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거인
- 프랑수아 플라스 글 그림 / 윤정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

우연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그 쪽을 향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부쩍 환경과 생태에 대한 책들이 손에 자주 잡히는 편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든건 수채화풍의 삽화가 맘에 들어서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담긴 책이라서 놀랐다. 가볍게 읽으면서도 부드럽고 깊이 있는 울림. 동화는 이래서 좋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책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주인공이 거인족을 만나 그들의 삶을 기록하지만, 세상에 거인족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고원에서 살아가는 거인족들은 피부로 자연과 공명하며 이야기를 하고, 밤이면 별을 보며 노래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에 반해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경배하기는 커녕, 이익을 위해 그것을 파괴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주인공은 명예욕에 취해 거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남은 평생을 어부로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뻔한 얘기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의 터전을 망칠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 요즘은 툭하면 신문지상에서 환경 오염이 심각해서 조만간 심각한 위기가 닥칠 거라는 류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지구 온난화로 닥치는 대재앙을 다룬 스펙터클한 헐리웃 영화도 수많은 사람들이 봤다고 한다. 사람마다 심각하게 느끼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아마도 모두들 어렴풋하게나마 뭔가가 문제라는걸 알고 있을거다. 근데 왜 계속 이 모양일까?

물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는 체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윤은 그 자체로 물신화된 욕망이기도 하지만, 이윤을 형성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어떤 체제이건,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인간이 지구의 진정한 재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현경 교수는 "아름다움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거"라고 말했다. 그 분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사실 정확히 모르지만, 그 말 자체는 내게는 상당히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내게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의 반대에 있는, 즉 추한 존재인가를 깨닫는데 있다고 본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정성들여 묘사하는 거인의 아름다움은,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인간의 추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일 것이다. 여전히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생명의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의 추함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반성할 때, 어쩌면 아름다움은 진정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ps. 책은 예쁜데, 사실 좀 비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폭격의 역사
-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였다. 영화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주인공들은 동막골로 향하는 미군의 폭격을 돌리기 위한 작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그들에게 육중한 비행기 엔진음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잠시 후 한쪽 하늘을 뒤덮은 비행기 무리가 지평선 쪽으로부터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 처음이었다. 언제나 나는 폭격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으로만 상상해왔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나면 잠시 후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흙먼지만이 폭격의 이미지를 구성할 뿐이었다. 그런데 (비록 가상의 체험이지만) 아래로부터, 대상의 입장에서 바라본 폭격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줬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위압감이었고, 절망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

그리고, "반딧불이의 무덤"을 읽었다. 비처럼 내리는 소이탄이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절규했다. 그들은 아마 황국의 신민으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일본의 전쟁 수행에 복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해진 폭격은 정당했을까? 다행히도, 폭격을 가한 자들도 그런 변명은 하지 않는다. 대신,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아예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 폭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함부르크는? 드레스덴은? 그 곳에게 다치고 죽어간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절망과 공포를 가한 폭력이 고의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것이 실수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선언된 언설은 대개 현실을 기만한다. 히로시마를 순식간에 쓸어버린 그 어마어마한 폭탄의 이름이 'Little Boy' 였듯이, 이 땅에 공화주의의 전통을 수십년 후퇴시킨 독재자가 '공화'당을 만들고, 광주에서 수많은 민중을 학살한 자가 '민주정의'당을 만들었듯이. 언어는 자조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과 대척점에 선다. 하지만, 그렇게 기만된 현실을 복원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다. 민간인을 향한 폭격은 없다는 선언, 폭격이 종전을 앞당겨 결국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논리, 정밀 폭격으로 군사적 목표물만을 파괴한다는 선전이 있다. 하지만 폭격의 역사는 전혀 다른 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전부터, 심지어 아직 서구인들 스스로조차 창과 화살로 전쟁을 치룰 무렵부터, 하늘로부터의 폭격은 서구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했다. 그것은 창과 화살로 무엄하게도 서구인들에 덤벼드는 야만인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단죄의 형벌이었다. 적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으로부터 안전하게 그들을 절멸시키는 힘에 대한 상상력이 서구인에게 준 카타르시스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의 권능, 다시 말해 절대적 권력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기가 발명되었다.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식민지 열강들은 세계 지도에 자로 줄을 그어가며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의 역사 서술에는 서구 열강들 사이의 전쟁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무슨 전투를 했고, 그 결과 국경선이 어떻게 그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땅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서구 열강들에게 얌전히 자신들의 땅을 헌납하고 영광스러운 노예의 길로 들어섰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토착민들과의 사이에서 서구인들이 말하는 "전쟁"은 없었다. 전쟁은 인간사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 미천한 미개인들과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종하지 않는 야만인들에게는 오직 "절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으로부터의 단죄,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불기둥이 이 땅에 내릴 지어다.

폭격은 20세기의 초반 식민지 곳곳에서 착실하게 실험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폭격의 역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구인들이 비로소 폭격에 경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 폭탄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다. 그제서야 유럽인들은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를 수 있냐고 절규했지만, 그 절규는 비서구인들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서구 중심주의의 야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사실, 폭탄이 서구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기에는 많은 논리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와 다른 타자를 지배하거나 아니면 절멸시켜야 할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가했던 폭력과 동일한 논리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격은 곧 상대에 대한 완전한 힘의 우위를 선포하는 행위였다. 미국이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을 파괴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거부한 채 대신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던 것도,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던 시점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도, 폭격의 목적 자체가 완전한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2차대전의 끝을 선언했을 때, 세계는 새로운 권능의 주체가 어디로 옮겨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계는 여전히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정당성에 대해 침묵한다. 그건 과연 피해자들이 전쟁을 시작한 이들이라서일까, 아니면 폭격을 가한 자가 승자이기 때문일까.

대답은 오늘날에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은 이라크의 어느 마을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군사적 목표만을 향한 제한적인 폭격이며 민간인 피해는 없다는 표준 멘트가 뉴스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역사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인도주의적' 폭격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때때로 양심적인 언론인들의 목숨을 건 탐사보도를 통해 진실의 일부가 드러날 때조차 우리는 잠시 놀라는 척을 할 뿐이고, 그들은 단지 실수에 의한 오폭일 뿐이라는 뻔한 멘트를 반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100년 동안 반복된 폭격의 역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망 좋은 방
-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 

이야기 하나. 언젠가 한 후배에게서 프로그래머의 정년이 40세도 채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전공을 바꿔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 때가 내 나이 25세 무렵이니 후배는 20대 초반이었다 -_-) 또 한 친구는 지금까지 배운게 이 짓(?) 밖에 없으니 일단 생계는 회사에서 월급 받는걸로 해결하고, 가욋돈을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노후를 대비해야한다고 역설한다. 다른 한 친구는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야기 둘.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에서 '도전'보다는 '안정'을 원하고 있다. 기업에서 '평생 고용' 개념이 사라져 가면서, 학생들의 직업선호도가 더욱 안정 희구 성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대학신문〉이 지난해 20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생 의식 조사에서 39.6%가 공무원·공기업을 입사 선호 1순위로 꼽았다. 1998년 8.7%에 그쳤던 것이 구제금융 사태 뒤인 2000년 13.9%를 기록했고, 2004년 이후에는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마저 제쳤다.(인터넷 한겨레 2006년 2월 19일, <<대학생들 너도나도 "공무원·공사 직원">> 기사 中)

이야기 셋. "... 그리고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준비 없이 기습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데 기습이 닥치지 않는 인생이다. 이런 종류의 비극에 대해 우리 영국의 도덕은 당연히 침묵을 지킨다. 위험을 대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사람이건 국가건 완전 군장을 갖춘 채 비틀거리며 살아 나가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E.M.포스터 『하워즈 엔즈』(1910) p.141


나는 가끔 세상을 젊음과 늙음의 투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곤 한다.(여기서 젊음과 늙음은 단지 나이에 따른 구분은 아니다) 젊음에게 세상은 새로운 신천지이며 기회의 땅이다. 이 기회의 땅에서 젊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하지만, 그 땅에 이미 터를 일구어 정착한 늙음의 저항과 경험부족에서 오는 시행착오들을 극복해야만한다. 반면 늙음은 자신들의 땅을 생소한 방식으로 바꾸어버리려는 젊음을 경계한다. 그들에게는 비록 예전의 정렬은 사라졌지만,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완숙함을 무기삼아 젊음의 서투름을 압도하려한다. 이 투쟁에서 젊음이 늙음을 압도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감내해야하고, 반대로 늙음이 젊음을 압도하면 사회는 변화의 역동성을 잃게 된다. 요컨데, 이들 사이의 투쟁이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종종 나는 우리 사회에서 늙음이 점점 젊음을 압도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젊음은 이제 실패를 너무나 두려워해서 늙음의 안정된 지식에 너무 쉽게 귀를 기울인다. 고등학생들은 취직 걱정을 하며 전공과 대학을 선택하고, 대학생들은 오랫동안 안정된 수입을 줄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하고, 직장인들은 은퇴 후의 노후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럼 도대체 우리에게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지금 내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현재'는 막연한 '미래'에 저당잡혀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희미해지고 있다. 젊음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늙음의 표정을 하며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젊음이 조로한만큼 사회도 조로해간다.

이 책 『전망 좋은 방』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0여년 전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젊음과 늙음의 투쟁으로도 읽힌다. 소설의 축을 이루는 갈등관계는 루시로 대표되는 젊음과 샬롯으로 대표되는 늙음이다. 여기서도 늙음은 끊임없이 젊음을 포섭하려 한다. 젊은은 늙음에게 반항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경험 없음에서 비롯된 불안은 어느 틈에 젊음으로 하여금 늙음을 닮아가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경제적 불안감이라면, 빅토리아 시대의 젊음들을 짓누른건 과거의 권위들, 즉 종교와 관습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투쟁의 법칙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늙음은 결코 젊음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이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이들은 늙음이 아니라 젊음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늙음은 젊음과 헤게모니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젊음의 투박한 열정을 다독이면서도 그들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가도록 격려한다. 바로 조지의 아버지 에머슨 씨처럼. 혼란에 빠진 루시를 구원하는 사람이 열정에 가득찬 젊음(조지)이 아니라, 사려 깊은 늙음(에머슨 씨)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사람이 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젊은가 혹은 늙은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무엇이 현명한가를 깨닫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자!! 결국 이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건 젊음이다. 젊음이 젊음답지 못한건 정말 슬픈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식의 발견
-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 

'지식의 발견'은 내게 있어 '한국 지식인의 발견'으로 읽히는 책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텐데, 나 같은 경우는 한국 저자들의 책들보다는 외국 저자들의 책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건 한편으로는 내 자신의 지식/가치 체계가 서구 담론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저자들의 저작들은 불가피하게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 속의 복잡한 역학구도 안에 배치되어 읽힐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기가 좀 더 골치아프다는 이유도 있다.(후자는 사실 일종의 현실도피다 -_-) 여하간, 이런 이유로 한국 저자들의 책을 등한시했던 나로서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책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책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은 서구 담론의 단순한 수입에서 벗어나 한국적 맥락의 담론을 찾고자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한국의 인문/사회학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학계를 이끌만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서구의 담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소화과정을 통해 한국적 맥락을 찾고자하는 시도들이 여러 지식인들을 통해 꾸준히 시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탄스러운 것은, 이들의 저작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현직기자다운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덧붙여 더욱 풍성하게 해석해내는 저자의 시선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그냥 꿰는 정도가 아니라, 구슬의 장단점을 잘 가려내어 절묘하게 배열하는 장인의 솜씨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책의 시작은 그리 좋지 못했다.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앞부분에서 저자는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출발한다. 학문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글에서 '주구', '배신자', '비열한' 등과 같은 다분히 선동적인 수사들이 동원되는 것도 불편한 느낌을 주었고, 박노자 교수와의 논쟁에서는 매우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는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논쟁의 핵심을 찾아 부딛히기보다는 상대(박노자)의 주장을 비껴나가고 있다. 사실 이건 꼭 저자인 고명섭에게서만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들을 때 종종 느끼는 점이기도 하다. 어떤 이념이건 그것이 현실 속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이념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 속의 모순에 기반하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양코자 하여야 한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주장들의 논거는 멀게는 일제시대부터 가깝게는 80년대까지의 외세의존적 군사독재 정권에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민족주의의 '현재적' 의의와 한계를 지적하는 박노자 교수의 글에 제대로 답변할 수 없음은 필연적 결과로 보인다.

물론 저자가 민족주의를 옹호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목표는 따로 있을 것이다. 글 중간중간 저자는 탈근대 담론을 내세우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보수 세력과 불순한 동거를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계간 <<역사비평>>의 비판 참조) 탈근대 담론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들어 형성된 것이며 민족주의 역시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는 분석(B. 엔더슨,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기반하여 민족주의를 근대의 한 부분, 즉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탈근대 담론들은 과거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아시아 지역의 식민화를 정당화했던 논리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그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친일 행위가 탈근대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한 일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명섭은 서중석과 김동춘의 글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러한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문제는, 저자가 '과거의' 친일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의'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 민족주의의 '현재적' 의의를 별다른 검증 없이 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데, 고명섭은 탈근대 담론의 민족주의론은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 형성된 이론일 뿐이며, 우리 민족은 근대 이전부터 균질적인 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주의 개념을 그대로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와 친미사대적인 독재정권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 속에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기능을 해 왔음을 간과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한국적 상황에 맞게 새롭게 고찰해야 한다는 고명섭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탈민족주의 담론들이라고 해서 서구 이론에 기대 무작정 민족은 허구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탈민족주의 담론들은 단일 민족이라는 지배적 인식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사를 더욱 세밀하게 검토하기도 한다. 따라서 민족/민족주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탈민족 담론을 서구의 것으로 평가절하할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논쟁을 통해 심화되어야 할 터인데, 저자는 이러한 논의 없이 일부 탈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행보를 근거로 탈근대 담론 전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의 긍정적 기능 역시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 가능하다.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보여준 비타협적 투쟁을 근거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는 가장 긍정적인 순간에조차 민족주의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매개로 삼아 '국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하고자하는 열망과 직결되어 있었으며, 80년대의 반미투쟁 역시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지향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때문에 내게는 민족주의 세력의 비타협적인 투쟁 역시 정통성을 잃은 지배세력에 강점되어 왜곡된, 외형만 근대를 취한 국가를 대신하여,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시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국 정치사의 발전에 민족주의 세력의 투쟁이 큰 기여를 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민족주의 개념의 정당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서평집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개하는 책의 논점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 책만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중간중간 간접적으로 읽히는 저자의 생각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엄밀한 개념 정립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책의 1/3을 할애할만큼 큰 비중을 가지고 다룰 주제라면, 반대쪽 의견도 진지하게 검토하며 고민하는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식의 발견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화이트 노이즈
-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 ★★★★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케이블 TV와 인터넷, 핸드폰과 떨어져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핸드폰과 일상 생활을 연결시킨 모 통신사의 '현대생활백서' 광고 시리즈가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오른편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으며, TV에서는 스포츠 중계가 나오고 있고, 나는 인터넷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테크놀로지를 논할 때 우리는 비데나 에어콘을 예로 들지 않는다.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킨 기술들은 인류 역사상 수도 없이 많았지만, 아무도 성급하게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테크놀로지가 압도적인 이유는 과거의 기술들과 달리 그것이 우리가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자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TV, 인터넷, 핸드폰. 그 외에 당신은 무엇을 통해 세상을 만나는가?(물론, 이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미국인 가정 역시 매스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접한다. TV와 라디오, 타블로이드 신문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저녁 식탁에서 아이들은 서로가 새로 획득한 정보들을 과시한다. 대화가 멈춘 빈 공간을 채우듯 TV와 라디오는 계속 정보를 내뱉는다. 참으로 정보로 충만한 삶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충만함 속에 안도한다.

하지만, 환상이었다. 재난이 닥치자 그 모든 정보는 뜨내기 소문과 다를 바 없었고, 그들에게 남겨진 현실은 그들이 정작 아/무/것/도/모/른/다 라는 냉혹함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가장 현명한 행동인지 결정할 지혜는 결코 정보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습 위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앞에 허둥대던 미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정보의 범람 속에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지배하는건 두려움이다. 그들이 획득한 정보 속에 그들 삶의 고민을 해결해 줄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삶은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쇼핑을 하고, 섹스를 하고, 정신상담을 받지만, 변하는건 아무 것도 없다. 지혜는 지식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에 정복당한 우리 삶의 현주소, 우리 문명의 현주소이다.

White Noise :【물리】(모든 가청(可聽) 주파수를 포함하는) 백색 소음 (출처 : 네이버 사전)

White Noise는 본래 물리학 용어로서 모든 주파수대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정보는 우리 주변을 언제나 가득 채워 하얀 소음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그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우리에게 유용한 지식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정보의 홍수 속에 길을 잃은 셈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 문명의 아이러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1-02-1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히리의 [지옥 천국]을 읽고난 후의 턴님 감상을 들었을 때도 느낀건데요, 턴님과 저는 같은 책을 읽고 반응하는 부분이 아주 다른것 같아요. 물론 같을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 책, [화이트 노이즈]를 읽고 예상하지 못한 위안을 얻었거든요. 책 속의 여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아주 심하게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 아직 시판되지도 않는 약의 임상실험자가 되고요. 저 역시 가끔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는데, 혹시 이건 나에게 어떤 '이상한' 성향이 있는건 아닐까 스스로 고민스러운 부분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걸 알게되니까 묘하게 위안이 되더라구요. 책 속의 여자는 신문의 광고를 보고 찾아가죠. 그 광고가 나왔다는건 그런 고민을(죽음에 대한 두려움)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가 될테구요. 그리고 여자가 그 약을 먹었다는 걸 알게됐을 때 남편도 그러잖아요. 자신도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그게 몹시도 마음에 들었어요. 스스로 이상한가 싶어서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는 일을 이제는 좀 덜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turnleft 2011-02-11 13:3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책이 좋잖아요. 맥락이 풍부하고, 저마다 다른 곳에서 삘(?)을 받을 수 있다는거. 영화도 훌륭한 텍스트지만 책만 못한 까닭도 거기 있지 않을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니까, 혹시 "스위치"란 영화 봤어요? 제니퍼 애니스톤이 주연으로 나온.. 거기 나오는 꼬마가 죽음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죠. 근데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그러니까, 그런걸로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