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 

나는 책을 통해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 내가 겪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나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책은 바깥 세계로의 통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 속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책에 담긴 지식과 사물과 타인의 삶에 비친 나라는 존재의 한 조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건 나만의 경험은 아닐거다. 같은 텍스트를 읽고도 저마다 다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까닭은 책 속에서 찾게 되는 저마다의 조각이 다르기 때문일테니.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건 나 자신을 읽는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대성당>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두려움'이다.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그래서 가족으로부터도 멀어져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삶의 모습들은 내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부유한 삶에 대한 희망은 일종의 판타지일 뿐, 어떤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실패한 삶은 약간의 불운만 겹쳐도 충분히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나만의 두려움, 악몽은 아닐테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두려움이며, 본질적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 소외된 노동으로 강제하는 기본 장치이기도 하니까.

그걸 안다고 달라지는건 없다. 아니, 사실 알면서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는게 가장 큰 비극이다. 팍팍한 현실에 돌파구가 없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타인에 대한 경계, 적대감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그게 힘 없는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버지가 동구에게 늘상 강조하듯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 사는게 삶의 유일한 지혜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나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안이 되더라.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몸 안의 독소가 빠져나가듯 가슴 속 덩어리 하나가 슬그머니 풀리는 것 같더라. 통쾌한 사건도 없고, 눈물 쏙 빼 놓는 신파도 없다. 그저 삶의 흐름에 휩쓸려 맥없이 흔들리는 부초 같은 삶들만 있을 뿐이다. 앞서 말했던,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남루한 삶 말이다. 그런데, 그 소설들을 조용히 읽어 나가다 보면 오히려 어떤 안도감이, 마치 한참 운 후의 후련함 같은 차분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건, 두렵다고 움츠러 들지 말라고, 적의로 가득찬 것처럼 보이는 저 사람도 너처럼 그저 세상이 두려운 또 한 명의 외로운 이일 뿐이라고 속삭여주는 카버의 목소리 덕이다.

그랬다.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고, 때로는 공격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이 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럴까 싶어 짜증이 나고, 심지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힘겹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 사람에게도 내가 힘든 세상살이에 얹혀진 또 하나의 짐 같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적대감이라는 가면을 벗고 마주하면 그들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지친 얼굴과, 그 지친 얼굴이 품은 갓 구운 따뜻한 롤빵 같은 가슴을 만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도 생겨난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의 빵집 주인처럼 말이다.

나는 아마도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의 주인공 같은 사람일게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고 인생을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가까운 사람들과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나에게 카버의 소설은 주인공을 찾아온 맹인 같은 존재다. 소설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그저 머리 속으로만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함께 그려주는, 인도해주는 손이 되어준다.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손길이 느껴진다. 세상을 다시 그리는 내 손 위에 올려진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 두터운 온기를 말이다.

올 여름엔 그의 무덤에 들러 하아얀 꽃 한 송이 놓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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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들고 파리를 가다
- 린다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로드 / ★★★★★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 파리 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 이야기도, 유명한 패션쇼 이야기도 없다. 에펠탑 이야기는 나왔던가? 나왔다해도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을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파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풍성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저자들이 파리를 세련됨, 낭만 등과 같은 추상적 이미지들의 종합선물세트가 아닌 구체화된 역사적 실체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여행의 키워드는 "혁명"이다. 파리는 근대국가의 출발점이 된 프랑스대혁명의 성지이다. 우리에게 혁명이란 어떤 가능성인 반면, 프랑스인들에게 혁명은 역사적 경험이다. 저자들은 파리에서 그 경험의 흔적들을 쫓아가면서 혁명의 의미를 되짚는다. 이 여행 경험이 씨줄이 되고 역사적 지식이 날줄이 되어, 책이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의미의 그물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성지순례를 하듯 프랑스대혁명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중국의 지식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저자들 역시 혁명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민중들의 집단 광대극 같은 모습이 배어있음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이념의 순수한 구현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가당착과 모순의 역사였다.(혁명의 끝에 민중들은 나폴레옹 '황제'에 환호하며 혁명을 종결시킨다) 허나 그 혼란을 통해 인류가 한 걸음 진전한 것 역시 사실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혁명이 내세운 거창한 이념의 아우라가 아니라, 혁명을 통해 저지른 잘못들과 숭고한 희생 양쪽 모두에서 배워야 할 교훈들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책 한 권"은 프랑스대혁명의 배경으로 한 위고의 "93년"이다. 하지만 실제 책 내용에서 위고의 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93년"도 읽어봐야겠지만, 일단은 이 책에 대한 만족감을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파리에 갈 때 이 책 한 권을 들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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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1-02-15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죠 ^^ 근데 턴님은 책 몇 권 들고 미국에 가신겁니까 ㅋㅋ 한국책 참 많이 읽으시네용 ^^

turnleft 2011-02-16 03:04   좋아요 0 | URL
분명 미국 올 땐 빈 손으로 왔는데, 어느새 책장엔 200권 가까이 꽂혀 있네요. 다들 어디서 나타나..쿨럭;;
 

돌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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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 

티벳의 독립운동과 중국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한참 국제사회가 시끄럽다. 중국의 향상된 정치/경제적 지위 앞에 국제사회가 슬그머니 침묵하는가 싶더니, 다행히 올림픽 개막식 불참이나 성화 봉송 거부 등의 형태로 항의를 표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얼마 전 유럽의회가 소속 국가들의 개막식 불참을 검토할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확실히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는 이럴 때 은근 장점이 있다. 국가 대 국가로 항의를 할 때 발생할 외교적 마찰을 유럽연합이라는 대표성을 통함으로써 피해 가고 있으니까. (아, 이건 국가건 개인이건 마찬가지 같다. 행패부리는 동네 깡패한테 혼자서는 차마 맞짱 못 뜨는 대신, 동네 사람들이 단체로 항의하면 되는 것과 비슷하달까?) 프랑스가 티벳 유혈진압을 비판하자 까르프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던 위대한 중국 인민들께서도 유럽연합이라는 거대 블럭 앞에서는 마땅한 대응책을 못 찾고 계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장점으로 유럽연합의 의의를 축소해서는 안될 일이다. 저마다의 이익을 쫓는 분리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경제 수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통합을 이뤄낸 유럽연합의 존재는 차라리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통합이 무조건 좋고 분리주의가 무작정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통합이냐 분리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판단도 담보해 주지 않는다. 강요된 통합이 초래하는 억압과 폭력은 제국주의의 전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으며, 그 중 한 제국이 붕괴하면서 촉발된 동유럽권의 내전과 인종학살은 방향성을 상실한 분리주의가 가져오는 맹목과 증오의 폐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유럽연합의 역사가 존경스러운 것은 단순히 통합을 이루었다는 외면적 결과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 체제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일방적이지 않은 공존의 조건을 창출해 냈다는, 그리고 내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당위로서의 통합이 아닌 그 과정과 방식의 총체로서의 통합이다. 가깝게는 남북한의 통일이나,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생각해보면, 이 공존의 지혜는 더욱 절실하다. 굳이 유럽연합과 같은 단일 공동체로의 통합은 아니더라도, 상호 신뢰 하에 공존할 수 있는 관계 구축은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 체제 정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오늘날 남북간의 반목과 한중일 간의 상호 견제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그만한 수준의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뢰는 커녕 불신과 증오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소설 <돌뗏목>이 발표된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가입했다. 때문에, 두 나라가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가 통째로 유럽에서 떨어져나가 대서양을 떠돈다는 소설의 설정은 그저 상상력의 산물로만 보이지 않는다. 지리적 조건은 유럽공동체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상상으로나마) 이 필요조건을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이 바로, 통합을 위한 충분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될 것이다. 어쩌면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는 유럽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유럽 대륙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제외하고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공동체로 여길 것인가?

작가의 반응은 일단 부정적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떨어져 나갔을 때 겉으로는 걱정을 하지만 다소 안도하는 듯한 유럽 각국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그런 유럽 주류 사회의 반응에 반발해 "우리도 이베리아인이다" 이라며 시위를 펼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유럽의 젊은이들이 진짜 이베리아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스스로한테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씨니컬하게 읊조린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스페인, 포르투갈)들이 하나의 유럽으로 묶일 때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거부감 같은 것들이 형성되고 표출되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쩌랴. 반도가 속수무책으로 대서양을 향해 흘러가듯, 유럽의 통합도 이미 현재진행형이 된 것을.

자, 여기부터 작가는 빙 둘러가기 시작한다. 사실, 반도가 떠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여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 소설에서는 간주곡 정도일 뿐이다. 소설은 온전히, 반도의 분리와 동시에 기이한 경험을 하기 시작한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다. 그렇다고 이들이 반도의 운명을 책임지는 영웅들인 것은 아니다. 개인은 그저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찬 개인들일 뿐. 이들의 기이한 체험은 이들이 반도의 운명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관계는 명확하지 않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이 체험은 그저 다섯 인물들이 한데 모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유럽의 통합이 어떤 식으로든 유럽 곳곳에 사는 평범한 개인들을 "유럽인" 이라는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 묶이게 했듯이 말이다.

이제 중요한건 신기한 체험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 다섯이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며 겪는 여정이다. 서로 연인이 된 두 쌍의 남녀와 한 노인이 늙은 말 한 마리가 끄는 짐마차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날 때, 이들은 작은 운명 공동체를 구성할 수 밖에 없다. 마차를 준비하고, 여비를 충당하기 위해 도시에서 옷가지를 사서 시골에 가서 팔고, 돌아가며 마차를 끌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데는, 저마다의 삶의 이력과 경험이 각자의 몫을 한다. 가난한 농사꾼의 경험이 없이는, 책상머리에서 셈을 하던 샐러리맨의 능력 없이는, 나이 든 이의 현명한 조언이 없이는 이 공동체가 원활히 움직이는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나이도 성별도 문화도 국적도 언어도 넘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관계맺음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삶의 연대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허나, 이 공동체의 결속도 완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연인이 아니라 혼자라는 이유 때문에 항상 남들에게 더 많은 것을 양보하며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노인, 페드로 오르셰의 존재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지불식간에 승인하고 있는 불평등을 드러낸다. 물론 이 현명한 노인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준 늙은 개와 산책을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랠 뿐이다. 정작 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오는건 가진 쪽이다. 오르셰의 외로움을 눈치챈 여인들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노인을 위로하자, 연인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침해받았다고 느낀 남자들이 불만을 터뜨린 것. 개인적인 "관계"의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지만, 결국 이 공동체의 해체를 먼저 주장한 것이 기득권을 "침해받은" 쪽이라는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배타적 관계에의 욕구를 그저 버려야 할 기득권으로 몰아가는것 또한 부당하다. 타자와 구분되는 "우리"를 규정하고자 하는건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문제는 그 "우리"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대서양을 오르내리던 반도가 바다 한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멈추자,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주인공 두 여인을 포함한 반도의 많은 여인들이 일제히 아이를 갖는다. 이 새로운 세대의 탄생 앞에서, 남자들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썪고 있다. 도대체 저 아이는 자기 아이일까, 아니면 페드로의 아이일까. 혈통을 명확히 하고픈 이 욕구는 현실에서는 민족 혹은 민족국가라는 범주로 확장 가능하다. 유럽의 새로운 세대를 어떤 정체성을 갖도록 키울 것인가. 그들은 저마다 포르투갈인, 프랑스인, 이태리인, 독일인으로 남을까, 아니면 하나의 "유럽인"이 될 것인가.

유럽이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분리되어 있었던 과거가 무의미해 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국가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은 더더욱 성급하다. 민족 혹은 민족국가라는 범주가 갖는 강력한 구심력은 그것이 무의미하다 강변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허나 이 구심력이 유럽인들을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가능성 또한 분명히 상존한다. 소설의 남자들이 느낀 원심력 말이다. 이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오늘날 유럽인들이 고민해야 할 숙제 아닐까. 어쩌면, 남자들의 의문에 대한 여인들의 이 간결한 대답은 그 출발점을 말해주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건 우리 아이들이라는 거야"

이제 여행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반도는 바다 한 가운데 멈춰 섰고, 우리의 주인공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반도가 움직이면서부터 땅의 진동을 느껴왔던 페드로 오르셰에게 그 진동은 여전히 계속된다. 감각으로 느끼지 않을 뿐이지, 실은 페드로만 그런게 아니다. 사람들 모두가 이제 섬나라가 되고 동서남북이 뒤바뀌어 버린 이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한다. 삶을 뒤흔드는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삶의 한 조건이 된 것이다. 유럽의 통합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유럽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도 결코 변화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설 속 여정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듯, 통합 이후의 과정들이 오히려 통합의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힘, 그리고 통합을 지속시키는 힘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주인공들의 공동체를 이끌었던 원칙들은 그 힘의 출발점이다.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와 협업의 정신 말이다. 이건 체제나 이념, 경제 수준 따위로 사람을 재단해선 불가능하다.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바라보고,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북한 사람들을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으로 생각하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우리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인식,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연대의식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시 저 막막한 대양을 홀로 떠도는 돌뗏목과 다를 바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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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이정익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

이 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조금은 부담스러운 저 제목을 지나쳐 바로 부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만화로/보는/한국/현대/인권사... 라니. 만화라는건 알겠는데, 한국 현대사라는건 알겠는데, 마지막 "인권사"라는 단어가 쉽게 혀에 감기지가 않는다. 그냥 현대사도 아닌 현대 인권사.

기본적으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이 결코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기록은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날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같은 사실도 그것이 어떠한 맥락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진리값을 가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역사는 그것을 기록한 이의 사관에 많은 부분을 기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역사는 학문의 영역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정치의 영역, 권력 투쟁의 장으로 이끌려오게 된다. 어느 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해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학문의 논리가 아닌 헤게모니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인식에 반기를 든 학파가 실증주의다. 실증주의는 객관적 사실에 최대한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맥락을 죽이고, 실제 벌어진 일들 자체를 기록하라는 주문.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복합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에 접근할 경우, 대개 우리는 건조한 팩트들 속에 매몰되어 길을 잃고 만다.

예컨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수탈한 것도 하나의 팩트고, 그들이 조선 땅에 철도를 놓고 공장을 세운 것 역시 동등한 진리치를 지닌 팩트가 된다. 이 팩트들만 놓고 보면 일제가 우리를 강점하여 수탈했다는 주장과 그들이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주장 모두 각자 나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찬가지의 논리 구조는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는 주장과 박정희가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주장이 모두 옳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실증주의는 역사의 모든 교훈을 무화시킨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아니 정확히는 옳고 그른 것은 없고 그저 모두 팩트만이 남을 뿐이라는 이 역사관은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 죄과를 가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희석시키고 만다.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는 실증주의가 현실 속에서는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특히 멀지 않은 가까운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말이다. 실증주의적 역사인식을 가장 강조하는 집단이 조선일보를 위시한 극우세력과 그들을 보위하는 지식인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때문에, "인권사"는 길을 잃은 현대사 논란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그건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럭거리며 부서지는 팩트들 사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건 인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이다. 이 책이 "인권사"라는 부제를 달고 말하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리라. 유신정권의 칼날이, 인혁당 사건의 억울한 외침이, 그리고 80년 광주의 총성이 결코 다른 사실들(경제 발전? 안정?)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없는건 바로 인간의 피가 홍건히 베어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정공법이다. 가해자는 침묵하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화해를 구걸하고, 그들 중 일부가 마치 대표인 양 용서를 선언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에 날리는 따끔한 일침이다. 만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애니메이션 전공의 작가가 그려내는 그로테스크한 화면은 그 무게를 적절히 담아낸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꽉 짜이지 못한 듯한 느낌도 주지만, 모든 것이 가벼운 이 시대에 78년생이라는 어린(?) 작가가 그려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Epilogue를 읽고 나서, 앞서 지나친 제목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라는 제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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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버티고
-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김병욱 옮김 / 황금부엉이 / ★★

Vertigo 는 "현기증, 어지럼증"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니, 이 책의 제목 [American Vertigo]를 한글로 풀자면 "현기증 나는 미국" 정도 되겠다(설마 "미국인의 현기증"은 아니겠지). 제목만 봐서는 책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프랑스 철학자(?)라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월간 애틀란틱>의 후원으로 한 세기 전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여행 여정을 다시 한 번 따라가보며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 이 책의 기획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여느 여행기와는 달리 어떤 지역, 어떤 도시라는 '장소'에 대하여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끔은 한다.) 대신, 미리 잘 계획된 스케쥴을 따라 각 지역을 돌며, 그 지역에 사는 유명 인물들을 인터뷰하며 미국의 현안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 책의 주축을 이룬다.

레비가 만난 인물들의 면면은 흥미롭다. 조지 부시부터 시작하여 힐러리와 오바마, 존 케리와 같은 정치인들부터 시작해, 샤론 스톤, 우디 앨런, 워렌 비티와 같은 헐리웃의 스타들, 원주민 운동가와 무브온 등의 시민운동가들, 빌 크리스톨,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과 같은 우파 이데올로그들, 조지 소로스 같은 금융계의 거물 등 한 권의 책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다양한 인물들을 접할 수 있다. 이만하면 현재, 그리고 미래의 미국을 이끌고 있고, 이끌 인물들을 어느 정도는 섭렵했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각각의 인물과의 만남이 너무 짧은 분량에 담겨 있어 미진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의식 지도를 대략이나마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으니까.

허나, 다분히 상층(?) 중심의 이러한 접근은 대개의 논의가 미국이 대외정책으로만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중간중간 저자가 여행 도중 접하는 미국의 여러 면면들이 단상처럼 언급이 되나, 문제는 그 고민의 깊이가 그닥 깊어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짐짓 진지한 척을 한다. 미국의 여러 시스템의 비만을 선언하거나, 미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걱정하거나, 감옥을 둘러보며 푸코를 들먹거리거나, 불법이민자를 막으면서도 불법이민자에 의해 경제 시스템이 유지되는 미국의 현재를 의심스러워 하기는 한다. 말로는.

하지만 그게 전부다. 정작 직접 만난 원주민 운동가는 그가 시오니즘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당신은 틀려먹었어"라고 결론짓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넌 (그래서 그가 그토록 걱정해 마지 않는) 불법이민자들은 아예 직접 만나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대신 엉뚱하게 스트립댄서나 매춘여성들을 업소로 찾아가서 인터뷰하는 수고는 마다하지 않으니, 이 쯤에서 저자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접근하는 기본 프레임 자체가 좀 의심스럽다. ('선정성'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당신, 미국이라는 나라에 진짜 관심이 있기는 한건가. 혹시 관심있는건 당신 나라의 반미주의자들과의 논쟁 뿐인게 아닌가.

물론 외부인으로서 미국의 대외정책은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 중 하나다. 게다가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상세히 설명해주는 미국의 대외정책 관련 분파(?)들은 그 자체로 유용한 정보와 생각할거리가 된다. 허나, 그 정도로는 왜 이런 여행이 필요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여행을 통해 배운게 아니지 않는가? 각각의 인물과의 만남이 그 인물의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도 아니요(즉, 이 책은 인터뷰집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즉,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미국의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의미 있게 분석하는 것도 아니라면(즉, 이 책은 문화비평서가 아니다), 일 년 이상 미국 곳곳을 여행한 결과물이기라기엔 좀 허망하다. 차라리 미국의 대외정책(특히 네오콘의 이데올로기들)을 제대로 파고들어, 각 진영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며 치고 받는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또 하나, 나는 이 책의, 아니 저자 레비의 가장 큰 결점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그가 책 여기저기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에 대한 일방적 지지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건, 우리가 학문이나 저널리즘에 요구하는건 균형감각이다.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그는 단 한 번도 팔레스타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도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충돌을 이야기 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충돌을 간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시오니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요구하는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그의 머리속에서는 과연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논점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걸까?

누구나 자유를, 평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언명의 진실성, 그것을 레토릭과 구분해 주는 것은 바로 철학적 일관성일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들이대는 잣대가 달라지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주장은 결코 철학자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그의 언어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저자를 '철학자'로 부르길 주저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그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있는 이 기묘한 의식의 진공 영역이, 마치 블랙홀이 빛의 경로를 굴절시키듯, 저자의 사유를, 그의 통찰력을 굴절시키고 있지 않을까? 이라크전에 반대하다면서도 결국 "사담 같은 독재자도 나쁜 애들인건 분명하잖아", "미국 네오콘들도 그렇게 꼴통들인 것만은 아냐"라는 식으로 어물쩡 말을 흐리는 이면에는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당당할 수 없는 그의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자리잡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혹평을 해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책이다. (아, 변명이 안 되고 있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를 그 이름 외에는 별로 알고 있는게 없다면, 신선함을 느낄만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도 있고, 미국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싶은 정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이러저러한 부연설명을 가뿐히 생략하시는 저자 덕분에 인터넷 검색을 아주 많이 해줘야해서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 이러나 저러나, 별점 둘 이상은 힘들겠다.(그래, 별점은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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