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28쪽)

 

1992년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을 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고 두렵고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로운 떠돌이가 이번엔 세계화 시대의 제1 화두가 된 ‘디아스포라’라는 담론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나서, 더 근사하고 다소 스타일리시하게 떠돌이의 아픔을 전한다.

책에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책의 포맷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비슷하다. 떠돌이(이 책에서는 ‘디아스포라’)가 한국 일본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떠돌이의 눈에 비친 미술을 논하는 것. 달라진 것이 있다면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의 현실(북에는 수령국가, 남에는 독재국가) 때문에 내적으로 외적으로 아픔을 겪은 청년의 넋두리 같았던 전작이 21세기에 와서 ‘디아스포라’라는 프레임을 얻었다는 것, 15년 전 ‘서양미술순례’의 저자가 어깨 늘어지고 창백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면 ‘디아스포라 기행’의 저자는 나름대로 이름을 얻어 일본의 방송사가 다큐멘터리 기행을 맡길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어 숨길래도 숨길 수 없는 명사(名士) 분위기가 글에서 묻어난다는 것.


서경식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세상도 시대도 상전벽해가 되어 광주에서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릴 지경이 되었으니, 저런 변화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리고 15년 세월 동안 독자인 나도 변했다. ‘서양미술순례’ 때에 캄뷰세스왕의 재판 그림과 옆구리 뚫린 예수상 앞에서 시큰한 감정으로 상처를 달래고 있던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서경식의 글은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이 사람은 상처 입은 그림들, 상처 입은 조각들만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특유의(서경식 특유의, 라기보다는 일본어 특유의) 잔잔하게 흘러가는 문체를 따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자니 15년 전과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이 아프고, 15년 전과 다른 맥락에서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좋은 책에 굳이 트집을 잡는 것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내 눈에는 서경식도 역시나 ‘주류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한국과 일본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유럽기행’이다. 왜 아우슈비츠를 자꾸만 떠올리나요, 라고 물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 부르는 사람과 유대인의 연결은 1차원적으로 보일 정도로 직접적인 연결 아닌가. 요는,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은 유럽적이고 유대적이라는 얘기다.

여전히 고상한 디아스포라의 눈에는 잘츠부르크와 츠바이크가 보일 뿐,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앞부분에 잠시 책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나 인도네시아 난민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에겐 미술관에 전시돼 있을만한 ‘고상’하고 ‘유명’한 문화가 없기 때문이고, 일본 방송들이 돈 써가며 서경식같은 내레이터를 데리고 취재를 다닐만한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 모든 우울과 아픔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가리워져 눈에조차 들지 못하는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은 아니다. 디아스포라도 아닌 주제에 다만 무식해서 서양 음악이나 미술 따위 잘 모르는 나같은 자가 머라머라 말하기엔, 그의 취향은 고상하고 우아하다.

내 눈이 꼬인 걸까? 꼬인 것 맞다. 15년 전엔 유대인 학살당한 얘기만 해도 불쌍하고 인간 세상이 처참해 보이고 했는데, 지금은 눈이 꼬여서 유대인 학살 얘기 들으면 “자기들도 당해봤다며 팔레스타인에서 남들 학살하니 이스라엘도 참”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나는 눈도 꼬이고 귀도 꼬여서, 재일조선인 문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얘기에 고개를 주억이다가도 누가 잘츠부르크 유대인 이런 얘기하면 “아랍 얘기는 왜 빼놔” 하면서 거슬려한다. 그래서 서경식의 글도 마음이 불편했다.


“부모가 모두 나이지리아인인 잉카 쇼니바레는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런던과 라고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 (158쪽)


관심을 끄는 포인트이기는 한데... 책에 잉카 쇼니바레 ‘정사와 간통’ 사진이 나와 있는데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그런 작품은 아니다. 아프리카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 아프리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것인가 보다 착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잉카 쇼니바레의 다른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내 눈에는 아프리카적임을 가장하여 서구의 침범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작품들에 가까워 보였다.)
아프리카인의 아픔을 얘기하려면 아프리카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았을텐데. 역시나, 꼬인 눈으로 보아 그런 것일까. 어쨌든 책은 우리가 읽어야 할, 알아야 할, 관심 가져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고 좋은 책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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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7-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의 꼬인 눈이 반갑습니다.

딸기 2007-07-23 11:25   좋아요 0 | URL
앗 혹시 블루님도 그렇게 느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무 꼬인반응만 보인것같아서 마음 속으로 좀 그랬거든요

드팀전 2007-07-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접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미국의 9.11테러가 났을때..왜 너희들이 더 많이 죽인 이라크는 생각하지 않니 되물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구도로만 문제에 접근하면 폭력적인 순환만 지속됩니다.(미국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모르는바도 아니고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만 떠올리고 팔레스타인은 떠올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디아스포라라는 소외층을 영토주의적 의미로 다시 분할하는 방식입니다.이 문제가 근대적 폭력구조의 전세계적 난민형성사 관점에서 봐지길 바랍니다.물론 디아스포라들의 역사 역시 동일성을 갖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계급적으로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프레모 레비가 상징하는 바는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요.그것을 이스라엘이냐 유대인이냐의 문제로만 독해하는 것에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일본제국주의에 분노하는 것과 히로시마 피폭희생자들에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딸기 2007-07-23 15: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쳐도, 저는 약자를 지향한다면서 결국은 서구지향적인 모습이 좀 짜증났던 거예요.

딸기 2007-07-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서, 다시 댓글 답니다. 제 댓글이 너무 성의없게 들렸을까봐...

드팀전님, 저는요, 드팀전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꼭 반대를 하는 건 아닙니다만,
아우슈비츠를 떠올리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든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고, 또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우슈비츠가 '보이는 디아스포라'라면 팔레스타인은 '보이지 않는 디아스포라'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것이 위의 리뷰에서 언급한 서경식의 글에 나온 것처럼,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고,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포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비롯해 '근대적 폭력구조가 낳은 전세계적 난민 형성사'를 가려버리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부분 즉 가려진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무지라고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어디서 왜 뿌리뽑혀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다양성들을 보지 못하면서 "디아스포라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지식이 없이 '담론'만 아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아우슈비츠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에 대해선 모르고 있지 않나요. "팔레스타인인들이 핍박받는 건 알아"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아우슈비츠를 모두들 알지만 당장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대량학살된 난민캠프 이름을 대라면 몇 명이나 댈 수 있을까요?
결국은 그런 것이 '가려진 디아스포라'의 진실이고, 그 가려진 부분들을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예요. 그 과정이 곧 '보편적 의미'로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