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화
- 아흐멧 알탄 지음 / 이난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뱀의 몸을 한 채 첫날밤마다 신부를 잡아먹는 왕자. 처녀는 마흔 겹의 옷을 입고 왕자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왕자에게도 옷을 벗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뱀이 마흔 번의 허물을 멋자,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본래의 왕자가 나타나 진정한 사랑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어렸을 때 들어본(아마도 읽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야 아마도 좀 무서운, 하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행복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위험한 동화>는 이 책 전체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서 베린이 주인공 "나"에게 뱀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동화가 왜 "위험"한지, 그리고 이 동화가 전체 스토리와 갖는 연관성을 따져보면, 이 책은 위 동화의 현대적 해석이라 부를만하다. 물론 이는 아흐멧 알탄이라는 한 개인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터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작가 한 개인을 넘어 그 사회,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해석으로서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마광수나 장정일의 소설들이 당시 한국 사회의 한 징후를 포착해내며 아이콘이 된 것처럼 말이다.

어딘가 잘 정리된 논문 또는 책이 있을 것 같은데, "사랑"의 개념이 시대와 함께 변해온 것은 분명하다. 예컨데, 근대가 "개인"을 탄생시킨 이래, 사랑은 개인의 권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기능해 왔다. (오늘날까지도 종종 통속극 등에서 활용되고 있듯이) 전근대의 유물인 규범과 질서에 맞서 사랑을 쟁취하는 개인의 이야기는 근대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랑은 불가침의 이상향, 절대적 가치를 지닌 미덕으로 숭배되어 왔다. 그러니, 이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의 시대이기도 한 셈이다.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시련이 대립구도를 이루며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야 마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시대.

그러나, 현대사회의 성립은 낭만적 사랑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 버린다. 파편화된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한 개인은 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한다. 가면 속의 개인은 고독하다.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과연 날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것이 진짜 존재하기는 할까. 서로의 진심은 가면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끊어진 소통의 자리에는 앙상한 성애만이 남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몸부림. 그것이 현대인의 사랑을 규정한다.

소설 속 베린은 끊임없이 "나"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왕자가 허물을 벗듯이 가면을 벗고 진실한 자신을 내보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허나 가면 속에서 드러난 얼굴이 또 다른 가면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면을 벗겨야 상대의 본모습이 드러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왕자가 얼마나 많은 허물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면, 과연 처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칫 나 혼자만 발가벗은채 이 위선의 게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가면을 벗는 손짓을 더욱 느리게한다.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의 소용돌이, 그것이 현대인의 사랑인 셈이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으라 말하는 이 동화는 정녕 "위험한" 동화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마, 이 소설에 대한 보다 깊은 분석은 90년대라는 콘텍스트 안에 놓인 터키 사회를 함께 바라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직 남아있던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가 현실 속에서는 끊임없이 배반당하면서 사람들이 느꼈던 당혹감과 혼란을 적절히 짚어내었기에 사회적 이슈가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90년대 한국 사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노골적 성애 묘사가 사회적 금기에 균열을 내면서 본질을 벗어난 논쟁만 유발했다는 점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를 읽어내기 좋은 텍스트지만, 아무래도 2009년에 읽기엔 조금 뒤처진 소설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디지털 시대의 사랑은 또 다른 느낌일테니 말이다.

ps. 이 책의 초판 인쇄일을 보고 조금 놀랐다. 97년. 오르한 파묵의 노벨상 수상과 함께 국내에 잠깐 불었던 터키 소설 열풍에 재출간되었거니 했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터키어를 전공하고 터키 소설을 번역해온 역자에겐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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