라까지 굳이 찾아가서 생색내며 쓸 필요는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다. 오히려 여행기라는 틀에서 중요한 것은 "현장감", 말 그대로 "현장"의 당사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어떤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는지 아닐까.

물론 현장의 이야기도 일부 실리긴 한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는 다분히 고압적,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빈민운동을 하는 말레이지아의 청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언급하자 "당신, 공산당이야?"(말로 한 건 아니지만 생각으로) 라며 선을 긋는가 하면, 미얀마 정부가 싸이클론 피해자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장 활동가를 외세에나 의존하려고 하는 무력한 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요컨데, 저자에겐 현장의 움직임보다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본인의 판단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는 이도 저도 못마땅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그 실체조차 모호한, 그래서 편리한, "민중"이라는 이름을 호명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정부의 도움을 바라거나 기다리지 않았어요. (...) 전신주의 전선은 언제 가설될지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쓰러진 전신주를 세웠어요. 뭐랄까. 그건 마치 코뮌을 보는 것과 같았단 말이지요."
그는 그 현장에서 민중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했다. (...) 그러나 늦지 않게 그가 느꼈던 그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싸이클론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미얀마의 민중들이 홀로 분투하는 까닭은 코뮌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미얀마의 군사정부가 복구에 힘을 쏟기는 커녕, 국제사회의 원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저자는 양비론을 들고 나선다. 군사정부도 나쁘지만, 원조를 시발점으로 개방을 강요하는 서방 국가들의 과거 전례가 군사정부가 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 자체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당장 생사의 기로에 선 민중들에게 구호물자가 더 시급한지, 서방의 원죄를 묻는 것이 더 시급한지는 분명한 일 아닌가. 원론이나 읊다가 생뚱맞은 민중예찬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무책임함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그리고 우리가 제 아무리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해도, 우리가 그 민주주의를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사회의 진보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만이 담보할 수 있고, 담보해야만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어깨를 걸고 연대하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이해하는게 우선이 아닐까. 의견이 다르고 전망이 다른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역설적으로 저자가 처음 방문했다는 네팔의 이야기는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유익했는데, 그것은 저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혹 저자는 그동안 보아 온 다른 국가들의 사정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쿠바에서의 낯설음과 놀라움이, 그리고 그 경험 앞에서 저자가 보였던 깊은 사색이 그립다.

ps. 좋았던 책보다 나빴던 책 리뷰 쓰는게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성격이 나빠지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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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of the Book
- Geraldine Brooks 지음 / Penguin Group USA / ★★★★ 

춘천 북쪽 용화산 기슭 근처에 고탄이라는 동네가 있다. 집안 선산이 있는 곳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명절 때마다 꼭 가게 되는 곳이다. (그러고보니, 한국에 있었으면 지금쯤 벌초하러 갔겠구나) 예전에는 춘천에서 이 곳으로 가려면 춘천댐 근처까지 올라가서 물길을 따라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기억이 잘 안 난다) 지내리를 통해 고개을 넘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생겼다. 이 고갯마루 무렵에서 뒤를 돌아보면, 산등성 사이에 자리잡은 작은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물길을 따라 자리잡은 작은 마을들과 논밭들.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농촌의 풍경이다. 

이 풍경 자체가 내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 풍경을 볼 때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마 수천년전 춘천 부근에 터를 잡았다는 고대국가 맥국(貊國)에 대한 이야기가 상상력을 불어넣은게 아닐까 싶다. 수천년 전에도 누군가가 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경이롭게 한다. 기껏해야 50~100년 사는 인간의 삶이 쌓이고 쌓여 수천년의 강을 이룬다. 누군가 이 땅에 자리를 잡아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의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오늘의 나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 강물은 나를 지나쳐 또 수천년을 흐를 것이다. 그것이 역사책에는 담기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역사 아닐까. 

물론, 기록에 남지 않은 이들 하나하나를 오늘의 우리가 기억할 방법은 없다. 큰 사건이나 업적이 없는 이상 개인의 삶은 역사학의 시야 밖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마을 제방의 저 돌을 쌓았고, 누군가는 우물을 파 시원한 물을 퍼올릴 수 있게 하였고, 또 누군가는 나무를 심어 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과거의 그들을 기억하는 출발점은 바로 그 간접의 증거들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상상력의 벽돌을 쌓아올려 모두가 볼 수 있는 작은 사원을 짓는 것이 문학의 몫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People of the Book>은 책보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사라예보 하가다(Sarajevo Haggadah)"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소재이지만, 작가가 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 것은 이 작은 책 한 권에 얽힌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다. 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작은 힌트들(곤충 날개, 얼룩, 흰 머리카락 등)은 각각 이 책이 거쳐간 인물과 시대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이어지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땅의 오래되고 낯선 인물들의 모습을 우리 앞에 그려 놓는다. 하지만 이 이국적 풍광과 인물들 속에서 느껴지는건 이질감이 아닌 동질감과 공감이다. 슬픔과 기쁨, 분노와 용서, 탐욕과 박애.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우리는 모두 이토록 인간적이지 않았는가. 

책의 중심 소재가 된 "사라예보 하가다"는 실존하는 책이다. 하가다(Haggadah)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의 첫날밤(Passover Seder) 자식들에게 유대인들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사용되는 경전이다. 보통의 하가다는 간결하고 검소하게 만들어지는데 비해 사라예보 하가다는 매우 화려한 그림과 장정을 사용해 예외적인 사례로 더 큰 문화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예외성 때문은 아니다. 2차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을 거치며 이 책은 여러번 파괴될 위기를 넘겼는데, 그 때 이 유대교 경전을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무슬림이었다. 오늘날의 종교간 갈등(을 표방한 헤게모니 다툼)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종교적 관용의 실례는 좋은 소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소설로 재구성되면서 어쩐지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초점이 무슬림이 아닌 유대인에 맞춰지면서 목숨을 걸고 책을 구해낸 무슬림의 이야기는 곁가지로 밀리고 있는 탓이다. 신앙은 그 속성상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독선을 어느 정도 전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믿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독선을 넘어선 관용이 더욱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무슬림들에겐 그게 너무 쉽다.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백설공주를 도와주는 착한 일곱 난장이처럼 말이다. 그러니 결국 주인공은 유대인이라고 읽는건 그저 내 편견일까? 게다가 주인공인 한나가 알고보니 유대인 핏줄이었다는 내용까지 접하고나면 슬슬 짜증까지 밀려온다. 내가 보기엔 굳이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와 연관도 없는데 말이다. 왜 이렇게까지 유대인이라는 핏줄에 집착하는거지? 

개인적으로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떨어트리는 소재는 과감히 덜어내는 것이 좋은 작가의 기준이라고 믿는다. 작가로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지 몰라도, 독자에겐 과잉으로 느껴질 뿐이니까. 작가의 전작들을 접해보지 못해서 이 작가의 일반적인 성향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때문에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까지는 딱히 들지 않는다. 좋았던만큼이나 실망도 남는 책이다. 

ps. 원서읽기에 대한 첨언 : 단어나 문장 등이 전체적으로 무난한 수준이니 원서로 읽어도 크게 부담은 없겠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굳이 원서로 읽을만한 이유도 별로 없어 보인다. 중간중간 히브리어가 영역되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좀 귀찮기도 하다. 국내 번역본의 번역이 얼만큼 잘 빠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왠만하면 번역본으로 읽는게 무난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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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 / 권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건 대학 때 [언론학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교수님은 한국 언론이 전하는 외신 보도가 몇몇 소수의 통신사에 지나치고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균형감 있는 국제 감각을 원한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을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추천하셨다. 물론 언론학 전공도 아닌 이공계 학생이 매달 일정액을 내면서까지 굳이 구독을 했을리는 만무했으니(-_-;), 교수님의 추천은 그저 추천으로만 남았을 뿐이었다. 대신, 그 기억 덕에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 책을 구해 보았으니, 교수님의 추천도 그냥 헛수고는 아니셨다고 마음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세계는 넓다. 그리고 넓은 세계만큼이나, 다양한 이슈들이 지구촌 여기저기에 산적해 있다. 재밌는 것은, 한중일과 서유럽, 미국과 연관된 이슈들은 대개 익숙한 반면, 그 외의 지역 문제들은 대부분 생소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접하는 외신의 출처가 한정된 탓이다. 꼭 어떤 "주장"만이 서구 중심주의인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창 자체가 이미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창에 비친 풍경이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더라도, 한정된 주제와 한정된 지식만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한 때 식물에서 뽑아내는 바이오 디젤이 화석 연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재의 에너지 소비 구조를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오 디젤 생산이 옥수수 등의 가격을 상승시켜 제3세계의 기아를 유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관점에서는 정당한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부당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이슈들을 폭넓게 접하고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일방적 소스만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면, 눈 양쪽에 차단막을 세워 한 곳만을 보고 뛰게 만든 경주마처럼,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서구 중심적 시각과 사고를 체득하며 살 뿐이다.

프랑스 <르몽드> 지의 국제문제 전문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펴 낸 이 책은, 다른 시각에서 세계의 구석구석을 한번씩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물론 이들 역시 또 다른 서구 언론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적어도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각각의 이슈를 길게 다루지는 않지만, 주간지답게 요점을 꼭꼭 짚어내기 때문에 전반적인 개요로는 손색이 없다. 넉넉한 판형 속에 담긴 자료도 충실하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잘 도표화해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 등에서 참고 자료로 써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읽다보면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너무 늦은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최대 2006년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는데, 책이 국내 출간된 것은 2009년이니 어떤 이슈들은 이미 과거의 사안이 되어 시의성을 잃은 경우도 많다. 현재 진행형의 이슈들도 2006년 이후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힌트가 없어 일일히 찾아봐야만 한다. 번역하면서 출판사에서 간략히라도 정리해 줬으면 어땠을까. 물론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라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같이 게으른 독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별점 한 개를 깍는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게으른 독자의 월권행위라면 할 말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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