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22
- Joseph Heller / Simon & Schuster / ★★★★★
믿을 수 없다. 이런 소설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이렇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반짝반짝 재치가 넘치며, 말도 못하게 웃긴,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안타깝고, 숨막히게 긴장감이 넘치며, 분노로 열통이 터지게 하는, 그러면서도 잔잔한 미소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하는 책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올해 최고의 책을 넘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명작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바로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명작에는 무릇 진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겐 이 책은 너무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초반부의 좌충우돌은 멍청하고 산만한 인물들이 벌이는 반복적인 농담들로 가득해 그저 쓴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블랙 유머로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초반의 다소 느슨한 전개가 단박에 깨지는 볼로냐 폭격 장면 이후부터,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유머들이 돌고 돌아 뒤통수를 치듯 다시 등장하면서 정교한 플롯이 드러나고, 몇몇 장면들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밀도를 보이며 읽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가벼움의 형식은 얄팍함의 발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가벼움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애초부터 의도된 표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가벼움의 중심에 Catch-22 가 있다. 책 속에서 Catch-22 의 정의는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상황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모든 합리적 결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하는 순환논리의 함정을 지칭함을 깨닫게 된다. Catch-22 의 상황은 책 전체에서 반복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 Yossarian의 부대에서는 미친 사람만이 조기 퇴역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조기퇴역 신청을 했다는 것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 순환논리에 따르면 그 누구도 조기퇴역을 할 수가 없다. Yossarian의 결혼 신청을 받은 여자는 Yossarian 이 미쳤기 때문에 그와 결혼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데, 자기와 결혼하려고 한다니 미친게 틀림없다고 답하는 식이다. 물론 결혼은 불가능하다.
얼핏 듣기에는 억지 농담 같지만, 의외로 이 순환 논리의 틀은 견고하다. 겉으로는 명제와 명제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식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명제 자체가 권력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증명하기도, 반증하기도 어려운 이들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명제가 참임을 선언하는 권력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그래서 이 권력관계에 순응하는 한, 이 순환 논리의 고리 안에 발을 담그면 벗어날 방법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순환 논리 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안, 이 함정(catch)을 놓은 이들은 본래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합리와 설득을 가장한 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폭력과 공포를 동원하는 억압 체제에서야 굳이 그러한 메카니즘이 필요치 않다. 오히려 형식적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보다 세련된 지배의 기술이 공고화한 곳에서 비로서 이러한 함정들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이 책이 전통적 악역인 추축국이 아닌 승전국 미국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력의 작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한채 순환 논리의 덫에 걸려 우왕좌왕하다 희생된다. 자본과 권력과 권위의 신성동맹은 부패하고 멍청하며 관료적이지만 오직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승자가 되어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칭 현대 민주주의의 본산이며 유럽과 세계를 구한 정의의 국가 미국의 맨얼굴 아니었는가.
저들 신성동맹이 우리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의미"의 그물망은 무겁다. 국가, 민족, 자유, 정의 같은 "거대한 의미"들은 "작은" 개인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체계를 우리에게 심어 놓는다. 정색하고 그 체계에 맞서 싸우다간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신, Yossarian 은 슬쩍 몸을 틀어 내리누르는 "의미"의 무게를 비껴간다. 가벼움으로 "의미"의 무게를 희석시킨다. 이렇게 "의미"들의 오오라를 벗겨내자, 작은 개인들의 모습만이 남는다. "의미"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의 비열함과 위선. 그들 때문에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 이 부조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Yossarian 의 외로운 투쟁 - 살고 싶다는 희망, 타인을 죽이지 않고도 내가 살 수 있는 가능성에의 모색 - 은 그 어떤 "의미"들보다 고귀하고 진중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벼움의 전략은 우리에게 그닥 생소하지가 않다. 이 책이 선보이는 가벼움의 형식이 2000년대 한국 문학을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박민규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온 일련의 젊은 작가들은 가벼움을 무기로 빠른 속도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드라마로 치자면 정극 대신 시트콤의 형식이 대세를 이룬 셈인데, 형식은 가벼워졌지만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작품 속 껄렁껄렁한 주인공들이 멍청함을 가장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희화화를 통해 사회와 제도가 강제하는 규범을 무력화 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의 지배질서가 보다 "합리적"으로 변하고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으로 보인다. 군사독재에 맞섰던 80년대의 한국문학은 비장한 결의와 거대담론의 "무거움"을 채택했었고, 자본의 지배가 공고해지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어가던 90년대의 한국문학은 사회적 맥락을 잃고 개인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한 과도기를 거쳐, 2000년대의 작가들은 "가벼움"이라는 전략을 통해 주어진 의미체계에 저항하며 동시대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와 이성이 만들어낸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그것들을 조롱하고 탈주하는 해방된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Yossarian 처럼 말이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거대한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면, 그게 바로 Catch-22 라고 생각하면 된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폭력을 쓸 수 밖에 없었는데, 폭력을 썼기 때문에 쫓겨나야 한다는 순환 논리가 먹히는게 바로 이 곳이다. 돈이 없어 돈을 벌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에게, 억울하면 돈 벌라는 말로 화답하는 것이 이 곳이다. 정작 분노해야 할 이들은,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외쳐야 할 이들은 엉뚱하게 합법이니 불법이니, 국익이 어쩌니 하는 논쟁에나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주어진 의미체계에 순응하는, Catch-22 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니, 무려 4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이 소설 <Catch-22> 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시대에 질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대신, 그대, 이 책을 읽어라. 그래서, 그대들을 옭아매는 꼰대들의 세상에 반기를 들지어다.
탈주하라, 그대. Yossarian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