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부터 서재 들어와 노닥거리고 있다. 쫌 한심하긴 하지만...

방금전, 분노가 올올이 묻어나오는 플라시보님의 글을 읽었다. 자기 돈으로 책 한권 사서 보기 아까워하면서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아마 나도 그런 분노를 느낄 것이고, 그 심정이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나도 소설책은 간간이 빌려읽는 사람이지만 말이다.

나는 책을 잘 빌려준다. 아니, 그냥 줘버린다. 빌려주기보다는 그냥 주는 쪽이다. 책 빌려주고 돌려받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번 읽은 책 내가 다시는 안 읽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에 제법 큰 '마음의 결심'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인정하고 나니까 속이 편해졌고, 책에 미련을 안 갖게 됐다고나 할까. 요샌 아예 다 읽고난 책 목록을 홈페이지에 올려서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게끔 한다. '책꽂이 비우기'의 일환이다. 책욕심이 없냐고? 꼭 그런것 같지는 않다. 어떤 책은 절대로 집 밖으로 반출 안되게끔 신경 쓰고 있으니깐. 그런책의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그 책 건드렸다가는 죽음이야, 책에 눈독 들이는 사람들을 향해 나 혼자 뒤통수에 대고 경고의 눈초리를 보내곤 한다.

책을 빌려주고 나서 가장 속상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에이브 문고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에릭 호가드의 '바이킹 소녀 헬가'와 '바이킹 호콘'을 한 친구에게 빌려줬었다.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의 잘못은 아니다. 어차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친구도 아니었는데, 내가 권해서 빌려갔던 거였으니까.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이사를 했고, 그 친구와는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책 두 권은 내 곁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지금 에이브 문고는 창고나 다름없는 곳에 쌓여있고 나는 벌써 십여년째 그 책들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두 권을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에이브 얘기가 나오거나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멍청하게도 친구에게 그 책들을 빌려준 나 자신을 탓했다. 몇년이 지났는데 뜬금없이 찾아가서 그 책들 돌려달라고 하면 날 이상한 애로 보겠지? 역시 빌려주는게 아니었어, 이 바부팅이야...

회사 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숱하게 책을 잃어버렸다. 사적 소유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회사인 탓에, 책꽂이에 책을 꽂아놓으면 어떤 인간들인지 가져가버리곤 한다. 도둑넘들!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왜 아니야, 도둑 맞지! 회사 들어와서 초반 몇년 동안 혼자서 얼마나 분해 했는지 모른다. 나중엔 책을 책꽂이에 올릴 때 뒤집어서 꽂는 짓까지 했다.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이 방법은 김윤식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다. 언젠가 그분 연구실을 방문한 적 있는데 책을 몽땅 뒤집어 꽂아놓거나 눕혀놨다. 책 도둑이 많아서 아예 그렇게 했다는 말씀을 듣고 나도 따라해봤다)

요샌 그래도 애착이 많이 줄어들었다. '많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읽고 난 책은 어떻게 처분할까, 누구에게 줘버릴까를 고민할 정도. 아쉽게도 내가 읽은 책들을 받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하지만, 책 자체에 대한 애착은 줄었지만 정작 나는 사람들에게서 책을 잘 빌리지 않는다. 아예 내게 주는 거라면 몰라도. 이유는 내가 책을 지저분하게 읽기 때문이다. 남의 책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돌려줄 수는 없으니깐. 이래저래 책값만 많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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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1-2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처분할 요량이시면, 저한테 주셔도 좋은데요. ^^;

딸기 2005-01-2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들은, 직접 보신 뒤에 '저한테 주셔도 좋은데요' 하셔야 할 걸요. 책이 지저분하다니깐요. ^^

2005-01-23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1-2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님처럼 책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나 아직까지도 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큰지라... 역시 저는 소인배라니깐요. 으흐흐^^

하이드 2005-01-23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읽고 안 읽을 책들은 그냥 줘버리고, 정말 좋아하는 책들은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사주고, 그 외에는 꽁꽁 가지고 있습니다.

nemuko 2005-01-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욕심 참 많은 편인가봐요. 뱀딸기 님 대문에 걸려 있는 글을 볼때마다 뜨끔한 맘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 책을 버릴 용기는 안 생기네요. 빌려 읽기도 별로 안 좋아 하구요. 아마 전 사서 꽂아 두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예요^^ 그래도 버리실 책 있으심 저 받으러 갈께요~~^^

딸기 2005-01-2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은 먹어버리고 싶은 책들도 있지요. 꼭꼭 씹어서 삼켜버리고 싶은. ^^

알라비 2005-01-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라,
책의 소유를 둘러싼 친구들간의 치열한 투쟁-
음, 우선 '책'이 있어야하고, 또 '친구'가 있어야겠군요.
올해는 기필코 책도 좀 모으고...
그런데, 파괴된 인간관계는 어떻게 복구해야하나?
여러분, ...저랑 친구할래요?

딸기 2005-01-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요, 뭐. 친구합시다. ^^
그런데 알라비님은 어떤 분이신지... 서재에 가봐도 모르겠고 말이죠.
스무고개 할까요? ^^

알라비 2005-01-2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허물 벗어셨네요. 축하^^
서재를 꾸밀줄 몰라서리.. 컴맹 수준이거든요.
소개를 할려니 쑥스러워서. 댓글 달다보면 아시게 되겠죠.^^

딸기 2005-01-2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제가 알라비님과 인터뷰를 하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거절하시면 친구 안 할 거예요!)

알라비 2005-01-2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긴장.. 초조..)

panda78 2005-01-2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둑넘들! ^ㅁ^

딸기 2005-01-2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단어에 저의 분노가 녹아있는 것이 느껴지지요? ^^

울보 2005-01-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책욕심이 많은 터라,.내책을 누가 소홀히 대해도 속상하고.그리고 가주가는건 더 용납이 안되는 스타일인데..그래서 시집 올때 제집의 반인넘게 가져온 책을 보면 우리 친정엄마 그러 돈으로 하면 얼마냐고 가끔 물으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속상하죠, 주로 아이책을 사고 제 책은 가끔....

딸기 2005-01-2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애엄마 자질을 못 갖춘 것인지, 아이가 이제 네 살(만 3살)이 되었는데도 그림책조차 제대로 안 사줬어요. 어디서 얻은 것들 아니면 이마트에서 싸길래 몇권 산 것(완존 꽝이었음) 그 정도. 그러면서 제 책만 사지요. ^^;;

sooninara 2005-01-24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빌려준것은 잘 안돌아오거나 상태가 심각해져서 돌아오더군요^^

딸기 2005-01-24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영어사전을 놔뒀는데, 없어졌어요. 아마도 누군가가 잠시 필요해서 가져갔다가 안 돌려준 거였겠죠. 이제나 저제나, 언제 돌아오려나 기다리면서 몇달이 지나간 것 같아요. 결국 게시판에 써붙였죠.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엄청 거칠고 싸나운 말투의 경고문을... 그리고 사전이 돌아왔는데, 너덜너덜~~
사전 같은 것, 가운데 쫙 갈라져버리면 열받잖아요. 표지도 다 뜯어져있고.

marine 2005-02-25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빌려 주는 거 싫어해요 대부분 빌려 주면 읽지도 않고 돌려 줄 생각도 잊어 버리거든요 어떤 친구는 한 번 빌려 가더니 나도 아까워서 조심히 보는 책에 밑줄을 쫙쫙 긋지 않았겠어요? 무지하게 화가 났지만 날 이 정도로 친하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참았죠 도서관 가면 책 엄청나게 많은데 왜 남한테 빌려서 돌려 주지도 않는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