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타운
- 가브리엘 제빈 지음, 서현정 옮김 / 북폴리오 / ★★★★ 

연애편지라는걸 써 본 적이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연애편지에서 으례 떠올리게 되는 사랑의 찬가들이 민망했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철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면,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깨지고 좀 더 현실적인 사랑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찬가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연애편지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대화로는 전달하기 힘든,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여기 한 권의 책 이야기를 빌려 당신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려 합니다.

당신은 종종 당신의 어디가 좋냐고 내게 묻습니다. 그 때마다 씨익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를 하지만, 글쎄요, 정색을 하고 답한다고 한들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다 라는,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사실, 당신이 지닌 어떤 장점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차라리, 당신이 지닌 어떤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닌 장점과 단점 모두 당신의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요. 내게 당신은 장단점들의 목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우주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를 묻는 당신의 질문 앞에 나는 더더욱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굳이 우리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수많은 연인들이 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가 스스로 그 약속을 저버리곤 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어떤 이들은 그래서 사랑의 덧없음을 외치곤 합니다. 사랑이 주는 희열과 사랑의 배신이 주는 절망을 생각하면 이 양 극단의 반응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을 좀 더 살펴보면 보다 현명한 이들이 사랑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곤 한답니다. 그런 통찰을 통해 나는 우리의 사랑 역시 더 굳건해질 수 있다고 믿구요. 이 책 <마가렛타운>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먼저 책은 N 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N 은 자신이 조교로 들어가던 수업의 메기라는 학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메기의 본명은 마가렛 타운(Margaret Towne)입니다. 메기는 마가렛의 애칭 중 하나죠. 어느날 N 은 메기와 함께 그녀의 고향 마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 마을의 이름도 마가렛타운(Margarettown) 입니다. 마가렛타운에 사는 마가렛 타운. 이 이름이 가진 중의성은 아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을 겁니다. 어쨌든, 마을 입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덕에 N 은 메기의 고향집에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 집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되죠. 나이가 아주 많은 마가렛 할머니와 퉁명스러운 중년의 마지, 어딘가 음울하고 반항적인 느낌의 10대 미아, 그리고 어린 꼬마인 메이가 그들입니다.

눈치를 챘겠지만, 메기나 마지, 미아, 메이 모두 마가렛의 애칭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특정 나이대의 마가렛이랍니다. 마가렛 할머니는 자신이 본체에 해당하고 삶의 어느 순간마다 자신과 똑같은 다른 마가렛이 나타나 계속 자신과 살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자살해버린 30대의 그레타를 제외하곤 말이죠. 그리고, 하나의 마가렛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질거라는 전설도 들려줍니다. 나이가 많이 들면 모르는게 없어지거든요. 몇 주를 마가렛 타운에서 보내면서 N 은 메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메기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하죠. 메기가 승락을 하자, 정말로 다른 마가렛들은 사라져 버립니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죠? 사실 이 이야기는 N 이 자신의 딸에게 남기는 편지 속에 적은 이야기니까,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어요.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가 만나 사랑하게된 과정을 로맨틱하게 과장해서 들려주는거야 흔한 일이죠. 요즘 같은 시절에 허위사실 유포죄로 잡혀갈까봐 약간 걱정은 되는군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어떤 은유임은 분명합니다. 메기와 결혼을 하던 날, N 은 메기의 눈 속에서 그 모든 마가렛들을 발견합니다. 귀여운 메이와 까칠해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미아, 퉁명스러운 마지와 깊은 마가렛 할머니, 심지어 자살한 그레타 까지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오늘의 아름다운 신부 메기는 다른 모습의 마가렛들로 변해갈 겁니다. 그걸 알고 있는 N의 청혼은 아마도 그 모든 마가렛을 사랑하겠다는 뜻이었겠지요.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은 이 연애담은 이제 마가렛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합니다. 결혼 후 골동품점을 차린 마가렛은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갑니다. 그러던 문득 자신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옆 가게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요. 사실 이 남자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사람이에요. 마가렛에게 푹 빠진 것 같지도 않고(그도 아내가 있거든요), 평범한 외모에 배도 살짝 나온데다가 머리까지 벗겨졌지요. 하지만 마가렛은 이 남자에게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남자와 함께 잠자리를 가진 마가렛은 그제서야 왜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끌렸는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건 그 남자가 N 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그 때문이었습니다. 권태. 그녀에게 N 은 계속 똑같은, 변하지 않는, 그래서 지루해진 N 으로만 남아 있었던 겁니다.

마가렛, 아니 그레타는 이 권태로부터 탈출하지 못합니다. 어느날 문득 집을 나가고, 몇 년 후 딸을 데리고 N 에게 돌아오지요. 그리고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레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권태로워야 했는지, 언제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는지,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면 왜 실패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레타를 비난할 수는 없어요.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N 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건 그녀가 N 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흔히 지금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나 역시도 그래요.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변하는데, 그 사람의 사랑은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건 헛된 희망이 아닐까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건 그래서 우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은수도 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거죠.(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토록 분명히 알 수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후에 은수를 돌려보낸 후 상우가 지은 웃음은 비로서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그렇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을 현명하게 이끌도록 노력하는게 아닐까요. 서로의 변해가는 모습을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말이죠.

마가렛의 안에서 여러 명의 마가렛을 발견한 N 의 이야기는 그래서 내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을 수준이 아니라 도시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가렛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당신 역시 그럴겁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많은 모습들과, 시간이 우리에게 안겨줄 새로운 모습들까지, 우리는 모두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니까요. 내게 주어진 축복은 내게 당신의 그 변화를 함께 할,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나도, 나의 사랑도 그렇게 함께 변해갈 것입니다.

하지만, N 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가렛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 자신이 함께 변화하지 못한 N 의 잘못일 수도 있고, 짜릿했던 흥분으로만 사랑을 기억한, 그리고 기대한 마가렛의 잘못일수도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에 잘잘못을 따지는건 불필요할 일일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건, 사랑이란 결코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아마도 사랑의 서약이란건 그런게 아닐까요. 영원불멸의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말이죠. 그러니, N 이 딸에게 남긴 편지의 한 대목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을 겁니다. "진짜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p. 246)"라는 말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1-02-18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턴님으로 하여금 연애편지를 쓰게 한 소설이로군요.

나의 어디가 좋아?, 혹은 나를 얼마만큼 좋아해? 는 여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연인에게 묻는 질문인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여자들을 만족시킬만한 답변을 한다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여자의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포기해야 하구요. 어떤 대답도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을거에요.

그래서 차마 묻지 못하는 여자들이 있죠. 상대가 아무리 성의를 다해 대답한다 한들 만족할리 없다는 걸 아니까요.

진짜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의지,
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전 본능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의지라고도 생각하질 않아요.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 겠어요.

turnleft 2011-02-19 03:19   좋아요 0 | URL
음.. 핵심은 "사랑은 변한다"라는 거에요. 첫 느낌도 사랑이지만, 그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질(quality)의 사랑으로 변한다는게 제 생각이고, 거기엔 의지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거죠. 뭐,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금요일 밤은 즐겁게 보냈나요?
 

인간을 묻는다 : 과학과 예술을 통해서 본 인간의 정체성
-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 김용준 옮김 / 개마고원 / ★★★★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어렸을 때 영화 <트루먼 쇼>와 같은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안 보이는 곳에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네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말이다. (물론 그게 방송된다고 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그 때는 그저 혼자 생각하고 큭큭댔던 상상이었는데, 어른이 된 후에 <트루먼 쇼>를 보고 나니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게 아니라는걸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내가 특별히 왕자병은 아니었던게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년을 거치면서 비슷한 의식의 변이를 거치기 때문이다.

'생리적 조산설' 이라는게 있다. 인간의 신체 크기 대비 두뇌 용적이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히 커지면서, 뇌가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자궁 입구를 빠져나오도록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의 타당성 여부야 어쨌든, 태어날 때 아직 뇌가 충분히 성장해 있지 않은 인간은 일정 기간 동안은 (대개 부모인)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 하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때의 자아는 지극히 제한적인 세계만을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외부의 어떤 존재, 즉 '타자'가 오직 자신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유년기의 자기 중심성은 필연적인 셈이다.(아멜리 노통브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서두에서 주인공은 "나는 신이었다"라고 선언한다. 아, 유년의 자기 중심성을 이렇게 앙증맞게 표현하다니!)

기본적으로 유년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는 방식은 귀납적이다. 내가 A 라는 행동을 하면 B 라는 반응이 온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때 유아는 그것을 하나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경험은 부모로부터 온다.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면, 부모는 아기가 배가 고픈지 혹은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하고 그에 맞는 조처들을 즉각 취해준다. 울음이라는 행동이 욕구의 충족이라는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금 더 큰 후에 만나게 되는 외부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장난감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기대한대로 반응하지 않는건 뭔가가 고장난거다. 간단히 말해 유년의 자아에게 세계란 자신의 행동에 정해진 반응을 보이는 거대한 장난감과 같다.

이러 한 유년의 세계가 무너지는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부모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반응이 올 때도 많다.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아이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또 하나의 '자아'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는 단지 '타자'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자아가 지녔던 신성(神性)의 해체이자,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갈등들의 전조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트루먼 쇼> 류의 상상은 바로 그 경계점에서 나온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는, 유년의 자기 중심성이 남긴 잔상 같은 상상력으로 말이다.

이 유년의 경험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 <인간을 묻는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그대로 따르자면, 하나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에 관한 지식"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식'은 인간 고유의 특성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리고 잘 설계된 기계들은) 경험을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해 나간다. 대부분 생존과 직결된 이들 지식들은 외부 세계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즉 "자연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자아"를 가지며(여기서 자아는 보다 능동적인 의미다), 더 나아가 "자아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저자는 이 "자아에 관한 지식"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인간됨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을 대표하는 과학은 대개 논리와 이성의 영역, 인간적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사실"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 역시 인간이 지닌 지식의 한 종류로서, 지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한계 속에 함께 묶여 있음을 지적한다. 그 어떤 언어도 모든 자연의 논리를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없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이를 증명한다). 과학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모호함과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이며, 과학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온 힘은 바로 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아에 관한 지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이성의 논리, 과학의 이론이 다른 지식에 비해 정확하며, 그러므로 우월하다는 근대적 믿음을 뒤흔든다.

그렇다면, "자연에 관한 지식"과 "자아에 관한 지식"이 갖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저자가 지적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인간이 이 지식 체계에 가하는 노력의 방향이다. 과학은 하나의 이론체계가 가진 모순과 모호함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탐구가 이루어진다. 이 때 새로운 이론체계는 기존 이론체계의 논리적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기에서 묘수가 번쩍 떠오르듯 새로운 상상력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반면,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다. 인간에게 A 라는 상황에서 반드시 B 라는 행동을 보이도록 요구하는 것이 이 지식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자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A 라는 상황에서 B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C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심지어 D 라는 반응을 보일수도 있음을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모순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 자아에 관한 지식의 목적이다.

저자는 "자아에 관한 지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문학을 꼽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 삶에서 만나게 되는 딜레마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는 작품들이다. 그 딜레마의 유일무이한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던가, 혹은 독자들을 하나의 교훈으로 이끄려 하는 작품은 그저 통속 소설에 불과할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딜레마에 처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의 자세이다. 만약 우리가 문학 작품을 "자연에 관한 지식"과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고는 "살인을 하면 결국 처벌을 받는다"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벌>에서 다른 것을 얻는다. 우리는 로쟈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내가 소냐였다면 과연 로쟈를 받아들였을까를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고민들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아에 대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자아들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반응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어떤 도덕적 요청이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이 길은 또한 인간이 "인간다움"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하다.

20세기는 과학의 세기였지만, 동시에 폭력의 세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은 그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능하게한 도구였다. 우리는 히틀러를 비난하고, 스탈린을 비난하고, 부시를 비난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그 독가스를 만들었고, 원자폭탄을 만들었으며, 폭격기와 탱크를 만들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단지 그들이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해서 과학자들은 그들의 작품(?)들이 초래한 그 모든 폭력으로부터 면책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이는 과학이 스스로를 인간 위에 위치지움으로써 초래한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이 자기 기만이야말로 저자 브로노프스키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인간에 기반한 새로운 과학 철학의 제시를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시장미 2011-02-17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턴형의 리뷰네요. 으흐
요런 글 좋아요. 문제제기를 하면서 책의 내용과 저자의 시각을 분석하고, 다른 사례 혹은 다른 책들의 내용을 끌어와 더 풍부한 생각을 이끌어 내는 글이요. ^^
비판적인 사고가 잘 드러난 글이네요.

turnleft 2011-02-17 17:12   좋아요 0 | URL
아마 예전에 봤을걸요? ㅋ
전에 닫아 둔 마이 리뷰 글들을 페이퍼로 옮기는 중이에요. 제 글이지만 제가 다시 읽어도 좀 생소하군요;;

가시장미 2011-02-18 04:38   좋아요 0 | URL
그래요? ㅋㅋㅋ 처음 보는 글 같은데 ^^;;;
어쨌든, 다시 알라딘에서 리뷰들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제가 리뷰를 많이 못 쓰니, 이렇게라도 대리만족을 ㅋㅋㅋ

요 책은 꼭 읽고 싶었던 책인데 요즘 사두고 읽지 못 한 책이 넘 많아서..
나중에 사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이젠 책을 둘 공간도 부족해서.. -_-;;

그나저나 책 선물하고 싶어요. 읽고 싶으신 책 있으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근데, 해외 배송은 배송비가 비싸나요?ㅋㅋㅋ

turnleft 2011-02-18 08:05   좋아요 0 | URL
해외 배송은.. 비싸죠 -_-;;
책 선물은 뭐.. 일단은 저도 쌓인 책이 많아서요. 4월 정도에 한국 한 번 더 나갈 것 같으니까 그 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볼게요 ㅋㅋ

가시장미 2011-02-19 20:20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 그래요.
4월에 또 오세요? ^^
꽃피는 봄에는 제가 꼭 선물을...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할지 그동안 고민 좀 해야겠어요. -_-a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책을 읽는데 꼭 정해진 독법이 있는건 아니다. 피카소의 화집으로 색칠공부를 하건,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스타인벡 소설로 영어공부를 하건, 그건 독자의 권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서란 저자와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모든 대화가 그러하듯 이 대화에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서로간에 정해진 규약, 프로토콜이 존재하는데, 이 프로토콜을 무시하는 독서란 제대로 된 독서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꼭 노력한다고 되는 일만은 아니다. 특히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책의 경우 일정 정도의 배경지식이 요구되는데, 짧은 시간에 배경지식을 쌓을 수는 없는 일이니 제대로 된 독서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대개는 배경지식이 없는 책은 아예 손에 들지 않는 편인데, 간혹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되는 책들이 생긴다. 

미안해서 하는 소리다. 나같이 모자란 독자를 만나, 제 뜻을 맘껏 전달하지 못하는 작가에게 미안해서 말이다. 미시사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는 찬사도, 그 방법론적 혁명도 역사학에 무지한 독자에게는 그저 이해하지 못할 외국어 같이 다가올 뿐이다(서문은 주눅들기 딱 좋다). 16세기 이탈리아 사회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을 방대한 사료들도, 그저 난수표 같은 어지러움으로 남을 뿐이다. 어쩌겠나. 세상의 모든 책들이 제 짝인 독자만을 만나는건 아니니까, 너무 날 나무라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는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저자에게 감사한다.

아마 나 뿐만은 아닐게다. 학술적으로 파고들면 꽤나 전문적인 서적인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꽤 대중적으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재밌다". 물론 재미의 요소는 다양하다. 헤겔을 읽으면서도 깔깔거리는 사람이 있으니 무엇을 재밌어 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혹자는 추리 소설과 같은 전개를 마음에 들어할 수도 있겠다.(이렇게 말하면 에코의 책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 정도로 '소설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무엇보다 매료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 책의 주인공 메노키오라는 인물 그 자신이다.

도메니코 스칸델라, 혹은 메노키오. 그는 대단한 영웅도 아니었고, 이름을 남길만한 큰 업적을 세운 바도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방앗간 주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이 촌로의 삶에서 남다른 점이라고는 "종교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라는 사실 뿐이다. 이마저도 마녀 사냥이 횡행했던 시대에 그다지 "남다르다"라고 할만한 삶의 궤적도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즈부르그는 종교 재판 기록과 서신 등 남겨진 기록을 통해 메노키오라는 이 인물이 가졌던 생각과 주장을 입체적으로 다시 살려낸다. 그 결과 우리가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보다 훨씬 더 큰 우주를 품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물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인류 역사상 나타났다 사라져간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싸고 자는 삶을 살다가 갔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오만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16세기의 한 촌로가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색다른 세계관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세계관을 견지해 나간 방식이다. 몇 차례의 종교 재판은 그에게 지배적인 질서를 내면화하고 순응하며 살아갈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는 반복적으로 교회의 규율을 벗어나고, 결국 화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이건 하나의 '선택'을 뜻한다. 메노키오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지키기를 선택한 것이다. 왜일까?

메노키오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교회와 성경이 가르친 세계와 자신이 두 눈으로 관찰하는 세계 사이의 불일치였다. 그는 이 불일치 속에서 새로운 설명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물론, 종교적 세계관에 한 발을 담그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접목시킨 그의 사고는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못 되며, 또한 온전히 그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나온 생각도 아니었다.(메노키오는 금서로 분류되던 책을 여럿 읽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메노키오가 그 자신의 사유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였으며, 심문관들 앞에서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제가 생각한 것들입니다.(p.127)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신적 권능(심문관들은 신적 권능의 대리인들이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는 한 개인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언명을 내놓기 수십년 이전에,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당대의 지식인 계층과 교류도 없었던 한 시골 방앗간 주인의 입에서 우리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 스스로 사유하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거듭 강조하듯 메노키오는 당대의 보편적 인물상이라기보다는 매우 예외적인 인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메노키오의 주장을 근거로 근대의 성립을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가 이후의 시대에 보편화될 사유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메노키오의 선택,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 앎에의 욕구가 밝아오는 인간 이성의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고 이해한다.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가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다. 세계가 절대자에 의해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혼돈 속에서 스스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메노키오 자신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이 예외적인 인물의 출현은 어떤 의식적이고 지적인 연구 활동이나 학풍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구전 문화와 인쇄물로 보급된 지배 계급의 기록 문화의 접점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말이다. 진즈부르그가 이 책의 제목을 <치즈와 구더기>로 정한 이유도 여기 있는게 아닐까? 거시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하지만 언제나 기술된 역사의 이면에서 실제로 세상을 움직여온 기층 민중 문화의 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보여주려고 말이다.

그게 바로 내가 메노키오라는 인물에게, 그리고 이 책에 매혹당한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른 살의 강
- 은희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하얀 입김이 떠도니 이제 계절은 완연히 겨울로 향하고 있다. 제 잎을 떨궈내는 저 나무들처럼,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또 한 겹의 나이테를 두를 시간이 다가온게다. 새해와 함께 시계 초침 넘어가듯 째깍 하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순환이 끝나는 겨울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하는 계절임에는 분명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리던 20대의 마지막 나날들이 엇그제 같은데, 이제 나도 어느새 서른 하고도 셋의 나이가 된다. 

되돌아보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때는 오히려 20대의 중반이 아니었나 싶다. 정작 서른을 맞이하는 순간은 덤덤하게 지나갔고, 여전히 나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막상 이 나이가 되니 서른이라는 나이를 두고 떨었던 지난날의 호들갑이 의아스러워 지기까지 한다. 서른이 되면 더 이상 열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줄 알았던가? 무릎까지 처지는 다크 서클이나 이마에 새겨진 주름, 살짝 벗겨진 머리, 불룩 나온 뱃살 등으로 상상되던 "중년"이 시작될 거라 믿었던가? (오, 이런. 뱃살은 나왔구나) 아니다. 사실 미래를 앞당겨 비관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하릴 없는 나날은 아니었다. 다만 그 때의 나는 그 빛나던 젊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청춘의 시간들을 "서른"이라는 나이를 거울 삼아 뽐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흘러, 이제 나는 정.말.로 삼십대가 되었다. 이십대 때 상상하던 것처럼 청춘이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분명 그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나도 변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변했으니까. 익숙한 듯 하면서도 삶은 항상 그렇게 새로운 고민들을 던져준다. 그 고민들은 힘겨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행복한 고민들이다. 조금 건방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민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가 바로 나라는 존재,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눈 앞의 현실에 매몰되어 더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게 아닐까 두려움이 문득 찾아오곤 한다. 이럴 때가 바로 책을 집어 들 때다. 문학이란 자고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위한 간접 경험의 보고 아니겠는가.

<서른 살의 강> 이라는 단편집은 그렇게 내 손에 흘러 들어왔다. 작가들이 그리는, 조금은 극단적이겠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 혹은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은희경, 김소진, 전경린, 성석제, 양순석, 이병천, 차현숙, 박상우, 윤효, 이 9명의 작가가 그리는 서른은, 불행히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아니, 내가 느낌 감정은 차라리 당혹스러움에 가깝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이토록 아팠던가? 나의 무던한 서른은 그저 유예된 이십대의 끝자락에 불과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이건 그저 '소설' 속 이야기에 불과한건가.

공감하지 못하는 아픔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면,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점은 그 아픔의 유형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편집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의 배치 순서도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글을 번갈아 보도록 되어 있어 양 성(性)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렇게 보니, 서른의 아픔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는 자기만 아픈 것 같고 자기만 못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모두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얼마만큼씩은 공유하고 있는 아픔인 셈이다. 직접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 담긴 남성 작가들의 글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이(남성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이다) 하나 같이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서른의 사랑이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음을,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행복해 지기에는 서로에게 얽힌 관계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그 사랑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다. 사실 이들은 많이 아파하지도 않는다. 미처 아프기도 전에, 이들은 체념할 뿐이다. 그저 쓸쓸히, 사랑은 끝났다고 중얼거리듯 말이다.
 
오히려 여성 작가들의 주인공들은 더 많이 아파하면서도 오히려 희망적이다. 통념상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지만,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이게 꼭 삼십대여서인지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직 독립된 존재로 홀로 서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이 아픔은 차라리 깨달음에 가깝다. "아버지" 혹은 "가정"에 예속된 존재였던 여성이 진정한 "나"를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를 더 많이 사랑해" 라는 선언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처럼 50이 되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아닌 셈이다.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은 듯 체념하는 남성과, 아직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여성. 30대를 바라보는 이 관점의 차이는 결국 삶의 자세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누가 자신의 인생을 확신할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아직은 되돌아보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정점을 지나 노쇠한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시간의 켜가 쌓이는 만큼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나에게도 저런 아픔이 찾아오더라도, 그 아픔을 '나'라는 존재를 더욱 나아가게 하는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내 앞에 놓인 서른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

만화는 언제나 금방 읽힌다. 이 책을 읽는데 걸린 시간도 기껏해야 20여분 남짓. 하지만 책을 그냥 덮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정독. 다시 20여분이 흐른 후에, 역시나 남는 이 착잡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송희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표지에서 얼핏 느낄 수 있는 그림체 역시 내가 호감을 가질 타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집어들게 한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착잡함이었다.

아마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책을 구성하는 3개의 막 제목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가로막힘(Blocked)", "이야기하기(Telling)", "봄(Seeing)". 거칠게 정리하자면 "단절되고 억압된 현실과, 그것을 직시하는 깨달음, 그리고 발화를 통한 치유와 극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끝끝내 착잡함이 남는 까닭은, 치유와 극복의 과정에 비해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표제작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의 가슴을 만지던 담임 선생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연인과의 관계 진전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남자친구는 "미안해"라며 그녀를 끌어안지만, 그건 "이해심 많고 공감해주는 남자친구"라는 판타지가 아니라 또 다른 회상 - 이번에는 가해 - 으로 연결된다. 그 역시 고등학생 때 자취방에 놀러온 옆집 어린 여자아이를 더듬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처, 그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을 더듬던 남자를 기억하는 또 다른 그녀의 상처. 현실은 "미안해", "괜찮아" 식의 사죄와 용서의 맞물림으로 해소되기엔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가 그 복잡한 얽힘 속의 한 부분 - 가해든 피해든 - 이라는 깨달음은 고통스럽다.

이 고통스러움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편함과 맞닿아 있다. 근엄한 척 하는 남자 지식인들의 속물스러움처럼, "그게 뭔지 몰랐어"의 남자들은 그저 "나쁜 놈" 하고 욕해버리고 말기엔 나와 너무 가까이 있다. 그 저열함과 그 가식과.. 그 부끄러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