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지음 /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 이라는 영화가 있다. 97년에 나왔던 영화인데, 내가 본 건 아마도 99년 정도의 어느 지루한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아직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VHS를 빌려 보던 시절. 영화는 컬트적 매력이 있었지만 내가 그리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던지라 그냥 한 번 흘려 본 정도로만 기억이 난다. [매드니스]에 이어 또 한 번 멋진 호러 연기를 보여준 샘 닐 정도가 인상적이었던 듯.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문득 [이벤트 호라이즌]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순전히 한 시퀀스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벤트 호라이즌 호를 탐사하던 대원 하나가 우주선 중심에 있는 순간이동장치(?)에 빨려들어간다. 다행히 몸에 줄이 연결되어 있어 그를 끌어당겨 꺼내지만, 끌려나온 그는 별다른 외상은 없지만 완전히 넋이 나간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만 한다. 이를 보며 다른 대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그는 저 너머에서 뭘 보고 온걸까." 갑자기 [이벤트 호라이즌]을 기억 너머에서 길어올린 접점은 바로 여기였다.

2차 대전 후 기나긴 참호전에서 돌아온 병사들, 베트남의 밀림에서 돌아온 병사들 중 상당수가 육체적 외상과 별도로 어떤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증세를 호소했다. 전쟁에서 이겼는냐 졌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전쟁 이전과 같은 인격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삶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이 의문과 함께 사람들은 비로서 승리 혹은 패배라는 전쟁의 거시적 결과에서 눈을 돌려 전쟁이 개개인에게 가한 압도적인, 그리고 폭력적인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거칠게 말하면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빌리 필그림이라는 참전군인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이 범상치가 않다. 그는 시간여행을 할 줄 알아서(거창한게 아니라, 한 순간 과거에 있다가 눈을 깜빡하면 현재로 돌아와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동물원 같은 곳에 전시되기까지 한다.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빌리 자신의 정신세계를 글로 옮긴 것이라는걸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빌리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미쳤군.

그런데, "전쟁에서 미쳐서 돌아온 어느 군인의 이야기" 라고 요약하기에 그의 분열된 정신세계가 보여주는 디테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책은 결코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빌리의 시간을 오가는 여정을 쫓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충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외계인에 의한 납치라는 황당한 이야기와 전쟁 경험, 그리고 전쟁 이후의 삶을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직조하면서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탁월함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는거지..."

커트 보네거트는 이 책에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장의 뒤에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라고 읊조린다. 작은 벌레의 죽음부터 폭격에 희생당한 사람들, 주인공 아내의 비극적 죽음까지, 누가 어떻게 죽느냐에 상관없이 그렇게 가는 거란다.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달관의 경지 같기도 하고, 그저 뒤틀린 냉소 같기도 한 이 문장은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진다. 자칫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으로, 망자에 대한 모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거리두기 내지 무감각(?)은 비단 서술자의 태도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을 납치한 외계 종족 트랄팔마도어인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는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아무런 구분을 둘 필요가 없다. 슬퍼할 이유도 없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행복한 순간만을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집중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감각을 지닌 트랄팔마도어인의 입을 빌어 설파되는 이 기묘한 숙명론 혹은 순응주의는 곧 빌리의 그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고 미쳤다고 말한다.

빌리는 정말 미쳤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미쳤다. 사실 이 모든게 빌리의 망상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실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 외계인의 납치니 시간여행이니 하는 빌리의 망상을 말 그대로 망상으로 밀쳐두고, 그가 망상 속에서 외면하고 있을 현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자.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전쟁 후 평범한 삶 속에서 문득 시간여행을 하듯 드레스덴에서 폭격에 불타버린 시체가 눈 앞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건 생존의 문제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처에서 밀려드는 죽음의 홍수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의 생존 전략 말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 중 하나는 이렇다.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지배하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는 일종의 탈색효과다. 영화 [300]에서 탈색된 그래픽이 살육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켰듯이, "그렇게 가는거지"와 같은 시니컬한 유머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독자는 빌리와 같은 생존의 전략을 체득한다. 그리고 그렇게 낄낄거리며 빌리의 좌충우돌 인생을 읽다보면, 어느새 슬그머니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오는게 느껴진다. 전쟁은 거대한 부조리극이고, 인간은 그저 그 안에서 미쳐버린 광대 같은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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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0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에 동의하며 추천했어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세권쯤 읽었는데 이 책은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거든요. 이번 연휴(라고 해봤자 이제 이틀 남았네요. 앞의 3일은 술먹느라 다 써버린 ㅠㅠ)중에 이 책을 읽어봐야 겠다고, 이 리뷰를 보는 순간에는 결심했는데 정말 읽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언제나 전쟁이 개개인에게 미친 영향-말씀하신 것 처럼 전쟁전의 인격을 되찾을 수 없는-이 가장 가슴 아파요. 건물이 폭격되고 무너져내리는 그런 것 보다 전쟁을 겪기 전과 겪고 난 후에 인간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히 미친건 사람이 아니라 전쟁이에요.물론 전쟁을 일으키는게 사람이긴 하지만요.

turnleft 2011-02-05 03:36   좋아요 0 | URL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곤 하는 거겠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력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 비극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미친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고귀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효과도 큰 것 같아요. 전쟁 소설 중 명작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 아닐까요. 전에 [The Things They Carried]를 읽으면서 느꼈던 아이러니에요.

아, 커트 보네거트의 미발표 단편을 모은 책이 또 나왔어요. [While Mortals Sleep]. 한국에는 언제 번역되서 나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