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프리즘] 명승부 / 송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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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송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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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에 때 집을 뛰쳐나왔다. 9남매 중 다섯째. 영세민 집안에 입 하나 더는 것도 효도라면 효도라고 여겼다. 양말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권투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세계챔피언이 돼 집도 일으키고, 우리 어머니 불편한 다리도 고쳐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는 ‘두 평짜리 체육관 옥탑방이면 또 어떠랴!’ 스스로를 토닥였다. 한국챔피언이 됐을 때 그는 며칠 동안 벨트를 껴안고 잤다. “눈물은 왜 그렇게 나던지.” 아버지는 돈이 없어 펼침막도 걸지 못했다. 아들이 챔피언 됐다고 쓴 종이를 동네에 붙이는 게 가난한 아버지의 사랑표현이었다.

이제 그가 ‘도전자 정재광’으로 링에 섰다. 동양챔피언 벨트를 앞세워 챔피언 김지훈(20)이 등장했다. 저 벨트. 1년 전 정재광(30)의 것이었다. 그는 김지훈과의 방어전이 다섯차례나 연기되자 돌연 벨트를 내놓고 링을 떠났다. 빚이 불어났고, 더는 아내를 고생시킬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다시 글러브를 꼈다. 그 놈의 꿈. 그 놈의 미련. 아들의 열성팬 아버지는 오지 못했다. 지난해 겨울 쓰러진 아버지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아버지가 늘 응원하던 자리. 한 살 연상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체육관 건물 경리였다. 그는 아내 사무실 형광등을 갈아주던 날 쭈뼛쭈뼛 첫 데이트를 청한 쑥맥이었다. 아내 눈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박스(Box)! 심판이 소리치자 ‘땡’ 종이 울렸다. 챔피언 김지훈은 8케이오(KO), 11승을 거둔 독종이었다. 정재광도 맞으면서 들어가는 탱크였다. 7월 초 열린 동양챔피언 페더급 타이틀매치. 권투계는 모처럼 보는 최고 라이벌전이라며 흥분했다. 승자에게는 세계챔피언 도전의 길도 뚫린다. 모두 승리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는 서글픈 경기.

둘은 1라운드부터 피하지 않았다. 키(163㎝)가 작은 정재광의 왼쪽눈가가 2라운드에 찢어졌다. 3라운드엔 입술도 터졌다. “이쯤되면 재광이형이 쓰러져야 하는데 버티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맞받아치면 지훈이가 움찔해야 하는데 그런게 전혀 ….”

심판은 6라운드 중반 ‘스톱’을 외쳤다. 정재광 눈가가 피로 뒤덮였다. 그는 “싸우겠다”고 했다. 그러곤 둘은 승부를 내겠다는 듯 퍽 퍽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함성이 최고가 된 순간, 누군가 무릎을 바닥에 찍으며 무너졌다. 정재광이었다. 오른 주먹에 턱이 걸려들었다. 아마추어 경력을 포함해 50여차례 싸우는 동안 첫 다운. 1, 2 …. 심판이 보챘다. 그는 다리를 부르르 떨며 몸을 세우려 했다. “일어나고 싶었는데,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는 체중 10㎏을 빼며 이날을 준비했다. “훈련하다 죽는 게 아닐까 생각도 했죠.” … 8, 9, 10. 모든 게 끝났다. 그는 부축을 받고서야 일어섰다. 아내는 울음을 삼키며 링쪽으로 다가갔다. 마지막이라던 도전. 그는 처참한 패자가 됐나?

챔피언이 뛰어왔다. “형, 수고하셨어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도 한걸음 나가 힘빠진 두 팔로 후배를 꼬옥 안았다. 그들 위로 그날 가장 큰 박수가 쏟아졌다. 도전자는 흔들거리며 링에서 나와 바닥에 누웠다. 입술과 눈가를 수십 바늘 꿰맸다.

그러더니 퉁퉁 부은 눈으로 후배를 또 찾았다. “꼭 세계챔피언이 돼야 한다.” “형님 몫까지 짊어지고 챔피언이 될게요.” 두 주먹이 금방 하나로 섞였다.


정재광은 말했다. “그러고도 왜 행복하냐고요? 내 꿈을 좇아 다시 도전을 해봤잖아요. 후회 없어요.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깨끗이 받아들여야죠. 그것도 좋은 후배한테 졌으니까.” 링의 승자가 답했다. “형한테 배운 게 많아요. 지고도 형이 날 끌어안는데 정말 가슴이 찡했죠.” 삶에서 승부는 그저 상대를 밟고 일어서는 냉혹한 세계일 뿐인가? 이날의 명승부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흔든다.

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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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7-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하군요. 스포츠기자이리 마음에 아리게 기사를 쓰는군요. 눈여겨보고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