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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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지병으로 숨졌을 때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가 사망했다"고 선언했다. 신문에 쓰인 대로 굴드는 '스타 과학자'였다. 30년 가까이 수많은 에세이와 저술을 남긴 대중적인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스타성은 학문적 업적과 날카로운 사회적인 메시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굴드가 숨진 지 1년이 넘어서야 그의 최대 역작 중 하나인 이 책이 국내에도 소개됐다.


책은 생물학적(유전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서(이는 굴드의 인생을 관통한 테마였다고 해도 될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굴드의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주제가 명확하다. '인간의 지능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센세이셔널하게 표현하면 'IQ는 없다'가 될 것이다. "지능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세상에는 머리 나쁜 인종과 머리 좋은 인종, 머리 나쁜 성(性)과 머리 좋은 성이 따로 있다"는 '지능 이데올로기'를 뒤집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지능'으로 표현된 유전적 결정론의 내면에는 백인 남성 우월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잘못된 척도에 대한 오해'라는 뜻을 제목(The Mismeasure of Man)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지능을 기준삼아 저질러지고 있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비판한다.

"100% 유전적 근시도 20달러짜리 안경으로 교정할 수 있는데" 유독 '지능'이라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 계급을 만드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지능에 따라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풍조는 과학의 탈을 쓴 정치적 범죄에 불과하다고 굴드는 말한다.


여기서 근원적으로 한걸음 물러서, 저자는 '지능'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그런 실체가 존재하는가. "놀랄만큼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의 능력을 나타낼 때 '지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축약된 말은 물화(物化)의 단계를 거쳐 단일한 실체라는 의심스러운 지위를 얻게 된다".

과학자들과 기득권자들의 결탁 속에서, 인간 뇌의 다면적 기능은 '지능'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되고 막강한 지위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다음 수순은? 서열화다. 지능에 따라 사람들을 줄세우는 것. 줄을 세우는 기준은? 계량화다. IQ테스트다. 이런 '생물학적 지능결정론'은 과거 서구의 식민주의가 즐겨 써먹었던 '개종'이나 '동화'로도 해결될 수 없는 서열화라는 점에서, 차별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차별이다.

굴드는 이전 세기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통계치를 어떤 식으로 악용 또는 오용해서 인간 지능 서열화에 써먹었는지 탐정처럼 밝혀내면서, 서구식 '진보' 개념과 연결된 서열화를 통렬하게 비판한다(진화생물학에서 '진보' 개념에 대한 비판은 굴드의 마지막 저작이었던 '풀하우스'에 체계적으로 나와 있다). 굴드가 미국에서 인종차별 철폐투쟁이 가열하게 일어났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반골임을 염두에 두고서 읽으면 다소 과격한 그의 논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책은 생물학에 관한 대중적 저술 중에서는 '고전'에 해당된다. 과학저술가로서 굴드의 인기를 생각하면 국내 출간은 많이 늦은 셈이다.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81년. 이 책을 20여년이 지난 지금 읽으려면, 그가 던진 메시지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봐야만 한다. 지난 96년 굴드는 15년만에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90년대적 의미'를 해석했다. 바이오테크혁명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1920-30년대 우생학자들의 논리로 다시 회귀하는 듯한 90년대 미국 보수주의와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증)가 다시 판치는 세상.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우생학의 논리를 21세기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지금 우리는? 외국인노동자를 비하·학대하고 고정된 성역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이야말로 굴드의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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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18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지 않다면 읽어보고 싶어요.

Muse 2005-11-18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19900

리뷰랑 전혀 상관없이 캡쳐하기...ㅋㅋ

숫자, 예쁘죠?


딸기 2005-11-18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연사랑님 땡큐 ^^
나무님, 저 책 안 어려워요. 의외로 슉슉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nemuko 2005-11-1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리뷰 늘 간단명료해서 좋아요^^
저 책도 책꽂이에서 1년째 울고 있는데 얼른 읽어줘야 겠어요.

이네파벨 2005-11-1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제이 굴드...

그의 주장에 공감하든 하지않든...미워할 수 없는...아니..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저씨죠. 그냥..이런 사람들이 사는 것 만으로 세상이 좀 더 훈훈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몇년전 이 사람이 죽었을 때는 눈물이 다 슬쩍 나려고 하더군요...아까운 나이이기도 하고...단순히 그가 내놓은 학문적 업적이나 훌륭한 글들 뿐만 아니라...글 뒤에 있는 그 자신이 사람들의...그리고 나의 마음 속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가지 않았나 싶어요..

다른 저서를 몇권 읽었는데 이 책은 아직 못읽었어요.
(보관함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죠...값이 좀 쎄서뤼....)
딸기님께서 요즘 저의 구매욕에 불을 활활 지피시네요~~

딸기 2005-11-1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네파벨님... 너무나 공감 가는 말씀을.
그의 주장에 공감하든 않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저씨. 그렇죠.
저도 굴드가 죽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너무 아까워서요.
 
전쟁의 세계사 히스토리아 문디 5
윌리엄 맥닐 지음, 신미원 옮김, 이내주 감수 / 이산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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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닐이 Plagues and Peoples 를 1975년에 쓰고 1982년에 이 책, The Pursuit of Power 를 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나란히 ‘전염병의 세계사’ ‘전쟁의 세계사’라는 말로 나왔다. 무리 없는 제목이고, 어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구미에 맞는 제목인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전작이자 대표작인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병원균과 인간(숙주)의 관계를 ‘미시기생’으로, 피지배층과 지배층 즉 인간 간의 착취관계를 ‘거시기생’으로 표현했었다. ‘전염병의 세계사’는 미시기생에 관한 것이고, 구분하자면 ‘전쟁의 세계사’는 거시기생에 관한 것이다. 전자가 환경/생태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것이었다면 후자는 전쟁무기를 소재로 삼아 물질문명의 역사 쪽을 들여다본다.


“인간에게 유일하고 중요한 거시기생체는 다른 인간, 즉 폭력행위의 전문가로서 자기가 소비하는 식량이나 생활물자를 스스로 생산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들 사이의 거시기생을 연구하려면 그 연구대상은 단연 군사조직이며, 거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장비의 변화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설명한 것은, 좀 억지스러운 해석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기 위해 ‘거시기생’이라는 개념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책은 고대와 중세를 거쳐, 주로 유럽을 배경으로, 전쟁과 전쟁기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해갔는지, 전쟁기술 및 장비의 발달과 전쟁의 상업화 과정을 뒤쫓는다. 적어도 중세까지는 ‘전쟁의 상업화’일 것이고 근대 이후로는 ‘산업화’가 될 것이다. 전쟁이 산업이 되는 과정은 전쟁 무기의 발달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전쟁 무기의 ‘혁신’은 국가기구의 발달과 묶여 있다.

‘전염병의 세계사’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면 유럽에서 전쟁의 발발을 해당 사회의 인구 압력과 연결지은 부분인데 이 문제는 이 책의 중심 주제도 아니고, 크게 눈에 띄거나 재미있지도 않다. 이 책의 재미는 정치-경제-사회의 변화와 무기의 변화가 만나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데에 있다. 특정 무기의 개량이 어떻게 전쟁 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그런 개량은 어떤 사회에서 가능했던 것인지, 그리하여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무기의 개량이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바꿔놓는지를 설명하는데 무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나조차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맥닐 같은 유명한 역사학자한테서 잡학상식 류의 무기 얘기만 들어야 한다면 이 책을 아기다리고기다리고했던 의미가 없지! 책의 백미는 역시나, 맥닐이 보여주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다. 고대와 중세 초기를 설명한 맨 첫 장을 넘기고 나면 두번째 장에서는 배경이 서기 1000년 무렵의 송대로 바뀐다. 문약했던 것으로 알려진 송의 수도 개봉, 그곳이 어떻게 ‘전쟁의 세계사’의 중심 무대가 되는 것일까. 역사가로서 저자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11세기 이후 1000년간 서구의 확장과 발전의 근본적인 동력이 ‘중국의 부(富)’를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맥닐은 ‘명령’과 ‘시장’이라는 두 가지 동원체계의 분기점이 바로 서기 1000년 개봉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시장’이라는 말은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혹은 요즘 우리가 글로벌화를 얘기할 때 쓰는 시장이라는 말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명령이냐 시장이냐 하는 것은, 사회의 권력관계가 신분구조와 억압에 의해 이뤄지느냐, 아니면 돈의 논리에 따라 이뤄지느냐를 말한다는 정도로 해두자.

저자는 1000년 전 개봉에서부터 세상은 후자, 즉 돈의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발흥하기 이미 1000년 전에, 세상은 힘이냐 돈이냐에서 ‘돈이 힘이 되는’ 세상으로의 구조적인 변화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비롯된 이 대현상은 시장에 의해 규제되는 행동양식을 문명세계의 여러 민족 사이에 유례없는 규모와 심도로 보급시켰다. 구시대적인 명령 일변도 사회의 통치자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예전만큼 철저히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역사의 시간이 어느 지역에나 동일하게 흐른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근세 이후 시장의 지배가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빨리 사회를 변화시켰지만 중국에서는 “시장적 행동양식의 거센 불길이 시장에 적대적인 중국의 명령구조 자체를 녹여버리는” 데에 9세기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서유럽과 그 밖의 문명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대규모 자본의 사적인 축적에 대한 억압(예를 들면 상공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중국의 관료들과 같은)이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저자는 전쟁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전쟁의 역사를 쓰는 사람에게 ‘당신은 전쟁을 좋아합니까’ 내지는 ‘그래서 당신은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문이다. 맥닐은 “전쟁을 비롯한 인간의 조직적인 폭력 행위에는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양의성(兩義性)이 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성은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영웅적 행위나 자기 희생, 용맹을 통해 최고도로 발휘된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명과 자산에 대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파괴 행위는 현대인의 도덕의식에 깊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그는 전쟁 자체보다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게끔 만드는 구조, 그 불합리성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편이 맞겠다. 어쩌면 이것이 사실은, 전쟁을 역사의 ‘필요악’으로 보는 많은 이들의 시각에 더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1884년에 정신없이 쏟아져 나왔던 기술혁명이 이처럼 가장 얄궂은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초 건함 경쟁의 수많은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이 포격통제 논쟁 역시 다가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기술이 제어되고 있지 않고 또 제어될 수도 없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를 예시한 것이다. 가장 큰 역설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모든 개별적인 측면에서는 위대하고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 전체는 제어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합리성을 추구하다가 비합리성의 극단으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고도의 과학성, 합리성이 경직성과 비합리성을 낳게 되는 아이러니. 그리하여 서기 1000년 개봉에서 시작된 변화는 ‘합리적인 국가경영’이라는 명제와 결합돼 ‘모든 사회의 군수화, 모든 전쟁의 산업화’를 불러왔고 전쟁산업을 모태로 한 국가주의라는 리바이어던을 낳았다는 것이다. 전시 동원으로 시작돼 군비경쟁으로 치달은 20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맥닐은 대량생산과 서구의 눈부신 경제발전에서 되살아난 ‘명령’의 망령을, ‘명령’이라는 동원수단을 다시 불러냄으로써 더욱 강하게 세상을 쥐어짜내는 ‘시장’의 위력을 본다. ‘결론’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결론 대신 SF 한 편을 선사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 고도의 합리성과 총체적인 비합리성이 우울하게 결합돼 우리를 계속 옥죌 것인지는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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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 2005-11-18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가로로, 세로로...종횡무진 묶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책이겠네요. 오늘은 출근하시자마자 리뷰 한 편 해치우기?^^

blowup 2005-11-18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산출판사에, 딸기 님의 촘촘한 리뷰까지. 언제 읽을지 몰라도 일단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딸기 2005-11-1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도 이산출판사 팬이시군요. 제가 그렇거든요 ^^

페일레스 2005-11-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딸기님. 저번에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기 전에 <전염병의 세계사>를 읽어보는 게 낫겠다고 말씀하신 게 맞나요? 생각이 잘 안 나서... -_-;
이산출판사는 저도 팬이어요! '이산의 책 02'인 <도쿄 이야기>부터. 흐흐. -_-)b

딸기 2005-11-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 균, 쇠를 읽기 전에 전염병의 세계사를 읽으셔도 좋고요,
사실 순서는 상관없을 것 같아요.
굳이 고르라면, 전염병의 세계사를 먼저 읽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도쿄이야기도 재밌었지요. :)
 

이건 그냥 오리지날 쌩잡담이다.


로드무비님의 ‘플라나리아’ 서평을 읽고.

난 그 작가도 모르고, 그런 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난 플라나리아는 안다.

플라워도 아니고 나리도 아니고.. 이놈이다, 이놈.






국민학교 때 어거지로 방과 뒤 과학공부를 해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에 저녀석에 대해 몹시 신기해하면서 보고파하면서...

암튼 그랬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밥인지 술인지를 먹으며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후배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난 어떤 놈하고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 너무 웃기지 않아요?”

“오오, 멋지다.  그 도저한 정신세계라니!  그런데 니 그동안 내 모르는 새 무슨 험한 일들을 그리 많이 겪었더란 말이고!”


난 그 후배 같은 사람을 ‘이기죽거릴’ 수가 없다. 왜냐?

난 그 후배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가지려고 애써왔는데 알고 보니 원래 그런 성향인,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개성이 강한 편이라서, 내가 좀 독특하긴 하지, 어쩌구 저쩌구...

난 저런 말을 들으면 두드러기가 막 날라구 그런다.

세상에 개성 없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독특하지 않은 사람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뭔가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특별한 것을 지향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닭이 돼버린다.






다 그리면 너무 기니깐 중간에서 짤랐다. 받아들이기 힘드시겠지만...

저녀석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말도안되는 설정;;이지만)


나는 단골들만 북적거리는, 소위 가족적이라고 하는 가게가 싫었다. 우연히 지나치던 손님이라도 가볍게 들어올 수 있는 가게로 만들고 싶어서 단골이건 초면이건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메뉴도 일부러 별 연구 없이 그날 들여온 횟감과 아무런 특징도 없는 구이를 내놓았다. 술도 요즘 유행하는 술 따위는 고집으로라도 들여놓지 않았고, 정종이건 소주건 맥주건 딱 한 가지씩뿐이었다. 이런 가게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닐까?


난 이런 종류조차도 부담스럽다.

소위 가족적이라고 하는 가게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고,

안 가족적인 가게는 또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난 특별한게 싫고 평범함만 좋아, 라고 하는 것도 실은 유별나다.


이건 시비를 걸기 위한 쌩잡담입을 다시 한번 밝히며.


아시죠? 이 녀석한테 칼 대면 이 모양 되는 것. 




공부할 때 좋겠네..


 

스미에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가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들고 있던 맥주를 확 부어버린 친구를 말리는 시늉을 하고 나서 영수증을 챙겨달라고 해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가던 짧은 머리의 여인. 남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고, 어떤 상황이라도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자기 것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들.


그러게 손금은 왜 보냐고.

그냥, 이 길 아니면 길이 없냐,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내 기분이라는 얘기다.

 

로드무비님, 서평 재밌게 읽었어요.

 

재밌게 읽었으니 재밌게 읽었다고 하는데 왜 재밌게 읽었냐고 하시면... (어린 대장금 버전;;)

 

로드무비님과 잡담을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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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5-11-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플라나리아 저도 몬지 대충 알아요.참으로 편리한 생물이지요.^^
오리지날 쌩잡담도 넘 멋지게 쓰시는군요.

mannerist 2005-11-1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히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좌우간 딸기(베리에이션)언니 만쉐이~
^_^o-

로드무비 2005-11-18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잼아줌마님, '플라나리아 계' 결성된 거 모르시죠?ㅎㅎ
우리 계원들에게 이 재밌는 글 소개하고 싶어요.
님은 잡담이라시지만 제가 보기엔 꽤나 심오한 얘기인 듯해서.

플라나리아란 놈이 저렇게 생겼군요.
전 잠에서 아직 덜 깼는지 보는 순간 엉뚱한 놈을 상상했지 뭡니까요.ㅎㅎ

아무튼 제 껄렁한 서평 재밌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따로 재밌는 말쌈까지 해주시니 더더욱......

딸기 2005-11-18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런 계도 있군요 ^^

2005-11-1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11-1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로드무비님 서재에 가보세요 ^^
 
중음의 꽃
겐유 소큐 지음, 김춘미 옮김 / 열림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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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 김춘미 선생님 만나러 갔다가 다른 손님들이 있어 기다리는 동안 3분의1 읽고 집으로 돌아와서 내처 다 읽어버렸다. 읽는 동안 수월수월 잘 넘어갔는데 윤회 영혼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 그런지 읽고 나서 별 감흥은 없다. 역시 구도의 길은 나하고는 안 맞아. 작가는 실제로 승려라 하는데, 재미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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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원자 -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
데이비드 린들리 지음, 이덕환 옮김 / 승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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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이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루드비히 볼츠만이라는 오스트리아의 탁월한 과학자가 원자 이론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소개한 일종의 전기이다. 그러나 단순한 위인전으로 읽기에는 내용이 복잡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연대기적으로 그린 저술이 아니라, 한 과학자가 어떤 논쟁과 비판을 거쳐 하나의 가설을 이론으로 확립해갔는지 보여주는 과학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책을 `과학 이론의 전기'라고 표현했다.

볼츠만이 태어나 활동했던 19세기는 기계적, 실증주의적 과학관이 활개치던 시기였다. 당시 학자들의 눈에 과학은 `관찰된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실험'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던 시대였다. 이론물리학 같은 분야는 맹아로만 존재하던 시기에 볼츠만은 `머리 속의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도입했다. "더 깊은 수준의 이해를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그치지 말고 더 깊은 곳을 파헤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과학자도 있었다. 볼츠만은 그런 선구자 중의 하나였다".

 

저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볼츠만에게서 엿보이는 그런 `과학의 정신'이다. 그래서 책은 볼츠만 못지않게, 당시 학계에서 볼츠만과 정반대되는 주장 쪽에 서있었던 에른스트 마흐의 입장에 대해서도 상당한 문장을 할애한다.

오늘날은 분자를 구성하는 공처럼 둥글게 생긴 원자들이 당당하게 과학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는 원자라는 것의 존재가 아직 확실히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볼츠만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이 존재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 믿음은 뒷날 사실로 인정받았다. 원자라는 존재를 가정하고 기체의 운동과 열(에너지)의 관계를 정립한 그의 이론은 현대 열역학의 선구였다.

반면 마흐는 기껏 `확률'로 표현되는 원자들의 세계를 믿지 않았다. 볼츠만과 마흐, 두 과학자의 대립은 곧 열역학의 토대인 원자이론의 성립 과정을 보여주는 물리학적, 철학적 논쟁의 역사로 자리매김된다.

 

볼츠만의 업적이 왜 중요한가. 볼츠만이 원자라는 존재에 대해 갖고 있던 `믿음', 혹은 그가 제안한 확률·통계적 접근방식은 `과학적 사고'와는 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성실한 학자'였던 볼츠만은 진리를 향한 열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인식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시기에 볼츠만의 원자론은 인간을 결정론에서 해방시키는 토대를 마련해줬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이후 일리야 프리고진이 주창한 비평형 통계역학 등의 이름으로, 또 생태주의 세계관의 형태로 우리의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고보면 저자가 볼츠만의 원자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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