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근 백여년 전을 살고 있다.
800쪽이 넘는 아인슈타인 전기를 읽다가, 그의 첫아내 밀레바 마리치의 고향 세르비아로 가서 <집시의 시간>의 배경이 된 그 지역을 둘러보기도 하고, 아인슈타인과 친했던 채플린의 영화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라임라이트>를 보고 흑백의 화면에서만 우러날 수 있는 진한 감동에 취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지만,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다보면 느끼는 것이, 우리가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더 나아가 동구권 전체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 더 나아가 문화 콘텐츠, 더 나아가 문화적 역사적 이해..., 이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낯설다는 것이 동구에 대한 우리의 현재 느낌이 아닐까. 유럽-북미의 지역들 중에서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순으로 하면 영미, 불독, 이탈리아, 스페인 등등 해서 맨 마지막이 동구인 것 같다. 그들이 유럽사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위대한 인물과 위대한 작품이 없지 않았는데 우리는 전혀 거기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서구의 근대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에 관심이 많아졌고, 그 시대에 써진 책들, 소위 고전 또는 명작이라는 책들을 읽으려고 뒤늦게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씩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책들을 여러 번역본과 영어본을 비교해서 몇 구절 읽어보는 일이 많다. 그 중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루소의 에밀,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살펴본 경험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톨스토이는 박형규 교수 번역이 최고인 것 같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번역을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무작위로 일부를 살펴봤을 때 문체도 무난하고 명료하며 정확하다. 다른 사람 번역본을 하나 더 살펴봤는데, 사실 볼 필요도 없었다. 전쟁과 평화는 3권에다 마지막에 에필로그 1, 2가 붙어 있는데, 에필로그 1은 말 그대로 소설의 결말 부분이고, 에필로그 2는 거의 독립된 에세이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이 에필로그 1,2를 수록하지 않았다. 번역을 덜한 셈이다. 이룸출판사에 2001년도 찍은 책인데, 책표지에 "위대한 작가의 최초 완역본"이라고 써놓고도 이 모양이니 망연자실이다. 전쟁과 평화는 아주 여러 판본이 오랜 세월 동안 출판되었는데, 대부분이 박형규 교수 번역본이고, 아마 수정 없이 계속 나온 거 같다.

루소의 에밀은 한길사에서 나온 김중현 번역이 있고, 또 서강대 불문과에서 은퇴한 박은수 교수의 에밀(인폴리오)이 있는데, 이 책은 절판이다. 에밀도 여러 판본이 있지만, 내가 중시한는 판본은 위의 두 가지이다. 박은수의 에밀은 1998년에, 김중현의 에밀은 2003년에 나왔다. 박은수는 프랑스어를 번역가 자신의 순우리말체로 번역했다. 그의 문체로 번역된 프랑스 고전이 같은 출판사에서 여러 권 나와있고, 읽을만하다. 이 번역본에 대해 평가하자면, 좋기는 하지만 걸작은 아니다.

사실 걸작 번역은 참 나오기 힘들다. 특히 우리 나라 같은 풍토에서는.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미술품이든 문학 작품이든 걸작은커녕 수작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에밀의 김중현본은 역주를 포함해서 880쪽이 넘어간다. 루소, 이 친구 글을 보면 대단히 재치가 있다. 루소의 글을 딴지 일보 스타일로 번역해도 아주 재미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재기발랄한 글을 학술적이라는 미명하에 둔중하게 번역하지 말고 딴지식은 과하지만 좀 가볍게 번역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물론 나는 불어를 모르니까 영어본을 좀 읽어봤는데, 그의 재치, 세상에 대한 심통 등이 잘 느껴졌다. 물론 영어본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기존 번역은 문제가 좀 있다고 하고, 현대에 번역되어 서점에 팔리는 영어본과 내가 직접 비교한 결과 나도 동의한다.
에밀은 김중현본이 더 최근에 나왔고, 문체도 무난하고 번역가의 텍스트 이해도도 무난하다.

레미제라블은 방곤(범우), 김은희(금성), 송면(동서)본이 있다. 송면의 번역이 최근의 번역이다. 현대적인 어휘 사용으로 봤을 때는 최근 번역본인 송면의 것이 좋고, 문학적인 표현에는 김은희의 것이 나아 보인다. 사실 방곤의 번역과 송면의 번역은 너무 비슷하다. 방곤의 것을 저본으로 수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지난 시절에 출판된 고전 번역서를 보면서, 나는 고성장과 부실이라는 빛과 그늘을 생각한다. 며칠전에 우연히 노대토령이 LA 교민들 앞에서 하는 연설을 잠시 들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세금을 많이 걷어서 사회 간접자본을 만들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은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 국민소득이 만불이 넘었지만, 사회간접 자본의 축적은 크게 부족하다... 그나마 도로와 교량에는 투자가 많이 되었지만, 도서관 같은 곳의 투자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도서관에 대해 한국 대통령이 언급한 것이 이게 처음이 아닐까... 도서관을 도로와 교량과 동등한 사회간접자본으로 인정한다는 것, 이제 건설업자가 아니라 출판업자가 돈벼락 맞는 세상이 올까... 논란이 많은 대통령이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그를 미워하기 힘든다.

되돌아가서,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고성장과 함께 부실 기업, 부실 아파트, 부실 교량이 많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이 뻥뻥 넘어가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다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거기에 발맞추어 부실 출판물도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명저라는 이름의 서구의 저작물들이 일어중역에 날림번역에 몇십권짜리 전집이라는 외형만 맞춰서 많이도 나왔다.

어쩌면 고성장 시대에 부실은 하나의 영특한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재수없는 부실 건물이 극소수가 무너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은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생활양식에 맞지 않아서 자기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해체되었으니까.

그래서 부실 아파트들은 싼 값에 제 역할을 다하고 조기에 퇴역했지만(차액이 어느 주머니에 들어갔는지는 논외로 하고), 부실 출판물들은 아직도 도서관에 모셔진 채 군림하고 있다.

고성장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재건축되듯이 부실 번역물도 재건축되면 좋겠다. 그런데, 아파트는 누군가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돈을 내서 짓는데, 서구의 저작물들은 안읽어도 그만이거나 부실 번역물을 값싸게 재탕하지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면 잽싸게 다시 짓는데, 수많은 부실 번역물들은 무너진 채로 몇십년째 방치되고 있다. 교량이 공공재이듯이 번역서도 공공재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런 사정에서, 그나마 있는 번역물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읽을만한가 하는 정보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원어로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 흔히들 대한민국 1퍼센트라는 말을 하는데, 노어로 된 전쟁과 평화는커녕 불어로 된 에밀을 원어로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은 퍼센트 단위가 아니라 퍼밀 단위로 따져야 할 것이다.

우리말만 알면 세계의 모든 중요 저작물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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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전문 번역가 김희봉님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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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4-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책속에 책 2005-04-0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고 퍼갈께요^^

딸기 2005-04-0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글을 퍼올 기회가 많으면 좋을텐데... 재미있고 좋은 글을 많이 쓰시거든요.
앞으로도 종종 훔쳐올께요.

딸기 2005-04-0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데이드리머님, 실시간 접속이로군요. 반갑. :)

서연사랑 2005-04-0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계약설 가르치다보니 루소를 한 번 완독을 해 줘야겠구나...생각했었는데, '에밀'김중현본. 기억해야겠군요^^

로쟈 2005-04-0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룸출판사에서 나온 건 톨스토이의 '초판' <전쟁과 평화>를 번역한 것입니다. '초판'에는 톨스토이 장황한 역사철학을 상술하고 있는 에필로그가 들어 있지 않으며, 에필로그는 그가 나중에 삽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