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발견
-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 

'지식의 발견'은 내게 있어 '한국 지식인의 발견'으로 읽히는 책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텐데, 나 같은 경우는 한국 저자들의 책들보다는 외국 저자들의 책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건 한편으로는 내 자신의 지식/가치 체계가 서구 담론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저자들의 저작들은 불가피하게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 속의 복잡한 역학구도 안에 배치되어 읽힐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기가 좀 더 골치아프다는 이유도 있다.(후자는 사실 일종의 현실도피다 -_-) 여하간, 이런 이유로 한국 저자들의 책을 등한시했던 나로서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책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책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은 서구 담론의 단순한 수입에서 벗어나 한국적 맥락의 담론을 찾고자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한국의 인문/사회학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학계를 이끌만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서구의 담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소화과정을 통해 한국적 맥락을 찾고자하는 시도들이 여러 지식인들을 통해 꾸준히 시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탄스러운 것은, 이들의 저작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현직기자다운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덧붙여 더욱 풍성하게 해석해내는 저자의 시선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그냥 꿰는 정도가 아니라, 구슬의 장단점을 잘 가려내어 절묘하게 배열하는 장인의 솜씨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책의 시작은 그리 좋지 못했다.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앞부분에서 저자는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출발한다. 학문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글에서 '주구', '배신자', '비열한' 등과 같은 다분히 선동적인 수사들이 동원되는 것도 불편한 느낌을 주었고, 박노자 교수와의 논쟁에서는 매우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는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논쟁의 핵심을 찾아 부딛히기보다는 상대(박노자)의 주장을 비껴나가고 있다. 사실 이건 꼭 저자인 고명섭에게서만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들을 때 종종 느끼는 점이기도 하다. 어떤 이념이건 그것이 현실 속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이념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 속의 모순에 기반하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양코자 하여야 한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주장들의 논거는 멀게는 일제시대부터 가깝게는 80년대까지의 외세의존적 군사독재 정권에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민족주의의 '현재적' 의의와 한계를 지적하는 박노자 교수의 글에 제대로 답변할 수 없음은 필연적 결과로 보인다.

물론 저자가 민족주의를 옹호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목표는 따로 있을 것이다. 글 중간중간 저자는 탈근대 담론을 내세우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보수 세력과 불순한 동거를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계간 <<역사비평>>의 비판 참조) 탈근대 담론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들어 형성된 것이며 민족주의 역시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는 분석(B. 엔더슨,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기반하여 민족주의를 근대의 한 부분, 즉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탈근대 담론들은 과거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아시아 지역의 식민화를 정당화했던 논리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그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친일 행위가 탈근대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한 일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명섭은 서중석과 김동춘의 글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러한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문제는, 저자가 '과거의' 친일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의'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 민족주의의 '현재적' 의의를 별다른 검증 없이 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데, 고명섭은 탈근대 담론의 민족주의론은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 형성된 이론일 뿐이며, 우리 민족은 근대 이전부터 균질적인 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주의 개념을 그대로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와 친미사대적인 독재정권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 속에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기능을 해 왔음을 간과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한국적 상황에 맞게 새롭게 고찰해야 한다는 고명섭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탈민족주의 담론들이라고 해서 서구 이론에 기대 무작정 민족은 허구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탈민족주의 담론들은 단일 민족이라는 지배적 인식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사를 더욱 세밀하게 검토하기도 한다. 따라서 민족/민족주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탈민족 담론을 서구의 것으로 평가절하할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논쟁을 통해 심화되어야 할 터인데, 저자는 이러한 논의 없이 일부 탈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행보를 근거로 탈근대 담론 전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의 긍정적 기능 역시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 가능하다.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보여준 비타협적 투쟁을 근거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는 가장 긍정적인 순간에조차 민족주의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매개로 삼아 '국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하고자하는 열망과 직결되어 있었으며, 80년대의 반미투쟁 역시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지향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때문에 내게는 민족주의 세력의 비타협적인 투쟁 역시 정통성을 잃은 지배세력에 강점되어 왜곡된, 외형만 근대를 취한 국가를 대신하여,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시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국 정치사의 발전에 민족주의 세력의 투쟁이 큰 기여를 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민족주의 개념의 정당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서평집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개하는 책의 논점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 책만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중간중간 간접적으로 읽히는 저자의 생각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엄밀한 개념 정립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책의 1/3을 할애할만큼 큰 비중을 가지고 다룰 주제라면, 반대쪽 의견도 진지하게 검토하며 고민하는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식의 발견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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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 ★★★★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케이블 TV와 인터넷, 핸드폰과 떨어져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핸드폰과 일상 생활을 연결시킨 모 통신사의 '현대생활백서' 광고 시리즈가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오른편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으며, TV에서는 스포츠 중계가 나오고 있고, 나는 인터넷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테크놀로지를 논할 때 우리는 비데나 에어콘을 예로 들지 않는다. 인간의 편익을 증진시킨 기술들은 인류 역사상 수도 없이 많았지만, 아무도 성급하게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테크놀로지가 압도적인 이유는 과거의 기술들과 달리 그것이 우리가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자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TV, 인터넷, 핸드폰. 그 외에 당신은 무엇을 통해 세상을 만나는가?(물론, 이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미국인 가정 역시 매스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접한다. TV와 라디오, 타블로이드 신문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난다. 저녁 식탁에서 아이들은 서로가 새로 획득한 정보들을 과시한다. 대화가 멈춘 빈 공간을 채우듯 TV와 라디오는 계속 정보를 내뱉는다. 참으로 정보로 충만한 삶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충만함 속에 안도한다.

하지만, 환상이었다. 재난이 닥치자 그 모든 정보는 뜨내기 소문과 다를 바 없었고, 그들에게 남겨진 현실은 그들이 정작 아/무/것/도/모/른/다 라는 냉혹함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가장 현명한 행동인지 결정할 지혜는 결코 정보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모습 위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앞에 허둥대던 미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정보의 범람 속에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지배하는건 두려움이다. 그들이 획득한 정보 속에 그들 삶의 고민을 해결해 줄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삶은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쇼핑을 하고, 섹스를 하고, 정신상담을 받지만, 변하는건 아무 것도 없다. 지혜는 지식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에 정복당한 우리 삶의 현주소, 우리 문명의 현주소이다.

White Noise :【물리】(모든 가청(可聽) 주파수를 포함하는) 백색 소음 (출처 : 네이버 사전)

White Noise는 본래 물리학 용어로서 모든 주파수대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정보는 우리 주변을 언제나 가득 채워 하얀 소음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그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우리에게 유용한 지식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정보의 홍수 속에 길을 잃은 셈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 문명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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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2-1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히리의 [지옥 천국]을 읽고난 후의 턴님 감상을 들었을 때도 느낀건데요, 턴님과 저는 같은 책을 읽고 반응하는 부분이 아주 다른것 같아요. 물론 같을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 책, [화이트 노이즈]를 읽고 예상하지 못한 위안을 얻었거든요. 책 속의 여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아주 심하게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 아직 시판되지도 않는 약의 임상실험자가 되고요. 저 역시 가끔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는데, 혹시 이건 나에게 어떤 '이상한' 성향이 있는건 아닐까 스스로 고민스러운 부분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걸 알게되니까 묘하게 위안이 되더라구요. 책 속의 여자는 신문의 광고를 보고 찾아가죠. 그 광고가 나왔다는건 그런 고민을(죽음에 대한 두려움)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가 될테구요. 그리고 여자가 그 약을 먹었다는 걸 알게됐을 때 남편도 그러잖아요. 자신도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그게 몹시도 마음에 들었어요. 스스로 이상한가 싶어서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는 일을 이제는 좀 덜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turnleft 2011-02-11 13:3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책이 좋잖아요. 맥락이 풍부하고, 저마다 다른 곳에서 삘(?)을 받을 수 있다는거. 영화도 훌륭한 텍스트지만 책만 못한 까닭도 거기 있지 않을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니까, 혹시 "스위치"란 영화 봤어요? 제니퍼 애니스톤이 주연으로 나온.. 거기 나오는 꼬마가 죽음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죠. 근데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그러니까, 그런걸로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
 

보이지 않는 도시들
-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나의 제국은 실재하는가?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문득 어린 시절 TV에서 종종 보았던 도날드 덕 만화가 떠올렸다. 금고에 가득 쌓인 금화 속을 헤엄치는 도날드 덕의 모습은 쿠빌라이 칸의 고뇌와 정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도날드 덕의 소유는 즉물적이다. 그의 소유는 숫자나 상징이 아닌 금고 속의 금화들로 실체화되어 있고, 도날드 덕은 그 속을 헤엄치며 금화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느낀다. 반면, 쿠빌라이 칸은 광대한 제국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칸 자신은 그 제국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자신이 보는 것은 오직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수도와 방문해 본 몇몇 도시들일 뿐, 제국은 지도상의 표식과 한번도 가 본 적도 없는 도시들에서 보내오는 조공들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칸은 자신의 제국이 실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인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당혹케 하지만, 그 중 가장 고약한 것은 인식에 대한 질문은 곧 인식하는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존재는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제국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칸이 스스로가 칸임을 확신할 수 없음을 뜻한다. 칸의 고민도 여기에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하여,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그대가 여행한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칸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애초에 아름답거나 신기한 도시의 풍광이 아니었으리라. 칸의 사유는 이미 소유의 굴레를 넘어 자아와 인생, 그리고 세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화답하여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도, 따라서 제국의 도시에 대한 기행문이 아니다. 이야기 속의 도시들은 과연 실제 제국의 도시들이기는 할까?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우리는 이 도시들에 가 본 적도, 심지어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동시에 마르코 폴로가, 아니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린 작가가 들려주는 도시들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릴 것이 없어 보인다. 모든 도시란 결국 인간의 거주지이며,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책 속의 도시들이 기억, 욕망, 기호, 교환, 하늘, 죽음 등의 키워드들로 묶여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금 과장을 섞자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이 짤막짤막한 하나하나의 도시 이야기들은 우리 인생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에서는 은폐되고 모호해져 잘 보이지 않는 삶의 면면들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는 보다 날카롭게, 그러나 훨씬 풍부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어찌 이 아름다운 언어와 심오한 상징들로 가득한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한편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그 여운은 마치 향기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네루다가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가르쳤듯, 시는 메타포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한 편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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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 

성폭력에 관련한 토론을 보다보면, 가해 남성들이 성욕을 억제 못하는 까닭을 진화론적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주장을 종종 접하게 된다. 과거, 인류가 아직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당시, 종족 번식을 유도하기 위해 남성의 유전자는 성욕을 강화하는 식으로 진화했고, 여성은 남성에게 자신과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식으로 진화했다는 식의 설명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들은 '그럴듯하게' 들릴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또한 생물학자들의 간단한 반론(예컨데, 여전히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강간은 인간에게만 나타난다는 사실)에도 그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 어설픈 진화론은 남성의 성욕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들의 단골 소재로 차용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왜 하필이면 '진화론'일까. 이런 류의 주장에서 '과학'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과학 이전의 인기 레퍼토리는 '신의 섭리'였다. 진화론이든 신의 섭리든, 공통점은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성의 시대에 '과학'만큼 확실한 권위가 또 있을까. 허나 이들이 호명하는 '과학'은 엄밀한 의미의 과학이 아니다. '신의 섭리'가 입증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듯, 이들 '과학' 역시 입증할 수 없고 단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손을 따서 체기를 내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실용적인 지식은 그 자체로 요긴하지만, 이것이 나쁜 피가 질병의 근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앞서의 체한 사례 덕에 이러한 주장은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과학은 유추가 아닌 엄밀한 인과관계의 증명 속에서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를 뽑는 치료 방법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비 과학/의학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처럼 "옳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입증할 수 없는 주장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p. 269)"

인종차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들이 반복되었다. 애초에 신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창조하였다는 주장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종차별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속속 나타난다. 골상학이나 두개계측학과 같은 초기적 시도들부터 시작해 IQ 테스트와 같은 좀 더 고상한 이론들에 이르기까지, 인종주의는 지속적으로 과학의 이름을 호명해 왔다. 이들이 사용한 과학적 방법의 핵심은 인간의 측정(Measure)과 그 자료의 분석(Analysis)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굴드는 이 책 [The Mismeasure of Man] 을 통해 이들 이론들이 측정과 분석 모두에서 어떤 오류를 저질렀는지를 밝혀낸다.

우선 골상학과 두개계측학은 잘못된 측정(Mismeasure)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뇌용적을 측정한다던가 아니면 신체의 여러 치수들을 측정하여 이를 근거로 인종간의 우열을 논하는 이들 이론들은, 사람들에게 숫자가 가지는 권위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눈을 어지럽히는 숫자들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자료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실험도구의 변화로 동일한 대상의 측정치가 달라지는 것은, 오차가 큰 실험도구를 썼을 때 실험자가 선입견에 따라 실험을 진행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로는 원하는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결과 산출 과정에서 제외하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표본에서 산출한 평균을 해당 인종 전체의 평균값으로 제시하는 등, 이들 측정된 자료의 신뢰수준은 '과학'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이다.

아전인수격인 자료 해석은 더 가관이다. 대표적인 두개계측학자인 폴 브로카는 자신이 속한 인종(프랑스인)의 두뇌 용적이 독일인들보다 작은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뇌의 크기가 신장 및 나이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브로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이라에서 측정한 작은 두뇌 용적을 열등함의 증거라고 주장할 때는, 그들의 작은 신장이나 사망 나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들 이론들의 가장 큰 난점은 인과관계의 증명 없이 자의적으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예컨데 자신들이 가진 샘플에서 전두엽의 크기가 백인종 > 황인종 > 흑인종의 순서로 나타났을 때 이들은 가차없이 이것이 백인종의 우수성을 증명한다고 선언했는데, 후에 새로운 샘플에서 이 관계를 뒤집는 수치가 나타나면 이들은 전두엽 크기를 포기하고 다른 기준을 찾아나섰다. 이는 이들 이론들이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치를 찾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신체적 측정을 통해 인종간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능력, 즉 지능을 측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른바 IQ 테스트의 탄생이다. 애시당초 IQ 테스트는 인간의 지능을 '서열화' 하고자 창안된 테스트는 아니었다. 오히려 IQ 테스트의 창안자 비네는 이 테스트가 학습능력이 극히 떨어지는 아이들을 일찍이 찾아내어 적절한 교육을 통해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사람들을 서열화하여 낙오자들을 배제하고자하는 목적이 아니었음을 강조하였다. 허나 창안자의 이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된다.

비네의 이론은 터먼과 브리검 등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면서 표준화된 문항들을 통해 지능을 측정하는 현대식 IQ 테스트의 형태를 갖춘다. 그러나 굴드가 밝혀내듯 이들이 실행한 IQ 테스트는 매우 조잡하고 사실상 엉터리로 진행된 실험이었는데, 문제는 이 테스트의 결과를 인종주의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은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수행한 결과 낮은 수치가 나왔음을 근거로(수십일간 배를 타고 미국에 갓 도착한 비영어권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수행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주민들이 미국 전체의 평균 지능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는 이민제한법을 제정하였다. 덕택에 가난과 전쟁으로부터 도망친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거나 죽음을 맞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정신박약인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단종법"이 제정되어 수십만의 정신박약인들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IQ 테스트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파괴에 이르는 길은 종종 간접적이지만, 사상은 총이나 폭탄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 382)

'지능'을 기준으로 인간 본연의 권리를 말살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과연 이 '지능'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냐는 점이다. 터먼과 브리검, 그리고 후에 일반지능 g를 창안한 스피어맨과 버트 등 IQ 테스트 옹호론자들의 공통점은 지능이 고정불변하며, 하나의 수치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통칭하여 '생물학적(유전적) 결정론자'라고 부를 수 있는데, 굴드는 이들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해 나가면서 '지능'이 결코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특징이 아님을 밝혀낸다. 이른바 '물화(物化)'의 오류이다. 또한 이들 이론들이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구분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갖지 못한채 성급하게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비약하고 있음도 굴드가 비판하는 주요한 오류이다.

스피어맨이 발견한 일반지능 g 는 IQ 테스트에서 수행된 다양한 테스트들을 관통하여 강한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어떤 수치를 지칭한다. 스피어맨은 요인분석 기법의 복잡한 계산을 통해 이 g 값을 산출한 후, 이것이 사람의 여러 정신적 능력들을 지배하는 '일반지능'을 실제로 측정한 값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굴드는 요인분석의 결과값은 분석에 도움이 되는 편의적 수치지, 결코 어떤 실체가 아님을 지적한다. 마치 우리가 '속도'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편의적으로 사용되는 수치일 뿐 어떤 실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대성 이론의 세계에서 사물의 속도는 간단히 사라져버린다. 일반지능도 마찬가지다. 요인축을 회전하면 일반지능은 사라지고 다른 형태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값에 '지능'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실제 존재하는 무엇을 측정한 것처럼 착각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IQ 인 셈이다. 따라서 지능이 생물학적으로 고정적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러나 IQ의 옹호자들은 IQ 테스트의 결과를 끊임없이 확대 해석했다. 상류층 아이들의 IQ 테스트 결과가 높게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지능이 유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부모의 IQ는 재 보지도 않고!!) 좋은 환경은 아이들 부모가 지능이 높다는 증거이며, 그렇기 때문에 높은 지능을 유전받은 아이도 지능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좋은 환경이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높였다는 가설은 이들의 머리에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는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이 실험의 결과 생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먼저 생물학적 결정론의 입장에 서서 실험결과를 해석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닌게 아니라, 골상학이건 두개계측학이건 IQ 테스트건, 굴드가 밝혀내는 이들 이론들의 일관된 오류는 냉정한 관찰자의 눈조차 흐리게하는 선입견에 의한 왜곡이다. 원하는 결론을 위해 자료 자체까지 조작하는 조악한 시도들은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엄밀한 과학적 과정을 강조한 연구자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인종주의적 결론으로 비약해 버리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회의마저 들 지경이다. 한마디로, 이 모든 사례들은 어떻게 '의도'가 '원하는 결론'을 향해 진실을 왜곡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블랙홀의 존재가 빛의 진로마저 바꾸어 놓는 것처럼, 인종주의라는 사회적 통념의 힘은 이처럼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그리고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적 탐구마저 왜곡시켰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아무리 전문지식으로 무장했더라도 결국 과학자들도 이 사회의 평범한 한 명의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곱씹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이들 이론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은 사회적 통념과 선입견의 강한 요구가 과학자라는 사회 구성원을 통해 이론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들이 발표 당시 상당한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음은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러한 이론들이 각광을 받은 것이 그 과학적 엄밀성과 획기적인 결과물 때문이 아니었다. 거꾸로 이들 이론들은 대중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었던 선입견들을 확인해주는 일견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인종주의'라는 비난과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자신이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건 그저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대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들을 밟고 올라서서도 당당하게 "나는 관대하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드러날 오류들이 묻혔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결론을 얻은 이상, 그 과정을 짚어보는 것을 무의미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대중용 출판물에서 쉽게 보 수 있는 버트의 주장이나 자료에 분명한 잘못이나 의심스러운 주장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능에 대한 그의 주장을 믿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것은 객관성이라는 가면을 쓴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p. 446)

사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소상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소위 '황우석 신드롬'에서 대중들이 원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세계 최초'라는 허위 의식과 '국익'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주판 굴림이 그들을 지배했을 뿐이다. 때문에 거짓 가면이 거의 벗겨진 순간에조차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들을 외부 세력의 불순한 음해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 믿음이 강했던만큼,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 사회는 더 큰 정신적 폐허를 견뎌야만 했다. 이 역시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인간이 원래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니면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정말로 만약, 사람들 사이에 유전적 차이로 우열이 존재하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를 집어던져야 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다 이다. 생물계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른다고 해서 인간 사회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를 까닭은 없다. 만약 약자를 보호하고 다 같이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결정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과학은 결코 우리 삶의, 우리 사회의 판관이 될 수 없다. 과학에서 답을 찾으려 했던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인간은 평등한가'라는 사실관계의 질문이 아니라,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가'라는, 우리가 추구할 가치를 묻는 질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는 있지만 답을 줄 수는 없다. 과학이 인간을 측정할 때,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양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단지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함이다. (p. 616)" 는 굴드의 조언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다.


ps. 원서와 비교하지 않아서 전체적인 번역의 정확성은 알 수 없지만, 책 표지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 이라는 문구는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역자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한게 맞을까? 출판사 쪽의 실수이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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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

아무런 힌트도 없이 나타나는 갑작스런 시점 이동은 김소진의 글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보통은 과거와 현재, 생각과 현실 사이를 오갈 때면 단락을 나눈다던가 하는 형식상의 변화가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를 주기 마련인데, 김소진의 단편들에서는 이러한 배려(?)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실어 잠시 나른하게 읽다가도 갑작스래 정신을 곧추세워 다시 읽어내려가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러한 형식상의 특징도 일상의 나른함 속에서 그의 소설이 주는 정신적 각성 효과와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닌데, 김소진의 글을 읽노라면 세대차이 같은게 느껴진다. 그가 77년생인 내게는 익숙치 않은 우리 고유어와 사투리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리는 삶의 모습이 낯선 까닭이다. 예컨데 90년대 후반부터 많이 읽히는 하루키나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곤궁함은 (젊은)주인공에게 닥치는 일시적 시련/고난의 성격을 지니는 반면, 김소진의 주인공들에게 가난은 어려서부터 뼈 속 깊이 스며든 삶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가난은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흔한 경험이었지만, 확실히 우리 세대에게는 낯선 경험일 뿐더러 우리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작가들도 좀체 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지금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들이다.

김소진이 지적하는 바, "열린 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그 이데올로기의 관심사가 아닌 이들을 타자화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닫힌 사회"이다. 생각해보면, 서울역이나 종묘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때 그 주변에는 노숙자들이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었는데, 정작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싸늘했던 것 같다. 노동자/농민/빈민/장애인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외칠 때 이들은 그 구호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건 몰라도, 자신들도 그 좋은 세상에 한자리 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느꼈을리는 없는 것 같다. 모두로부터 타자화된 삶. 그것이 김소진이 신문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던 이야기일지 모른다.

단편집 한 권 읽고 하기엔 좀 건방진 이야기지만, 확실히 김소진이라는 작가는 '아직' 미완의 그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존성이라던가 어릴적 담력 과시를 위해 철탑에 오른 이야기 등은 오롯이 그 자체로 의미부여가 되고 어느 단편에서는 중심 소재가 되는 내용인데, 몇몇 단편에서 별 비중 없이 소품처럼 재차 사용되다보니 오히려 소재의 가치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소품으로 쓰일 소재를 좀 더 풍부히하고, 힘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좀 더 면밀히 파고 들어갔더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이런 바램을 들어줄 수 없는,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의 생이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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