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지음 /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 이라는 영화가 있다. 97년에 나왔던 영화인데, 내가 본 건 아마도 99년 정도의 어느 지루한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아직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VHS를 빌려 보던 시절. 영화는 컬트적 매력이 있었지만 내가 그리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던지라 그냥 한 번 흘려 본 정도로만 기억이 난다. [매드니스]에 이어 또 한 번 멋진 호러 연기를 보여준 샘 닐 정도가 인상적이었던 듯.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문득 [이벤트 호라이즌]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순전히 한 시퀀스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벤트 호라이즌 호를 탐사하던 대원 하나가 우주선 중심에 있는 순간이동장치(?)에 빨려들어간다. 다행히 몸에 줄이 연결되어 있어 그를 끌어당겨 꺼내지만, 끌려나온 그는 별다른 외상은 없지만 완전히 넋이 나간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만 한다. 이를 보며 다른 대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그는 저 너머에서 뭘 보고 온걸까." 갑자기 [이벤트 호라이즌]을 기억 너머에서 길어올린 접점은 바로 여기였다.

2차 대전 후 기나긴 참호전에서 돌아온 병사들, 베트남의 밀림에서 돌아온 병사들 중 상당수가 육체적 외상과 별도로 어떤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증세를 호소했다. 전쟁에서 이겼는냐 졌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전쟁 이전과 같은 인격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삶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이 의문과 함께 사람들은 비로서 승리 혹은 패배라는 전쟁의 거시적 결과에서 눈을 돌려 전쟁이 개개인에게 가한 압도적인, 그리고 폭력적인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거칠게 말하면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빌리 필그림이라는 참전군인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이 범상치가 않다. 그는 시간여행을 할 줄 알아서(거창한게 아니라, 한 순간 과거에 있다가 눈을 깜빡하면 현재로 돌아와 있다던가 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동물원 같은 곳에 전시되기까지 한다.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빌리 자신의 정신세계를 글로 옮긴 것이라는걸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빌리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미쳤군.

그런데, "전쟁에서 미쳐서 돌아온 어느 군인의 이야기" 라고 요약하기에 그의 분열된 정신세계가 보여주는 디테일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책은 결코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빌리의 시간을 오가는 여정을 쫓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충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외계인에 의한 납치라는 황당한 이야기와 전쟁 경험, 그리고 전쟁 이후의 삶을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직조하면서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탁월함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는거지..."

커트 보네거트는 이 책에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장의 뒤에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라고 읊조린다. 작은 벌레의 죽음부터 폭격에 희생당한 사람들, 주인공 아내의 비극적 죽음까지, 누가 어떻게 죽느냐에 상관없이 그렇게 가는 거란다.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달관의 경지 같기도 하고, 그저 뒤틀린 냉소 같기도 한 이 문장은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진다. 자칫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으로, 망자에 대한 모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거리두기 내지 무감각(?)은 비단 서술자의 태도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을 납치한 외계 종족 트랄팔마도어인의 세계관에서 모든 존재는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아무런 구분을 둘 필요가 없다. 슬퍼할 이유도 없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행복한 순간만을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집중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감각을 지닌 트랄팔마도어인의 입을 빌어 설파되는 이 기묘한 숙명론 혹은 순응주의는 곧 빌리의 그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보고 미쳤다고 말한다.

빌리는 정말 미쳤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미쳤다. 사실 이 모든게 빌리의 망상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실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 외계인의 납치니 시간여행이니 하는 빌리의 망상을 말 그대로 망상으로 밀쳐두고, 그가 망상 속에서 외면하고 있을 현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자.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전쟁 후 평범한 삶 속에서 문득 시간여행을 하듯 드레스덴에서 폭격에 불타버린 시체가 눈 앞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건 생존의 문제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처에서 밀려드는 죽음의 홍수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의 생존 전략 말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 중 하나는 이렇다.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지배하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는 일종의 탈색효과다. 영화 [300]에서 탈색된 그래픽이 살육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켰듯이, "그렇게 가는거지"와 같은 시니컬한 유머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독자는 빌리와 같은 생존의 전략을 체득한다. 그리고 그렇게 낄낄거리며 빌리의 좌충우돌 인생을 읽다보면, 어느새 슬그머니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오는게 느껴진다. 전쟁은 거대한 부조리극이고, 인간은 그저 그 안에서 미쳐버린 광대 같은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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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0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정말 미친건, 전쟁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에 동의하며 추천했어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세권쯤 읽었는데 이 책은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거든요. 이번 연휴(라고 해봤자 이제 이틀 남았네요. 앞의 3일은 술먹느라 다 써버린 ㅠㅠ)중에 이 책을 읽어봐야 겠다고, 이 리뷰를 보는 순간에는 결심했는데 정말 읽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언제나 전쟁이 개개인에게 미친 영향-말씀하신 것 처럼 전쟁전의 인격을 되찾을 수 없는-이 가장 가슴 아파요. 건물이 폭격되고 무너져내리는 그런 것 보다 전쟁을 겪기 전과 겪고 난 후에 인간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히 미친건 사람이 아니라 전쟁이에요.물론 전쟁을 일으키는게 사람이긴 하지만요.

turnleft 2011-02-05 03:36   좋아요 0 | URL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곤 하는 거겠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력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 비극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미친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고귀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효과도 큰 것 같아요. 전쟁 소설 중 명작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 아닐까요. 전에 [The Things They Carried]를 읽으면서 느꼈던 아이러니에요.

아, 커트 보네거트의 미발표 단편을 모은 책이 또 나왔어요. [While Mortals Sleep]. 한국에는 언제 번역되서 나올까요..
 

푸른 알약
-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 /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 

감기에 걸렸다. 한동안 몸을 좀 혹사시켰다 싶더니, 어김없이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감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다. 잠시 틈을 허락했더니 비집고 들어와 제 것도 아닌 몸을 이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콧물을 훌쩍이며 그 작고 바글바글한 것들(너무 작아 보이지는 않지만)에게 욕설을 퍼붓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병원에서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알약 몇 알에 의지하는 것 뿐이다. 참 무력하지 않은가.

감염. 질병. 죽음.

단어들이 낯설다.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저 단어들. 아니, 어쩌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 그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이다. 일단 시작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무력함,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나의 삶, 존재가 뒤틀려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나의 이 두려움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건 그저 (내 생각에)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내 안의 두려움을 실제 사람에 투사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인간 이전에 어떤 질병의 덩어리, 보균자로 낙인찍고 소외시켜 버린다. 물론, 드러내놓고 배척할 정도로 "교양"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래봤자, 가장 흔한 반응, "이해하는 척하면서 경계하는 쪽"에 속할 뿐이다. 여기서 교양은 이해를 가장한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다.

감기에서 출발해서 너무 건너뛰어 버린 것 같은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쯤에서 귀뜸해 두자면, 이 책은 에이즈 환자와의 사랑 이야기다. Fiction 이 아닌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실제 이야기. 그가 사랑하는 여인 카티는 에이즈 환자이고, 그녀의 아들 역시 에이즈에 감염된 채 세상에 태어났다. 카티는 프레데릭과 가까워지면서 먼저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고백했고, 놀랍게도 프레데릭은 그런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는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두렵다. 콘돔이 찢어진걸 발견한 날 그는 곧바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그가 감염될 확률은 길가다가 흰 코뿔소를 만날 확률과 같다고 말하지만, 길을 걸으며 뒤에서 코뿔소가 계속 따라오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만화적 상상력이 빛나는 장면이었다. 조용히 뒤따라 걸어오는 코뿔소라니!!) 하지만 그는 코뿔소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그 곳에 코뿔소가 없음을 확인하고 미소지을 뿐이다. 두려움의 근원을 아예 멀리 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를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카티가 있다. 침대에 누운 채 카티가 프레데릭에게 왜 자기를 좋아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왠만한 연인들 사이에 적어도 한 번씩은 오갔을 질문이지만, 카티가 묻고 싶은건 아마 더 깊숙한 질문이었을거다. 두렵지 않냐고.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왜 내 곁에 있는거냐고. 사실, 카티도 두렵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병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당신마저 감염된다면, 난 정말 죄책감에서 헤어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에게 프레데릭은 대답해 준다. 한 남자 한 여인에게서 발견하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매혹을 느꼈음을.

프레데릭은 친구에게 카티와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맞는 커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따금 20분의 1미리짜리 얇은 고무를 껴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 그렇게 완벽한 반쪽을 만나기가 흰 코뿔소 만나기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을지도. 프레데릭은 카티를 사랑하고, 그게 가장 중요한거다. 두려움은 그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둘 만의 즐거운 대화를 즐기고 있는 표지그림처럼 말이다.

카티와 그녀의 아들은 아마 평생을 치료제와 항생제에 의지하며 질병과 싸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푸른 알약은 결코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고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의 한 조건이고, 그들은 담담히 그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푸른 알약은 삶에 대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방 가득 푸른 알약을 넣고 걸어오는 카티의 얼굴에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건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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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 Hunter S. Thompson 지음 / Vintage / ★★★★ 

1969년 12월 6일, 북부 California 에 위치한 Altamont Speedway 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래 San Francisco의 Golden Gate Park 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Free Concert 였지만, Rolling Stones가 공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군중이 몰릴 것을 두려워한 주정부는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공연 장소는 San Francisco 동쪽 Tracy와 Livermore 사이에 위치한 Altamont Speedway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공연 시작 20시간 전에야 공연 장소가 확정되면서 Altamont Free Concert는 이미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장실이나 의료 시설 등은 몰려든 사람들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부족했고, 급조된 낮은 무대와 열악한 음향 시설은 사람들이 무대 앞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은, 당시 공연의 안전요원 역할로 Hell's Angels 라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오토바이 갱단이 고용된 것이었다.(Rolling Stones의 로드 매니저였던 Sam Cutler가 이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Hell's Angels는 Harley-Davidson 같은 대형 오토바이에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는 근육질의 마초 집단을 생각하면 되는데, 이들의 복장이 Rolling Stones의 리더였던 믹 재거와 유사한 스타일인데다가 Hell's Angels 가 가지고 있던 "무법자" 이미지가 기성 세계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미 Rolling Stones는 런던 공연에서 Hell's Angels를 고용하여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던터라, 별 고민 없이 Hell's Angels를 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했던 것은, 영국의 Hell's Angels에 비해 미국의 Hell's Angels 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과격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공연이 무르익어 갈수록 무대 앞쪽으로 모여드는 관중들과 그 앞을 지키던 Hell's Angels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Rolling Stones가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던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무대 앞 한 쪽에서 Hell's Angel과 충돌을 빚던 Meredith Hunter라는 18살 흑인 청년이 총을 꺼내들었고, Hell's Angel 중 한 명에게 찰과상을 입힌 후, 자신은 그들의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이 청년이 살해되는 광경은 공연 실황을 녹화하던 카메라에 그대로 잡혀 후에 "Gimme Shelter"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에 실리게 된다. Rolling Stones는 후에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공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Altamont는 불과 4개월 전 열린 Woodstock Festival 에서 최고조에 올랐던 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기치, 즉 평화와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San Francisco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번져나가던 이 젊은 문화는 총 대신 꽃을, 전쟁 대신 사랑을 나눌 것을 외치며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Altamont은 이 사랑과 평화의 메세지가 폭력, 그것도 내부의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해버린 이 반문화는 결국 스스로 붕괴해버리고 말고, 이후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기 보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개인주의 문화로 돌아서버리고 만다. 결국, Altamont는 60년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된 것이다.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의 부제는 A Savage Journey to the Heart of the American Dream(어메리칸 드림의 심장을 향한 잔인한 여행)이다. 여기서 American Dream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금 만능주의, 일확천금의 꿈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60년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마약문화(drug culture)가 추구했던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Las Vegas는 60년대 젊은이들이 꿈꿨던 새로운 미래(사랑과 평화로 충만한 세계)가 무너진 폐허 위로,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이 마천루처럼 솟아오른 타락한 American Dream의 상징이 된다.

60년대의 반문화는 동시에 마약문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세대에게 마약은 오늘날처럼 쾌락이나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마약을 통해 정신적 고양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고양 상태를 통해 이기심과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잊고 사랑과 평화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와 같은 낙천적 인식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광범위하게 퍼져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Altamont에서 어떻게 급격히 무너졌는지를 저자는 이 책의 8장에서 절묘한 은유를 통해 표현해낸다.

이 장에서 주인공은 과거 자신이 처음으로 마약을 복용했던 때를 되돌아본다. LSD에 취한 채 그는 차를 몰아 동쪽을 향하지만 이내 길을 잃고 만다. 하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던 거기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고, 거기서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았기에 그는 해방감에 가득 차서 바람을 맞으며 길을 달린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과 음악의 비트에 취해 그의 마음은 점점 거대한 파도를 타고 높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 파도가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 파도는 벽에 부딛혀 급격히 튕겨나와 부서지고 만 것이다.

1971년 쓰여진 이 소설은 바로 60년대의 폐허 위에 서 있다. 이 잃어버린 American Dream 을 찾기 위해 두 주인공은 그들의 여정을 온갖 마약과 알콜에 곤죽이 된 채로 시작한다. 하지만 한 때 그들이 마약을 통해 찾았던 낙천적인 희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마약에 흐릿해진 의식에 비친 세계는 온통 불안과 공포 뿐이다. 검은 하늘은 거대한 박쥐 무리가 되어 덮쳐오고, 여행 내내 주인공은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만한다. American Dream의 상징이라는 Las Vegas는 결코 그들이 기억하는 American Dream의 땅이 아니었고, 더 이상 그들은 자신들의 American Dream을 찾지 못한채 좌충우돌 광폭한 여정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와 비교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소설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류의 소설이 마약을 통한 현실도피에서 각성/희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마약을 통한 각성/희망에서 절망을 향하는 이야기다. 이 절망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공유했던 아픔이었다. 한 때 세계를,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이끌었지만, 이제 그 방향타가 사라진 땅에서 그들은 그저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약은 전진이 아닌 퇴행,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어버릴 뿐이다.

1971년 Rolling Stone 지에 2회에 나누어 연재된 이 소설은 시대의 아픔과 혼란,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그 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60년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의 젊은이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과거의 꿈을 잃어버린채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마치 마약을 통해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약기운이 물러나면 몇 배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60년대의 꿈이 급격히 사라진 채 맞이해야 했던 70년대는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저자 Hunter S. Thompson은 2005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ps. 1998년, 이 소설은 Terry Gilliam 감독, Johnny Depp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맥락은 무시한채 마약에 취한 효과를 시각화하는데 치중하여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는다.

ps2.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내 독서습관을 많이 흔들어 놓았다. 우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경우, 실제 예약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는 날짜가 제 멋대로라서 내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책을 밀쳐두고 읽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로 된 책은 내용 외에 신경써야 하는게 너무 많아 몰입이 어렵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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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1-02-0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와일드 터키를 마시면서 이 영화에서 조니뎁이 마시던 술이라며 신나하면서 마시다가 완전 맛 갔어요 -_-;;;; 그 날도 조니 뎁이 맡았던 역할이 실존 인물이라고 해서 놀랐었는데 책이 원작이라니 더 놀랍네요.

전 이거 영화 정말 좋아하거든요. 취한 효과를 시각화에만 치중해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를 겪었다니 ㅠㅠㅠ 전 그래서 더 좋았는데.. 아 알콜중독의 기운이 댓글에서도 퐁퐁 솟아 나는듯 ㅋㅋㅋ

turnleft 2011-02-04 03:31   좋아요 0 | URL
오, 뽀님이 저 영화를 봤다는 것도 신기하고, 심지어 좋아하시기 까지 한다니 더욱더 신기하군요! 저도 책을 읽고 나서 DVD 까지 빌려 봤는데, 저한테는 영화가 너무 지루했어요. 뽀님 댓글을 보니 영화 볼 때 제가 너무 맨정신이었던게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Kitty 2011-02-03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 외에 신경써야 하는게 너무 많다는 말씀이 제가 생각하는 의미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보통의 "Anxiety" 읽을 때였는데요, "The Wealth of Nations"라는 말이 나와서 읭? 이게 뭐지...한참 생각하다가 "국부론"이라는걸 깨달았을때의 허탈감이라니;;; 한글로 읽었으면 전혀 걸리지 않았을 상식도 영어로 바꿔놓으니까 바로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중등교육을 영어권에서 받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만서도...ㅠㅠ

turnleft 2011-02-04 03: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별 것 아닌 표현인데, 그 의미를 깨닫기까지 몇 번의 검색이 필요한.. ㅠ_ㅠ 그래도 저보다는 키티님이 훨씬 더 편하게 읽으실 것 같은데요.. ㅋ
 

프라하의 소녀시대
-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

1960년, 10세의 소녀 요네하라 마리는 국제 공산주의 기관지 편집국에 일본 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약 5년간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고, 1965년 아버지를 따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마리는 프라하의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스에서 온 리차, 루마니아에서 온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왔던 야스나.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시대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왔을까.

이거이거.. 일단 이 특이한 이력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30년만에 처음 만나는 여고 동창생 이야기로도 충분히 얘기거리가 되련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낸 소녀시절 이야기에, 이후 그녀들이 고스란히 겪어야했던 동유럽의 굴곡 많은 역사가 겹쳐져 그야말로 이야기거리의 성찬이라 할 만하다. 남은 문제는 저자가 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균형 있게 버무려내느냐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리차, 아냐, 야스나 세 인물을 각각의 장으로 나누고(유년기의 기억이란 대개 서로 얽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인물별로 분절된 기억은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각 장을 다시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첫 단계에서는 우선 프라하에서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각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그 다음으로 30년 후 저자가 친구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통해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변을 가름하고, 그 후 실제 친구와의 해후를 통해 개인과 시대를 조우시키는 방식이다. 다소 지나치게 도식화해 이해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3번에 걸쳐 같은 구조가 반복되다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좀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든게 사실인지라.. ^^;;

어쨌거나, 저자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개인적인 감회와 시대를 읽는 분석적 사유를 상당히 성공적으로 배합해낸다. 그리스,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는 좀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는 내용이지만, 30년만의 해후를 담은 이 책에 그런 정보까지 요구하는건 별로 공정한 일은 아니리라. 다만, 독자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각 나라의 현대사를 개괄하는 보너스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은 있다. 다른 때는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추천사 등등으로 책 두께만 늘리던 출판사들이 왜 이런 작은 친절에는 이렇게 야박한지. 투덜.

하지만, 책의 중심은 역시 그녀들의 재회 아닌가. 낯설었지만 따뜻했던 프라하에서의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와 친구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녀들의 생사도 모른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의 안타까움은 저자의 섬세한 문체에 담겨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해진다.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자랑스러워했던 리차, 다소 교조적(?)이었던 아냐, 그리고 총명한 야스나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건 저자의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30여년의 시간과 굴곡진 역사가 그녀들의 삶을 변화시켰음에도, 그녀들 안에서 30년전 프라하에서의 "소녀시대"를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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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빙 2014-01-2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책이지요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칼럼니스트 분이 책하고 관련해서 칼럼을 썻는데 참고해보세요~
http://www.insight.co.kr/content.php?Idx=526&Code1=007

좋은하루 되세요 ㅎㅎ
 

 

낙원을 팝니다
- 칼 N. 맥대니얼 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바지만, 이 전지구적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초래한 전지구적 환경 파괴 앞에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는 그 절박함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과거 이념의 세기에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했었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야 제대로 알려진 사회주의의 실상은 자본주의보다 심각하면 심각했지 더 나을 것은 없었다. 친환경 낙원을 선전하던 동독의 영토 구석구석은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오염되어 있었고, 무리한 계획 농업의 추진으로 토지의 지력 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자연은 스스로의 재생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라는 대안 모델이 붕괴하자, 많은 학자들이 다른 대안 모델을 찾기 위해 관심을 돌린 분야가 바로 인류학이다. 우리가 흔히 세계사라 칭하며 배우는 인류의 역사는 사실 서구 문명의 역사일 뿐이다. 같은 시기 지구의 구석구석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와 사회가 수천년간 안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서구의 총칼 앞에 자신들의 문화를 강제로 포기해야 했던 이들 사회가 어떻게 수천년간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가를 재조명 함으로써, 인류학은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코자 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우루의 역사는 지속 가능한 사회의 한 사례이자,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 지속 가능성을 파괴하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우루는 사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나우루인들은 생존의 방법을 찾아내었고, 적절한 인구를 유지하며 수천년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18세기 서구인들의 등장과 함께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다. 서구인들과 함께 들어온 총기류들은 과거 원만히 해결했을 분쟁들을 내전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특히 20세기 초 나우루에 엄청난 양의 양질의 인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우루는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만다.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이 번갈아 점령한 후 나우루는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유엔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탁통치를 받는다. 이 기간 동안 나우루인들은 서구 열강에 일방적으로 수탈되어 오던 인광석 자원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독립과 함께 나우루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우루는 섬의 유일한 자원인 인광석을 판매하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분으로 남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과거처럼 자급자족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자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보장했지만 언젠가 인광석이 고갈되면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했고, 후자는 경제적 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이 수천년간 유지했던 안정적인 사회로 돌아가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미 서구적 물질주의에 익숙해진 나우루인들은 물론 전자를 택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나우루의 인광석은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광석을 팔아 얻은 수입으로 나우루는 남태평양에서 가장 부유한 섬 중 하나가 되었지만, 동시에 가장 비만율이 높고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이 만연하며, 수많은 생물종이 사라진, 다시 말해 낙원과는 거리가 먼 섬이 되었다. 이제 인광석이 고갈되어 가는 시점에 섬의 경제는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나우루 정부가 인광석 고갈에 대비해 기금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아시아발 경제위기(한국의 IMF 사태도 이 중 하나다) 등으로 인해 기금 운용은 실패해버렸다. 게다가 이제 황폐해진 섬의 환경은 예전 같은 자급자족의 시스템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떠난 후 흉물스럽게 버려진 건물들과 황량한 폐광들에 둘러쌓여 서 있는 나우루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우루의 오늘은 인류가 지금처럼 환경을 파괴해가며 지구의 자원을 무작정 소진할 때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결과와도 같다. 일차적으로, 나우루의 파국은 유한한 천연자원(특히 화석연료)에 대책 없이 의존하고 있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이 조만간 경험하게 될 미래라고 할 수 있다. 태양열이나 풍력 등의 지속 가능한 대체 에너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그 양이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다량의 온실가스마저 뿜어내는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이유는 단 하나, 눈 앞의 이윤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윤 앞에 눈이 멀어버린다. 자원이란 언젠가 고갈되기 마련인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모른채하며 오늘의 돈벌이에 탐닉한다. 하지만 이 이윤이란 결국 미래로부터 가불해 온 것에 불과함을 나우루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나우루의 경험(그리고 라파누이와 같은 여타 종족들의 경험)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과 그렇지 못한 시스템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의 가장 큰 조건은 주변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구 수를 적절히 조절하여 인간이 소비하는 양이 자연의 재생 속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여 가능한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 대신, 지속 불가능한 사회는 생태계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파괴한다. 파괴당한 생태계는 인간에게 음성 피드백을 보내지만, 인간이 그 위기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는 결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적 성과를 버리고 원시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 현명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과학적/기술적 성과들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은 과학 기술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체계,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최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과 같은 다큐멘터리 필름이 기여한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기후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기후 변화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음성 피드백이다.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몇몇 종족이 걸었던 쇠퇴의 길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재현하게 될 것이다. 기후 변화 협약과 같은 국제적 룰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은 파국을 막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가 형성해 온 "지속 불가능한" 문명을 "지속 가능한" 문명으로 바꾸기 위한 근본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나우루의 교훈은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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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3 15: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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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4 0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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