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에 앉으면 약간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든다. 피아노 건반이 요구하는 확신은 언제나 나를 위축시킨다.
모든 것은 피아노의 건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피아노의 겉모습만을 본다.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난다. 이것이 다이다. 그래서 피아노는 시작하기 쉬운 직관적인 악기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고 누구나 연주할 수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터치마다 묻어 나오는 습관과 연주자가 해석한 곡의 분위기가 마치 지장처럼 찍힌다. 그건 정말로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각자가 각자의 마음과 몸으로 각자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슈베르트의 즉흥곡2을 치는 도중에 갑자기 소리의 색채를 바꾸는 것을 보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충격을 받는 장면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활의 각도나 무게를 이용하여 색채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지만, 피아노는(적어도 보기에는) 건반을 누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탄하며 묻는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피아니스트는 답한다.그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들어야 해.

이것이 어쿠스틱 피아노의 매력이자 나의 두려움이다. 내가 상상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힘과 속도와 터치의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 내가 소리를 띄우고 싶으면 위로 퍼져 나가는 소리가, 깊게 깔고 싶으면 바닥에 깔리는 소리가 정직하게 난다는 것.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솔직한 악기라는 것. 나의 확신 없이는 희미한 소리만 웅얼대리라는 것.

나의 오랜 꿈 중 하나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완곡하는 것이다. 지금도 악보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칠 수는 있지만 그건 연주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악하다. 곡을 충분히 분석한 뒤 확신을 가지고 만족할 만한 속도로 치는 일을 ‘완곡’이라고 부르고 싶다.

첫 아르페지오는 첫 파트의 느낌에서, 결국은 곡 전체의 해석에서 결정된다. 은밀히 말을 건넬 것인지, 조금 더 확언하듯 말을 던질 것인지, 나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첫 음을 내본다. 아무도 설득되지 않을 소리가 난다.

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몸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혹은 온몸으로 참여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 글을 읽을 때보다 쓸 때, 춤을 볼 때보다 출 때, 피아노를 들을 때보다 칠 때 나는 구석구석 사랑하고 티끌까지 고심하느라 최선을 다해 살아 있게 된다

글이 어려운 만큼 글을 사랑하게 된다. 춤이 힘든 만큼 춤을 사랑하게 된다. 피아노가 두려운 만큼 피아노를 사랑하게 된다. 나는 피아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아노가 두려운 것이다.

중력이라는 우주의 법칙과 손가락의 단단한 힘을 믿어야 비로소 소리를 낼 수 있다.

사랑하는 이는 또한 성실해야 한다. 성실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다. 혹은 성실하게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나는 사랑은 성실로 증명된다는 원칙에 복무하기 위해 사랑하는 온갖 것에 나의 성실을 바쳐왔다. 어떤 성실은 배신당했고 어떤 성실은 사랑과 함께 증발했고 어떤 성실은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성실은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성실로, 매일 네 시간씩 바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네 달 이상 쉬지도 않는 종류의 것이다. 다섯 살 때부터 열세 살 때까지, 그리고 스물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 왔다.

글을 쓸 때마다, 영상을 찍을 때마다, 라디오에 출연할 때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짐한다. 괜찮아, 대충 하자, 하지만 열심히 하자. 끝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한다. 괜찮아, 그래도 재밌었고, 열심히 했어.

부끄럽다고 해서 그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부족했고, 부끄러웠고, 행복했다. 손이 달달 떨렸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자리를 채워준 사람들에게 이런 연주를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여전히 미안합니다). 하지만 소리는 나고 있었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곡은 연주되고 있었고, 거기에 마음을 맡겨야 했다. 무대도 관객도 사라지고 오로지 소리와 나만 존재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스타인웨이는 최선을 다해 울림을 전달해주었다.

짝사랑에 빠진 이의 어설픈 연주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근사하다. 조용한 연습실에서 귀로만 듣던 곡을 더듬더듬 연주할 때, 내가 알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자꾸 틀려서 답답하고 나 자신이 한심해도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기쁨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연습실에서는 유창한 쇼팽뿐만 아니라 느릿느릿한 쇼팽도 울려 퍼지고 있다.

음악에 대한 사랑, 피아노에 대한 사랑, 그것을 지속하려는 의지. 그러므로 내가 소리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추어의 사랑, 지극한 사랑의 덕이다.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피아노를 친다. 마음을 놓고 성실하게 친다. 뚱땅뚱땅 쳐도 소리는 나고, 그거면 된다.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일이다.

어쩌면 나는 욕심이 많아서 대책 없이 피아노를 좋아하나 보다. 그 어디에서든 제 소리로 할 일을 하는 게 부러워서. 나의 어리석은 욕심을 피아노는 하나의 욕심 없이 해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연주자와 애호가와 전문가 사이 어딘가에서 피아노를 즐긴다. 방과 방 사이의 복도, 늘 거기가 나의 자리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피아노를 잘 모른다. 나는 피아노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며, 피아노를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처럼 연주하지도 못하고, 피아노 연주를 평론해본 적도 없으며, 클래식 마니아들만큼 앨범을 꿰고 있지도 못하다. 하지만 피아노를 즐겨 연주하고, 음악을 만들어 발표한 이력이 있으며, 클래식 공연에 자주 가고,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으면 늘 클래식 피아노 앨범을 듣는다. 피아노 연습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무엇인지 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곡이 어떤 곡인지 안다.

어떤 곡들은 두 악기가 대화하기를 요구한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말을 주고받는다. 피아노가 물으면 바이올린이 답하고, 바이올린이 물으면 피아노가 답한다. 둘의 호흡이 정확히 들어맞을 때 느껴지는 쾌감. 이 구절을 쓰면서 나는 손열음과 클라라 주미 강이 함께 연주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번호 108의 3번의 4악장을 떠올리고 있다.

당연히, 모든 게 끝은 아니다.

내가 성취한 것 중 내가 성취하고 싶었던 것은 없었다. 내가 성취하지 못한 것은 온통 성취하고 싶었던 것들뿐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조금 일찍, 그것보다 더 일찍, 결심해야 했던 순간들을 계속 앞으로 돌려본다. 하지만 나는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 결과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나의 제유(提喩)? 피아노라는 한 점에 내가 포기한 모든 것을 몰아넣는 일 ? 를 이해했고, 이제는 더 이상 삶을 한 가지 회한으로만 정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어차피 피아노를 그만둔 일 말고도 놓쳐버린 것은 아주 많다. 다른 많은 삶이 그렇듯이.

나는 피아노를 어떤 상실의 상징으로서, 될 수 있었으나 될 수 없었던 것, 고통스럽게 내놓아야 했던 모든 것의 반영으로서 받아들였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삶을 돌아보면서 피아노에 부여한 역할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조직한 내 삶의 서사에서 피아노는 빠질 수 없는 주춧돌로 서 있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의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면, 나의 정체성의 일부분은 피아노라는 하나의 존재, 그 물건과 물건에 얽힌 무수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길고 고운 손가락이 곧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아노를 친다고 꼭 손가락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고, 길고 고운 손가락이 오히려 연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끝이 좁아지는 손가락은 보기에는 좋지만 건반 위에서 안정성이 떨어진다. 얇기만 한 손가락은 몸의 힘을 피아노에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피아니스트가 부채처럼 펼쳐지는 손바닥과 단단한 손가락, 넓적한 손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손끝은, 조금 과장하면, 개구리 발 같기도 하다. 그런 손을 가진 사람들이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면서 몇 번의 굳은살이 손끝을 다녀갔다. 손끝이 팔 무게를, 더 나아가 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야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변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변하고 있다.

내가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나에게는 피곤함을 감지하는 청각적 기준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음악의 속도고 다른 하나는 음악의 계이름이다. 분명히 듣고 듣고 또 들은 음악을 듣고 있는데 유난히 빠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곡이 이렇게 빨랐나? 당연히 레코딩이 갑자기 변했을 리는 없고 그건 내가 느려졌다는 말이다. 평소처럼 작동을 못 하니 같은 속도의 음악도 내 마음의 속도보다 빠르게 흘러가버린다. 반대로 내가 정력적일 때는 같은 곡도 느리게 느껴진다.

음이름은 각 건반에 할당된 고정된 이름,
계이름은 조에 따라 정해지는 이름이다.

사람들은 책 읽고 쓰기를 업으로 삼는 데다 음악에도 조예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에게 책을 읽을 때 듣기 좋은 음악을 추천해달라고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경험에 근거해 추천을 할 수밖에 없다.

각각의 음은 색과도 연결되어 있다. 나에게 G음은 푸른색의 음이다. C는 갈색의 음이다. B는 회색, B♭은 은색이다. 다른 악기보다 피아노로 연주되었을 때 색채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플랫이 많이 들어가는 조성(예를 들면 D♭장조11)은 더 부드러운 빛이라고 느끼고, 샵이 많이 들어가는 조성(예를 들면 B장조나 E장조)은 더 각지고 쨍하다고 느낀다

음향 엔지니어 수잔 로저스는 조바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1 D♭(내림 라)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장조. 플랫이 무려 다섯 개가 붙어 있다.

그 기분을 비유해보자면 이렇다. 시장에 갔는데 일시적으로 시각 처리에 장애가 생겨 바나나가 온통 오렌지색으로 보이고 상추가 죄다 노랗게, 사과가 자주색으로 보인다고 상상해보라.12
12올리버 색스, 『뮤지코필리아』, 장호연 옮김, 알마, 2012.

당혹스러운 일이다.

『뮤지코필리아』에 따르면 음과 색을 연결시키는 것은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고고학자 스티븐 미슨은 네안데르탈인이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인간 신생아도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가 언어를 배우면서 이 능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추측한다. 절대음감의 발달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인 다섯 살 전후는 언어능력이 발달하는 시기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높낮이가 정해진 성조 언어를 배우는 집단에서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연구도 있다. 이런 추측과 연구가 만약 타당하다면 언어능력이 완성되기 전 음높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절대음감이 형성(혹은 유지)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다섯 살 때부터 받은 피아노 교육은 나의 소리 세계를 건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피아노를 배움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세계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

피아노의 세부 부품은 대략 1만 2,000개가 넘는다. 소리를 내는 현만 해도 200개가 훌쩍 넘고 그 현은 각각 핀으로 고정되어 있다. 댐퍼 부분에도 수백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해머, 브리지, 공명판, 건반, 페달 등 각 파트의 부품을 따지면 1만 개 정도는 쉽게 넘는다. 이렇게 많은 부품이 피아노의 소리를 만들어 보내는데 모든 피아노가 같을 것이라고, 또 변함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조성진의 신보 소식이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스케르초 네 곡, 즉흥곡 한 곡과 에튀드 한 곡, 녹턴 한 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보나 마나 좋겠지. 그중 선공개된 음원들이 있었지만 앨범 전체를 순서대로 듣기 위해 일부러 듣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스트리밍의 시대지만 나는 여전히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것을 선호한다). 드디어 들어보는데 오, 생각보다 과감한 연주.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발라드 네 곡을 녹음했던 5년 전의 레코딩과 비교하면 더 과감하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원래 1년에 한 번은 조성진의 공연을 직접 가서 보는 게 삶의 낙 중 하나인데, 올해는 일정 문제로 티켓팅에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앨범도 충분히 좋다.

조성진이 처음 돈을 주고 산 앨범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쇼팽 발라드 앨범이라고 한다. 지메르만의 연주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 조성진은 자신의 첫 앨범에서 지메르만과 다른 고유한 해석을 가지고 나타난다. 발라드 2번15을 들어보자. 지메르만의 레코딩은 앞부분에서 음량의 대조가 더 극대화되어 있지만 코다16 부분에서는 페달 사용을 절제해 감정이 과잉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반면, 조성진의 레코딩에서는 앞부분의 다이내믹17 변화는 비교적 작지만 코다 부분의 드라마성이 도드라진다. 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근사하다. 연주자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렇다.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쳤는지, 나는 어떤 버전이 좋은지 탐험하는 것은 클래식 피아노 듣기의 재미 중 하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그걸 각자 다 리메이크해! 근데 곡이 길어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부분이 다 달라! 곡이 길고 다채로우니까 쉽게 질리지도 않아! 심지어 막 데뷔하는 가수도 전부 같은 곡을 리메이크해! 근데 또 다 좋아! 세상에, 그러니까 하나를 깊게 파고들어 가는 걸 즐기는 성향의 사람에게 클래식 피아노는 그야말로 끝없는 노다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답게 한 곡에 꽂히면 듣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전곡을 재생할 수 있을 때까지 듣고, 그렇게 듣고도 계속 듣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쇼팽 발라드 4번을 꺼내 듣는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다의 등대가 점멸하는 것 같은 도입부에서부터 마음을 사로잡힌다. 선선한 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이 곡을 ? 머릿속으로든 실제로든 ? 틀어둘 때면 어떤 삶의 진실이 찾아오는 것만 같다. 아, 삶은 이렇게 넘실대다가 끝나는 거야. 비통하게, 그러나 고요하게.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왈츠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의 격렬한 코다까지 마무리되고 나면 곡이 끝났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야 마는 것이다. 영원히 그 시간에 멈춰 있고 싶지만 음악이 흐르려면 시간 또한 흘러야만 한다는 아이러니에 아쉬워하면서.

나중에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긴다면, 그리고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약간의 여유를 허락한다면 스위스에서 열리는 베르비에페스티벌과 베를린필하모닉의 상주 공연장인 독일의 베를린필하모니에도 가보고 싶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과 영국 BBC프롬스에도 갈 수 있다면 끝내주는 여행이 되겠지.

공연을 볼 때는 피아니스트의 움직임을 보는 걸 선호하는 만큼 1층 앞자리, 그중 무대를 바라보는 방향 기준으로 왼쪽에 앉고 싶어 하는 편이다(오른쪽에 앉으면 피아노에 손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앞자리에서는 소리가 스쳐 지나가느라 조금 아쉽게 들리지만 그래도 좋다. 피아니스트의 팔과 손 모양, 손가락 움직임, 페달링까지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소리만 따진다면 1층 뒤쪽이나 2층 앞쪽이 조금 더 잘 들리는데, 공연용 망원경을 챙겨 다닐 만큼 부지런하지 못한 까닭에 그런 자리에 앉으면 피아니스트의 움직임은 많이 보지 못하고 음악만 즐기다 온다.

결국 너는 설득될 거라는 자신감(어쩌면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대담함). 남김없이 쏟아붓고 영혼을 투명하게 내놓지만, 그럼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관대함.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자신감, 관능성.(시마노프스키. 19세기 말~20세기 초. 니체의 시대. 1차세계대전. 시마노프스키의 〈마스크〉가 딱 1915~1916년이다.)

음악과 함께 흐르는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음악이 곧 호흡임을, 박동임을, 몸의 흐름임을 실감하게 된다.

피아노를 배우는 입장에서 공연은 살아 있는 교과서다. 영상이나 레코딩만으로는 보고 듣고 느낄 수 없었던 부분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소리와 움직임뿐만 아니라 무대에 선 연주자의 긴장, 시간이 지나며 긴장이 풀리는 모습,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사이의 어긋난 호흡을 맞춰가는 과정,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의 의사소통, 순간적인 정적 상태에서의 관객의 긴장, 앙코르 무대의 선곡, 심지어 실수까지도 포함된다. 공연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예상할 수 없으며 끝나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이다.

공연을 보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움직임과 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눈으로 영상을 찍듯 집중하지만 도통 그게 가능하지 않다. 한 번 들은 40분짜리 연주를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에 빠지는 아주 짧은 몇 초의 순간마저도 결국은 잊고 마는 게 인간이니까. 공연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잔상이 사라지기 전 재빠르게 몇 가지를 적어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래도 분명히 남는 게 있고,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소리는 아주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므로,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싶다면 나를 잊고 소리에 완전히 사로잡혀야만 한다. 완전한 집중, 고요한 몰입, 자아를 잊는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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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리듬을 바꾸기 위해, 빈둥거리는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

1837년 8월 22일자 편지에서 빅토르 위고는 기차 창문을 통해 바라본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길가의 꽃들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 얼룩, 아니 빨갛고 하얀 줄무늬다……. 모든 것이 줄무늬가 된다. 곡물 밭은 부스스하게 마구 자라난 노란색 털이며, 알팔파 밭은 초록색 머리칼을 길게 땋은 것 같다……. 가끔씩 어떤 그림자, 형태, 허깨비가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창문 뒤로 사라진다."1 위고가 탄 기차는 시속 24킬로미터의 속도로 이동했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다.

존 러스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격언을 남겼다.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더 따분해진다.

이동수단은 가장 빠른 것이 살아남아 앞으로 내달리며 이전의 수단을 지우는 방식으로 점점 진화해왔다. 이제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어서 잠시 멈추고 지금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물을 수조차 없다.

장 자크 루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철학자, 소설가, 작곡가, 에세이 작가, 식물학자였고, 독학자, 도망자, 정치이론가, 마조히스트였다. 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처럼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루소는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않은 최초의 자유인이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사람을 도시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모든 곳이 집이요, 그 어디도 집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걷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면 반드시 걸어야 했다. 오늘날 보행은 선택이다.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걷기는 루소를 살렸다. 또한 걷기는 루소를 죽이기도 했다.

루소는 자서전 《고백록》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늘 친구들보다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 대신 생각해줄 때를 제외하면 다시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름다움과 로맨스를 떠올리는 도시인 파리에 처음 도착한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더럽고 냄새나고 좁은 길, 못생긴 까만 집들, 전반적인 불결함과 가난, 거지, 짐마차꾼, 옷 수선공, 허브차 행상, 오래된 모자뿐이다."

잠에 관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잠을 인생의 성가신 방해물로 여기고 귀찮아한다. 두 번째 부류에게 잠은 인생의 순수한 쾌락 중 하나다. 나는 두 번째에 속한다. 내 얼마 없는 철칙 중 하나는 이거다. 내 수면을 방해하지 말 것. 암트랙 철도는 내 수면을 방해했고, 지금 나는 썩 기분이 좋지 않다.

악마는 밤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침에 공격한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취약하다. 바로 그때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 있는지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거의 50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지휘했다. 또한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거주하고 영토가 잉글랜드에서 이집트까지, 대서양 해안에서 티그리스 강까지 이어지는 대제국을 지배했다.

하지만 마르쿠스(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다)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미적거렸고, 낮잠을 잔 뒤 오후에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다. 이런 일상은 보통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던 다른 로마인의 삶과는 달랐다.

마르쿠스는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마르쿠스는 늦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평생 늦잠을 잤다.

마르쿠스는 미국 대륙 거의 절반에 맞먹는 크기의 제국을 지배했다. 나는 내 책상의 대략 절반 정도를 지배하며,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조차도 힘에 부친다. 나는 평생 명함, 잡지 구독 알림, 고양이털, 3일 된 참치 샌드위치, 고양이, 자질구레한 불교 장신구, 커피 머그잔, <필로소피 나우> 과월호, 개, 세금 보고 서류, 다시 고양이, 그리고 내가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산다는 점을 고려하면 왜 내 책상 위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모래의 반란을 물리치는 중이다.

마르쿠스와 나는 형제다. 마르쿠스는 제국을 통치하며 자신의 악마와 씨름을 했고, 나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나의 악마와 씨름을 한다. 우리에겐 공통의 적이 있다. 바로 아침이다.1

아침은 그날의 느낌을 결정한다. 아침이 나쁘면 하루가 나쁘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렇다. 춥고 칙칙한 월요일 아침에는 지위와 특권이 아무 쓸모가 없다. 삶의 다른 측면에서는 너무나 큰 도움이 되는 재산마저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부유함은 푹신한 이불과 한패가 되어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든다.

모든 새벽은 곧 재탄생이다.

레이건을 백악관에 앉힌 것은 ‘미국의 아침’을 불러오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생각은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지, 내려앉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침을 싫어할 가능성이 크다. 불행한 삶에 아침은 영화 <행오버3>의 오프닝 장면과도 같다. 다가올 끔찍함의 맛보기랄까.

아침은 변화의 시간이며, 변화는 결코 쉽지 않다.

철학자들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그러하듯 아침에 대해서도 둘로 나뉘었다.

니체는 동틀 무렵에 일어나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신 다음 오전 11시까지 일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이런 니체를 게으름뱅이로 보이게 한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하늘이 아직 잉크처럼 새까만 오전 5시에 일어나 묽은 차를 한 잔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대 피운 다음 일에 착수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그녀에게 축복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아아, 커피가 발명되기 약 1200년 전에 태어난 마르쿠스는 그러한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실존주의적 판단은 늘 임시적이다

다른 중요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중요한 침대 문제는 한 가지인 척하지만 사실은 여러 가지다. 이불을 끌어올리고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이 침대에서 나가는 것이가능한지를 묻는다. 장애가 없다면 그 답은 ‘그렇다, 가능하다’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나가는 것이 유익한지 아닌지, 결정적으로 침대에서반드시 나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문제가 까다로워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침대 안은 따뜻하고 안전하다. 어머니의 자궁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근접하다. 삶은 좋은 것이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침대 안과 달리저 밖은 춥다. 밖에서는 나쁜 일들이 벌어진다. 전쟁. 역병. 이지리스닝 음악.

침대에 남아야 한다는 진영이 확실한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철학에서 명백한 것은 없다. 철학에는 늘 ‘하지만’이 있다. 모든 철학 체계와 인지적 상부구조, 우뚝 솟은 사상 체제는 ‘하지만’이라는 이 짧은 단어 위에 세워졌다.

로마 시대 이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이 중요한 침대 문제는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남아 있다.

대통령이든 농민이든, 스타 셰프든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든, 로마제국 황제든 노이로제에 걸린 작가든, 우리 모두 똑같은 관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길 기다리며 가만히 멈춰 있는 물체다.

마르쿠스는 황제로서 자기 마음대로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왜 바쁜 일정 속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고전을 읽고 삶의 난제를 고민했을까?

그리스식 생활방식에 마음을 뺏긴 마르쿠스는 어머니가 "이 허튼 짓"을 당장 멈추고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라고 야단을 칠 때까지 철학자의 남루한 외투인팔리움Pallium만 걸치고 딱딱한 바닥에서 잠들기도 했다.

당시 로마인이 생각하는 그리스 철학은 현재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오페라와 비슷했다. 가치 있고 아름다우며 더 자주 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짜증날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 게다가 그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로마인은 진짜 철학보다는 철학이라는 개념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진짜 철학자였던 마르쿠스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로마제국에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마르쿠스는 세금을 올리는 대신 예복과 술잔, 조각상, 그림 같은 황실의 귀한 물건들을 경매로 팔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감동한 조치가 있다. 마르쿠스는 대부분이 어린 남자아이였던 줄타기 곡예사들이 반드시 두툼하고 부드러운 매트리스 위에서 공연을 펼치게 하라고 명했다.

마르쿠스의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은 "타고난 비관주의를 억누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5이었다.

뭐가 그리 어렵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먼저 한 발을 바닥에 딛고 다른 한 발을 내딛는다. 몸을 수직으로 일으킨다. 하지만 나는 수직으로 일어서는 데 실패한다. 대각선도 불가능하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도와줘요, 마르쿠스.

《명상록》은 내가 그동안 읽은 그 어떤 책과도 다르다. 사실 책이 아니다. 훈계다. 독촉과 격려 모음집이다. 로마 시대의 냉장고 메모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마르쿠스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 통증과 복통으로 고생했다. 거만하지만 유능한 의사였던 갈레노스는 마르쿠스가 잠들 수 있도록(아편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6 테리아카theriaca라는 이름의 약을 처방해주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냉장고 메모를 출판할 생각이 없었다.7 혼자 보려고 쓴 것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마르쿠스의 생각을 읽는다기보다는 엿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엿본 내용이 좋다. 마르쿠스의 솔직함이 좋다. 마르쿠스가 자신의 두려움과 취약함을 드러내며 종이 위에 스스로를 벌거벗겨놓은 방식이 좋다.

마르쿠스는 모든 철학이 스스로의 유약함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는 스토아철학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번역가 그레고리 헤이스가 말하듯, 《명상록》은 "말 그대로 자기계발서"8다.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좋은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관둬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

철학과 철학을 논하는 것의 차이는 와인을 마시는 것과 와인을 논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마르쿠스의 사상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철학자는 없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가치이지, 생각의 출처가 아니었다.

고대 철학 연구자인 피에르 아도의 말처럼, 지금 나는 "인간이 되고자 단련 중인 사람"9을 지켜보고 있다.

"내가 세상에 나온 목적, 내가 태어난 이유를 실행하려 하는데 왜 불평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이게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인가? 이불 안에서 따뜻하게 몸을 웅크리는 게?"
"하지만 이 안에 있는 게 좋은데……."
"그럼 너는 ‘좋은 기분’을 느끼려고 태어난 것인가? 여러 가지 일들을 실행하고 경험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르쿠스는 두 진영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불을 덮은 햄릿이다.

"우릴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건 활동이지, 알람시계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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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처럼 어떻게를 묻는 질문이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규범적이다.

작가 대니얼 클라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다음과 같은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에피쿠로스를 철학이라기보단 "삶을 고양시키는 시"4라고 생각하고 읽을 것.

여행은 좋은 의미에서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지혜는 쉽게 이동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절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내 선택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 사상가들이 지혜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전염성이 있는가?

그들의 관심은 삶의 의미가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이나 무아지경에 빠졌다. 루소는 사람들 앞에서 몇 번이나 엉덩이를 깠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푸들과 대화를 했다.(니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자.) 어쩌겠는가. 지혜는 고급 양복을 입는 일이 드물다. 뭐,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늘 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나도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지만, 그 단계들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 세상의 시간을 전부 가진 양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하찮고 바보 같은 것들로 머릿속을 채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나는 아니다. 나는 내가 중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수학 천재인 내 10대 딸아이가 지적해주었듯이, 내가 110세까지 살지 않는 한, 엄밀히 말하면 나는중년이 아니다.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 한다. 그것도 너무 늦기 전에.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5 프랑스 사상가 모리스 리즐링이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의심했다. 글은 종이 위에 생기 없이 누워 있으며 오직 한 방향으로만, 저자에게서 독자에게로만 움직인다. 책과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좋은 책도 마찬가지다.

《대화편》은 건조한 논문이 아니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논쟁적일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재미있는 대화다. 니체의 말처럼 "농담 가득한 지혜"다.

"소크라테스 근처에 있거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논쟁에 말려들기 쉽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든 간에 소크라테스가 졸졸 따라다닐 것이며, 결국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소크라테스와 얽히면 소크라테스에게 철저하고 완전하게 털리기 전까진 그를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질문이 성가신 것은 멍청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대답할 능력이 없어서다. 아이들은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은 길게 보면 도움이 될지언정 당장은 무척 짜증스러운 일이다.

피터 크리프트는 말한다.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13

소크라테스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열외자의 지위. 두둑한 뱃살. 늘 궁금해하며 여기저기로 떠도는 마음. 대화를 향한 사랑.

우리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끈기다. 나는 실제든 상상 속에서든 싸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 기원전 432년에 있었던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놀라운 힘과 체력을 드러내며 친구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구했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혀 일종의 지적 광합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원사였다. "마음속에 당혹스러움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14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소. 그러니 당신 말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을 찾으시오. 당신은 폭군이오, 소크라테스. 이 논쟁을 끝내거나,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시오."

사람들은 왜곡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착각한다. 심지어 자신이 안 맞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루 종일 휘청거리며 가구에 부딪치고 사람들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내내 가구와 사람들을 탓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어리석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들먼은 철학자가 견해라는 나이트클럽 문을 지키는 건장한 문지기와 같다고 말한다.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다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시리처럼 평범한 질문은 표면 위에서 맴돈다.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좋은 말 같다. 질문을 살아내면서 남은 평생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질문의 답은? 대답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이 받는 부당한 평가다.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제나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두라고, 제이컵 니들먼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늘 성공을 미적 측면이 아닌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다.

성공은나한테 어떤 모습이지? 그 모습을 본다면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인도의 현자들은브라모디야brahmodya라는 시합을 펼쳤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절대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시합은 언제나 침묵으로 끝이 났다.

제니퍼가 던진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에 수십 개의 질문을 일으켰다. 이제는 더 이상 제니퍼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관점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에서, 내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

"사람들이 가끔 기차 안에서 경험하듯이,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뒤쪽으로 달리고 있고, 그러다 갑자기 진짜 방향을 깨닫게 된"17 것이다.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안경의 도수를 다시 맞추었고, 이제 앞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 사람들은메타포라를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지하철을 타는 행위조차 자기 혁신을 약속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직판했다.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직접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배꼽에 대해 생각하다’에는 ‘묵상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것을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불렀다. 보통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사실 의미 있는 융성한 삶이라는 더 큰 뜻이 있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20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곳으로 갈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반드시 잊지 말고 갚아주게나."
크리톤이 대답한다. "알겠네. 다른 할 말은 없는가?"
소크라테스는 대답이 없었다. 죽은 것이다.
이런 재미없는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학자들은 수백 년간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일부는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말을 비관적으로 해석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을 바쳤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마 삶이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질병과 같다는 뜻에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지라도 작은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시민으로서, 또 친구로서의 의무를 간과하지 말 것. 명예로운 사람이 될 것. 다른 사람에게 수탉을 빚졌다면, 수탉을 갚을 것.

질문의 왕이 질문의 구름을 남기고 사라짐으로써 남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궁금해하게 만든 것이 본인과 유쾌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것. 소크라테스는 도저히 못 배기고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것이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우리가 경험할 또 하나의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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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지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충족되지 않는 이 배고픔은 도대체 무엇일까?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Miles Kington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1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앎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혜는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를 운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이올린을 운으로 배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지혜의 부스러기를 줍기를 바라면서 비틀비틀 인생을 살아나간다. 그러면서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한 현대 철학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잘못된 삶"2을 살고 있다.

영어의 ‘철학자philosopher’라는 단어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필로소포스philosophos에서 왔다. 하지만 미국 독립선언문이 행복을 손에 넣는 것에 관한 글이 아니듯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 역시 지혜를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은 것,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다.

기차 내부는 태아를 감싸는 양막의 내부와 비슷한 면이 있다. 훈훈한 온도, 따뜻한 햇살. 기차는 나를 자의식이 생기기 전의 더 행복했던 시절로 데려다준다.

기차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우리 안에 머무는 무언가가 있다.

철학과 기차는 서로 잘 어울린다. 기차 안에서 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버스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아주 조금도 불가능하다.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거나, 어쩌면 연상 작용 때문일 수도 있겠다. 버스는 어린 시절에 갔던 수학여행이나 캠프처럼 내가 가기 싫었던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기차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그것도 생각의 속도로.

하지만 철학과 기차에는 퀴퀴한 느낌이 있다. 둘 다 한때는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였으나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물이 되었다.

오늘날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도 일부러 기차를 타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부모님이 말리는데도 일부러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은 기차 타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뭘 모르던 시절에나 하던 것이다.

철학은 어처구니없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와 ‘실용적인practical’이라는 단어는 오직 사전에서나 가까이 붙어 있다.

과학은 뒷좌석에서 괴성을 지르며 내 등받이를 발로 차는 아이에게 육체적 위해를 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용인되는지 아닌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창밖의 풍경이 아름다운 건지 흔한 건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확실하진 않지만, 철학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우리 동네 서점에는 ‘철학’ 섹션과 ‘자기계발’ 섹션이 붙어 있다. 고대 아테네의 ‘반스앤노블’에서는 이 두 섹션이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는 철학이 곧 자기계발이었다. 그때는 철학이 실용적이었고, 철학이 곧 심리 치료였다. 영혼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더 가깝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어떻게. 요즘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단어다.

우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처럼 어떻게를 묻는 질문이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규범적이다.

작가 대니얼 클라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다음과 같은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에피쿠로스를 철학이라기보단 "삶을 고양시키는 시"4라고 생각하고 읽을 것.

여행은 좋은 의미에서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지혜는 쉽게 이동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절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내 선택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 사상가들이 지혜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전염성이 있는가?

그들의 관심은 삶의 의미가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이나 무아지경에 빠졌다. 루소는 사람들 앞에서 몇 번이나 엉덩이를 깠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푸들과 대화를 했다.(니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자.) 어쩌겠는가. 지혜는 고급 양복을 입는 일이 드물다. 뭐,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늘 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나도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지만, 그 단계들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 세상의 시간을 전부 가진 양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하찮고 바보 같은 것들로 머릿속을 채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나는 아니다. 나는 내가 중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수학 천재인 내 10대 딸아이가 지적해주었듯이, 내가 110세까지 살지 않는 한, 엄밀히 말하면 나는중년이 아니다.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 한다. 그것도 너무 늦기 전에.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5 프랑스 사상가 모리스 리즐링이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의심했다. 글은 종이 위에 생기 없이 누워 있으며 오직 한 방향으로만, 저자에게서 독자에게로만 움직인다. 책과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좋은 책도 마찬가지다.

《대화편》은 건조한 논문이 아니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논쟁적일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재미있는 대화다. 니체의 말처럼 "농담 가득한 지혜"다.

"소크라테스 근처에 있거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논쟁에 말려들기 쉽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든 간에 소크라테스가 졸졸 따라다닐 것이며, 결국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소크라테스와 얽히면 소크라테스에게 철저하고 완전하게 털리기 전까진 그를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질문이 성가신 것은 멍청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대답할 능력이 없어서다. 아이들은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은 길게 보면 도움이 될지언정 당장은 무척 짜증스러운 일이다.

피터 크리프트는 말한다.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13

소크라테스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열외자의 지위. 두둑한 뱃살. 늘 궁금해하며 여기저기로 떠도는 마음. 대화를 향한 사랑.

우리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끈기다. 나는 실제든 상상 속에서든 싸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 기원전 432년에 있었던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놀라운 힘과 체력을 드러내며 친구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구했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혀 일종의 지적 광합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원사였다. "마음속에 당혹스러움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14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소. 그러니 당신 말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을 찾으시오. 당신은 폭군이오, 소크라테스. 이 논쟁을 끝내거나,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시오."

사람들은 왜곡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착각한다. 심지어 자신이 안 맞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루 종일 휘청거리며 가구에 부딪치고 사람들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내내 가구와 사람들을 탓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어리석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들먼은 철학자가 견해라는 나이트클럽 문을 지키는 건장한 문지기와 같다고 말한다.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다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시리처럼 평범한 질문은 표면 위에서 맴돈다.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좋은 말 같다. 질문을 살아내면서 남은 평생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질문의 답은? 대답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이 받는 부당한 평가다.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제나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두라고, 제이컵 니들먼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늘 성공을 미적 측면이 아닌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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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3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의 우주와 우리의 시대, 그리고 모든 생각하는 존재들에게는 일종의 번호표가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우주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양자요동이 가짜 캡슐을 양산할 것이므로, 우리 후손이 만든 진짜 캡슐은 그 속에 섞여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양자적 잡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영원을 상상할 수 있고 영원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직접 만질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야생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 내심 부담스러워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너는 작은 벌레의 출현에도 거의 죽을 듯이 놀라 자빠지는 소심형 인간이므로 무리수를 두지 말라."는 맞춤형 경고가 배달된 것이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 나도 잘 안다. 우주는 내가 하는 일이나 나에게 닥쳐올 위험 같은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인간이 다른 종을 제치고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의 패턴에 매우 민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물의 연결 관계를 추적하고, 우연을 가볍게 넘기지 않으며, 규칙을 기억하고 중요도를 할당한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혼란스러운 경험에 어떻게든 질서를 부여하려는 감정적 충동의 산물이고, 현실의 특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얻은 결과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의 가장 확고한 믿음은 자연이 법칙에 따라 운영된다는 것이다(우주는 법칙을 준수하는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법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방정식이다.

어느 날,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에게 우리가 구축한 방정식을 보여 준다면 가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우리도 처음에는 수학으로 시작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현실 세계를 서술하는 현실적 언어를 찾았기 때문에, 굳이 수학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화를 통해 직관과 인지력을 키우고 물리학을 습득해 왔지만, 자연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적 언어로 표현된 호기심 덕분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방정식은 현실의 깊은 구조를 탐구하는 최상의 도구가 되어 다양한 지식을 창출했다. 그러나 방정식은 인간의 마음이 반영된 구조물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험의 가치를 평가할 때 이런 관점을 고수하는 편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선과 악, 운명과 목적, 가치와 의미 등은 모두 유용한 개념이지만, 도덕적 기준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중요도를 할당하는 행위가 인간의 마음보다 근본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덕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규범이라기보다 편의를 위해 고안된 발명품에 가깝다. 다윈의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은 마음은 다양한 개념과 행동에 끌리거나,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근친상간을 혐오하는 것은 세계 공통의 가치관이다. 매사에 공정하고, 가족과 동료에게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선조들이 집단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에는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오만 가지 문제가 속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인의 행동이 집단생활의 효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일종의 피드백 회로를 거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 규범이 서서히 정착되었다. 그리고 집단의 일원들은 자신이 행동 규범을 따르는 정도에 따라 생존 확률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자연은 우리의 소망과 판단, 도덕적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 물리 법칙에 따라 가차 없이 나아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의 소망과 판단, 그리고 도덕적 평가는 물리적 세계의 일부로서, 자연의 냉정한 법칙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 전개되는 과정은 별로 인간적이지 않은 수학을 통해 서술된다.

이 모든 여정은 입자와 장, 물리 법칙, 그리고 초기 조건이라는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우리가 아는 한, 이 네 가지 외에 우주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와 장은 만물의 구성 요소이고, 물리 법칙은 주어진 초기 조건에 의거하여 우주가 나아갈 길을 결정한다.

현실 세계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물리 법칙은 확률적으로 적용되지만, 확률 자체는 엄밀한 수학을 통해 결정된다. 또한 입자와 장은 가치나 의미를 따지지 않고 법칙에 따라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자연이 수학을 따라 전개되다가 생명체를 낳을 수도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물리 법칙을 따른 결과다. 생명은 물리 법칙에 개입할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자기 인식이 가능한 종이 언어 능력을 획득하면 자신을 ‘과거에서 미래로 전개되는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생존은 더 이상 삶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생존이 중요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분석하여 관련성을 찾고, 각 항목에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담을 전해 들으면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예술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고, 음악을 들으면서 패턴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고, 종교를 통해 집단의 결속력을 다져 왔다. 그러나(진화론적으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이런 것은 단명한 삶을 초월하여 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의 산물일 수도 있다. 인간사에 무심한 자연을 초월하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다.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우주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 이유를 궁금하게 여겼지만, 그가 마주친 가장 큰 딜레마는 무언가를 자각하는 능력이 결국 무無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모든 행동은 언젠가 멈출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양한 시간대를 거쳐 오면서 목격했던 탄생과 죽음, 출현과 붕괴, 그리고 창조와 파괴의 리듬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엔트로피 2단계 과정과 진화의 선택력은 혼돈 속에서 고도의 질서를 창출하지만, 별과 블랙홀, 행성과 인간, 그리고 분자와 원자는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모두 분해될 것이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이 불멸에 적응할 만큼 충분히 현명하다고 생각한다(지금 당장은 부족하다 해도, 영원의 시간이 있으니 차차 개선해 나가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은 날이 갈수록 많아지겠지만, 그것을 조달하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향상될 것이다. 기존의 기쁨과 행복에 식상해진다면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거나, 발명하거나, 개발하면 된다. 물론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영원한 삶이 지루하다는 주장은 부정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된 것 같다.

영생을 생각하면 삶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사실 현세에서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결정과 선택, 경험, 그리고 다양한 반응들은 유한한 시간 안에 한정된 횟수만큼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 수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외치진 않지만, 남은 여생 동안 맞이하게 될 아침의 횟수가 직관적으로 계산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아침의 횟수가 무한대라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과는 완전 딴판일 것이다.

여기에 반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가치관이 있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후손들이 계속 추구하기를 바라는 마음, ‘나’라는 존재의 흔적이 죽은 후에도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분야, 수행하는 일, 우리가 감수하는 위험, 함께 일하는 파트너, 평생을 함께할 가족, 삶의 목적, 취미, 등등…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기회가 별로 많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지구는 평범한 은하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평범한 별 주변을 공전하는 그저 그런 행성입니다.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져도 우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겁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요."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다. 갑자기 집중력이 높아지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거나, 지나온 삶을 후회하거나,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애써 평정심을 찾거나, 갑자기 심오한 무언가를 깨닫기도 한다. 나의 반응도 이들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종말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면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도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만, 전 인류의 종말이 닥치면 무력함 외에 달리 느낄 만한 감정이 없을 것 같다. 그때에도 아침에 일어나 물리학을 연구할 것인가? 하긴, 익숙한 일에 집중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오늘 내가 위대한 발견을 이룬다 한들, 알아줄 사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을 완성하고 싶어질까? 엉성하게나마 탈고를 하면 잠시 만족스럽긴 하겠지만, 읽어 줄 사람이 없으니 이것도 공허하기만 하다. 그날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까? 아이들도 늘 하던 일을 계속하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미래가 통째로 사라질 판인데, 배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류 종말 시나리오가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방정식과 수학 정리, 그리고 물리 법칙은 진리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칠판에 휘갈기거나 학술지와 교과서에 인쇄된 기호의 집합일 뿐이다. 이들의 가치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창출되며, 그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이 깨달음은 방정식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귀하게 여겼던 것을 물려줄 사람이 없고 물려받을 사람도 없다면 미래는 의미를 상실한다. 한 개인의 영생은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인류의 영생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우리의 관심사와 의무, 가치와 판단, 중요한 것과 보람 있는 일들,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삶이 계속된다는 가정하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개념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이다.7

미국의 철학자 수전 울프Susan Wolf는 모든 인류가 운명 공동체임을 인식하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는 미래에 인류가 존재해야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8

셰플러는 임박한 위험에만 반응하고 먼 미래에 다가올 위험에 무심한 것은 직관적인 반응일 뿐 합리적 판단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경험 범위를 훨씬 넘어선 긴 시간을 계량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울프도 이 점에 동의하면서 코앞에 닥친 멸종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먼 훗날 다가올 멸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수십억 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여러 번 확인한 바와 같이, 시간의 길고 짧음은 절대적 기준이 없다.

현재를 넘어 은하들이 멀어지는 시대를 지나, 태양계의 시대를 지나, 별들이 소진되어 행성들이 공간을 떠도는 시대를 지나, 블랙홀이 빛을 발하다가 분해되는 시대를 지나, 차갑고 텅 빈 무한 공간의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한때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라곤 여기저기 흩어져서 떠도는 입자들뿐이다). 실감이 가는가? 머릿속에서 진행된 여행이 현실로 느껴진다면, 당신은 상상력이 꽤 풍부한 사람이다. 물론 현실처럼 느꼈다고 해서 경외감이나 신비함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빅뱅의 순간에 입자의 위치나 장의 값이 조금만 달랐어도 당신과 나, 인간, 지구, 그리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확률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수많은 입자 배열들 속에서 특별한 배열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우연의 신이 우리를 한없이 축복하사, 자연의 법칙이라는 좁디좁은 깔때기를 통과하여 우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의 조합으로 형성될 수 있는 사람들 중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직 한 번도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빅뱅에서 당신이 태어난 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매 순간마다 양자적 과정이 확률 법칙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이들이 도중에 한 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당신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입자의 다른 가능한 배열이 엄청나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를 이루는 염기쌍과 분자 배열이 만들어졌다.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우리 몸의 분자 조합과 화학적, 생물학적, 신경학적 배열이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생명체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인간은 시간을 벗어나 과거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며, 상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우주를 탐험할 수 있다. 우주의 한 구석에서 우리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단어와 표상, 구조, 소리를 만들어 냈고, 이들을 이용하여 갈망과 좌절, 혼란과 계시, 실패와 승리를 표현했다. 또한 우리는 독창성과 인내를 발휘하여 내면과 외부 세계의 한계에 도달했고, 반짝이는 별과 빛의 이동, 시간의 흐름과 공간 팽창을 좌우하는 법칙을 발견했으며, 이 법칙 덕분에 우주의 시작과 끝을 엿볼 수 있었다.

우주는 왜 텅 비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생명의 근원은 무엇이며, 의식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추측을 내놓았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의 두뇌는 결코 성능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종류의 진실을 전혀 모르는 채 ‘플라톤의 벽’만 응시하면서 그 너머에 존재한다는 궁극의 진실을 동경하는 무력한 존재도 아니다.

춥고 황량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려면 웅장한 설계도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입자에게는 목적이 없으며, ‘우주 깊은 곳을 배회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궁극의 해답’ 같은 것도 없다. 그 대신 특별한 입자 집단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자신만의 목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태를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바깥이 아닌 내면이다.

이미 제시된 답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과학은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과학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짙은 어둠을 뚫고 소리와 침묵에 각인되어 끊임없이 영혼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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