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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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그 당시 우리는 정말로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을 실제로 결정했다. (중략) 우리가 맛보았던 그 도취는 보통 권력의 도취라고 불리는 것인데, 나는 그러나 (약간의 선의를 가지고) 그보다 좀 덜 가혹한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든 일에 여러 가지 면이 있듯)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나가고 만들어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이렇게 지독한 ‘농담’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체코라는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던 사회주의 열풍이 ‘농담’이었다고 말한다. 체코와 사회주의만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있다고 믿는 수많은 순진한 젊음들과, 시대를 휩쓸고 폐허를 남긴 채 사라져버리는 격정과 폭풍,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농담’이었다고 말한다. 그냥 ‘후일담 문학’ 정도로 치부해버리기엔, 그러나 이 농담은 너무 농도가 짙다. 작가의 생각이 가벼운 것도 아니고 냉소적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농담의 뒷맛이 너무 쓸쓸하다. 

386 작가들의 후일담 소설이 싫었다. ‘우리는 치열했네’ 하는 식의,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듯한, 그래서 엄살처럼 보이는 소설들. 후일담이라면 되돌아보는 만큼의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얄팍하기 만한 소설들. 고민에 비해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버린 듯한, 그런 기분. 시대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시대’를 너무 간단하게 얘기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곤 했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도 난 불만 투성이였다. 인간 개개인에게 더없이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군중’들, ‘시대’라는 이름의 광기. 몽땅 미친 놈들이었다, 그 시대는 미친 시대였다... 후일담 문학이 됐든 시대비난 문학이 됐든, 단선적으로 뭔가를 재단해버리는 것이 싫어서 ‘소설이 싫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쿤데라의 회고는 뜻밖이었다. 문혁을 겪어낸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 시절을 미친 시대로 비난하는 것과 달리(그 지식인들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광풍의 시기를 ‘역사에 매혹되었던 시대’라고 말한다. 이건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다. 소설에 묘사된 한 청년의 젊음이 탄광에 처박혀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를 바라보는 쿤데라의 시각은 너무 따뜻한 것 아닌가! 

작가 스스로가 힘겹게 살아낸 시대를 냉소 혹은 비난 대신 연민과 통찰력을 갖고 바라보는 것. 쿤데라 소설의 힘은 어쩌면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 체제의 문제 혹은 경계에 선 망명자의 시각 같은 것들, 쿤데라라는 작가에게서는 이렇게 녹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작가의 명성을 확인한 독자로서의 기쁨 뿐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지나온 시대의 '광기'를 비난하는 '후일담 군중심리'(공산주의 욕하기)가 오히려 원초적 군중심리(홍위병 심리)보다 더 환멸스럽게 느껴지던 차였기 때문일까. 쿤데라식 '돌아보기'에 어쩐지 안심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 


옴니버스 비슷한 묘한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여러 명이다. 연애편지에 써갈긴 몇마디로 탄광에 처박혔다가 결국 냉소주의자가 되어버린 청년, 전통만이 체코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라 믿는 한 아버지, 끝내 '신(神)'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는 수도승 같은 남자. 그들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이야기, 자기만의 회한을 안고 있다. 

공산주의는 사회를 동심원으로 만들어서 중심부터 테두리까지 겹겹이 원을 만들려 했지만 인간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중심을 갖고 있고, 저마다의 원을 만든다. 각각의 원은 때로는 사회주의의 이상에서, 때로는 전통과 문화에서, 때로는 사랑에서 서로 교차하며 접점을 만든다. 쿤데라의 주인공들도 그렇게 때로는 접점을 만들고 때로는 멀어져가는 동그라미들이다. 동그라미들이 사그러지고 서로 멀어져갈 때 나는 서글펐고,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서로 만날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숱한 동그라미들의 교차점이 어디가 될지, 작가는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역사의 방향성을 논하는 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 시대, 혹은 글로벌 자본주의로 일로매진하는 것만이 역사의 남은 방향인 듯 느껴지는 시대. 이 소설은 오래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역사를 쉽게 재단하지 않는 것을 보면 쿤데라라는 작가는 어쩌면 '사회주의 그 이후'가 찬란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들, 하나같이 서글픈 인생들이다. 인생도 역사도 유동적이지만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쉽게 얘기할 수 없다. '농담'의 주인공들은 흐르지도 머물지도 못한 채 그저 흔들린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고독뿐이다. 그런데 쿤데라의 시선은 냉혹하지 않다. 그들의 서글픈 인생도, 고독마저도 결국 스스로 껴안아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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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8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3-0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 님, 역시 정확하시군요. 쓰다 만 것 맞습니다. 머리 속에 생각이 맴돌긴 하는데, 역시나... 읽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났거든요.

마태우스 2005-03-0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내공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리뷰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책에 대해 쓴 리뷰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다행히 제 리뷰는 알라딘에 없습니다.

알라비 2005-03-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공감이 가는 리뷰... 딸기님, 복 받으세요^^

딸기 2005-03-1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알라비님, 오랜만이예요!
알라비님 인터뷰를 이제 다시 시작해야겠군요. ^^

알라비 2005-03-1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인터뷰 그거, 긴장되던데요... 뭐,그래도 합시다. 이미 친구는 된 것 같지만^^
 
Hirai Ken - SENTIMENTALovers
Hirai Ken (히라이 켄)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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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꼭 터키 남자처럼 생겼다. 처음엔 half 인 줄만 알았다. 
미성(美聲)이다, 히라이 켄의 목소리는. 
그런데 왜 별이 세 개 밖에 안 되냐면... 머리 속에 맺혀지질 않는다. 내게 '좋은 음악'이라면, 듣고난 뒤에 두통처럼 머리 속에 노랫가락이 왔다갔다 하거나 혹은 듣고 있는 동안 춤이라도 추고 싶어지는 그런 음악이거든.
'ひとみを閉じて’가 듣기 좋아서 사긴 했는데, 히라이 켄의 노래는 사실 어느 것이나 그게 그것 같다.

(한가지 궁금증: 이 음반이 왜 '19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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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3-08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주제곡이군요. 영화를 못 봤는데...
전 요즘 러브 사이키델리코 음반 살까 심각하게(?) 고민중인데...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시나 봐요.

딸기 2005-03-0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는 못 봤는데, 그거 주제곡이라고 하더군요.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이 음악은 제 취향은... 아닌가? 맞나? 솔직히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요. 좋아하는 장르를 고르는 것이 불가능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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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야 리사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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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굴러다니던 녀석을 집어들고와 책꽂이에 꽂아놨는데, 지금 리뷰를 올리려고 검색해보니 그새 신간이 나왔다. 같은 소설, 같은 번역자, 아마도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이라는 작가의 경력 덕에 신판 출간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암튼 한국 출판계가 요상하기는 하다. 

열 아홉 여고생 작가의 소설. 딱 그만큼. 경쾌하면서도 나름대로 진지하다. 처음엔 너무 시시해서 "음..."하면서 읽었는데, 다 읽어갈 무렵엔 그래도 기분이 가벼워져서 "이히..." 했다. 벽장 속으로 들어간 여고생과 꼬맹이라니, 깜찍한 발상이다. 그 이상 의미를 두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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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 아니다 - 아메리카의 진정한 해방자 볼리바르
니나 브라운 베이커 지음, 이정민 옮김 / 파스칼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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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차피 기대를 크게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용이 너무 빈약했다. 알라딘에서 책을 사면 이런 맹점이 있다. 내 눈으로 책 표지를 넘겨보고 살 수가 없으니. 얇은 책에 하드커버, 이런 책들 치고 알찬 것이 별로 없다. 볼리바르, 이름만 들어본 위인이라서 한번 읽어볼까 하고 구입했는데 영양가가 너무 없었다. 

볼리바르의 어린 시절부터 늙어죽을 때까지를 소설처럼 엮었다. 읽기에 지루하지는 않다. 당시 라틴아메리카 끄리오요 상류층들의 분위기랄까, 그런 것들이 머리 속에 좀 그려지기도 하고. 그래저래 술술 읽어내려가기는 했는데, 그냥 딱 거기서 끝이다. 뭐가 모자라냐고? 볼리바르의 '사상'도 없고 저자의 '역사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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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3-0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크게 났던 기억이 나네요
 

5000원 받아먹으려고 지난주 내내 서재질을 했더니.

보람이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좀 힘들다. 리뷰 올리느라고...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위대한 알라디너들은 어떻게 그렇게 리뷰 & 페이퍼를 많이 올릴 수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좀 갈쳐주세요.

리뷰 한 개는 몇 점, 페이퍼 한 개는 몇 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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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0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거 안 가르쳐줄 걸요? 흐흐...
그냥 읽고 올리는 게 생활이 되면 괜찮지 않으려나...
게다가 추천수와 리플이란 변수가 있으니 점수를 안다한들...

딸기 2005-03-0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구두님, 앞으로 제 리뷰에 추천 & 리플 많이많이 부탁드려요~~

바람구두 2005-03-07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잘 쓰면 그렇게 해줄께요. 흐흐, 어떤 건 책이 좋아서 추천했거덩요,,,,하하

2005-03-07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3-0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홋... **님, 고맙습니다
구두님.
흥.

딸기 2005-03-0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14175점.
오늘 올린 것, 리뷰 3개, 페이퍼 2개.
리뷰 점수를 x, 페이퍼 점수를 y라고 하면.

음...

모레 다시 계산해봐야겠군.

바람구두 2005-03-0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산결과 나오면 알려줘요. 이런 너무 미움 살 말을 했군요.

2005-03-07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3-08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렇다면 다음주에 그 책 갖다드릴께요.

딸기 2005-03-08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로는... 리뷰 한 개 20점, 페이퍼 5점...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하루(春) 2005-03-0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