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를 참 좋아한다. 쓩쓩 차 말고, 마시는 茶 말이다. 꽃꽂이나 난초 그리기 따위 배울 마음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다도'라는 것이라면 해보고 싶다.

도쿄에서 일본어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은 기모노를 많이 갖고 있고(기모노를 넣는 옷장을 내게 보여주신 적이 있는데 정작 선생님께서 기모노를 입고 계신 모습은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담한 체구에 지적인 분이었다.

벌써 언제적 일인가 싶지만, 선생님 집에 놀러갔다가 말차를 마셨다. 말차는 곱게 빻은 찻잎을 넣어 걸죽하다 싶을 정도로 진하게 타는데, 일본의 다도라고 하면 말차를 마시는 걸 말한다. 진한 말차를 마시면 잎 안이 파래 풀어놓은 듯 초록색으로 물이 들어요. 헤헤~ 하면서 파랗게 된 입을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다도에서도 말차 마시고 초록색 입이 된 것은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달디 단 와가시(和菓子·일본과자)를 그야말로 쪼끔, 선생님 하나 나 하나 먹으면서 말차와 센차(煎茶·잎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더랬다. 이상, 도쿄에서의 추억 한 토막.


본격적으로 차에 맛(이라기보다는 버릇)을 들인 것은, 2000년 무렵 쯤이었던 것 같다. 그땐 그냥 아무거나 주변에 있는 것을 마셔댔다. 2002년에 살이 많이 찔 일이 있었는데, 옆지기가 홍콩에 갔다가 보이차 한 통을 사다주었다. 말이 보이차일 뿐, 그런 고급차를 싼 가격에 사왔을리 만무하고, 아마도 다른 차가 아니었을까 싶다. 맛은 독특하고 씁쓰레하면서 싱거운 것이 우롱차 비슷하기도 했는데 그거 마시면 살이 빠진다나.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쪘던 살은 금방 빠졌다. 물처럼 그걸 마셔댔다(사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어릴적부터, 맹물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차나 우유, 음료의 형태로 되어있지 않은 맑은 물은 마시지 않는다).


보이차 이후에 나를 뿅 가게 만든 것은 얼그레이였다.


홍차에 조예가 깊은 것은 전혀 아니고, 종로 2가 티포투에서 파는 얼그레이에 홀딱

빠졌더랬다. 이대 근처 티앙팡(만화 '홍차왕자'에서 따온 상호라는데 난 그 만화는

몇권 보고 재미없어서 치웠더랬다)에서도 홍차를 마셔본 일이 있지만,

나는 처음에 먹어본 것이 얼그레이인 탓에, 티앙팡 얼그레이 맛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아예 마음속에서 접어버렸다. 그렇게, 한번 가본 티앙팡은 다시 가지 않는다.

티포투에서 얼그레이를 사다가 집에서 혼자 우아한 분위기 내가며 마시곤 했었다.

한 친구는 내가 그 집 차를 좋아하는 걸 알고 다즐링을 사다줬는데 그것도 훌륭했다.

하지만 역시, 맛있는 얼그레이.


함께 일하던 이들과, 시간낭비 '부서 회식' 대신에 무언가 서로서로 배워볼 만한 것을 하자고 해서 딱 두 번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와인이었고 두번째는 차였다. 그때 티포투에서 여러 사람이 여러 종류의 차를 주문해서 먹어봤는데, 내가 시켰던 로즈는... 무려 립스틱 맛이 났다 ㅠ.ㅠ

역시나, 기본이 중요해...라는 것을 재확인. 하지만 티포투가 아닌 대부분의 커피숍 다방 까페 레스토랑 등등, 이런 곳들에서 얼그레이를 마시면 100이면 100 후회한다. 고로 얼그레이는, 평소의 내겐 '마음 속의 차'일 뿐이다.

마음 속 최고의 홍차로 기억하는 것은, '평범한' 영국산 잉글리시 브렉파스트.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친구가 영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조그만 까만 종이상자에 든 잉글리시 브렉파스트(티백)를 사왔다. 내가 어떤 수준이었냐면--- 짙은 홍차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해내고 좋아한 적이 있었다. 이 세상엔, 벌써 수백년도 전에 '밀크티'라는 걸 마시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알고서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아무튼 잉글리시 브렉파스트에 설탕 듬뿍, 우유 듬뿍 넣어 마시는 것이 내 '차 이력'의 최대 호사였다.


이렇게 수다를 떨게 된 이유--


사무실에서 녹차를 물처럼 대놓고 마신다. 정식으로 차를 우려내 마실 여유는 없고, 일본에 있을 때 수퍼마켓에서 구입한 전차를 티백(이것 너무 맘에 들어서 잔뜩 사가지고 왔다)에 넣어 마신다. 오차 특유의 고소하고 쌉싸름한 맛은 있지만 가히 좋은 맛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던 차에, 회사 선배님께서, 일본 출장길에 공항에서 사왔다는 반차(番茶)를 갖다주셨다. 집에 가져가서 티백에 넣으면서 어제 하나를 우려 마셨다. 다카시마야(高烏屋) 백화점 마크가 찍혀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싸구려는 아니겠거니 하면서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감로차 같다고 해야 하나, 맑으면서도 가볍게 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도는 것 같다.

기분이 개운해지고 즐거워졌다.

<녹차문화 홍차문화>라는 책이 있네. 재미있겠다;;

 

이번 설에 보성 녹차가 아주 쪼끔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재작년 터키 여행 때

사가지고 와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애플티를 꺼내서 먹어보았다. 저가품;;이지만

상큼하고 맛있었다. 그리하여 요 며칠, 차 마시는 생각만 하고 있다.

며칠 뒤에는 일본 공보문화원에서 다도회를 여는데 선착순 150명 무료라고 하니

구경이나 가볼까나.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viana 2006-02-0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에 이어 님도...
티투포에서 마시는 차는 대부분 더 맛있어요.분위기 때문인가?
삼실에서 포트넘 메이슨의 얼그레이를 마시곤 했는데, 혼자서 마시니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버렸답니다.통이 예뻐서 버리지도 못하고.....
홍차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 방법을 '스스로' 고안하시다니 대단하세요..
아참 원래는 정말 보이차 먹으면 살이 빠지나요라는 질문을 하려고 한건데..ㅋㅋ
저희 엄마는 용정을 집에서 물처럼 마시시더니 살이 빠졌다고 좋아하셨는데, 전 별로 효험이 없었어요.ㅎㅎ

Muse 2006-02-0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차 맛을 전혀 구분하지 못해요. 모든 차들이 다 녹차 맛 같아요. 좀 우아해 보고픈데 커피도 1회용 봉지 커피가 제일 맛있으니 원....^^

hnine 2006-02-0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를 즐겨 마시지 않던 저도 Earl Grey 맛에 반했더랬어요.
몸 상태에 따라서도 끌리는 맛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커피보다 차를 한잔 마시고 싶을때가 요즘 자주 있거든요.
홍차에 설탕과 밀크라...딸기님은 정말 영국 스타일로 차를 드시는군요.

水巖 2006-02-09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일민미술관에서 마신 커피 생각 나네요.ㅎㅎㅎ (이런 차는 아니죠?)

panda78 2006-02-0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얼그레이는 못 마시는데(그 강한 향 때문인지 비눗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레이디 그레이는 좋아해요. ^^; 아류에 약하달까..
레몬 라임 티, 애플티 이런 거 무지 좋아하구요.
웨지우드 티백 몇 개 얻어다 마셔봤는데 괜찮길래, 함 사 볼까 고민중이랍니다.
내일은 진짜 오랜만에 홍차 한잔 우려내 볼까요.. 싸구려 플라스틱 티팟이지만. ^^

딸기 2006-02-10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스...
댓글을 쭉 읽어내려가다가...
제가 아는 어떤 친구도, 얼그레이에서 비누맛이 난대요.
방금 그런 글을 읽고 왔는데... 판다님도. ^^;;

파비아나님 티포투 좋아하시는군요. 우리 언제 거기서 차 마셔요
제 경험으로 봐서는-- 살이 빠지려면
보이차를 마구마구 마시면서, 끼니 걸러가며 손에 땀을 쥐고
월드컵(올해가 기회로군요) 경기를 보면서, 하루 1시간씩 걸으면 됩니다. 히히.

서연사랑도 티포투에서 함 만나야겠다. ^^

에이치나인님, 홍차에 설탕에 밀크는, 홍차가 진할 때 얘기예요.
아쌈이나 다즐링이나 잉글리시브렉파스트는 밀크티 만들어먹으면 맛있는데요,
얼그레이는 아무것도 안 타고 (한껏 우아한척 하면서 꽃무늬 잔에다가) 마셔야 해요.

수암님, 일민미술관... 히히 그 뒤로 한번도 못 뵈었네요 ^^

판다님, 플라스틱 티팟도 있나요?

panda78 2006-02-10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 위에 플라스틱으로 씌워진 거죠. ^^;; 손잡이하고 몸통이랑 뚜껑이랑요.

panda78 2006-02-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얼 그레이에서 비누맛을 느끼는 게 저만이 아니었군요, 아유, 반가워라! ㅋㅋ

딸기 2006-02-1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판다님. 그 친구랑 소개시켜드릴까요 -_-

반딧불,, 2006-02-2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차,재스민차,모밀눈차,동정오룡차,한밭제다의작설.

아...그립다...
요사이 푹 퍼진 아줌마는 맥심봉다리 커피만 드립다 마신다나요??

딸기 2006-03-01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에 맥심봉다리 신세랍니다 ^^

반딧불,, 2006-03-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밀눈차 구하고 싶은데..이게 일본산이였던 듯 한데요.
뜬금없이 생각 나는 것이....

딸기 2006-03-0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모밀눈차가 뭐예요? 모밀의 씨눈을 갖고 만든 건가요?
먹어보고싶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