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우주와 우리의 시대, 그리고 모든 생각하는 존재들에게는 일종의 번호표가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우주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양자요동이 가짜 캡슐을 양산할 것이므로, 우리 후손이 만든 진짜 캡슐은 그 속에 섞여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양자적 잡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영원을 상상할 수 있고 영원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직접 만질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야생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 내심 부담스러워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너는 작은 벌레의 출현에도 거의 죽을 듯이 놀라 자빠지는 소심형 인간이므로 무리수를 두지 말라."는 맞춤형 경고가 배달된 것이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 나도 잘 안다. 우주는 내가 하는 일이나 나에게 닥쳐올 위험 같은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인간이 다른 종을 제치고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의 패턴에 매우 민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물의 연결 관계를 추적하고, 우연을 가볍게 넘기지 않으며, 규칙을 기억하고 중요도를 할당한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혼란스러운 경험에 어떻게든 질서를 부여하려는 감정적 충동의 산물이고, 현실의 특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얻은 결과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의 가장 확고한 믿음은 자연이 법칙에 따라 운영된다는 것이다(우주는 법칙을 준수하는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법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방정식이다.
어느 날,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에게 우리가 구축한 방정식을 보여 준다면 가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우리도 처음에는 수학으로 시작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현실 세계를 서술하는 현실적 언어를 찾았기 때문에, 굳이 수학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화를 통해 직관과 인지력을 키우고 물리학을 습득해 왔지만, 자연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적 언어로 표현된 호기심 덕분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방정식은 현실의 깊은 구조를 탐구하는 최상의 도구가 되어 다양한 지식을 창출했다. 그러나 방정식은 인간의 마음이 반영된 구조물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험의 가치를 평가할 때 이런 관점을 고수하는 편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선과 악, 운명과 목적, 가치와 의미 등은 모두 유용한 개념이지만, 도덕적 기준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중요도를 할당하는 행위가 인간의 마음보다 근본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덕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규범이라기보다 편의를 위해 고안된 발명품에 가깝다. 다윈의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은 마음은 다양한 개념과 행동에 끌리거나,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근친상간을 혐오하는 것은 세계 공통의 가치관이다. 매사에 공정하고, 가족과 동료에게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선조들이 집단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에는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오만 가지 문제가 속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인의 행동이 집단생활의 효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일종의 피드백 회로를 거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 규범이 서서히 정착되었다. 그리고 집단의 일원들은 자신이 행동 규범을 따르는 정도에 따라 생존 확률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자연은 우리의 소망과 판단, 도덕적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 물리 법칙에 따라 가차 없이 나아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의 소망과 판단, 그리고 도덕적 평가는 물리적 세계의 일부로서, 자연의 냉정한 법칙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 전개되는 과정은 별로 인간적이지 않은 수학을 통해 서술된다.
이 모든 여정은 입자와 장, 물리 법칙, 그리고 초기 조건이라는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우리가 아는 한, 이 네 가지 외에 우주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와 장은 만물의 구성 요소이고, 물리 법칙은 주어진 초기 조건에 의거하여 우주가 나아갈 길을 결정한다.
현실 세계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물리 법칙은 확률적으로 적용되지만, 확률 자체는 엄밀한 수학을 통해 결정된다. 또한 입자와 장은 가치나 의미를 따지지 않고 법칙에 따라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자연이 수학을 따라 전개되다가 생명체를 낳을 수도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물리 법칙을 따른 결과다. 생명은 물리 법칙에 개입할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자기 인식이 가능한 종이 언어 능력을 획득하면 자신을 ‘과거에서 미래로 전개되는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생존은 더 이상 삶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생존이 중요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분석하여 관련성을 찾고, 각 항목에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담을 전해 들으면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예술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고, 음악을 들으면서 패턴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고, 종교를 통해 집단의 결속력을 다져 왔다. 그러나(진화론적으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이런 것은 단명한 삶을 초월하여 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의 산물일 수도 있다. 인간사에 무심한 자연을 초월하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다.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우주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 이유를 궁금하게 여겼지만, 그가 마주친 가장 큰 딜레마는 무언가를 자각하는 능력이 결국 무無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모든 행동은 언젠가 멈출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양한 시간대를 거쳐 오면서 목격했던 탄생과 죽음, 출현과 붕괴, 그리고 창조와 파괴의 리듬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엔트로피 2단계 과정과 진화의 선택력은 혼돈 속에서 고도의 질서를 창출하지만, 별과 블랙홀, 행성과 인간, 그리고 분자와 원자는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모두 분해될 것이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이 불멸에 적응할 만큼 충분히 현명하다고 생각한다(지금 당장은 부족하다 해도, 영원의 시간이 있으니 차차 개선해 나가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은 날이 갈수록 많아지겠지만, 그것을 조달하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향상될 것이다. 기존의 기쁨과 행복에 식상해진다면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거나, 발명하거나, 개발하면 된다. 물론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영원한 삶이 지루하다는 주장은 부정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된 것 같다.
영생을 생각하면 삶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사실 현세에서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결정과 선택, 경험, 그리고 다양한 반응들은 유한한 시간 안에 한정된 횟수만큼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 수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외치진 않지만, 남은 여생 동안 맞이하게 될 아침의 횟수가 직관적으로 계산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아침의 횟수가 무한대라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과는 완전 딴판일 것이다.
여기에 반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가치관이 있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후손들이 계속 추구하기를 바라는 마음, ‘나’라는 존재의 흔적이 죽은 후에도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분야, 수행하는 일, 우리가 감수하는 위험, 함께 일하는 파트너, 평생을 함께할 가족, 삶의 목적, 취미, 등등…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기회가 별로 많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지구는 평범한 은하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평범한 별 주변을 공전하는 그저 그런 행성입니다.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져도 우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겁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요."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다. 갑자기 집중력이 높아지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거나, 지나온 삶을 후회하거나,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애써 평정심을 찾거나, 갑자기 심오한 무언가를 깨닫기도 한다. 나의 반응도 이들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종말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면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도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만, 전 인류의 종말이 닥치면 무력함 외에 달리 느낄 만한 감정이 없을 것 같다. 그때에도 아침에 일어나 물리학을 연구할 것인가? 하긴, 익숙한 일에 집중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오늘 내가 위대한 발견을 이룬다 한들, 알아줄 사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을 완성하고 싶어질까? 엉성하게나마 탈고를 하면 잠시 만족스럽긴 하겠지만, 읽어 줄 사람이 없으니 이것도 공허하기만 하다. 그날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까? 아이들도 늘 하던 일을 계속하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미래가 통째로 사라질 판인데, 배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류 종말 시나리오가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방정식과 수학 정리, 그리고 물리 법칙은 진리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칠판에 휘갈기거나 학술지와 교과서에 인쇄된 기호의 집합일 뿐이다. 이들의 가치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창출되며, 그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이 깨달음은 방정식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귀하게 여겼던 것을 물려줄 사람이 없고 물려받을 사람도 없다면 미래는 의미를 상실한다. 한 개인의 영생은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인류의 영생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우리의 관심사와 의무, 가치와 판단, 중요한 것과 보람 있는 일들,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삶이 계속된다는 가정하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개념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이다.7
미국의 철학자 수전 울프Susan Wolf는 모든 인류가 운명 공동체임을 인식하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는 미래에 인류가 존재해야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8
셰플러는 임박한 위험에만 반응하고 먼 미래에 다가올 위험에 무심한 것은 직관적인 반응일 뿐 합리적 판단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경험 범위를 훨씬 넘어선 긴 시간을 계량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울프도 이 점에 동의하면서 코앞에 닥친 멸종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먼 훗날 다가올 멸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수십억 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여러 번 확인한 바와 같이, 시간의 길고 짧음은 절대적 기준이 없다.
현재를 넘어 은하들이 멀어지는 시대를 지나, 태양계의 시대를 지나, 별들이 소진되어 행성들이 공간을 떠도는 시대를 지나, 블랙홀이 빛을 발하다가 분해되는 시대를 지나, 차갑고 텅 빈 무한 공간의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한때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라곤 여기저기 흩어져서 떠도는 입자들뿐이다). 실감이 가는가? 머릿속에서 진행된 여행이 현실로 느껴진다면, 당신은 상상력이 꽤 풍부한 사람이다. 물론 현실처럼 느꼈다고 해서 경외감이나 신비함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빅뱅의 순간에 입자의 위치나 장의 값이 조금만 달랐어도 당신과 나, 인간, 지구, 그리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확률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수많은 입자 배열들 속에서 특별한 배열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우연의 신이 우리를 한없이 축복하사, 자연의 법칙이라는 좁디좁은 깔때기를 통과하여 우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의 조합으로 형성될 수 있는 사람들 중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직 한 번도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빅뱅에서 당신이 태어난 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매 순간마다 양자적 과정이 확률 법칙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이들이 도중에 한 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당신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입자의 다른 가능한 배열이 엄청나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를 이루는 염기쌍과 분자 배열이 만들어졌다.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우리 몸의 분자 조합과 화학적, 생물학적, 신경학적 배열이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생명체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인간은 시간을 벗어나 과거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상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우주를 탐험할 수 있다. 우주의 한 구석에서 우리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단어와 표상, 구조, 소리를 만들어 냈고, 이들을 이용하여 갈망과 좌절, 혼란과 계시, 실패와 승리를 표현했다. 또한 우리는 독창성과 인내를 발휘하여 내면과 외부 세계의 한계에 도달했고, 반짝이는 별과 빛의 이동, 시간의 흐름과 공간 팽창을 좌우하는 법칙을 발견했으며, 이 법칙 덕분에 우주의 시작과 끝을 엿볼 수 있었다.
우주는 왜 텅 비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생명의 근원은 무엇이며, 의식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추측을 내놓았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의 두뇌는 결코 성능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종류의 진실을 전혀 모르는 채 ‘플라톤의 벽’만 응시하면서 그 너머에 존재한다는 궁극의 진실을 동경하는 무력한 존재도 아니다.
춥고 황량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려면 웅장한 설계도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입자에게는 목적이 없으며, ‘우주 깊은 곳을 배회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궁극의 해답’ 같은 것도 없다. 그 대신 특별한 입자 집단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자신만의 목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태를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바깥이 아닌 내면이다.
이미 제시된 답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과학은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과학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짙은 어둠을 뚫고 소리와 침묵에 각인되어 끊임없이 영혼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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