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로 외국에 간 것이 여섯 번이다. 두 번은 일본, 두 번은 이라크, 두 번은 아프리카. 일본에 갔던 두 번을 빼놓고 나머지 네 번은, 우울해져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여행 아닌 여행이었다. 동료들은 내게 “남들이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에만 다니니 좋겠다”고들 한다.

솔직한 나의 마음은-- 남들이 다 가는 ‘좋은’ 곳들만 돌아다녔으면, 싶은 것이다. 그냥 홀가분하게, 깨끗한 거리, 이쁘고 멋진 집들, 고풍스런 성채, 환상적인 노을, 바쁘게 일하더라도 이런 걸 보면서 일하고 싶단 말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 좋았다’ 하면서 푹 잠들 수 있는. 그런 출장을 바라는 건 무리일까?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 외곽의 주이 마을에는 노르웨이 구호기구의 지원으로 만든 ‘앰퓨티(Amputee) 마을’이 있다. 내전 기간 소년병들에게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들을 위한 일종의 정착촌이다. 지난 2일 국제이주기구(IOM) 직원들과 함께 주이마을을 찾았다. 일자리도 없고 정부로부터 변변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내전 피해자들은 대개 낮동안 프리타운으로 구걸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마을은 한산했다. 뭉툭하게 절단된 팔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절단·전쟁피해자협회(AWWPA)의 알 하지 주수 자카(48) 회장은 갈고리가 달린 의수를 들며 취재진을 맞았다. 1999년 반군이 프리타운을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을 당시 그는 은행에서 일하면서 시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반군이 당시 14세였던 딸을 납치해가는 것을 막으려다가 붙잡혀 양팔을 잃었다. 사흘간 치료도 못한 채 피를 흘렸다는 그는 “뒤에 의사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년병들은 ‘손목을 잘라라(Cut Hands)'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만행을 저질렀다”면서 “다만 눈길을 끌기 위해 그런 짓을 한 반군들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몸서리를 쳤다. (진정 의문이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자카 회장처럼 팔을 잘린 이들은 대부분 반군들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정부와 국제적십자사 등이 마련한 구호캠프로 옮겨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금도 이들의 정확한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조사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협회 쪽에서는 6000~7000명 정도가 절단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카 회장은 “무장해제된 소년병들에 대해서는 정부와 구호기관들이 지원을 해주는데 정작 피해자인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의 관심과 도움을 호소했다.

 
이런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 괴롭잖아. 난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사해동포주의자도 아니지만 그저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서, 괴롭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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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끔직하고 참혹한 내전을 겪은 나라.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면한 빈국 시에라리온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라이베리아의 먼로비아에 들렀다가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프리타운을 지나 세네갈을 거쳐 종착점인 감비아로 가는 ‘완행비행기’였다.




공항에 내려서 이런 헬기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어요.


프리타운 공항에 내린 것은 지난 30일. 시에라리온 내 9개 공항 중 유일하게 포장된 활주로가 있는 곳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육지를 파고들어온 만(灣)을 건너야 하는데 교량이 없어 군 수송기를 개조한 헬리콥터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내전(1991~2002년)이 끝난 지 4년이 지났지만 프리타운 시내에는 그 상흔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직까지도 국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라고는 볼 수 없는 탓에, 거리는 쓰레기장이었고 무너져가는 집들에 꾀죄죄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내전은 온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 황폐함은 ‘잃어버린 10년’ 따위의 말로는 형용이 되지 않는다. 2001년부터 이곳에서 구호활동을 벌여온 국제이주기구(IOM) 프리타운사무소는 내전 기간 교육시설의 88%가 파괴됐고 문맹률이 85%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10달러, 말 그대로 세계 최빈국이다. 전체 도로 1만km 중 포장도로는 895km 뿐이어서 프리타운을 벗어나면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전력공급, 물 공급이 최대 현안. 전국적인 전력 공급망이 없어 건물마다 발전기 돌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내전 기간 시에라리온에서는 250만명이 집을 떠나 피난을 했다. 전쟁 종류 뒤 20만명 가량이 귀환했지만 아직도 200만명은 유민(流民)이 되어 국내를 떠돌고 있다. 기니와 라이베리아, 감비아 등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도 많다. 그나마 존재했던 인프라는 내전 기간 남아나지 못했다. 시에라리온이 자랑하던 다이아몬드 광산은 군벌들 손에 넘어가 파헤쳐졌다. 삼림 남벌과 토양 침식, 물 부족 때문에 ‘환경 재앙’ 우려도 심각하다.








이 사진들을 보고는 누군가가 '난민촌이냐'고 묻더군요. 프리타운 시내 중심부랍니다.


내전의 상처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재건의 몸부림은 몹시 힘겨워보였다. 시에라리온에 있는 닷새 동안 나는 내내 프란츠 파농의 책 제목,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삶이 척박해서일까,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은 적대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도시는 쓰레기장이었고 주민들은 걸인들 같았고 젊은애들은 모두 부랑아같았다. 85% 문맹, 산업도 공공서비스도 없는 곳, 치유될 수 없는 폭력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유엔은 지난해 말 시에라리온평화유지임무(UNAMSIL)를 공식 종료하고 평화유지군을 철수시켰다. 현재 국제기구 중에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유엔개발계획(UNDP) 등이 남아 유엔통합사무소(UNIOSIL)를 구성해 활동을 벌이고 있고, IOM 같은 기구들이 재건작업을 돕고 있다. 1996년 집권한 아메드 테잔 카바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국내 유민들의 재정착과 소년병들의 사회통합 작업은 계속 진행중이다. 정부는 빈곤감소전략계획(PRSP)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붐부나 지역에 건설될 예정인 대규모 발전소는 10년째 공사 중이고, 공항과 시내를 잇는 교량은 카바 대통령의 첫 공약이었음에도 착공조차 되지 않고 있다. IOM 프리타운사무소에서 2001년부터 구호활동을 펼쳐온 앤드루 초가 소장은 “사람들이 일하는 법을 잊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IOM에서는 유럽 등지에 나가있는 시에라리온 출신 전문인력을 고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한시적 귀국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지만 참여는 저조하다. 프리타운 외곽에 소규모 음료 공장과 직물 공장 따위가 있기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기업 활동은 거의 없다 해도 될 정도이며 무엇보다 교육받은 인력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여전히 외화수입의 90%는 내전의 원인이 됐던 다이아몬드에서 나온다. 최근 광산들이 위치한 코노 지역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정부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것은 내전의 상처였다. 1990년대 중반 다이아몬드 광산을 노린 군벌들은 라이베리아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다. 마약이 주입된 소년병들은 군벌들이 조종하는대로 민간인들의 사지(四肢)를 자르고 유아들까지 성폭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IOM에서 일하고 있는 카트리나(33)는 반군이 프리타운까지 들어왔던 1999년 만삭의 몸으로 집 안에 숨어지냈던 악몽을 떠올리면서 “아무도 잊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시에라리온 사람들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자원 덕분이다. 시에라리온은 널리 알려진대로 다이아몬드와 철광, 티타늄광과 보크사이트 등을 수출하는 천연자원 부국이다. 외화수입의 90%는 내전의 원인이 됐던 다이아몬드에서 나온다.

아프리카 외교에 발벗고 나선 중국은 프리타운 대사관에도 직원 20여명을 상주시키고 있고, 식민종주국이었던 영국을 비롯해 유럽국들과 미국에서도 투자자들이 다시금 프리타운행을 저울질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프리타운에서 외국투자자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한국은 아직 대사관을 개설하지 않았지만 교민 50여명이 식당 등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

 


프리타운에도 이런 곳은 있지요. 빈투마니라는 바닷가의 호텔인데요,
저기에 중국식당이 있어서 점심을 먹으러 갔었어요.
 

 
높은 건물에서 바라본 시가지 풍경. 멀리서 보니깐 제법 그럴싸해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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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5-16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서, 에 동감해요;;;

딸기 2006-05-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아뒤에 뿡뿡이 붙었나요 치카언니 ^^
 

차인표라는 탤런트, 참 존경스럽다. 이모저모 다 존경스럽지만, 글도 참 잘 쓴다.
오늘자 문화일보 오피니언면에 실린 차인표의 글.

---

[살며 생각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유산.

 

차인표(탤런트)


얼마전 예은이의 백일 사진을 찍었다. 예은이는 지난해 12월, 대한사회복지회로부터 우리 가정이 입양한 딸이다. 갓 찍은 예은이의 백일 사진과 8년 전에 찍은 아들 정민이의 백일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니, 둘이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톰한 볼살이랑, 납작한 코랑, 커다란 귀까지 참 많이 닮았다. 남매니까 닮았겠지. 한 가족이니까. 이젠 한 가족이 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한국 사람들은 서로서로 많이 닮았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도쿄(東京)의 지하철에서도, 상하이(上海)의 백화점에서도, 태국의 공항에서도 한국 사람을 구분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모가 닮고, 느낌이 닮았기 때문이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몸을 부비며 살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닮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하나의 큰 가족이니까 닮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정민아, 넌 북한 사람들 만나면 어떨 것 같아?"

"떨릴 것 같아."

"왜?"

"무시무시하잖아. 날 죽이면 어떡해?"

"누가 그래? 북한 사람들이 너 죽인다고? 학교에서 그랬어?"

"아니. 그냥 알아. 옛날에도 전쟁 나서 사람들 많이 죽었잖아."

"그건, 아주 오래 된 옛날 일이잖아."

"하지만, 아직도 화해 안했잖아."

이 이야기는 며칠 전, 여덟 살 난 아들 정민이와 나눈 대화다. 더 이상 대화가 진행 되지는 않았다. 아빠로서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민이를 태권도 도장에 보내고 되짚어 보니, 지금 정민이는 내가 아홉 살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에 북한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막연한 공포를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질병이나 가난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의 공포, 즉 사느냐 죽느냐 하는 죽음의 공포였다. 가슴에 답답함이 몰려 왔다. 그리고 지난 3월에 다녀온, 하얀 눈이 면도크림처럼 덮여 있는 백두산이 그리워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를 부를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던 백두산을 지난 3월에 다녀왔다. 중국 옌지(延吉)를 통해서 다녀왔다. `화려한 휴가'라는 광주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촬영중인 김지훈 감독과 나의 매니저 성 실장,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일행 셋을 백두산에서 사냥꾼으로 살다가 지금은 가이드를 하는 `백두산 고무장화'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조선족과 다른 가이드 한 분이 안내해주었다.

대부분의 산은 오를 테면 올라봐라 하는 양, 가파른 경사로 하늘로 치솟아 있지만, 백두산은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오르기 어려운 곳은 반드시 눈의 색깔로, 돌의 크기로 이곳으로 오르지 말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산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길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꽁꽁 얼어 있는 천지를 가로질러, 해발 2525m 관면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어떨 때는 기어서 가고, 어떨 때는 밧줄을 붙잡고 올라갔다. 봉우리 위에서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은 정확했다.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정확히 한 발짝씩 가까워졌다. 바람이 심해지면 구름이 몰려왔고, 구름이 온 후 어두워졌다. 내 평생 처음 가본 백두산. 그동안 내 인생에는 백두산이 없었지만, 백두산에는 줄곧 내가 있었다. 5000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발을 휘날리며, 나뭇가지를 떨며, 돌멩이를 굴리며 나를 반겼다. 어서 오라고, 기다렸노라고. 왜 이제야 왔느냐며 질책하지 않았다. 외로웠다고 탓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서 묵묵히 나를, 우리를, 우리 민족을 굽어 살피고 있었다.

다시 백두산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이젠 남의 나라 땅을 밟아서 가고 싶지는 않다. 당당히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우리 땅을 밟아서 가고 싶다. 집사람과 정민이의 손을 잡고, 예은이를 등에 업고 친구들과, 부모님과 웃으며 가고 싶다.

북한에 내 동생이 있다면, 내 아내가 있다면, 내 자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들이 헐벗고 굶주린다면…. 내가 지금, 오늘 밤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을까?

백두산이 가르쳐주었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라는 노래 가사는 너무나도 틀린 가사라고. 통일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다른 나라가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정치인들 한테만 맡겨 놓을 일은 더더욱 아니라고. 통일은 우리 하나하나가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 어떤 아픔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뤄내야 할 우리의 숙제라고.

통일은 우리 시대에, 우리가 이뤄야 한다. 왜냐하면, 내 할아버지 아버지가 물려주신 통일의 빚을, 분단의 비극을, 전쟁의 공포를 내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시켜선 안되기 때문이다. 통일을 않은 채로 이 나라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건, 부도가 나 빚만 잔뜩 진 회사를 물려주는 것이며, 자식 더러 마당이 지뢰로 덮인 집에 살라는 말과 똑같기 때문이다.

내 나이 올해 마흔. 시간이 잘도 간다. 마음이 급해진다. 적당히 연기나 하면서, 가끔 기부금이나 내면서, 호주로 태국으로 좋은 곳이나 찾아다니면서 나이 들어 가기엔 하지 않고 미뤄 놓았던 숙제가 너무나 많다.

관면봉 정상에 서서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아주 차가웠다. 백두산에 유명한 칼바람이었다. 내가 생을 마감하는 날, 내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비싼 집이나 멋진 차가 아니라 통일된 조국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한반도라는 것을 바람이 말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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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5-1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잘 쓰고 생각도 올바르고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딸기 2006-05-1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이지요. ^^

이잘코군 2006-05-1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머 빠지는게 없군요. 불공평해.

paviana 2006-05-13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제 생각에 연기는 아직 좀 빠지지 않나 싶어요. ㅎㅎ

2006-05-13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6-05-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인표는 연기보다는 그 '페이소스 넘치는 눈빛'으로 먹고들어가지 않나 싶어요
**님, 그런 단체(?)는 통 모르겠는걸요?

2006-05-15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큐리어스 시리즈 : 남아공 UAE 모로코 이스라엘 시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인도 쿠바

   

세계도시 문화여행 가이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베네치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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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5-1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하신 서재공사가 멋지옵니다.

딸기 2006-05-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
 

...해도 믿는 사람 이젠 많지 않겠지만.

세계를 상대로 ‘인권’을 외쳐온 미국에서 또다시 인권 문제가 불거져나왔다.
지난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던 ‘감청 파문’에 이어, 미 정보당국이 대형 통신회사들의 자료를 건네받아 국민 수천만명의 전화통화 기록을 조사한 사실이 폭로된 것. 또 말 많았던 테러용의자 고문 수사 문제에서도 정부가 광범위한 고문을 허용하는 쪽으로 관련조항을 개정한 사실이 들통나 ‘인권국가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됐다.

감청파문 ‘2라운드’
일간 USA투데이는 지난 10일
국가안보위원회(NSA)가 2001년 9.11 테러 뒤 AT&T와 버라이즌, 벨사우스 등 3대 통신회사로부터 미국인 수천만명의 전화통화기록을 넘겨받아 조사했다고 폭로했다. 통화를 ‘도청’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자료들을 수집.분석함으로써 NSA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통화 습관을 비롯한 사적인 데이터들을 원하는대로 얻을 수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음날인 11일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부시 대통령이 나서서 해명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악관은 “테러용의자를 식별하기 위한 모든 조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졌다”고 밝혔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앞서 부시대통령은 통화기록 조사가 이뤄진 기간 동안 NSA 의장을 지냈던 마이클 헤이든 공군대장을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지명, 야당은 물론 공화당 의원들로부터도 반발을 샀었다. 이번 파문으로 헤이든 지명 논란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AP통신 등은 이미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진 부시대통령의 레임덕을 부추기는 또하나의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포로 고문’ 허용?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11일 미 국방부가 테러용의자나 전쟁포로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혹독한 심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지침서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국방부는 지침서 관련 브리핑을 취소하면서 지침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논란이 되는 구체적인 심문 방법은 비밀로 분류돼 있지만 예전보다 훨씬 가혹한 심문을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대통령은 지난해 공화당의 온건파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고문금지법’을 제안하자 “미국은 고문을 하지 않으니 고문금지법이 필요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거부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체포한 탈레반.알카에다 용의자들을 쿠바 관타나모 기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하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와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인권침해 사실이 알려진 뒤 국방부는 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침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히려 개악이 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신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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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5-1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 인권이사회에는 참여도 안 했다고 하던데, 설마 인권이라는 것이 있겠어요.

딸기 2006-05-1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자기네 나라 사람들 인권은 잘 챙겨주는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봐요
뭐 우리보다는 낫겠지만... 미군기지 넓히는 것 반대했다고 두들겨패는 나라보다는 그래도 미국이 낫지 않을까 싶어요

물만두 2006-05-1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나라나 다 비슷하지 싶어요. 일본에서는 극우파가 무서워 시민단체 사람들이 점조직으로 다닌다고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