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 Hunter S. Thompson 지음 / Vintage / ★★★★ 

1969년 12월 6일, 북부 California 에 위치한 Altamont Speedway 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래 San Francisco의 Golden Gate Park 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Free Concert 였지만, Rolling Stones가 공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군중이 몰릴 것을 두려워한 주정부는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공연 장소는 San Francisco 동쪽 Tracy와 Livermore 사이에 위치한 Altamont Speedway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공연 시작 20시간 전에야 공연 장소가 확정되면서 Altamont Free Concert는 이미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장실이나 의료 시설 등은 몰려든 사람들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부족했고, 급조된 낮은 무대와 열악한 음향 시설은 사람들이 무대 앞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은, 당시 공연의 안전요원 역할로 Hell's Angels 라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오토바이 갱단이 고용된 것이었다.(Rolling Stones의 로드 매니저였던 Sam Cutler가 이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Hell's Angels는 Harley-Davidson 같은 대형 오토바이에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는 근육질의 마초 집단을 생각하면 되는데, 이들의 복장이 Rolling Stones의 리더였던 믹 재거와 유사한 스타일인데다가 Hell's Angels 가 가지고 있던 "무법자" 이미지가 기성 세계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미 Rolling Stones는 런던 공연에서 Hell's Angels를 고용하여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던터라, 별 고민 없이 Hell's Angels를 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했던 것은, 영국의 Hell's Angels에 비해 미국의 Hell's Angels 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과격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공연이 무르익어 갈수록 무대 앞쪽으로 모여드는 관중들과 그 앞을 지키던 Hell's Angels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Rolling Stones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던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무대 앞 한 쪽에서 Hell's Angel과 충돌을 빚던 Meredith Hunter라는 18살 흑인 청년이 총을 꺼내들었고, Hell's Angel 중 한 명에게 찰과상을 입힌 후, 자신은 그들의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이 청년이 살해되는 광경은 공연 실황을 녹화하던 카메라에 그대로 잡혀 후에 "Gimme Shelter"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에 실리게 된다. Rolling Stones는 후에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공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Altamont는 불과 4개월 전 열린 Woodstock Festival 에서 최고조에 올랐던 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기치, 즉 평화와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San Francisco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번져나가던 이 젊은 문화는 총 대신 꽃을, 전쟁 대신 사랑을 나눌 것을 외치며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Altamont은 이 사랑과 평화의 메세지가 폭력, 그것도 내부의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해버린 이 반문화는 결국 스스로 붕괴해버리고 말고, 이후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기 보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개인주의 문화로 돌아서버리고 만다. 결국, Altamont는 60년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된 것이다.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의 부제는 A Savage Journey to the Heart of the American Dream(어메리칸 드림의 심장을 향한 잔인한 여행)이다. 여기서 American Dream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금 만능주의, 일확천금의 꿈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60년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마약문화(drug culture)가 추구했던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Las Vegas는 60년대 젊은이들이 꿈꿨던 새로운 미래(사랑과 평화로 충만한 세계)가 무너진 폐허 위로,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이 마천루처럼 솟아오른 타락한 American Dream의 상징이 된다.

60년대의 반문화는 동시에 마약문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세대에게 마약은 오늘날처럼 쾌락이나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마약을 통해 정신적 고양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고양 상태를 통해 이기심과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잊고 사랑과 평화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와 같은 낙천적 인식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광범위하게 퍼져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Altamont에서 어떻게 급격히 무너졌는지를 저자는 이 책의 8장에서 절묘한 은유를 통해 표현해낸다.

이 장에서 주인공은 과거 자신이 처음으로 마약을 복용했던 때를 되돌아본다. LSD에 취한 채 그는 차를 몰아 동쪽을 향하지만 이내 길을 잃고 만다. 하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던 거기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고, 거기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았기에 그는 해방감에 가득 차서 바람을 맞으며 길을 달린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과 음악의 비트에 취해 그의 마음은 점점 거대한 파도를 타고 높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 파도가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 파도는 벽에 부딛혀 급격히 튕겨나와 부서지고 만 것이다.

1971년 쓰여진 이 소설은 바로 60년대의 폐허 위에 서 있다. 이 잃어버린 American Dream 을 찾기 위해 두 주인공은 그들의 여정을 온갖 마약과 알콜에 곤죽이 된 채로 시작한다. 하지만 한 때 그들이 마약을 통해 찾았던 낙천적인 희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마약에 흐릿해진 의식에 비친 세계는 온통 불안과 공포 뿐이다. 검은 하늘은 거대한 박쥐 무리가 되어 덮쳐오고, 여행 내내 주인공은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만한다. American Dream의 상징이라는 Las Vegas는 결코 그들이 기억하는 American Dream의 땅이 아니었고, 더 이상 그들은 자신들의 American Dream을 찾지 못한채 좌충우돌 광폭한 여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와 비교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소설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류의 소설이 마약을 통한 현실도피에서 각성/희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마약을 통한 각성/희망에서 절망을 향하는 이야기다. 이 절망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공유했던 아픔이었다. 한 때 세계를,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이끌었지만, 이제 그 방향타가 사라진 땅에서 그들은 그저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약은 전진이 아닌 퇴행,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어버릴 뿐이다.

1971년 Rolling Stone 지에 2회에 나누어 연재된 이 소설은 시대의 아픔과 혼란,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그 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60년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의 젊은이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과거의 꿈을 잃어버린채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마치 마약을 통해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약기운이 물러나면 몇 배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60년대의 꿈이 급격히 사라진 채 맞이해야 했던 70년대는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저자 Hunter S. Thompson은 2005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ps. 1998년, 이 소설은 Terry Gilliam 감독, Johnny Depp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맥락은 무시한채 마약에 취한 효과를 시각화하는데 치중하여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는다.

ps2.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내 독서습관을 많이 흔들어 놓았다. 우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경우, 실제 예약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는 날짜가 제 멋대로라서 내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책을 밀쳐두고 읽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로 된 책은 내용 외에 신경써야 하는게 너무 많아 몰입이 어렵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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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1-02-0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와일드 터키를 마시면서 이 영화에서 조니뎁이 마시던 술이라며 신나하면서 마시다가 완전 맛 갔어요 -_-;;;; 그 날도 조니 뎁이 맡았던 역할이 실존 인물이라고 해서 놀랐었는데 책이 원작이라니 더 놀랍네요.

전 이거 영화 정말 좋아하거든요. 취한 효과를 시각화에만 치중해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를 겪었다니 ㅠㅠㅠ 전 그래서 더 좋았는데.. 아 알콜중독의 기운이 댓글에서도 퐁퐁 솟아 나는듯 ㅋㅋㅋ

turnleft 2011-02-04 03:31   좋아요 0 | URL
오, 뽀님이 저 영화를 봤다는 것도 신기하고, 심지어 좋아하시기 까지 한다니 더욱더 신기하군요! 저도 책을 읽고 나서 DVD 까지 빌려 봤는데, 저한테는 영화가 너무 지루했어요. 뽀님 댓글을 보니 영화 볼 때 제가 너무 맨정신이었던게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Kitty 2011-02-03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 외에 신경써야 하는게 너무 많다는 말씀이 제가 생각하는 의미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보통의 "Anxiety" 읽을 때였는데요, "The Wealth of Nations"라는 말이 나와서 읭? 이게 뭐지...한참 생각하다가 "국부론"이라는걸 깨달았을때의 허탈감이라니;;; 한글로 읽었으면 전혀 걸리지 않았을 상식도 영어로 바꿔놓으니까 바로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중등교육을 영어권에서 받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만서도...ㅠㅠ

turnleft 2011-02-04 03: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별 것 아닌 표현인데, 그 의미를 깨닫기까지 몇 번의 검색이 필요한.. ㅠ_ㅠ 그래도 저보다는 키티님이 훨씬 더 편하게 읽으실 것 같은데요.. ㅋ
 

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

1960년, 10세의 소녀 요네하라 마리는 국제 공산주의 기관지 편집국에 일본 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약 5년간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고, 1965년 아버지를 따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마리는 프라하의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스에서 온 리차, 루마니아에서 온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왔던 야스나.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시대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왔을까.

이거이거.. 일단 이 특이한 이력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30년만에 처음 만나는 여고 동창생 이야기로도 충분히 얘기거리가 되련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낸 소녀시절 이야기에, 이후 그녀들이 고스란히 겪어야했던 동유럽의 굴곡 많은 역사가 겹쳐져 그야말로 이야기거리의 성찬이라 할 만하다. 남은 문제는 저자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균형 있게 버무려내느냐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리차, 아냐, 야스나 세 인물을 각각의 장으로 나누고(유년기의 기억이란 대개 서로 얽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인물별로 분절된 기억은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각 장을 다시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첫 단계에서는 우선 프라하에서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각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 다음으로 30년 후 저자가 친구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통해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변을 가름하고, 그 후 실제 친구와의 해후를 통해 개인과 시대를 조우시키는 방식이다. 다소 지나치게 도식화해 이해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3번에 걸쳐 같은 구조가 반복되다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좀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든게 사실인지라.. ^^;;

어쨌거나, 저자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개인적인 감회와 시대를 읽는 분석적 사유를 상당히 성공적으로 배합해낸다. 그리스,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는 좀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는 내용이지만, 30년만의 해후를 담은 이 책에 그런 정보까지 요구하는건 별로 공정한 일은 아니리라. 다만, 독자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각 나라의 현대사를 개괄하는 보너스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은 있다. 다른 때는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추천사 등등으로 책 두께만 늘리던 출판사들이 왜 이런 작은 친절에는 이렇게 야박한지. 투덜.

하지만, 책의 중심은 역시 그녀들의 재회 아닌가. 낯설었지만 따뜻했던 프라하에서의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와 친구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녀들의 생사도 모른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의 안타까움은 저자의 섬세한 문체에 담겨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해진다.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자랑스러워했던 리차, 다소 교조적(?)이었던 아냐, 그리고 총명한 야스나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건 저자의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30여년의 시간과 굴곡진 역사가 그녀들의 삶을 변화시켰음에도, 그녀들 안에서 30년전 프라하에서의 "소녀시대"를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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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빙 2014-01-2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책이지요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칼럼니스트 분이 책하고 관련해서 칼럼을 썻는데 참고해보세요~
http://www.insight.co.kr/content.php?Idx=526&Code1=007

좋은하루 되세요 ㅎㅎ
 

 

낙원을 팝니다
- 칼 N. 맥대니얼 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바지만, 이 전지구적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초래한 전지구적 환경 파괴 앞에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는 그 절박함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과거 이념의 세기에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했었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야 제대로 알려진 사회주의의 실상은 자본주의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더 나을 것은 없었다. 친환경 낙원을 선전하던 동독의 영토 구석구석은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오염되어 있었고, 무리한 계획 농업의 추진으로 토지의 지력 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자연은 스스로의 재생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라는 대안 모델이 붕괴하자, 많은 학자들이 다른 대안 모델을 찾기 위해 관심을 돌린 분야가 바로 인류학이다. 우리가 흔히 세계사라 칭하며 배우는 인류의 역사는 사실 서구 문명의 역사일 뿐이다. 같은 시기 지구의 구석구석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와 사회가 수천년간 안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서구의 총칼 앞에 자신들의 문화를 강제로 포기해야 했던 이들 사회가 어떻게 수천년간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가를 재조명 함으로써, 인류학은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코자 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우루의 역사는 지속 가능한 사회의 한 사례이자,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 지속 가능성을 파괴하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우루는 사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나우루인들은 생존의 방법을 찾아내었고, 적절한 인구를 유지하며 수천년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18세기 서구인들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다. 서구인들과 함께 들어온 총기류들은 과거 원만히 해결했을 분쟁들을 내전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특히 20세기 초 나우루에 엄청난 양의 양질의 인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우루는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만다.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이 번갈아 점령한 후 나우루는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유엔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탁통치를 받는다. 이 기간 동안 나우루인들은 서구 열강에 일방적으로 수탈되어 오던 인광석 자원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독립과 함께 나우루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우루는 섬의 유일한 자원인 인광석을 판매하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분으로 남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과거처럼 자급자족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자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보장했지만 언젠가 인광석이 고갈되면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했고, 후자는 경제적 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이 수천년간 유지했던 안정적인 사회로 돌아가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미 서구적 물질주의에 익숙해진 나우루인들은 물론 전자를 택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나우루의 인광석은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광석을 팔아 얻은 수입으로 나우루는 남태평양에서 가장 부유한 섬 중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가장 비만율이 높고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이 만연하며, 수많은 생물종이 사라진, 다시 말해 낙원과는 거리가 먼 섬이 되었다. 이제 인광석이 고갈되어 가는 시점에 섬의 경제는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나우루 정부가 인광석 고갈에 대비해 기금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아시아발 경제위기(한국의 IMF 사태도 이 중 하나다) 등으로 인해 기금 운용은 실패해버렸다. 게다가 이제 황폐해진 섬의 환경은 예전 같은 자급자족의 시스템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떠난 후 흉물스럽게 버려진 건물들과 황량한 폐광들에 둘러쌓여 서 있는 나우루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우루의 오늘은 인류가 지금처럼 환경을 파괴해가며 지구의 자원을 무작정 소진할 때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결과와도 같다. 일차적으로, 나우루의 파국은 유한한 천연자원(특히 화석연료)에 대책 없이 의존하고 있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이 조만간 경험하게 될 미래라고 할 수 있다. 태양열이나 풍력 등의 지속 가능한 대체 에너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그 양이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다량의 온실가스마저 뿜어내는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이유는 단 하나, 눈 앞의 이윤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윤 앞에 눈이 멀어버린다. 자원이란 언젠가 고갈되기 마련인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모른채하며 오늘의 돈벌이에 탐닉한다. 하지만 이 이윤이란 결국 미래로부터 가불해 온 것에 불과함을 나우루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나우루의 경험(그리고 라파누이와 같은 여타 종족들의 경험)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과 그렇지 못한 시스템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의 가장 큰 조건은 주변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구 수를 적절히 조절하여 인간이 소비하는 양이 자연의 재생 속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여 가능한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 대신, 지속 불가능한 사회는 생태계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파괴한다. 파괴당한 생태계는 인간에게 음성 피드백을 보내지만, 인간이 그 위기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는 결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적 성과를 버리고 원시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 현명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과학적/기술적 성과들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은 과학 기술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체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최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과 같은 다큐멘터리 필름이 기여한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기후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기후 변화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음성 피드백이다.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몇몇 종족이 걸었던 쇠퇴의 길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재현하게 될 것이다. 기후 변화 협약과 같은 국제적 룰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은 파국을 막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가 형성해 온 "지속 불가능한" 문명을 "지속 가능한" 문명으로 바꾸기 위한 근본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나우루의 교훈은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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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3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4 0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 홍은택 지음 / 한겨레출판 / ★★★★★

읽은 책은 쌓여가는데 리뷰가 점점 밀린다. 바쁜 와중에도 자기 전 잠깐, 휴일 한 나절을 온전히 책 읽는데 쓰면서도 이상하게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절대적 시간이 부족한게 아니라, 되새김질을 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탓일게다. 읽기가 휴식이었다면 쓰기는 생산인데, 이 input -> output conversion 에 투입할 에너지가 부족하니 결과물이 없을 수 밖에. 어쨌거나, 더 미뤘다간 책 내용과 감흥이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서둘러야지.

요즘 부쩍 내 몸에 대한 관심이 늘어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몸보다는 머리를 신뢰하는 타입니다. 운동을 할 때도 몸이 반응하기보다는 원리를 파악해 머리로 배운다. 고등학교 때 농구 레이업슛을 실기시험으로 보는데, 남들은 쉽게 그냥 휙휙 넣는 것 같은데 나는 '왼발, 오른발, 왼발, 점프, 슛' 이런식으로 단계화해서 몸을 움직였던 기억도 난다 -_- 지난 겨울 스노우보드를 처음 배울 때도 비슷한 식으로 시도하다가 하루종일 땅에서 기다시피 했던 기억도 아울러;; 암튼, 내 몸은 나에게 '머리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무엇' 정도의 의미였을 뿐이다. 최근 들어 뱃살은 생각대로 절대 안 움직인다는걸 깨달았지만 -_-

얼마 전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었다.(묘하게도, 이 책의 저자인 홍은택씨가 번역한 책이다) 미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이야기인데, 읽으면서 과연 나는 책 속에 나오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에 속할까, 아니면 저자처럼 어떻게든 "끝까지 가보는 사람"에 속할까 궁금해졌다. 물론, 현재로서는 90% 이상의 확률로 전자에 속할거다. 하지만, "과연 내 몸이 어느 정도까지 버텨줄까?", 혹은 "내 몸을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한계점으로 끌고 갈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이 계속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몸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번에는 자전거다. 이 책의 저자 홍은택씨는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서 자전거의 뒷바퀴를 대서양에 담근 후, 오레곤주 플로렌스에서 자전거의 앞바퀴를 태평양에 담글 때까지 미국을 동서로 가로질러 6400km 를 달렸다. 자동차로 워싱턴주를 가로지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거리다. 그 먼 거리를, 그것도 화석연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심장이 내뿜는 에너지만으로 정복한다는건 과정도 과정이지만 성취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저자가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니까.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저자의 여정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면, 저널리스트다운 꼼꼼한 글솜씨로 기록한 미국과 미국인의 모습은 책의 다른 축이 되어 읽는 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이미지를 걷어내고 몸으로 직접 만나는 미국의 모습은 역시 다면적이다. 초강대국의 오만이 은근히 도사리고 있는가하면, 인종이나 국적 따위는 개의치않고 맞이해주는 따스한 얼굴들도 있다. 어느 곳에 가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아무 연고도 없는 바이커들에게 잘 곳을 제공해주고 환대해 주는 사람들을 보자면, 사람은 본래 따뜻한 존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는다면, 국가니 민족이니 이런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진실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호들갑스럽게 자전거를 장만하고 페달을 밟을 계획은 없지만, 나도 차츰 내 몸에 대한 통제(?)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앉아서 공부만 하느라 몸이 둔해졌다는 엄살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할 수 있었던건 기초 체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달리기나 수영으로 단련한 몸이 있었기에 더 큰 목표를 향할 수 있었던 것. 책 몇 권 읽고 나서 그저 마음만 들떠서 내 능력 밖의 목표를 잡아서는 금새 포기하고 말 뿐이다. 조금씩 움직이자. 틈 나는 대로 산행도 하고. 그러면 나도 내 인생의 하프 타임에 뭔가 큰 목표에 도전해볼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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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서적 / ★★★★

새벽 1시.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서 돌아와 얼른 씻고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여 책을 집어들었다. 오늘은 말리를 보내야 할거다. 평소 눈물이 많은 나는 분명 엉엉 울게 틀림없었고, 따라서 이 책을 까페 같은 곳에서 끝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방에서 남 신경쓰지 말고 맘껏 울어버리고 잠들어야지. 예감은 적중. 실컷 눈물을 쏟고 노곤해진 상태로 잠들어 버렸다.

사실, 신파를 좋아하진 않는다. "울어"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면 기분이 찝찝하다. 게다가 찝찝해 하면서도 시키는대로 울고 있는 날 보는게 더 짜증난다. 하지만, 이 책은 신파와는 거리가 멀다. 말리라는 이름의 말썽꾸러기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13년을 동고동락한 이 이야기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건 기껏해야 마지막의 몇 장일 뿐이다. 그 외의 90%에서 나는 행복했다. 개를, 애완동물을 키운다는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아니, 누군가에게 애정을 갖고 교감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을까. 영화 에서 하나하나 복기해낸 기억이 말해주었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애완동물 애호가는 아니다. 오히려 간혹 사람에게보다 동물들에게 더 관대한 사람들을 보면 삐딱한 마음이 먼저 앞서는 편이다. 그래서 침이 마르도록 칭송으로 일관하는 개/고양이 예찬서라면 사절이다. 하지만 이 책 <말리와 나>는 다르다. 제목이 <"말리"와 "나">인 이유가 있다. 말리는 "개"라는 일반명사가 아닌 "말리"라는 한 존재의 고유명사이고, 이 책은 그 존재가 "나"의 인생과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리는 저자가 신혼 초기부터 아이를 여럿 낳고 이사를 가고 직장을 옮기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오롯이 함께한 동반자였다.

소중한 이의 의미는 종종 함께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헤어진 후에야 더 시리게 다가오곤 한다. 말리와 함께 울고 웃었던 여러 해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말리가 죽은 후 말리를 추억하는 대목에서 더 소중한 이야기들이 많이 읽힌다. 개가 없으니 집안이 참 깨끗하게 유지된다던지, 가구나 집이 망가질 일이 없어 가욋돈이 덜 든다든지 등등 개가 없으니 사는게 참 편해졌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깨닫는다. 말리의 존재는 그 모든 불편함들을 모두 보상하고도 남는, 결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음을.

말리. 너는 결코 남들이 말하는 최고의 개는 아니었지만, 너의 가족들에게는 최고의 개었단다. 사랑은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고 그저 존재 자체로 충만하다는 진리를 너는 너무도 잘 보여주는구나. 편히 쉬렴. 안녕.


ps. 리뷰를 쓴게 2007년이었는데, 그새 책 표지가 바뀌었다. 지금 표지는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옮긴 듯 한데, 하얀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앉아 있는 원래 표지가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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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2-0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눈물이 많으시군요! 와, 그렇다면 더욱 더 턴레프트 님이 좋아지는 이런 기분 아실랑가요. :)

turnleft 2011-02-03 03:25   좋아요 0 | URL
음.. 눈물 흘리는 남자가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매력으로 활용하려 해도 막상 울려면 쪽팔림이 더 큰건 왜일까요.. 울면 안되는 "남자"로 길러진 탓이 크겠죠?

stella.K 2011-02-02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얘기로군요. 표지 봐서는 로맨틱 코미디는 아닐까 거 외엔 관심 없었는데...
눈물이 많은 남자자로군요.
그게 또 여심을 자극하기도 하죠.ㅋ
이쪽은 설입니다. 그쪽은 별로 실감 안 나실지 모르지만...^^

turnleft 2011-02-03 03:28   좋아요 0 | URL
실은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도 나쁘지 않아요. 로맨틱한건 없는 대신, 삶의 단면들을 잘 드러내주죠. 배우들을 잘 고른 듯 하구요..

이 쪽 동네는 뭐, 한국 소식 안 들으면 전혀 명절이라는걸 알 방법이 없죠. 스트레스 덜 받으시는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