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그로서는 드물게 벅찬 감정에 휩싸여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공산주의가 온 세상에 도래할 그날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에 황금 변기를 설치할 거라고. 그날에 황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테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일단,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구저분한 공간도 부르주아의 대저택 못지않게 호화로울 거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날이 오면 노동자 계급이 인간의 탐욕을 저주받을 황금에 투영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황금과 항문기의 연관성을 강조한 바 있다. 사회주의는 황금의 특수성을 없애는 동시에 이 금속을 자본주의보다 더 잘 사용할 것이다.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해볼까. 2014년에 미국의 여성 사업가 킴 카다시안과 그녀의 남편이자 유명 래퍼인 카니예 웨스트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 실제로 황금 변기를 설치했다. 55만 달러는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비용이었다. 레닌의 서약은 이루어졌다. 자신의 서약을 이런 사람들이 이뤄주기를 바라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돈은 빤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중 하나다.

돈은 그 자체로 당연해 보이지만 좀체 밝혀지지 않는 미스터리다. 단어에도 이 신기한 애매성이 녹아 있다. 프랑스어에서 돈argent은 오랫동안 화폐 주조에 쓰였던 금속(은)을 뜻한다.

돈은 천박하면서 고귀하고, 허구이자 현실이다. 돈이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고 맺어주기도 한다. 돈은 너무 넘쳐나도 두렵고, 너무 모자라도 두렵다. 돈은 악을 행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을 행하는 악일 수도 있다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화폐가 기원전 3000년경 우르에서 등장했다고 본다.1 이 화폐에 새겨진 이슈타르는 다산과 죽음이라는 희한한 이원성의 여신이다.

자기 종교에 상관없이 돈은 사람을 즉각 개종시킬 수 있다.

돈은 원래 신뢰를 의미한다.

화폐는 어떤 국민이나 특정 공동체를 구체화하기 때문에 화폐의 후광에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돈이 비난의 대상이 되면 옹호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돈을 옹호하면 공격하고 싶어진다.

性이 그렇듯이 돈도 너무 많은 의미로 넘쳐나면서 본질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동의어가 널리고 널렸다.(프랑스어에서 돈은 grisbi, fric, flouze, pepetes, picaillons, pognon, thune, fraiche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돈은 창조주의 손을 벗어나 역으로 치고 들어온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매혹적이다. 말수 적던 자식이 성난 폭군이 되었다.

나는 행운의 여신께서 당신의 넉넉함으로 나를 품어주시리라 믿으며 오랫동안 베짱이처럼 살아왔다.

이 세상에서 돈이 제공하는 유일하게 정말로 귀한 값어치는 시간, 마르지 않는 시간의 풍부함이다.

나는 늘 밥벌이와 살아야 할 이유를 구분해왔다. 때로는 그 둘이 일치했지만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행복한 젊은 날이 오래도 갔다. 그 시절에는 필요와 과잉 사이가 아니라 필요와 본질 사이에서 움직였다.

나는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결핍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돈을 중심에 갖다놓으면서 돈이 근심거리가 된다고 곧잘 생각한다.

사람이 늙으면 계산의 이치, 잔금의 이치로 기울게 된다. 모든 것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살날이 줄어든다. 이제 시간은 남아돌지 않는다. 시간은 훈계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궁극의 사치는 고급 승용차나 호화로운 자택이나 별장이 아니라 공부하는 삶을 나이 들어서까지 연장할 수 있는 가망이라고 본다.

공부하는 삶이란 일상의 즉흥, 정처 없는 거리 산책 취향, 카페에서 죽치기, 초연함의 과시, 명예와 직책과 흐르는 세월을 피하려 주렁주렁 몸에 휘감는 상징적 패물에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매일 아침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부조리하지만 꼭 필요한 환상이다.

나는 늘 권력의 유혹, 커리어에 대한 예속보다 나의 자유를 소중히 여겼다.

돈을 잊어버릴 만큼 부유했던 적도 없고, 돈을 멸시할 만큼 가난했던 적도 없다.

따라서 돈은 지혜를 추구하는 약속이다. 이 표현은 이중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돈을 갖는 것이 지혜라는 의미도 있고, 돈에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지혜라는 의미도 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늘 조율을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돈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철학자가 된다. 잘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해 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돈 문제가 쉽고 편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돈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속으로는 돈을 우러러보기도 한다. 돈을 떠받드는 사람은 돈을 과대평가한다. 돈을 멸시하는 척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열광은 문제가 되지만 지탄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돈은 어려운 주제다. 하지만 지혜란 본디 만인에게 광기의 상징처럼 보이는 바로 그것을 공략하지 않는가? 그럴 게 아니면 철학이 무슨 효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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