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한 세계를 탐구한다 - 물질과 생명을 잇는 물리학의 세계
다치바나 다카시.요네자와 후미코 지음, 배우철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의 시사비평 ‘멸망하는 국가’를 먼저 읽고, 꽤 괜찮다는 느낌과 함께 어쩐지 찝찝한 느낌 같은 게 좀 있다 하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그냥 과학에 대한 것이다. 다치바나는 유명 저널리스트이고, 요네자와는 유명 과학자다. 특히 요네자와는 여성 과학자인데, 도쿄대 과학부에 여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 공부를 시작해서 여성과학자의 대모처럼 돼 있는 인물인 모양이다.
책은 재미있었다. 원자가 불규칙하게 배열돼 있는 고체 혹은 그런 상태를 아몰퍼스 amorphous 라고 하는데 요네자와는 이 물질의 전문가다. 다치바나가 질문을 던지고 요네자와가 대답하는 방식을 통해 두 사람은 아몰퍼스와 현대 물리학, 현대 물리학과 현대의 과학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현대의 과학과 현대의 세상’ 혹은 ‘미래의 과학과 미래의 세상’쪽으로 좀더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면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책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제목이 멋지다. 책이 부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랜덤한 세계라는 말 자체가, 저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좀 가려진, ‘미래의 과학과 미래의 세상’에 대한 시사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전문적인 내용이 좀 많이 나오는데, 밑의 주(註)들만 읽어도 소득이 된다. 읽고 나서 다 까먹어서 문제지.


인상 깊었던 요네자와의 말 한 구절...

“유치원 시절부터 삼각형의 내각의 합 같은 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기하학을 좋아해서 더 가르쳐달라고 어머니께 떼를 쓰곤 했지요.”

대단한 꼬맹이... 천재로 타고난 모양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9-1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ㅋㅋ 읽고나서 다 까먹는 책.. 아몰포스하고 그 누구더라 20살에 죽었다는 누구의 군론 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ㅎㅎ

딸기 2007-09-17 15:53   좋아요 0 | URL
저는 읽은지 몇달 지났더니 군론이라는 말 밖에 생각 안나요 ㅋㅋ
 
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하워드 진의 이름은 함부로 막 부르거나 쓰고 싶지가 않다. 좀더 경외심을 가지고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의 앞에 눈 감지 않지만 역사의 발전(억압받는 자들의 승리)를 낙관하고, 막 나가는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역사학자.

미국민중사는 잘 알려진 책이고, 하워드 진의 ‘대표작’이다. 그래서 두껍고, 거기다 2권으로 돼 있고, 비싼 이 책을 사서 읽었다. 미국 역사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워드 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 두꺼운 책들을 읽은 셈이다. 갖고 다니기도 무거워서 저녁마다 집 식탁에 앉아 줄 쳐가며 읽었다. 어떤 부분은 좀 지겨웠고 어떤 부분은 신기했다. 미국 역사를 워낙 잘 몰랐던 탓일까. 너무 자세히 써놓아서 머리 속에 잘 안 들어와 슬슬 넘어간 부분도 많았다.

미국민중사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하나. 역사학자가 쓴 역사책에서 나 같은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무엇일까?

‘민중사’가 그냥 미국의 역사와 다른 것은 분명한데, 역사학적 방법론에서도 달랐다면 더 재미있었을지 모른다(어떻게 달라야하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대통령과 정치인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밑바닥 중심의 역사라는 점에서 보면 그냥 ‘역사’와 ‘민중사’는 크게 다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역사를 보는 또 다른 눈과 방법론을 일깨워주는 측면에서라면 차라리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처럼 아예 새로운 시야를 틔워주는 쪽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두 종류의 역사학자를 비교하는 것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비교를 하는 것은, '전염병의 세계사' 쪽이 "국왕과 장군 만으로 역사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걸 더 잘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 국왕과 장군 외에 누가 역사를 움직였나? 맥닐은 전염병, 기후, 기생적 정치체계의 발달 같은 요인들을 든다. 하워드 진은 '민중의 투쟁'을 든다. 둘 다 맞는 얘기인데, 시야를 넓혀준 쪽은 (내 경우) 맥닐이었고, 감동적인 것은 하워드 진 쪽이다.

역사학자라면 역사학으로 평가받아야지 '진보냐 안 진보냐(좌파냐 안 좌파냐)'를 기준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문적 성과'만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 점에서 '미국민중사'는 (이 책을 1970년대에 읽었다면 엄청 감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전염병의 세계사'보다 재미 없었다.
하워드 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고 그냥 미국 역사를 알고 싶은 것이라면, 좀 많이 부담스러운 ‘미국민중사’보다 조금 간단한(그렇다고 해서 얇은 책은 아니지만) 케네스 데이비스의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를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중사가 감동적인 이유는? “싸우려 애써봐야 소용없어”“역사는 강자의 편이야”라고 말하는 무기력함 앞에서 희망과 용기가 되어주는 것은 하워드 진과 같은 역사의 메신저들이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09-18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민중사도, 전염병의 세계사도 꼭 보아야 할 책이군요. 쭈욱 담아놓고는 있었지만 언제볼 지 알 수 없어서 못 사는 책들이야요...ㅜ.ㅜ

딸기 2007-09-18 15:32   좋아요 0 | URL
그대신 마노아는 다른 책을 많이 읽잖아. :)
 
에덴의 용 - 인간 지성의 기원을 찾아서 사이언스 클래식 6
칼 세이건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칼 세이건의 책이니, 좋다 나쁘다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 책은 세이건 박사님이 1977년에 내놓은 것인데, ‘인간 지성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벌써 30년 전 책이건만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솔직히 세이건의 글을 많이 읽지는 못했고 '코스모스'도 아직 못 읽었지만 장차 읽을 예정이며, 매우매우 감동받을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고 있다)

부제가 그대로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데 더 자세한 줄거리 설명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의 뇌에 ‘마음의 자리’는 어디인가.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인간의 마음은 진짜로 뇌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유전자와 뇌를 연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길을 걷고 있다. 신의 선물,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머무는 대신 현대의 인간들은 인간의 마음, 지성이 우리 뇌의 어딘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받아들여가고 있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 아니어서, 아직도 미신이나 창조론이나 그런 것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세이건 박사님은 옛사람들이 생각한 마음과 정신의 위치를 쭉 돌아본 뒤 우리가 언젠가는 마음이 있는 자리를 발견할 것이라면서, 특유의 ‘온건한 낙관론’을 펼친다.

세이건의 문체는, 환원주의자로 비난받았던 에드워드 윌슨이나 ‘악마의 사도’들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리처드 도킨스의 어조와는 아주 다르다. 나는 이 사람들의 글을 다 좋아하지만, 세이건 박사님의 겸손하고 다정다감한 말투는 정말 너무 좋다. SF 작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알고 보니 신과 통하는 초월적 정신이 존재할지 그 누가 알리오. 세이건 박사님은 사이비종교와 미신과 그 모든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경계하되 과학을 지팡이 삼아 무지한 군중들의 머리를 강타하는 대신 손을 붙잡고 빛의 길로 이끌려하는, 그런 사람 같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는 당시 발견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타조가 기린과 모기 비슷한 곤충인 각다귀 간의 잡종 교배의 결과물일 거라고 말했다.” (33쪽)


타조는 기린과 모기의 잡종이라니, 강희제가 동토에 묻혀있던 매머드를 보고 ‘코끼리만한 쥐’라고 했다는 얘기 이래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참신한 생물학 유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28쪽)

 

1992년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을 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고 두렵고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로운 떠돌이가 이번엔 세계화 시대의 제1 화두가 된 ‘디아스포라’라는 담론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나서, 더 근사하고 다소 스타일리시하게 떠돌이의 아픔을 전한다.

책에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책의 포맷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비슷하다. 떠돌이(이 책에서는 ‘디아스포라’)가 한국 일본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떠돌이의 눈에 비친 미술을 논하는 것. 달라진 것이 있다면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의 현실(북에는 수령국가, 남에는 독재국가) 때문에 내적으로 외적으로 아픔을 겪은 청년의 넋두리 같았던 전작이 21세기에 와서 ‘디아스포라’라는 프레임을 얻었다는 것, 15년 전 ‘서양미술순례’의 저자가 어깨 늘어지고 창백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면 ‘디아스포라 기행’의 저자는 나름대로 이름을 얻어 일본의 방송사가 다큐멘터리 기행을 맡길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어 숨길래도 숨길 수 없는 명사(名士) 분위기가 글에서 묻어난다는 것.


서경식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세상도 시대도 상전벽해가 되어 광주에서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릴 지경이 되었으니, 저런 변화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리고 15년 세월 동안 독자인 나도 변했다. ‘서양미술순례’ 때에 캄뷰세스왕의 재판 그림과 옆구리 뚫린 예수상 앞에서 시큰한 감정으로 상처를 달래고 있던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서경식의 글은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이 사람은 상처 입은 그림들, 상처 입은 조각들만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특유의(서경식 특유의, 라기보다는 일본어 특유의) 잔잔하게 흘러가는 문체를 따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자니 15년 전과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이 아프고, 15년 전과 다른 맥락에서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좋은 책에 굳이 트집을 잡는 것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내 눈에는 서경식도 역시나 ‘주류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한국과 일본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유럽기행’이다. 왜 아우슈비츠를 자꾸만 떠올리나요, 라고 물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 부르는 사람과 유대인의 연결은 1차원적으로 보일 정도로 직접적인 연결 아닌가. 요는,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은 유럽적이고 유대적이라는 얘기다.

여전히 고상한 디아스포라의 눈에는 잘츠부르크와 츠바이크가 보일 뿐,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앞부분에 잠시 책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나 인도네시아 난민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에겐 미술관에 전시돼 있을만한 ‘고상’하고 ‘유명’한 문화가 없기 때문이고, 일본 방송들이 돈 써가며 서경식같은 내레이터를 데리고 취재를 다닐만한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 모든 우울과 아픔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가리워져 눈에조차 들지 못하는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은 아니다. 디아스포라도 아닌 주제에 다만 무식해서 서양 음악이나 미술 따위 잘 모르는 나같은 자가 머라머라 말하기엔, 그의 취향은 고상하고 우아하다.

내 눈이 꼬인 걸까? 꼬인 것 맞다. 15년 전엔 유대인 학살당한 얘기만 해도 불쌍하고 인간 세상이 처참해 보이고 했는데, 지금은 눈이 꼬여서 유대인 학살 얘기 들으면 “자기들도 당해봤다며 팔레스타인에서 남들 학살하니 이스라엘도 참”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나는 눈도 꼬이고 귀도 꼬여서, 재일조선인 문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얘기에 고개를 주억이다가도 누가 잘츠부르크 유대인 이런 얘기하면 “아랍 얘기는 왜 빼놔” 하면서 거슬려한다. 그래서 서경식의 글도 마음이 불편했다.


“부모가 모두 나이지리아인인 잉카 쇼니바레는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런던과 라고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 (158쪽)


관심을 끄는 포인트이기는 한데... 책에 잉카 쇼니바레 ‘정사와 간통’ 사진이 나와 있는데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그런 작품은 아니다. 아프리카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 아프리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것인가 보다 착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잉카 쇼니바레의 다른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내 눈에는 아프리카적임을 가장하여 서구의 침범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작품들에 가까워 보였다.)
아프리카인의 아픔을 얘기하려면 아프리카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았을텐데. 역시나, 꼬인 눈으로 보아 그런 것일까. 어쨌든 책은 우리가 읽어야 할, 알아야 할, 관심 가져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고 좋은 책인데 말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rblue 2007-07-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의 꼬인 눈이 반갑습니다.

딸기 2007-07-23 11:25   좋아요 0 | URL
앗 혹시 블루님도 그렇게 느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무 꼬인반응만 보인것같아서 마음 속으로 좀 그랬거든요

드팀전 2007-07-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접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미국의 9.11테러가 났을때..왜 너희들이 더 많이 죽인 이라크는 생각하지 않니 되물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구도로만 문제에 접근하면 폭력적인 순환만 지속됩니다.(미국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모르는바도 아니고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만 떠올리고 팔레스타인은 떠올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디아스포라라는 소외층을 영토주의적 의미로 다시 분할하는 방식입니다.이 문제가 근대적 폭력구조의 전세계적 난민형성사 관점에서 봐지길 바랍니다.물론 디아스포라들의 역사 역시 동일성을 갖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계급적으로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프레모 레비가 상징하는 바는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요.그것을 이스라엘이냐 유대인이냐의 문제로만 독해하는 것에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일본제국주의에 분노하는 것과 히로시마 피폭희생자들에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딸기 2007-07-23 15: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쳐도, 저는 약자를 지향한다면서 결국은 서구지향적인 모습이 좀 짜증났던 거예요.

딸기 2007-07-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서, 다시 댓글 답니다. 제 댓글이 너무 성의없게 들렸을까봐...

드팀전님, 저는요, 드팀전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꼭 반대를 하는 건 아닙니다만,
아우슈비츠를 떠올리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든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고, 또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우슈비츠가 '보이는 디아스포라'라면 팔레스타인은 '보이지 않는 디아스포라'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것이 위의 리뷰에서 언급한 서경식의 글에 나온 것처럼,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고,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포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비롯해 '근대적 폭력구조가 낳은 전세계적 난민 형성사'를 가려버리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부분 즉 가려진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무지라고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어디서 왜 뿌리뽑혀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다양성들을 보지 못하면서 "디아스포라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지식이 없이 '담론'만 아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아우슈비츠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에 대해선 모르고 있지 않나요. "팔레스타인인들이 핍박받는 건 알아"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아우슈비츠를 모두들 알지만 당장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대량학살된 난민캠프 이름을 대라면 몇 명이나 댈 수 있을까요?
결국은 그런 것이 '가려진 디아스포라'의 진실이고, 그 가려진 부분들을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예요. 그 과정이 곧 '보편적 의미'로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요.
 
멸망하는 국가 - 다치바나 다카시의 일본 사회 진단과 전망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열대림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여러 가지 책을 쓴 저널리스트라고 하는데, 다른 저서는 본 적이 없고 나는 이 것이 처음이었다. 내 호감도 기준으로 별점을 주자면 3개에서 4개 사이, 그런데 3개에 가까운 쪽이 될 것 같다. 작년 상반기, 그러니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일본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봤으면 훨씬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고이즈미 이후’를 예측하는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를 제대로 잘 예측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고이즈미가 절대로 안 물러나고 암장군으로 맹활약하거나 재집권할 것이라며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놨는데, 온몸으로 사무라이스러움을 증언하듯 고이즈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뒤로한 채 떠났다. ‘장기적인 예측’도 아니고, 당장 몇 달 뒤 일어날 총선 이후를 전망하면서 책까지 내놨는데 이렇게 틀려버리면 곤란하지. 저자가 인터넷 잡지에 실었던 에세이들을 묶은 거라고는 하지만, 그 생명력이 다만 몇 달도 못 갈 내용을 하드커버로 사서 읽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굵직한 테마들은 일본을 뒤흔들었던 라이브도어 사건, 여성천황제를 둘러싼 논란, 야스쿠니 참배와 개헌 문제, 고이즈미의 ‘우정개혁’ 깜짝쇼, 포스트 고이즈미 정계 시나리오 같은 것들이다. 거기에 곁다리로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오늘날 일본 언론의 얄팍함을 질타하는 에세이몇편과 이라크 파병 문제 같은 것들을 붙였다.
중요한 테마들이 시의성 위주로 되어있는 거라서 ‘사후에 읽기’엔 좀 그랬다. 그렇다고 후일담이라 할만큼 지나간 것은 또 아니니 말이다. 라이브도어 뒷이야기들은 재미있기는 했는데, 마침 일본 문제를 뒤적여야만 했던 나같은 사람들 말고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겐 쓸데없는 얘기가 될 것 같다.

우익들을 비판한 부분은 절절이 옳은 것도 많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몹시 마음 불편했던 부분이 적지 않았다. 첫째, 여성천황 문제를 보자. 이 책의 저자는 나름 유명한 저널리스트라 하고, 책 전반에 나타나있는 생각들도 상식적 합리적인 것 같다. 발로 뛴 에세이들을 보면 훌륭한 저널리스트이자 지식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성을 천황으로 삼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여성을 금지시키는 것은 넌센스이고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성차별의 잔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금지조항은 당연히 없애야 한단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견은 교묘하다. “국민들이 여성천황을 반대하지 않으니, 황실 규정을 고쳐 여성천황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천황에 찬성하는, 아니 ‘반대하지 않는’ 근거다. 야스쿠니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저자의 의견은 “중국과 한국이 싫어하니 참배하면 안 된다”이다.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찝찝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7-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핵심을 집어 확 미움을 받고 확 존경을 받든가 하지,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태도는...영 찝찝하군요.

딸기 2007-07-11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적으로 '괜찮은' 내용인데도, 저런 것들이 마음에 걸려요.
옳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고 '괜찮다, 안 괜찮다'로 판단하는 식.
남을 때리고 핍박해서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인 거죠. '그러면 욕먹으니까'가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은 좀 그런 식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