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기장바구니에 담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소소한 일상을 특별하게, 유쾌한 하루키 월드"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에 걸쳐 장편소설 <1Q84>를 탈고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간 에세이로, ‘앙앙 anan’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 분을 모은 것이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본업인 소설 쓰기는 어렵지 않지만,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와 같은 자신만의 에세이 쓰기 원칙을 세운다는 점도 흥미롭다. 작가 스스로 ‘쓸데없는 이야기’에 가까운 글이라고 하지만, 하루키 에세이를 한 권이라도 접해본 독자라면 소설과 사뭇 다른 에세이의 매력과 즐거움을 이 책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초콜릿, 파인애플, 금붕어, 햄버거, 파티, 조깅, 편지, 다자이 오사무, 섹스, 레이먼드 카버, 조르주 심농, 고양이…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과 에피소드는 실로 다양하다. 소소한 일상의 것들을 거의 모두 다루고 있어 하루키의 인간적인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대상을 던져놓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과정이다. 한 예로, 의욕적인 우머나이저로도 유명한 프랑스 작가 조르주 심농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LP 수집기를 거쳐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으로 결론을 맺는데, 하루키의 위트가 돋보인다. 시시할 수도 있는 일상을 특별함으로 채우는, 하루키만의 유쾌한 글쓰기에 주목해서 읽는다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곁들여진 52컷의 오하시 아유미 동판화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에세이 MD 송진경

또 다른 하루키 에세이 즐기기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자세히 보기장바구니에 담기

서쪽 숲에 갔다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편혜영의 서쪽 숲, 공포가 산다"
그는 형을 멸시했다. 치통이 올 때마다 자신을 때리겠다고 했던 치졸한 형. 변호사가 된 그는, 떠돌이가 된 형을 개의치 않았다. 형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면피하기 위해, 형이 실종되었다는 서쪽 숲을 찾은 순간, 그는 거대한 공포, 인간이라는 두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도그빌>처럼 <이끼>처럼, 미지의 숲은 공포스럽다. 한 가정을 파괴한 어느 사냥꾼이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을 법도 한 공간. 그러나 "사실 그런 곳은 숲뿐이 아니라는 걸, 의심과 불안이 잠식하는 한 우리가 사는 곳은 그게 어디이든 애당초 그렇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야기는 독자의 기대를 여러번 배반한다. 형의 행적을 추적하는 변호사 이하인의 시선을 따라가던 이야기가 급작스레 닫히고, 다음 장에선 숲을 이룬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죽음에 얽힌 비밀을 추적해야 할 ‘탐정’은 사라지고, 거대하게 입을 벌린 숲만 남았다. 문장이 짧은 대화체로 단호하게 이어지던 서사가 장르 문법을 벗어나는 순간, 독자 역시 공포의 숲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정확하게 계산된 편혜영의 문장이 서늘하게 그려내는 불안과 폭력의 실상. 두려움은 도처에 있다. 숲에도, 어디에도. - 소설 MD 김효선

책 속에서 : 이렇게 깊은 어둠은 이 마을에 와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전조등이 비추는 한 치 앞만 겨우 보였다. 삶의 채도가 극적으로 어두워져 있어서인지, 이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밤이 가지는 제각각의 농도에 대해서, 숲 그늘이 점차 마을 쪽으로 뻗어나갈 때의 서늘한 기운에 대해서. 부러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저 난감했다. 모든 것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과거가 현재를 장악했다. 현재는 과거에 속박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 미래도 잠식당할 것 같았다.



자세히 보기장바구니에 담기

잠복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데뷔 때부터 완성되었던 거장"
<잠복>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초기 미스터리 단편 모음이지만 일종의 요식 행위, 즉 작가의 팬들을 위해 마련된 시시한 습작 성지 순례와는 거리가 멀다. 세이초는 그 주제의식과 문장의 스타일 모두를 이미 이루어 놓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단편 '잠복'을 쓸 때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했다지만, 그 결심은 이미 자신을 어떤 궤도에 올려 놓은 뒤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러니 이 단편집에서 누구나 한때는 습작 시절이 있었다거나 하는 저급한 위안을 얻을 수는 없다. 역작은 글을 쓰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쓰디쓴 교훈 뿐이다.
 
살벌할 정도로 깎여나간 짧은 문장들은 천재적인 면모 대신에 비극적인 노동의 땀냄새를 풍긴다. '소거하는 노동'으로 만들어진 과묵한 문장들이 그의 주제의식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살펴 보시기 바란다. 세이초의 소설 속에서는 대적할 수 없는 '이 세계 자체'에 부딪혀 익사하는 사람들 투성이다. 몸부림치지만 소용없다. 그러나 몸부림치지 않을 수도 없다. 무용無用하지만 절박하다. 세이초의 문장도 마찬가지다. 무심하지만 절박하며, 화려하거나 큰 소리는 결코 낼 수 없다. 질식하는 사람이 비명을 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죽어간다'는 20세기 인간의 메시지는 이 높이와 이 크기로 이야기되어야 했던 것이다. 주제와 방법이 맞물려 있다. 맞물려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세이초는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행했다.’ 그러니 마쓰모토 세이초의 <잠복>에서 우리가 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 메시지는 바로 "나는 도대체 무엇이 하고(쓰고,그리고,찍고,만들고,노래하고) 싶은 걸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정말 좋은 '데뷔작'의 요건이 아닐까? - 소설 MD 최원호

작가의 말 :
1954년 여름, 드디어 네리마 구 세키 초 1번지에 셋방을 빌려서 규슈에 있던 가족을 불렀다. 처음으로 내 집을 가진 것이다. 그때 쓴 것이 「잠복」이다. 나는 전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지만 트릭 중심의 허무맹랑한 내용이 불만이었다. 작품을 쓸 때는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 추리소설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의 눈에 비친 한 여자의 처지를 그리고 싶었다.



자세히 보기장바구니에 담기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뿌리 깊은 나무> 이정명의 윤동주"
명품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이정명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세종과 신윤복, 기발한 상상력으로 역사의 이면을 그려냈던 이정명의 재능이 윤동주의 마지막에 닿았다. 만 이십사 년 일개월, 창씨개명을 해야만 일본 유학생이 될 수 있었던, 그래서 부끄러운 시를 써야 했던 '히라누마 도주'의 마지막 일년, 후쿠오카 형무소 이야기를 통해서다.
 
악마라 불리던 잔혹한 일본인 검열관 간수의 의문을 죽음을 추적하던 나(와타나베 유이치)는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죽은 이가 지니고 있던 시, <참회록>을 읽는다. 시는 와타나베와 검열관, 그리고 선한 눈매를 지닌 시인을 이야기의 전면에 끌어들인다. <말테의 수기>, <공산당 선언>, <백석 시 전집>을 읽던 선한 이들을 파괴한 전쟁의 참상. 영리한 이야기꾼의 문장이 살인사건의 비밀에서 죄수들의 탈옥기도 사건, 잔악한 군국주의의 음모까지 쉴틈없이 내달린다. 이야기의 호흡을 따르다 보면 타국의 형무소에서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박박 민 머리와 가지런한 눈썹’의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끝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자존, 이정명의 이야기가 깊은 감동을 전한다. - 소설 MD 김효선

후쿠오카 형무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

수십 킬로미터의 철조망을 얹은 담장
수천 킬로그램의 철근 쇠창살
수십만 개의 벽돌로 가로막힌 수백 개의 감방
서른여섯 명의 간수와 2백여 명의 간수병, 그리고 형무소장
천여 명의 죄수들 – 살인자, 강도, 사기꾼, 도둑, 조선인……
처형장 둘, 무연고자 무덤, 시체실.
시인 한 명.
피아노 한 대.
그리고 비밀 하나.
-<스기야마의 메모> (본문 3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