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의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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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 / 현대문학 / ★★★★★

오랜만에 읽는 미셸 투르니에.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흡혈귀의 비상"이라는 제목을 보며 신화를 변주하는 또 다른 소설을 기대하며 그답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이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라는 부제와 함께 묶이면 일단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흡혈귀라니. 호러 소설이라도 읽은걸까.

...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 - 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 - 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저자 서문에 담긴 이 흡혈귀의 비유는 (비록 피를 빨리는 입장이긴 하지만) 독자의 지위를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격상시켜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에게 제법 으쓱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내 이 기분은 위화감으로 바뀌기 마련인데, 미셸 투르니에가 몸소 보여주는 독서는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 독서 같은 나같은 소시민적 독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걸 깨닫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넘나들고 각 작가의 생애와 유럽의 역사를 아우르는 '읽기'라니!

차라리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쓰기'에 가깝다. 유럽 근현대의 거장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재로 삼아 미셸 투르니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흡혈귀는 책이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 자신이 되지 않을까. 거꾸로 그들 책에서 피를 빨아 자신의 세계를 살찌우고 있으니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책을 읽고 나면 유럽 문학에 대해서보다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에 대해 더 풍성하게 알게 되는 느낌이 든다. 예컨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대립항들은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진짜 이 번역제목 맘에 안 들지만)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내용들이 다시 서술되고 있으며,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회고에서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우연한 일이겠지만, "독서 노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Note de Lecture"인데, 여기서 영어 "reading"에 해당하는 단어 "lecture"는 영어의 "lecture", 즉 "강의"라는 단어와 철자가 같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마치 미셸 투르니에에게서 유럽 문학사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교재에 해당하는 각 원전들을 미리 읽는다면 더욱 풍성한 강의가 될 것이다. 물론 언제나처럼 불성실한 학생인 나는 교재도 읽어보지 않고 수업을 들어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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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 오르한 파묵 지음 / 민음사 / ★★★★★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세계는 오직 주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세계로 이해했듯이,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中' 이라고 이해했듯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이 "세계"를 지구로 한정시켜 이해하듯이. 이 집단적 의식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처럼 끊임없는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가득한건 이 저마다의 세계들이 서로 부딛히고 부서지기 때문이리라.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학교에 잡혀 있었고, 그저 약간의 일탈로 세상에 복수라도 한 양 의기양양했던 나의 세계는 얼마나 작았던가. 그 작은 세계의 의기양양했던 개구리 왕은 우물 밖 세상을 만나자 이내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계는 눈부셨다. 비록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작은 개구리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불안과 모험을 감내할만큼 새로운 세계는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내 옛 왕국은 이미 새로운 세계의 빛에 녹아내린지 오래. 나는 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기, 또 하나의 세계가 방금 무너졌다. 책 한 권이 인생 전체를 흔들었음을 고백하는 이 강렬하고도 간결한 두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 "새로운 인생"은 우리를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여정 속으로 이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 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인공이 찾고자 한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허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을 다른 성장소설들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이다.

때로, 중요한건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일 때가 있다. 샤르트르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추구한 것은 지식인은 이러저러하다는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였다. 답을 내놓는 순간, 그것은 관습이 되고 규범이 된다. 때문에, 질문하기를 멈추는 순간 진리는 화석이 되어 바스러진다. 진리는 끊임없이 부정되고 재규정되는 과정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에서 작가는 바로 삶이 이러저러하다는 규정 대신, 삶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어떤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는 그 반대말을 보면 된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메는 주인공과 자린, 마흐메트의 대척점에는 나린 박사가 서 있다. 그는 존중받을 만한 삶을 이루었고, 스스로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믿는 인물이다.

"...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 (중략)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이 말은 나린 박사의 자아도취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가족에게도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그의 아들이 왜 거부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준수한 외모에 좋은 머리를 가진데다가 풍족한 경제적 삶과 아버지(나린 박사)의 지혜까지 상속받을 수 있었던(나린 박사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마흐메트가,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고 헤메이는 것은 나린 박사에게는 헛된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린 박사는 바로 모든 젊은이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들 역시 한 때 젊은이였고 새로운 인생에 목말라했었지만, 이제 그들은 그 젊은 날의 열병을 극복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어느새 아버지의 입에서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젊은 날의 아픔을, 그 젊은 날의 방황을 이겨낸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함께 자부심이 묻어나온다. 이해한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아픔과 혼돈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당신들의 사랑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건 답이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모든게 완벽하고 모든게 갖추어진 미래가 혹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버스 창문 너머로 흐르던 그 불빛을, 잠든 자린의 어깨로 흘러내리던 그 머리칼을, 점멸하는 TV 불빛으로 어른거리던 고뇌의 그림자들을, 그 모든 것을 그저 헛된 지난날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고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인생의 순간들을 피하기 위해 그저 한 곳에 안전하게 정착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운 인생의 빛을 보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소설에서도, 새로운 인생의 빛을 강력하게 내비추던 그 책은 아버지의 친구가 몇 권의 책을 짜집기하듯 베낀 것이었고, "새로운 인생" 캬라멜의 천사는 그저 마를렌 디트리히의 어느 영화 제목에서 나온 단어였을 뿐이었다. 지난 날의 열정도, 그 뜨거웠던 사랑도, 운명같던 우연들도 뒤돌아보면 그렇게 그저 하나의 그림자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내 삶 그 자체였다. 그게 당신들의 삶 자체였다. 그 뜨거웠던 모색을 마감하고 결론에 안착하는 순간, 다시 말해 주인공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버스는 멈췄다. 그렇게, 삶도 멈췄다.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나는 비록 그 세계를 떠났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나의 한 부분이다. 사랑했던 이들이여, 그대들도 나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여전히,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사랑을 찾는 모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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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 

내가 '키치'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건 밀란 쿤델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였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키치를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무슨 뜻인지 찾아보려는 노력도 부재했음을 고백해야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는 인터넷이라는게 보급이 안 되어 있던 시기라서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도서관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서관이라고는 시험 때 열람실에만 가던 그 시절에는 궁금한게 생겼다고 바로 찾아보는건 불가능-_-한 일이었다. 그나마 우연히 알게된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같은 책은 너무 어려워서 조금 읽다가 그냥 접었던 기억이 난다.

아뭏든 그 후로도 여기저기서 키치의 이름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나, 여전히 어렴풋하게만 그 뜻을 파악하고 있었으니(이젠 인터넷도 있는데 말이다!!) 나의 지적 나태함도 참 심각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단어 하나의 뜻을 무려 10년이 넘게 모른채 방치해두고 있었다니. 그래서 이 책을 봤을때 옳다쿠나 싶어 집어들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도서 리스트에 집어넣었다 -_-) 그간의 게으름을 이 책 한 권으로 만회해 보려는 얄팍한 심성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모르는건 알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변명은 여기까지 해 두고, 이제 책 안으로 들어가보자. 목차를 보면 이 책은 크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치에 대한 개괄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 전반부(1장 '키치란 무엇인가')와 키치를 극복하기 위해 근현대 예술이 밟아온 여로를 개괄하는 후반부(2장 '키치 넘어서기'와 3장 '키치 해체하기')로 나뉠 수 있다. 4장은 앞의 내용에 대한 정리에 해당한다.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키치 자체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덕분에 이 책은 (특히)현대 예술에 대한 훌륭한 소개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나 현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키치라는 개념 자체에 충실할 필요가 있겠다.

키치라는 단어에는 몇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본래 키치는 19세기 독일에서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단어이다. 당시 자본주의의 정착과 함께 새로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와 프티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과거 귀족 계급과 같은 문화적 전통은 부재했다. 이들은 귀족 계급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변을 예술 작품들로 채우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소비햇던 것은 사실상 예술 자체가 아니라 예술을 소비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이었다. 키치는 이들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허위의식에 기대어 번식했던, 순수 예술을 가장한 기만적인 통속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예술은 크게 순수 예술과 통속 예술로 나뉠 수 있다. 순수 예술은 세계와 삶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며 표현으로, 감상자에게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세계와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듯이, 순수 예술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순수 예술은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식을 필요로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이는 감상자가 순수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것을 새로운 긴장과 도전의 계기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일상의 힘든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는 이와 같은 순수 예술을 즐긴다는건 사치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여흥으로서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속 예술이다. 통속 예술에게는 진리보다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람들은 순수하게 쾌락을 위해 통속 예술을 소비할 뿐이다. 하지만, 통속 예술은 스스로에게 쾌락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는다. 통속 예술은 세계란 무엇이라고 삶이란 이런 거라고 짐짓 진지한 척 설교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통속 예술은 차라리 순수하고 솔직하다.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다. 키치는 의미를 가장한다. 감상자의 허위의식에 아첨하고 그들의 자의식을 만족시켜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예술, 그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는 순수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만, 순수 예술이 감상자를 밀어내고 스스로의 진리를 구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감상자의 기호를 따른다. 때문에 키치는 달콤하다. 감상자는 키치를 통해 손쉽게 자신이 고상한 예술행위를 감상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여기에서 키치의 의미는 확장된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키치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소비하는 태도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감상자는 연극 작품을 보면서 작품 속에 담긴 슬픔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따라서 예술 감상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소, 즉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은 지엽적인 것이 되고 예술작품은 단지 자기 감상을 위한 하나의 기회로 전락한다." 아무리 심오한 깊이를 담은 예술 작품도 키치적 태도에 사로잡힌 감상자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감상자들이 많을 수록 그들에게 거짓 예술을 팔아먹는 키치 장사꾼들 역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점점 키치들이 범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최근 모 대기업의 전자제품 광고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명품이 명화 속으로 들어갔다'며 명화들 속에 자신들의 제품 사진을 심어놓고 있다. 이 광고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를 명화들이 가치고 있는 예술적 가치로 포장한다. 이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자극하여 자신의 제품들을 소비하면 명화들과 같은 수준 높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거짓 환상을 심어준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그 환상을 이용해 제품을 팔아먹는 것이다.

키치가 범람하면서 그것은 단지 예술에 대한 태도나 예술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스며든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없는 의미를 가장하는 삶의 태도들이 모두 키치가 된다. 거짓과 기만이 우리의 삶을 점령한다. 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확신한다. 아니, 확신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적 삶에서는 무엇을 하든 그것은 곧 그 행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슬픔이나 우울, 절망까지도 키치가 된다. 많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실제 삶의 고달픔보다는 자살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자살하곤 한다. 현대인의 삶은 이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키치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바로 이 키치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삶을 가득 채운 거짓을 걷어내고 진리의 빛을 회복하는 것이 예술의 소명 아니었던가.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시대의식도 바뀌고, 예술이 드러내야 하는 진리도 바뀐다. 단지 과거의 예술을 오늘날에 되살리는 것은 또 다른 키치가 될 뿐이다. 예술가들은 자기 시대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했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거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사조들은 이 모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객관적 세계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했던 경험주의 철학은 예술가의 주관적 인상을 강조하는 인상주의 미술을 낳았고, 오늘날의 해체 철학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보면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현대 예술이 하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현대 예술을 설명하는 부분까지 오면, 어쩐지 저자의 관심은 키치 자체로부터 멀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일방적인 예찬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리상, 포스트모더니즘은 키치 자체를 불가피한 무엇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키치를 가지고 노는데(왕을 가지고 노는거야!!),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키치를 해체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내게 이 논리는 어째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왕따 당하는 학생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는거라고 믿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도야 어쨌든, 현실에서 여전히 우리는 키치에 압도당하고 있지 않은가? 키치를 비웃는다고 키치가 해체되는건 아니다.

거꾸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이미 하나의 키치가 되고 있기도 하다.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소칼이 드러낸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 내용보다는 스타일 자체가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이내 키치가 되어 우리를 포위한다. 심지어 키치를 간파하는 자신의 이미지도 또 다른 키치가 되지 않는가.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신의 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다시 말해, 해답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해답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키치화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키치로 가득차 있다는 깨달음 그 자체이다. 사실, 우리는 키치를 소비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우리 삶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느냐의 여부가 아닐까. 우리의 인생이 어떤 해답에 도달했다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를 되짚어보는 끊임없는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키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제 쿤델라가 무슨 의미로 키치를 말했는지는 알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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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 

내가 이 만화를 처음 본건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신림동 어느 지하 만화방에서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였던걸로 기억한다. 정확한 장소나 시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만화방에 어울리는 나른함으로 책을 뒤적이던 내게 이 만화가 안겨주었던 예상치못한 그 얼얼한 충격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덕분에, 그 후로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만화는 내 추천 도서 목록에서 절대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만화에 이토록 높은 점수를 주게 만든 것일까? 10여년만에 다시 읽는 <기생수>에서는 확실히 처음의 신선한 충격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측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 그림체가 특별히 멋지거나 작화 수준이 아주 높은 만화는 아니었다. 박진감 있는 전개와 스토리의 완결성은 훌륭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만화에 비해 아주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외부생물이 사람의 몸을 차지해 조종한다는 설정도 SF에서 워낙 애용(?)되는 소재라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얼얼하다.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유에서 한 발짝 더 내딛어 절벽을 향해가는 아찔함은.

무슨 소리냐고? 사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결론짓기 어려운 질문은 대충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걸 깨닫게 된다. 대표적으로, 나는 우리가 어떤 권리로 먹기 위해 동물들을 사육하고 살해하는가를 묻는 채식주의자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동물들도 죽고 싶어하지 않으며 하물며 인간의 먹거리가 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권리로 그들의 생명을 우리의 먹거리로 재단하는가. 물론 반대의 의견도 있다. 육식 자체가 죄는 아니다. 인간도 생명이고 먹고 먹히는 생명의 순환고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토끼의 생명을 재단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무지보다는 (다소 의식적인) 망각에 있다. 나에게 인간이 동물들의 생명을 재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염치는 차마 없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되기엔 너무나 고기 매니아인 나로서는 이 양쪽의 의견 사이에서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잊는 쪽을 택한다. 어차피 양쪽 사이에 권력을 가진 쪽은 인간이고, 나는 침묵함으로써 권력을 가진 쪽에 슬쩍 무임승차를 하는 셈이다. 이게 권력관계가 동작하는 방식이며, 옹호와 침묵은 모두 권력관계를 떠받치는 양대 축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적극적인 옹호이던 수동적인 침묵이던 권력관계에 따른 일방성을 인정하는 당신은, 만약 이 권력관계가 뒤집힌다면 얌전히 희생되는 쪽을 택하겠는가? 혹은, 죽고 싶지 않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에도 당신에겐 동물들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하겠는가? 만화 <기생수>가 건드리는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권력관계의 우위에 서 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있었던 질문을 우리 눈 앞에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가정으로 '상상'해야 하는 문제를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생생하게 우리에게 제시해준다는 장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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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는 기생수 "타무라 료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날 문득 누군가 인간의 수가 줄어든다면 더 많은 나무가 살아남고 지구가 더 깨끗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밤송이 같은 것이 떨어지더니 그 안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나온다. 이 생물은 인간의 몸에 침투해 뇌를 포함한 머리 부분을 자신의 조직으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의 몸을 차지하게 된다. 몸은 인간이되 머리는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그래서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언제든 강력한 살상무기로 변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진 기생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미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집을 짓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이들에게도 누군가의 명령과도 같은 본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종」을 잡아먹어라" 라는 명령이. 이들은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다.

인간을 잡아먹는 기생수.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인다는 설정은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일 뿐, 중요한건 인간보다 강하며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존재를 설정한다는데 있다. 이쯤에서 왕년의 외화 [V]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V]는 (인간을 잡아먹는) 외계인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영웅담을 다루면서 적과 아군, 혹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치중해 평범한 SF 물 이상의 깊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반면 <기생수>에서는 포식자로서의 기생수의 위치(vs. 인간)가 포식자로서의 인간의 위치(vs. 동물)와 비교되면서, 양쪽의 입장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과연 기생수들은 없애야만 할 적인가? 그렇다면 인간 역시 동물들에게 마찬가지의 존재 아닐까? 와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차이를 가능하게 한 건, 주인공 신이치와 기생수의 기묘한 공존 덕분이다. 신이치의 몸에 침입한 기생수(오른손이)는 우연히 신이치의 뇌를 차지하는데 실패하고 그의 오른쪽 팔에 기생하게 된다. 오른팔에 자리잡은 기생수는 인간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이 신이치의 혈액에서 직접 양분을 흡수해 살아갈 수 있지만, 어쨌거나 숙주인 신이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신이치로서도 졸지에 오른팔이 사라진데다 훨씬 월등한 힘을 지닌 기생수를 떼어낼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기생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불가피한 공존이야말로 이들 사이의 가장 큰 장점이 된다. 상대를 물리쳐야 할 적으로만 바라보는게 아니라 공존해야할 동반자로 인정하는 순간, 대화가 시작되고, 상대에 대한 이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를 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는 사고의 지평을 넓혀준다. 포식자로서의 기생수를 이해한다는건 포식자로서의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먹히는 입장의 인간을 이해한다는건 먹히는 입장의 동물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가 문제를 단순화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해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허나, 단순한 해법이 정답인 경우는 거의 없다. 양반과 상놈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그것은 인식의 혁명적인 변화와 함께 사회 제도의 총체적 재구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복잡한 일이었을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 않는가. 인간-동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반드시 공존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일방적 관계 역시 답은 아니다. 그 공존의 방식을 찾는 것, 그것이 인간이 지구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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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0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지금 구해서 읽을 수 있는지 검색해봐야 겠어요.

turnleft 2011-02-09 14:34   좋아요 0 | URL
예 엄청 재밌어요.. 라고 말하지만 취향도 좀 타는 것 같더라구요.
애장판이 나왔을 정도니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거에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아리엘 도르프만 외 지음, 김성오 옮김 / 새물결 / ★★★★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 다큐멘터리 영화 "칠레전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속에 묻어나던 자랑스러움과 자긍심은 아마도 우리네 선배들이 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요,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를 살해하고 자신들의 민중 정부를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심정은 또한 80년 광주학살을 지켜보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첩되는 기억은 비단 민중의 모습만이 아니다. 항상 고상한 척 질서와 비폭력을 강조하는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워지는 바로 그 순간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을 자행하는 자로 돌변한다는 사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짧았던 아옌데 정권 기간, 키만투라는 정부 산하 출판 조직을 통해 펼쳐낸 일련의 의식 개혁 운동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아옌데 정권 이전의 칠레 정치/경제/문화는 철저하게 미국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때문에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 과정에서 이러한 문화적 종속성을 타파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그 중에서도 디즈니의 만화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상을 설파하고 제 3세계의 아이들(즉, 자라나 제 3세계의 민중이 되는)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자화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더더욱 피해갈 수 없는 주제였으리라.(물론 만약 우파가 디즈니의 만화를 이용하여 아옌데 정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 책도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 ) 어쨌거나 이 책으로 인해 당시 칠레에서는 도널드 덕이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아이콘처럼 되어버렸는데, "순수"의 이름으로 디즈니를 옹호한 이들이 바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지한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 일찍 방영하던 만화동산의 열렬한 애청자였던 나로서는 이 책에서 벗겨내는 도널드 덕의 가면은 꽤나 신선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세계는 실은 기이한 가족관계와 제3세계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찬 도착적 세계였음을 재발견할 수 있는데, 그 세계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만화라는 형식의 덕이 컷을 것 같다. 여기에는 만화는 아이들의 세계라는, 때문에 순수한 영역이라는 환상이 한 몫을 한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아동문학 비평의 핵심적 주제가 드러나는데, 아동문학의 생산자는 어른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어른의 가치관이 투사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수행하는 디즈니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동 문학이 결코 당연하게 "아동"들의 세계는 아님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깨달음이 아닐까.

사실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텍스트만이 유의미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정치적인 올바름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늘날 어느 대중 매체의 텍스트가 이러한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때문에 디즈니에 대한 이 책의 해석에 대해서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버가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왜 꼭 짚어서 디즈니냐"라는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왜 하필 나만.." 이라는 류의 변명은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아저씨부터 성희롱 발언으로 지탄받는 어느 대학 교수까지 폭넓게 애용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보통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후렴구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우선 디즈니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고, 둘째로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현실권력 관계, 즉 문화 제국주의라는 논점에 비추어볼 때 디즈니의 죄과는 유독 무겁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문화 제국주의의 가장 큰 병폐는 그 문화를 수용하는 제3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자본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문화는 매끈한 세련미로 치장하여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무장해제 시키는데, 그렇게 무장해제된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텍스트의 시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백인의 눈으로 유색인을 보고,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보고, 미국의 눈으로 제3세계를 보는 것이다. 미국 문화의 전파자들은 항상 문화의 교류(단어 자체는 쌍방향적이지만, 실은 단방향으로 주입된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데, 제3세계의 민중들은 결국 저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데에도 나름의 고통과 고난, 슬픔이 있다는 사실 정도를 이해하게 될 뿐이다. 저항은 순화되고, 지배는 영속화된다.

디즈니는 바로 그 전형이다. 디즈니의 만화에 등장하는 제3세계는 순진한 원주민이거나 잔인한 테러리스트들 뿐인데, 도널드가 원주민들로부터 금은보화를 가져가는 것은 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원주민들의 증여요, 테러리스트들을 혼내주는 것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어를 대체하자면, 미국이 제3세계로부터 부를 가져가는 것은 제3세계 사람들이 그 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요, 제3세계와 전쟁을 하는 것은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세계인 만화는 정치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이 '순수'해야 한다고? 디즈니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 변명이야 말로, 디즈니가 공격받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가 된다.

물론, 이제 한국에서 디즈니의 만화들은 더 이상 주류라고 할 수가 없다. 외형상 충무로의 영화들은 헐리웃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소비되는 미국 문화에서도 사람들은 디즈니보다는 디즈니의 캐릭터들을 비웃는 슈렉에 열광했다. 아직도 미국 문화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갖추기 시작한 오늘날,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동남아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의 문화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적한 박노자 교수의 글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 교류의 일방성과 내용(박노자 교수의 지적처럼,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사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 상류층의 '세련된' 소비생활이 아닐까)을 볼 때, 한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 교류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류를 다루는 신문 기사들 역시 그 안에 우월감과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주판 소리만 요란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어느 틈에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도널드 덕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서술에 중간 중간 들어가있는 삽화로 인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심 주제와는 별개로, 책 서두의 서문에서는 디즈니 월드의 만화 제작 방식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으며, 끝부분의 '공정사용'과 관련된 글에서 다루는 저작권을 둘러싼 법정 논쟁(비판/비평을 위해 만화를 무단전제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인가?)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를 보던 자신을 떠올리며 책을 읽는다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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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0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덕이란 만화를 본 기억은 나지만 그 만화를 내가 어떻게 봤었는지는(그러니까 보면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생각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요. 아마도 캐릭터만 기억나는 것 같아요. 전 만화를 유독 기억 못하는 것 같은데 사실 캔디에 테리우스와 안소니가 나온다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캔디엔..캔디만 나왔던게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일요일 아침마다 캔디를 봤는데 어쩜 저에게는 안소니와 테리우스에 대한 기억이 전무할까요.

그런 도널드 덕이 이런 내용을 숨기고 있었다니 흥미로운데요. 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turnleft 2011-02-09 14:38   좋아요 0 | URL
오와, 이 길고 지루한 리뷰를 꼼꼼히 읽고 계신 겁니까.. ^^;

음.. 아마도 다락방님이 일요일 아침에 만화를 본건 아주 어렸을 때 뿐이었던 것 같아요. 도널드 덕과 조카들 나오는 만화는 캔디 세대보다는 좀 더 나중이었던 것 같거든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도 간간히 봤던 듯..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