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이정익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

이 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조금은 부담스러운 저 제목을 지나쳐 바로 부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만화로/보는/한국/현대/인권사... 라니. 만화라는건 알겠는데, 한국 현대사라는건 알겠는데, 마지막 "인권사"라는 단어가 쉽게 혀에 감기지가 않는다. 그냥 현대사도 아닌 현대 인권사.

기본적으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이 결코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기록은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날 더 이상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같은 사실도 그것이 어떠한 맥락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진리값을 가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역사는 그것을 기록한 이의 사관에 많은 부분을 기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역사는 학문의 영역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정치의 영역, 권력 투쟁의 장으로 이끌려오게 된다. 어느 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해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학문의 논리가 아닌 헤게모니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인식에 반기를 든 학파가 실증주의다. 실증주의는 객관적 사실에 최대한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맥락을 죽이고, 실제 벌어진 일들 자체를 기록하라는 주문.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복합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에 접근할 경우, 대개 우리는 건조한 팩트들 속에 매몰되어 길을 잃고 만다.

예컨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수탈한 것도 하나의 팩트고, 그들이 조선 땅에 철도를 놓고 공장을 세운 것 역시 동등한 진리치를 지닌 팩트가 된다. 이 팩트들만 놓고 보면 일제가 우리를 강점하여 수탈했다는 주장과 그들이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주장 모두 각자 나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찬가지의 논리 구조는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는 주장과 박정희가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주장이 모두 옳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실증주의는 역사의 모든 교훈을 무화시킨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아니 정확히는 옳고 그른 것은 없고 그저 모두 팩트만이 남을 뿐이라는 이 역사관은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 죄과를 가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희석시키고 만다.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는 실증주의가 현실 속에서는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특히 멀지 않은 가까운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말이다. 실증주의적 역사인식을 가장 강조하는 집단이 조선일보를 위시한 극우세력과 그들을 보위하는 지식인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때문에, "인권사"는 길을 잃은 현대사 논란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그건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럭거리며 부서지는 팩트들 사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건 인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이다. 이 책이 "인권사"라는 부제를 달고 말하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리라. 유신정권의 칼날이, 인혁당 사건의 억울한 외침이, 그리고 80년 광주의 총성이 결코 다른 사실들(경제 발전? 안정?)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없는건 바로 인간의 피가 홍건히 베어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정공법이다. 가해자는 침묵하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화해를 구걸하고, 그들 중 일부가 마치 대표인 양 용서를 선언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에 날리는 따끔한 일침이다. 만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애니메이션 전공의 작가가 그려내는 그로테스크한 화면은 그 무게를 적절히 담아낸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꽉 짜이지 못한 듯한 느낌도 주지만, 모든 것이 가벼운 이 시대에 78년생이라는 어린(?) 작가가 그려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Epilogue를 읽고 나서, 앞서 지나친 제목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라는 제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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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버티고
-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김병욱 옮김 / 황금부엉이 / ★★

Vertigo 는 "현기증, 어지럼증"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니, 이 책의 제목 [American Vertigo]를 한글로 풀자면 "현기증 나는 미국" 정도 되겠다(설마 "미국인의 현기증"은 아니겠지). 제목만 봐서는 책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프랑스 철학자(?)라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월간 애틀란틱>의 후원으로 한 세기 전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여행 여정을 다시 한 번 따라가보며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 이 책의 기획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여느 여행기와는 달리 어떤 지역, 어떤 도시라는 '장소'에 대하여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끔은 한다.) 대신, 미리 잘 계획된 스케쥴을 따라 각 지역을 돌며, 그 지역에 사는 유명 인물들을 인터뷰하며 미국의 현안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 책의 주축을 이룬다.

레비가 만난 인물들의 면면은 흥미롭다. 조지 부시부터 시작하여 힐러리와 오바마, 존 케리와 같은 정치인들부터 시작해, 샤론 스톤, 우디 앨런, 워렌 비티와 같은 헐리웃의 스타들, 원주민 운동가와 무브온 등의 시민운동가들, 빌 크리스톨,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과 같은 우파 이데올로그들, 조지 소로스 같은 금융계의 거물 등 한 권의 책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다양한 인물들을 접할 수 있다. 이만하면 현재, 그리고 미래의 미국을 이끌고 있고, 이끌 인물들을 어느 정도는 섭렵했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각각의 인물과의 만남이 너무 짧은 분량에 담겨 있어 미진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의식 지도를 대략이나마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으니까.

허나, 다분히 상층(?) 중심의 이러한 접근은 대개의 논의가 미국이 대외정책으로만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중간중간 저자가 여행 도중 접하는 미국의 여러 면면들이 단상처럼 언급이 되나, 문제는 그 고민의 깊이가 그닥 깊어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짐짓 진지한 척을 한다. 미국의 여러 시스템의 비만을 선언하거나, 미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걱정하거나, 감옥을 둘러보며 푸코를 들먹거리거나, 불법이민자를 막으면서도 불법이민자에 의해 경제 시스템이 유지되는 미국의 현재를 의심스러워 하기는 한다. 말로는.

하지만 그게 전부다. 정작 직접 만난 원주민 운동가는 그가 시오니즘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당신은 틀려먹었어"라고 결론짓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넌 (그래서 그가 그토록 걱정해 마지 않는) 불법이민자들은 아예 직접 만나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대신 엉뚱하게 스트립댄서나 매춘여성들을 업소로 찾아가서 인터뷰하는 수고는 마다하지 않으니, 이 쯤에서 저자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접근하는 기본 프레임 자체가 좀 의심스럽다. ('선정성'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당신, 미국이라는 나라에 진짜 관심이 있기는 한건가. 혹시 관심있는건 당신 나라의 반미주의자들과의 논쟁 뿐인게 아닌가.

물론 외부인으로서 미국의 대외정책은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 중 하나다. 게다가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상세히 설명해주는 미국의 대외정책 관련 분파(?)들은 그 자체로 유용한 정보와 생각할거리가 된다. 허나, 그 정도로는 왜 이런 여행이 필요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여행을 통해 배운게 아니지 않는가? 각각의 인물과의 만남이 그 인물의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도 아니요(즉, 이 책은 인터뷰집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즉,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미국의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의미 있게 분석하는 것도 아니라면(즉, 이 책은 문화비평서가 아니다), 일 년 이상 미국 곳곳을 여행한 결과물이기라기엔 좀 허망하다. 차라리 미국의 대외정책(특히 네오콘의 이데올로기들)을 제대로 파고들어, 각 진영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며 치고 받는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또 하나, 나는 이 책의, 아니 저자 레비의 가장 큰 결점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그가 책 여기저기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에 대한 일방적 지지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건, 우리가 학문이나 저널리즘에 요구하는건 균형감각이다.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그는 단 한 번도 팔레스타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도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충돌을 이야기 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충돌을 간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시오니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요구하는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그의 머리속에서는 과연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논점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걸까?

누구나 자유를, 평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언명의 진실성, 그것을 레토릭과 구분해 주는 것은 바로 철학적 일관성일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들이대는 잣대가 달라지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주장은 결코 철학자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그의 언어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저자를 '철학자'로 부르길 주저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그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있는 이 기묘한 의식의 진공 영역이, 마치 블랙홀이 빛의 경로를 굴절시키듯, 저자의 사유를, 그의 통찰력을 굴절시키고 있지 않을까? 이라크전에 반대하다면서도 결국 "사담 같은 독재자도 나쁜 애들인건 분명하잖아", "미국 네오콘들도 그렇게 꼴통들인 것만은 아냐"라는 식으로 어물쩡 말을 흐리는 이면에는 역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당당할 수 없는 그의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자리잡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혹평을 해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책이다. (아, 변명이 안 되고 있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를 그 이름 외에는 별로 알고 있는게 없다면, 신선함을 느낄만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도 있고, 미국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싶은 정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이러저러한 부연설명을 가뿐히 생략하시는 저자 덕분에 인터넷 검색을 아주 많이 해줘야해서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 이러나 저러나, 별점 둘 이상은 힘들겠다.(그래, 별점은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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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거인
- 프랑수아 플라스 글 그림 / 윤정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

우연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그 쪽을 향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부쩍 환경과 생태에 대한 책들이 손에 자주 잡히는 편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든건 수채화풍의 삽화가 맘에 들어서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담긴 책이라서 놀랐다. 가볍게 읽으면서도 부드럽고 깊이 있는 울림. 동화는 이래서 좋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책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주인공이 거인족을 만나 그들의 삶을 기록하지만, 세상에 거인족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고원에서 살아가는 거인족들은 피부로 자연과 공명하며 이야기를 하고, 밤이면 별을 보며 노래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에 반해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경배하기는 커녕, 이익을 위해 그것을 파괴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주인공은 명예욕에 취해 거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남은 평생을 어부로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뻔한 얘기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의 터전을 망칠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 요즘은 툭하면 신문지상에서 환경 오염이 심각해서 조만간 심각한 위기가 닥칠 거라는 류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지구 온난화로 닥치는 대재앙을 다룬 스펙터클한 헐리웃 영화도 수많은 사람들이 봤다고 한다. 사람마다 심각하게 느끼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아마도 모두들 어렴풋하게나마 뭔가가 문제라는걸 알고 있을거다. 근데 왜 계속 이 모양일까?

물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는 체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윤은 그 자체로 물신화된 욕망이기도 하지만, 이윤을 형성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어떤 체제이건,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인간이 지구의 진정한 재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현경 교수는 "아름다움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거"라고 말했다. 그 분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사실 정확히 모르지만, 그 말 자체는 내게는 상당히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내게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의 반대에 있는, 즉 추한 존재인가를 깨닫는데 있다고 본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정성들여 묘사하는 거인의 아름다움은,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인간의 추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일 것이다. 여전히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생명의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의 추함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반성할 때, 어쩌면 아름다움은 진정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ps. 책은 예쁜데, 사실 좀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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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의 역사
-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였다. 영화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주인공들은 동막골로 향하는 미군의 폭격을 돌리기 위한 작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그들에게 육중한 비행기 엔진음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잠시 후 한쪽 하늘을 뒤덮은 비행기 무리가 지평선 쪽으로부터 다가오기 시작했다. 와... 처음이었다. 언제나 나는 폭격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으로만 상상해왔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나면 잠시 후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흙먼지만이 폭격의 이미지를 구성할 뿐이었다. 그런데 (비록 가상의 체험이지만) 아래로부터, 대상의 입장에서 바라본 폭격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줬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위압감이었고, 절망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

그리고, "반딧불이의 무덤"을 읽었다. 비처럼 내리는 소이탄이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절규했다. 그들은 아마 황국의 신민으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일본의 전쟁 수행에 복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해진 폭격은 정당했을까? 다행히도, 폭격을 가한 자들도 그런 변명은 하지 않는다. 대신,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아예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 폭격은 없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함부르크는? 드레스덴은? 그 곳에게 다치고 죽어간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절망과 공포를 가한 폭력이 고의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것이 실수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선언된 언설은 대개 현실을 기만한다. 히로시마를 순식간에 쓸어버린 그 어마어마한 폭탄의 이름이 'Little Boy' 였듯이, 이 땅에 공화주의의 전통을 수십년 후퇴시킨 독재자가 '공화'당을 만들고, 광주에서 수많은 민중을 학살한 자가 '민주정의'당을 만들었듯이. 언어는 자조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과 대척점에 선다. 하지만, 그렇게 기만된 현실을 복원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다. 민간인을 향한 폭격은 없다는 선언, 폭격이 종전을 앞당겨 결국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논리, 정밀 폭격으로 군사적 목표물만을 파괴한다는 선전이 있다. 하지만 폭격의 역사는 전혀 다른 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전부터, 심지어 아직 서구인들 스스로조차 창과 화살로 전쟁을 치룰 무렵부터, 하늘로부터의 폭격은 서구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했다. 그것은 창과 화살로 무엄하게도 서구인들에 덤벼드는 야만인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단죄의 형벌이었다. 적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으로부터 안전하게 그들을 절멸시키는 힘에 대한 상상력이 서구인에게 준 카타르시스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의 권능, 다시 말해 절대적 권력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기가 발명되었다.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식민지 열강들은 세계 지도에 자로 줄을 그어가며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의 역사 서술에는 서구 열강들 사이의 전쟁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무슨 전투를 했고, 그 결과 국경선이 어떻게 그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땅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서구 열강들에게 얌전히 자신들의 땅을 헌납하고 영광스러운 노예의 길로 들어섰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토착민들과의 사이에서 서구인들이 말하는 "전쟁"은 없었다. 전쟁은 인간사의 한 부분이다. 인간이 미천한 미개인들과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종하지 않는 야만인들에게는 오직 "절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으로부터의 단죄,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불기둥이 이 땅에 내릴 지어다.

폭격은 20세기의 초반 식민지 곳곳에서 착실하게 실험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폭격의 역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구인들이 비로소 폭격에 경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 폭탄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다. 그제서야 유럽인들은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를 수 있냐고 절규했지만, 그 절규는 비서구인들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서구 중심주의의 야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사실, 폭탄이 서구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기에는 많은 논리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와 다른 타자를 지배하거나 아니면 절멸시켜야 할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가했던 폭력과 동일한 논리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격은 곧 상대에 대한 완전한 힘의 우위를 선포하는 행위였다. 미국이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을 파괴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거부한 채 대신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던 것도,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던 시점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도, 폭격의 목적 자체가 완전한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2차대전의 끝을 선언했을 때, 세계는 새로운 권능의 주체가 어디로 옮겨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계는 여전히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정당성에 대해 침묵한다. 그건 과연 피해자들이 전쟁을 시작한 이들이라서일까, 아니면 폭격을 가한 자가 승자이기 때문일까.

대답은 오늘날에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은 이라크의 어느 마을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군사적 목표만을 향한 제한적인 폭격이며 민간인 피해는 없다는 표준 멘트가 뉴스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역사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인도주의적' 폭격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때때로 양심적인 언론인들의 목숨을 건 탐사보도를 통해 진실의 일부가 드러날 때조차 우리는 잠시 놀라는 척을 할 뿐이고, 그들은 단지 실수에 의한 오폭일 뿐이라는 뻔한 멘트를 반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100년 동안 반복된 폭격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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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 

이야기 하나. 언젠가 한 후배에게서 프로그래머의 정년이 40세도 채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전공을 바꿔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 때가 내 나이 25세 무렵이니 후배는 20대 초반이었다 -_-) 또 한 친구는 지금까지 배운게 이 짓(?) 밖에 없으니 일단 생계는 회사에서 월급 받는걸로 해결하고, 가욋돈을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노후를 대비해야한다고 역설한다. 다른 한 친구는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야기 둘.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에서 '도전'보다는 '안정'을 원하고 있다. 기업에서 '평생 고용' 개념이 사라져 가면서, 학생들의 직업선호도가 더욱 안정 희구 성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대학신문〉이 지난해 20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생 의식 조사에서 39.6%가 공무원·공기업을 입사 선호 1순위로 꼽았다. 1998년 8.7%에 그쳤던 것이 구제금융 사태 뒤인 2000년 13.9%를 기록했고, 2004년 이후에는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마저 제쳤다.(인터넷 한겨레 2006년 2월 19일, <<대학생들 너도나도 "공무원·공사 직원">> 기사 中)

이야기 셋. "... 그리고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준비 없이 기습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데 기습이 닥치지 않는 인생이다. 이런 종류의 비극에 대해 우리 영국의 도덕은 당연히 침묵을 지킨다. 위험을 대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사람이건 국가건 완전 군장을 갖춘 채 비틀거리며 살아 나가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E.M.포스터 『하워즈 엔즈』(1910) p.141


나는 가끔 세상을 젊음과 늙음의 투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곤 한다.(여기서 젊음과 늙음은 단지 나이에 따른 구분은 아니다) 젊음에게 세상은 새로운 신천지이며 기회의 땅이다. 이 기회의 땅에서 젊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하지만, 그 땅에 이미 터를 일구어 정착한 늙음의 저항과 경험부족에서 오는 시행착오들을 극복해야만한다. 반면 늙음은 자신들의 땅을 생소한 방식으로 바꾸어버리려는 젊음을 경계한다. 그들에게는 비록 예전의 정렬은 사라졌지만,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완숙함을 무기삼아 젊음의 서투름을 압도하려한다. 이 투쟁에서 젊음이 늙음을 압도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감내해야하고, 반대로 늙음이 젊음을 압도하면 사회는 변화의 역동성을 잃게 된다. 요컨데, 이들 사이의 투쟁이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종종 나는 우리 사회에서 늙음이 점점 젊음을 압도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젊음은 이제 실패를 너무나 두려워해서 늙음의 안정된 지식에 너무 쉽게 귀를 기울인다. 고등학생들은 취직 걱정을 하며 전공과 대학을 선택하고, 대학생들은 오랫동안 안정된 수입을 줄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하고, 직장인들은 은퇴 후의 노후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럼 도대체 우리에게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지금 내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현재'는 막연한 '미래'에 저당잡혀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희미해지고 있다. 젊음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늙음의 표정을 하며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젊음이 조로한만큼 사회도 조로해간다.

이 책 『전망 좋은 방』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0여년 전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젊음과 늙음의 투쟁으로도 읽힌다. 소설의 축을 이루는 갈등관계는 루시로 대표되는 젊음과 샬롯으로 대표되는 늙음이다. 여기서도 늙음은 끊임없이 젊음을 포섭하려 한다. 젊은은 늙음에게 반항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경험 없음에서 비롯된 불안은 어느 틈에 젊음으로 하여금 늙음을 닮아가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경제적 불안감이라면, 빅토리아 시대의 젊음들을 짓누른건 과거의 권위들, 즉 종교와 관습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투쟁의 법칙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늙음은 결코 젊음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이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이들은 늙음이 아니라 젊음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늙음은 젊음과 헤게모니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젊음의 투박한 열정을 다독이면서도 그들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가도록 격려한다. 바로 조지의 아버지 에머슨 씨처럼. 혼란에 빠진 루시를 구원하는 사람이 열정에 가득찬 젊음(조지)이 아니라, 사려 깊은 늙음(에머슨 씨)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사람이 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젊은가 혹은 늙은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무엇이 현명한가를 깨닫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자!! 결국 이 세계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건 젊음이다. 젊음이 젊음답지 못한건 정말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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