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Space Fantasia
- 호시노 유키노부 글.그림 /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 

이름을 처음 들어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그의 다른 작품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를 봤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작가를 따로 기억해 두지는 않았었는데, 그림체나 내용 등이 일본 작가라기보다는 미국 작가의 것처럼 보였기에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이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의 그 작가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알고보니 (이 작품집의 출간 소식을 접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SF 팬들 사이에서는 레전드 급으로 칭송받는 작가였나보다. 물론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건 아니겠지만, 2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정식 완역본"의 형태로 "굳이" 재소개될 정도의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의 기대는 가질만하지 않을까. 그게 이 3권의 (만화)책이 태평양을 "굳이" 건너 내 손까지 들어오게된 까닭이다.

<2001 Space Fantasia> 라는 제목은 <2001 Space Odyssey>와 <천일야화>를 합쳐놓은 것이다. 아서 클락의 소설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2001 Space Odyssey>를 차용한 것은 이 작품 전체가 SF 고전들에 대한 오마주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뜻한다. 형식면에서는 긴 서사를 매일밤의 이야기 단위로 들려주는 <천일야화>를 빌려왔다. 그렇게, 전체 3권, 20개의 밤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대략 4세기에 걸친 인류의 우주 진출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처음 두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현재의 과학기술을 넘어선 상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지만, 어느 하나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없다. 작품의 밑바탕을 이루는 "과학적" 상상력 위에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얹은 덕이다.

태양계의 형성을 밀턴의 <실낙원>에 등치시킨 [죽음의 별] 에피소드는 작가가 이 두 요소를 어떻게 절묘하게 조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물질과 반물질, 그리고 그들 간의 소멸 등의 이론은 현대 물리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이다. 하지만 반물질의 덩어리인 마왕성을 상정하여 태양과 대비시키고, 이를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싸움인 <실낙원>으로 연결시켜 미지의 우주를 마주한 인간의 두려움으로까지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게다가, 이 반물질을 통해 인간이 외우주로 뻗어 나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설정은 선악과의 비유로 연결되면서 탁월한 복선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 내고 있지 않은가. 과학적 상상력이 정통 SF 로서의 품격을 책임져 준다면, 장르를 넘어선 보편성을 확보해 주는건 바로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진 내러티브의 힘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에피소드에 치중하는 면이 있지만(뒤로 갈수록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비슷해진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의 우주 도전을 다룬 한 편의 장대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 서사의 결말이 일종의 실패로 끝난다는 점이다. 작품 후반의 (다소 파편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은 주로 인간이 외우주에 정착하려다 실패하는 사례들을 보여주는데 치중하는데, 많은 경우 고작 1~200년의 경험으로는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그럭저럭 "무난한" 환경의 거점 하나 찾는게 불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일단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정복할 수 없는 축적된 경험, "역사"의 부재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다른 SF 작품들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로 뛰쳐 나갔지만,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 상상해보라. 이 무한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줄 존재 없이 그저 혼자만의 힘으로 좌충우돌 전진하기란 얼마나 고된 일이겠는가. 한 개인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도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영화 <Contact> 에서처럼 아버지 같은 자상한 존재이건, 아니면 인간 따위 하며 비웃음을 날릴 시크한 외계인이건, 다른 지적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의 우주 진출의 결과가 아닌 선결조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주는 언제나 인간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비록 지금의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이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물질"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주가 더 이상 신비롭지 않은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는 여전히 광대하고, 인간은 여전히 이렇게도 작고 약할 뿐이니까. 이 작은 인간의 정신이 더 크고 거대한 무엇을 꿈꾸는것, 그것이 상상력의 힘 아니었는가. 이 작품을 보라. 과학이 열어젖힌 지평 너머로 새로운 상상력이 꿈틀댄다. 그 상상력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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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 존 쿳시 지음 /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 

존 쿳시를 읽을 때면 난 김훈을 떠올린다. 담담하면서도 간결한 서술 방식도 그러하거니와, 굳이 수컷 냄새를 감추려 들지 않는 남성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두 작가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다. 스타일만이 아니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도 묘하게 닮아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의 모습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의 모습이 겹치고, 이 작품 <추락>이 그리는 삶의 치욕(이 책의 원제목은 [Disgrace], "치욕"이다)은 <남한산성>의 그것과 닮았다. 전혀 다른 역사와 환경에 속한, 지구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두 나라에서 이렇게 닮은 꼴의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허나, 쿳시에게는 김훈의 세계가 지닌 단단함이 없다. 김훈의 단단함은 그가 지닌 자기 확신의 결과다. 제 몫의 밥벌이는 하고 살아왔다는 자긍심, 세상 모든 이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노동하며 그 삶을 이어온 인간의 생(生)은 그의 세계가 지닌 최후의 긍정이다. 시련은 인물들의 현재를 허물지만, 생 자체에 대한 긍정은 그 해체의 끝에 굳건히 버티어 선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다. 하지만 쿳시에게는 존재 자체가 긍정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지만 그 해체의 끝은 가늠하기 어렵다. 바닥을 모르는 추락. 그래서, 쿳시의 세계는 훨씬 위태롭고 또 불온하다.

쿳시의 이와 같은 태도는 시니시즘(Cynicism)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일부 사전에서는 시니시즘을 “견유주의[犬儒主義]”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인 견유학파(Cynics)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대의 시니시즘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현대의 시니시즘은 주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제도의(따라서, 그 사회의 한 구성원인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서구 문명의 오늘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수탈에 기반하고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이들 시니시스트들의 가장 주된 문제의식 중 하나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 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하더라도 스스로의 과거에 대한 인식과 통렬한 반성 없이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쿳시가 이와 같은 시니시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17세기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이주민)의 정착 이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는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행한 온갖 폭력들로 점철되어 왔다. 비록 쿳시 본인이 이러한 폭력의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백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득권을 향유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회의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김훈과는 달리, 그저 살아있다는 것, 존재 자체는 그에게는 도저히 그 자체로 선(善)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더 미묘하다. 1990년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와 함께 시작된 백인 지배의 종식은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집권으로 일단 그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오랜 차별의 결과 형성된 흑백 사회 간의 적대감과 기득권의 불균형, 빈부격차는 여전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흑인들이 오랜 기간 지녀온 분노와 박탈감들이 정치적 자유의 획득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곳곳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쿳시와 같은 백인 지식인들을 딜레마에 처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백인들이 지닌 기득권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흑인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야말로 이 작품 <추락>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문제의식이다. 주인공인 루리 교수와 그의 딸 루시는 일단의 흑인들에게 공격당하고, 루시는 그들에게 겁탈까지 당한다. 응당 어느 아버지든 그랬을 방식으로 루리 교수는 분노하고 범인들을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하지만, 놀라운 것은 루시의 반응이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워 했다. 하지만, 분노하고 보복하는 대신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윤간의 결과 생겨난 아이를 낳기로 하고, 공격의 배후에 있었던게 아닐까 싶은 이웃 페트로스가 그녀를 첩으로 들여 보호하겠다고 하는 제안조차, 그녀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체념은 아니다. 그녀는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선택이 가진 불가피성을 옹호한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것 뿐이에요. 아버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 그래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지금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그리고 그 패배감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아야 할 거에요.(p.242)

 

이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 땅에 터를 내리고 몇 세대를 이어온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 땅의 아들 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잃고, 심지어 흑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폭력에 노출되더라도, 그들 역시 떠날 곳 없이 이 땅에 묶여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루시는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굴종이라고?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프리카를 강제로 점령한 서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점령을 벗어날 무렵, 보호를 명분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서구인들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이 그 치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것, 그것이 아프리카의 역사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루리 교수는 이 아프리카의 역사 앞에 무엇을 해 왔던가?

시를 통해 정신의 쾌락을, 그리고 여자를 통해 육신의 쾌락을 누리며 기득권 속에 안락하게 살아가던 루리 교수가 추락한 곳은 바로 그 아프리카의 맨바닥이다. 그 추락의 과정은 한없이 나약하고 위선적인 지식인의 맨살을 드러낸다. 욕망조차 억제하지 못했으면서 사람들에게는 허세를 부리고, 정작 날것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으면서 경찰을 들먹이며 복수와 처벌에 목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렇게 쿳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허물어 내린다. 명백한 불의 앞에서조차, 자신에겐 정의를 외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듯이. 결국 루리 교수도 싸움을 포기하고 침묵한다. 대신, 스스로를 죄수로 삼아 오지의 동물보호센터에 자신을 유폐시킨 채,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돕고 그 시체를 처리하며 살아가기를 택한 것은 일종의 속죄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이제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오욕의 역사 속 아프리카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세상 뒤집어질 것처럼 분노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추락은 치욕이었지만, 치욕 이후의 삶은 그저 또 다른 삶인 까닭도 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오페라를 작곡하고, 개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지만, 거창한 의미에의 강박이 없다면 이를 굳이 "실패한" 삶이라 이름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또 하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ps.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소설을 떠올렸다. 그도,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없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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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ㅊ 2011-11-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들렀는데, 소설에 대한 평이 정말로 인상깊습니다. 스토리의 요체를 제대로 짚은 좋은 글인 듯합니다.

turnleft 2011-11-22 03:47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질병판매학
- 레이 모이니헌, 앨런 커셀스 지음 / 홍혜걸 옮김 / 알마 / ★★★★ 

예전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보면 그 기업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삼성이 '인간 경영'을 외친건 삼성이 가장 '비인간적인' 경영을 해 왔다는 뜻이며, 대우가 '탱크정신'을 내걸었던건 가장 내구성이 떨어지는 제품을 만들어 왔다는 뜻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막스 베버가(문득, 길 가다 불심검문에 걸린 친구가 "막스" 베버 책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잡혀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생각난다) 자본주의를 놓고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어쩌구 했을 때, 자본주의의 정체는 이미 뽀록났는지도 모르겠다. 근검? 절약? 이제 다 아는 처지에 흰소리 그만하자.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절제가 아니라 탐욕 아닌가.

물론 탐욕의 역사는 굳이 자본주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탐욕은 사실상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 왔고,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의 직접적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인류가 만들어낸 많은 종교와 사상들은 탐욕 자체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터부시 함으로써, 탐욕의 결과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권력과 결합된 탐욕이 인간의 역사에서 사라져던 적은 없었지만, 윤리적 요구가 최소한 권력의 폭주에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최소한 윤리는 더 나은 가치를, 그리고 그러한 윤리가 지켜지지 못하는 현실은 지양해야 할 죄악으로 인식되었으니까. 그렇게, 탐욕에 저항하는 윤리가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지속 가능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탐욕과 그 탐욕을 억제하는 윤리 사이의 균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욕망들이 시장을 통해 경쟁함으로써 그 효율성을 획득하는 체제이다. 당연히 이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탐욕이 장려(?)되어야 하는데, 사회의 존속을 위해 탐욕의 억제를 요구하는 윤리와 모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가 그 경제적 토대와 상충될 때 선택의 폭은 넓지가 않은 법이다. 토대를 전복하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그러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의 개념이 희석되는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오늘날 윤리는 기껏해야 개인적 차원에서만 통용될 뿐,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원리로서의 역할은 '법'의 역할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법은 윤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이 '가치'가 아닌 '행위'를 규정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풀어놓은 탐욕이라는 괴물이 먹이감을 찾아 끊임없이 법의 경계를 어슬렁 대더라도, 법은 선을 넘은 괴물의 특정한 '행위'만을 제제할 수 있을 뿐 그 괴물의 목에 사슬을 붙들어 매지는 못한다. 이 책에서 폭로하는 제약회사들의 행위들은 바로 그러한 괴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최소한 '합법'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진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이윤의 수단으로 삼는 것, 그리고 심지어 잠재적인 부작용까지 감수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제 아무리 '합법적'이라 강변할 지라도, 그 비윤리성, 부도덕함까지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다.

제약회 사의 마케팅 기법으로 포장된 10개의 사례들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이 '비윤리성'의 선봉에 서 있는 지식인들의 모습이다. 제약회사들의 마케팅 기법은 크게 두 가지(첫째, 정상적 삶의 과정와 질병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환자, 즉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거나, 둘째, 질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으로 축소시켜 치료의 방향을 약물치료로만 한정하는 방법)로 분류될 수 있는데, 양쪽 모두 제약회사로부터 스폰서를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척 행세하는 지식인들(의사, 교수 등 소위 의약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지식의 권위를 쓰고 담론의 형성과 그 헤게모니 투쟁을 제약회사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의 행동은 모두 합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슷한 사례들이 2009년의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서 관찰된다. 비무장의 시민을 곤봉으로 후려치거나 방패로 내려 찍으면서 합법적 진압이었다고 강변하는 경찰. 사생활이 담긴 e-mail을 검열하고 심지어 공개하면서 영장 받았으니 문제될 것 없다는 검찰. 상대를 모욕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건의 한쪽 측면만을 강조하면서도 거짓은 아니니 문제될 것 없다는 언론.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권리금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며 사람들을 내쫓고 철거를 강행하는 건물주들. 그렇게, 합법적으로들 살아서 행복한가? 정말로 당신 자식들에게 처벌받지만 않으면 어떻게 살든 상관 없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아니다. 이건 나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거리를 보라. 저기 "아니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작은 촛불 하나를 손에 들고, 이 시대에게 윤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합법/불법의 딱지로 가려지지 않는, 양심의 소리다. 이 책의 저자들과, 책에서 소개된, 제약회사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미국의 사례를 가지고 쓰여진 책이지만, 많은 내용들이 국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질병이 소개되고 재정의되는 과정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의 주장처럼 독립적인 전문가 집단은 극히 부족한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책들을 통해 양식 있는 의약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역자가 홍혜걸 씨라는게 나를 꽤 황당하게 했다. 의학 전문 기자 출신인 역자는 황우석 사태 때, 국익을 위해서라면 황우석 씨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도 눈감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윤리 따위 찜쪄먹어도 그만이라는 역자의 태도야말로 이 책과 가장 거리가 먼 태도 아닌가. 어쩐지, 잠실 경기 3루측 응원석에 앉은 롯데 팬마냥 어정쩡한 역자 서문이 눈에 걸리더라니. 번역하면서도 꽤 많이 찔렸을 것 같다.

좋은 책이지만 좀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사례는 다양하지만 결국 제약회사가 마케팅을 통해 질병 자체를 만들어낸단다는 같은 구조니까. 거기에 역자를 잘못 고른 죄까지 더해 별점 하나 감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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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Far Afield
Gunter Grass 지음 / Harcourt / ★★★★★ 

그 날, TV 뉴스는 긴급 속보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알리고 있었다. 화면은 온갖 낙서로 가득한 잿빛 담벼락 주위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는데, 일부는 아예 담 위로 올라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거나 서로 부둥켜 안은 채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감격과 환희에 찬 모습들.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을 뿐,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9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독일로 재통일된다. ‘통일’ 이라고는 하지만, 동독 지역에 속했던 주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사실상 ‘병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병합의 의미는 분명했다. 동독 지역에서 40여년간 고수해 왔던 공산주의 제도와 정책들을 모두 무효화하고, 대신 서독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면화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 통일은 공산주의의 붕괴,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무능하고 부패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민주적이며 부유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시각은 독일 통일을 바라보는 가장 보편적인 관점이다. 분명 역사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보다 최소한 더 유연한, 따라서 더 유능한 체제임을 증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비교우위가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이었음에도, 이러한 평가는 서독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서독인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단순화는 매우 편리한 것이었다. 이 도식을 통해 동독의 몰락이 곧 무능한 체제에서 고통받던 동독인들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졌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모두를 위한 善(심지어 동독의 빈곤까지 떠안은 서독의 희생이라는 주장과 함께)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What he really wants to hear is that we suffered day and night and felt like we were in one of those concentration camps(정말로 그가 듣고 싶어한 것은 우리가 그런 수용소들 중 하나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며 밤낮으로 고통받았다는 말이었다 ). P. 272  
   

물론, 대부분의 동독인들도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재통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점령국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다시 합쳐지는 것은 물론이요, 동독의 일상을 지배했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인들이 통일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벽 붕괴 이후 실제 통일에 이르는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즉 통일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에 이미 동독인들은 통일이 자신들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삶 전체의 해체(winding down)였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기구는 Treuhandanstalt (영역본에는 Handover Trust로 번역되어 있는데, 한국어로는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였다. 이 기구의 목적은 동독의 자산을 사유화 하는 것. 협동농장이나 공장 등 이전에는 “인민(people)”의 소유였던 자산들이 자본주의로 편입되면서 누군가의 사유재산으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이 거대한 이권을 향해 서독은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개인들은 동독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고, 기업들 역시 공장 등의 자산을 인수한 후 자신들의 시스템에 맞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먹는 하이에나 떼처럼, 그들은 무너진 체제를 갈기갈기 찢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책 첫머리에 묘사되었던,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 모여들어 뜯어낸 조각을 기념품으로 챙기거나 팔아치우던 사람들의 모습은 앞으로 벌어질 통일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전조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체된 것은 체제만이 아니었다. 개인들의 삶 역시 그와 함께 해체당했다. 서독인이 인수한 부동산은 ‘재개발’이 되어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으나, 그 곳에 살던 동독인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쫓겨나야만 했다. 어제까지 “인민”의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유화의 과정에서 해고되었고, 저가의 노동 시장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나마 모아두었던 연금과 사유재산 역시 화폐 통합의 과정에서 반토막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공공주택, 노동자 소유의 공장 등)은 ‘사회주의적’인 사고였으며, 통일된 ‘자본주의’ 독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잘못된’ 체제에서 살아왔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사고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된 것이다.

   
  Furthermore, he says, and I agree, that the rules of impending unification demand- in order to justify this move as the victory of capitalism- that not only every product of our devising but also every last Eastern idea be proven worthless(더 나아가 그는 임박한 통일의 규칙들이 – 이러한 변화를 자본주의의 승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들 뿐 아니라, 동독식 사고 하나하나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증명될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P.295  
   

하지만 합병’당하는’ 동독 지역의 목소리는 통일의 환상에 젖어 있는 독일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다시 하나가 된 ‘강력하고 위대한’ 독일에 대한 찬가가 울려퍼질 때, 그 영광된 순간이 동독인들의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95년 귄터 그라스가 독일 통일이 동독인들에게 어떤 삶의 조건들을 강요했는지는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 책 [Too Far Afield(원제 : Ein Weites Feld)] 를 발표했을 때, 독일 사회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 슈피겔 지는 보수적인 평론가로 유명한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이 책을 반으로 찢는 합성사진을 표지사진으로 게제함으로써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훗날 귄터 그라스는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본질적으로 ‘문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미학적으로 무가치하다, 지루하다, 혹은 구동독의 슈타지(Stasi)를 미화했다 등 여러 가지 혹평이 쏟아졌지만, 논쟁의 진영은 독일 통일에 대한 평가를 두고 명확히 갈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철저히 ‘문학적’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이전부터도 존재해 왔다. 다만 귄터 그라스는 문학 본연의 능력을 통해, 즉 타인(동독인)의 시각으로 세계를 조망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의 의미를 “독일 통일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로 단정짓는 것도 일종의 평가절하다. 사실, 통일의 형식에 대한 논쟁이라면 “흡수통일보다는 헌법 개정을 통한 연방제가 더 적절했다”는 짧은 결론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위해서라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통일 이후 불안정한 미래에 신음하는 어느 동독 출신 노동자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할 지언정 문학적으로 그저 그런, 평범한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멀리 둘러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래서 그 의미와 깊이를 잡아내려면 훨씬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눈 앞의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더 긴 호흡으로 독일의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이끈다.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넘쳐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주인공 Theo Wuttke 라는 인물이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작가 Theodor Fontane 의 삶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통일 공간이라는 좁은 시간대는 Wuttke 의 삶을 통해 20세기 전체로 확장되고, 다시 Fontane 를 통해 한 세기 전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독일의 근대사 전체로 확장되게 된다. 프리드리히 대제로부터 비스마르크,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의 준동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분단과 긴 냉전에 이어 마침내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격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의 간격을 가진 두 인물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겹친다. 시대에 따라 체제가 변하고 정부가 바뀌었지만, 실제 독일을 지켜온 독일인의 삶, 그리고 독일의 문화 유산(cultural heritage)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odor Fontane(1819 - 1898) 

작품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강연에서 Fonty(Wuttke 의 별명)는 Fontane 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한세기 전 독일, 특히 베를린의 시민 사회를 그린 Fontane 의 인물들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대개 구 동독인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독일인들의 표상이다. 문학은 이렇게 웃고 울고 때로 환호하고 때로 분노하는 인간의 삶이 시대와 체제를 넘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청중들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작중인물을 연호하여 이 상상의 파티에 동참한다. 현실에서는 통일이 그들에게 이등국민의 지위를 강요할 지언정, 적어도 이 파티에서만은 그들 역시 독일 시민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초대받은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독일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이다. 통일을 체제의 문제로 바라보는 대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갈 독일 시민으로서의 연대의 문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형식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진정한 통합으로서의 통일을 지향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물론, 통일의 과정에서 더 익숙한 쪽이 다른 쪽을 이끌 수는 있을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면, 그래서 동독의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정복자가 되어 그들을 윽박지르고 갈취하는 대신, 손을 내밀어 그들의 변화를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흔들리는 조각배 위에서 자리를 바꾸는 이들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At any rate, the two of them stood facing each other without a word. No order was given, unless of course my whispered "Go!" was a help: now they began changing positions simultaneously. With small groping steps, which, however, could merely be guessed at from the shore, they moved a shoe's width at a time, at first freehand, their arms still dangling, then joined together, each seizing hold of the other, for the boat had begun to rock, and they were now reeling along with it. Fonty's hands gripped Hoftaller's shoulders firmly, and Hoftaller hung on to Fonty's hips.

What could now be heard from the shore were instructions issued to Hoftaller, which he followed scrupulously because his subject was experienced at changing places in a rowboat. The linked pair pushed and turned clockwise. A solemn, groping dance. Or a ceremony of ritual seriousness. Or an embrace of the sort that is based on the well-known assurance: We're in the same boat.

(어쨌건, 그들 둘은 말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내가 "가요!"라고 속삭인게 들렸던게 아니었다면, 아무런 신호도 없이 동시에 자리 바꾸기를 시작했다. 비록 호수 기슭에서는 그저 추측할 따름이지만, 작은 종종걸음으로 한 번에 신발 하나의 폭만큼씩 움직이면서. 처음에는 빈 손으로 팔을 허공에 내밀었는데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내 하나로 합쳐져 서로를 웅켜잡았다. 그들은 배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Fonty의 손은 Hoftaller의 어깨를 꽉 잡았고, Hoftaller는 Fonty의 엉덩이에 매달렸다.

이제 호수 기슭으로 Hoftaller에게 내려지는 지시들이 들려왔다. Fonty가 배 안에서 자리를 바꾸는데는 익숙했기 때문에, Hoftaller는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연결된 둘은 서로를 밀며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장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춤. 또는 제의적 진지함을 지닌 의식. 또는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네”라는 잘 알려진 확신에 근거한 포옹 같은 것.) P. 340
 
   

그러나 불행히도, 작가의 염원은 실현되지 못한 듯 하다. 오늘날 오씨(Ossi, 구 동독 지역 출신)와 베씨(Wessi, 구 서독 지역 출신) 간의 빈부격차와 갈등은 독일 사회의 가장 큰 불안 요소로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독일은 더 강한 국가가 되었다. 한 때 전범국가로 인류의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의 독일은 유럽연합을 이끄는 중심국가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진정 독일이 추구해야 할 가치일까? 강한 독일, 영광된 프로이센의 재림이라는 환상에 취하기보단, 고통받는 형제와 친구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그것이, 모두가 프로이센의 절대군주 프리드리히 대제를 기리는 동안, Fonty가 친구 프리드리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Katte 를 추모하는 까닭일 것이다. “I still say, my hero is Katte : 여전히 말하지만, 내 영웅은 Katte 라네”(P.623)

당연한 얘기겠지만, 독일의 통일은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에게도 통일은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는가.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 “공산 독재 타도”, “고통받는 북한 민중의 구제”와 같은 익숙한 레토릭이 가져올 미래는 뻔하다. 그 레토릭이 전제하는 흑백논리(자본주의가 옳고 공산주의가 그르다)야말로 통일 후 우리 사회를 야만으로 이끌 광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It looks as though the victory over communism has made capitalism rabid : 마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를 미쳐 날뛰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P. 569) 삼등국민으로 편입되어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할 북한 지역 출신들, 북한 지역 전체를 투기의 장으로 뒤바꾸어 놓을 남한의 자본들, 그 와중에서 통일의 공로를 가로채려 이전투구하는 정치인들. 지금과 같은 대결논리가 횡행하는 이상, 이러한 상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연성이 높은 우리의 미래이다.

따라서, 통일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연대의 정신을 공고히 하는 것이야말로 통일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될 것이다. 한 사회의 수준은 결코 그 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함"을 선호하는 사회일수록 "약한" 사람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사회가 되기 마련이다. 이 사회의 약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 노동자들, 조선족 동포들을 대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가치를 말해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독일 통일을 통해,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아닐까.

이 외에도 너무도 풍부한 작품이라 미처 적지 못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많다. 책 자체도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인데 그 안에 그보다 훨씬 더 큰 사유를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으니, 진지한 독자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책이 되리라 믿는다. 국역본이 없어 영역본으로 읽긴 했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문장이 어려운데다, 독일 역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필요로 하고, 또 Fontane의 작품들이 끊임없이 인용되기 때문이다. 결코 녹록치 않은 작업이겠지만, 이 책은 꼭 번역되어 나와야 할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단언컨대,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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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s
- Art Spiegelman 지음 / Planeta Pub Corp / ★★★★★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이제야 읽었다. 이 작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성완경씨의 <세계만화>를 읽으면서 였는데(기록을 찾아보니 2005년에 읽었구나), 당시에는 국내에는 절판인 상태라 찾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재출간이 되었으나, 일단 손에 잡히는대로 이 곳에서 영어본으로 찾아 읽었다. 예상 외로 책은 얇았다. 하지만, 이 얇은 책 두 권 분량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만 13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책을 읽고 나니 역시 그 긴 시간만큼 깊이 고민하고 만든 작품이다 싶다. 명작은 그냥 명작이 되는게 아니다.

물론, 이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단지 홀로코스트를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독일인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텍스트는 이미 차고 넘친다. 인간에 대한 분노, 이성에 대한 절망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어반복을 위해서라면 굳이 홀로코스트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서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현장들이 더 생생한 분노를 자아낼 테니까. 이 작품 역시 홀로코스트를 증언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그 증언의 중심에 '죽음'이 아닌 '생존'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부제 <A Survivor's Tale(한 생존자의 이야기)> 가 말하고 있듯, 이것은 살아 남은 이의 이야기이다. 저자 아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을 인터뷰하면서 블라덱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기록한다. 당연하 이 기록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이 아닌,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만을 다루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얼마나 치밀하게 학살이 진행되었는가는 그 속의 개인에겐 전혀 중요치 않다. 블라덱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가 죽음 바로 근처에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아 남았다. 절반은 그의 능력으로, 절반은 운으로. 하지만 그의 능력이라는게 무엇이었나. 빵에 곰팡이가 필 지언정 남에게 주기보다는 나중을 위해 간직하고, 깨끗한 셔츠가 필요해질 것을 예상하고 다른 이의 셔츠를 미리 사 두는 것?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써놓고 보니 "자본주의 생존법"과 비슷하게 느껴지는건 나만 그런가?) 그의 생존은 생존을 위협한 상대와의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생존은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그를 살린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서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를 비난하는게 아니다. 그건 그가 거대한 폭력 앞에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비난은 응당 그런 상황을 초래한 폭력 자체를 향해야 할 것이다.(다시 한번, 이 문장을 쓰면서 데자뷰를 느낀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한들 그 폭력의 흔적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극단적 폭력에 직면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의식 자체를 뒤튼다. 살아 남기 위해 폭력에 맞서기보다는 가능한 순응하며 최악의 순간을 피하려하고,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폭력의 질서 자체를 삶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성장한 후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군대에서 가혹한 폭력을 당한 신병들이 고참이 된 후에는 똑같은 폭력을 후임병들에게 반복하는 것도, 폭력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뒤흔들어 버리는지를 보이는 또 다른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의 뒤틀림을 대개의 생존자들은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작품 곳곳에서 아버지 블라덱의 증언 외에 그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을 함께 기록하면서 오늘의 블라덱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물건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고, 재혼한 아내를 돈만 아는 여자라고 매도하고, 심지어 반쯤 먹은 시리얼을 반품하는 등, 블라덱의 오늘은 홀로코스트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그에겐 그 생존의 방식이 다른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압도하는 진리며 선(善)이기 때문이다. 살아 남았다는 것이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완고한 세계관 앞에 성찰과 반성의 자리는 없다. 흑인들을 차별하는 것이 유태인들을 차별하는 것과 똑같다는 지적에 "어떻게 흑인과 유태인이 같을 수가 있니?"라고 되묻는 블라덱의 모습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대로 겹친다.

"Here my troubles began(여기서 나의 고난들이 시작되었다)"

2권의 부제로 달린 위의 문장은 바로 저자 아티의 독백이다. 아들에게 "친구? 먹을 것 없이 일주일만 갇혀보면 친구가 뭔지 알게 될거다"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홀로코스트는 살아 남았으나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한 어머니. 어린 소년에게 이러한 가정 환경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상흔은 비단 직접적인 생존자들만의 몫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약물 중독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저자가 다행히 간신히 자신을 추스리는데 성공한 것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 생존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작가가 스스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육신의 상처에 치료가 필요하듯, 정신의 상처에도 적절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치유되지 않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보이는 광기의 상징이 아닌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유대인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대신, 자신들이 저지르는 그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력은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올 폭력의 사슬을 연장할 뿐이다. 자신들을 향한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변명은 무의미하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니까. 이 책 <쥐>의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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