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저녁과 밤이 지나가는 동안 멀고 가까운 불빛들이 붉게, 또 하얗게 반짝였다. 언젠가와 마찬가지로 검은 강물은 쉬지 않고 흘렀다.

먹이를 찾아 정신없이 집어등 불빛을 따라가는 고등어처럼 앞차의 빨간색 미등만을 뒤쫓는 것이 삼십대의 삶이었다.

물에 풀리는 핏방울처럼 제일 먼저 몸의 윤곽이 기억의 저편으로 풀려나갔다.

그에 비하면 목소리는 독립적이었다. 오래도록 지훈의 곁에 머물며 불쑥불쑥 들리곤 했다.

"이 글을 끝내면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랑은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문장이 지훈에게 떠오른 건 신도시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한 국숫집에서였다.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한파가 한반도의 상공을 뒤덮은 탓에 며칠째 맹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 덜덜 떨면서 수십 대의 택시로부터 승차 거부를 당한 뒤 지훈은 충동적으로 국숫집의 문을 열었다.

사랑이 막 끝났을 때였다. 지훈도 그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먹이를 내미는 119 대원도,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초등학생들도 없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 돌아갈 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훈 역시 쫓기듯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사랑이라는 걸 할 것이다.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으로만,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만 잊히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꼭 구해야만 했을까, 배수로 속의 그 고양이?

그 순간, 대답 대신 잔치국수 한 그릇이 지훈의 앞에 놓였다. 국수에서는 힘내라는 초등학생들의 목소리처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토요일 오후, 산책의 끝은 언제나 앨리스의 다락방이었다. 부암동 초입에서 골목길 안쪽까지 종아리가 좀 땅긴다 싶은 정도로 걸어가면 나오는 모퉁이의, 전혀 앨리스처럼 보이지 않는 중년 부인이 10월 하순의 은행잎보다도 더 샛노란 카레를 끓여주는 이층 카페였다.

지훈이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Alice’s Attic〉이란 단편영화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Alice’s Attic. 지훈은 기억하기로 했다.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못 봐요."
"네?"
"그 영화가 그런 내용이에요."
그녀는 웃었다.
"아, 네."

서른한 살에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는 "튤립은 맨 먼저 너무 빨개서,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썼고, 무대의 모리타 도지는 죽은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으며, 기억을 모두 지운다고 해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미셸 공드리는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지훈은 전혀 몰랐을 뻔했다.

뿐만 아니라 겨울 서귀포의 눈송이와 봄 통영의 벚꽃과 여름 경주의 물안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 어떤 여자를 생각하면 왜 어깨의 주사 자국과 등의 점들과 콧잔등의 주근깨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지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안나와 오토는 첫눈에 서로 반하지만 부모의 재혼으로 함께 살게 되고 어느 날 안나가 오토에게 몰래 종이 한 장을 쥐여준다. 거기에는 ‘valiente’라는 스페인어가 적혀 있었다. 스페인어 사전을 뒤져보니 그 단어의 뜻은 ‘용감한, 용기 있는, 멋진, 희한한’이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 단어는 ‘이따가 밤에 내 방으로 와’라는 뜻이었다. 잊지 말 것. 영화를 보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할 용기를 낸다는 뜻이라는 것을.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훈은 이제 리나가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문이 열린다 해도 그 비밀번호가 진짜 비밀번호가 될 수는 없었다.

옛날이야기, 모두 옛날이야기……
꽃이 지는 건 꽃철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는 건,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한때 서로 안을 때면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던 우리도 이렇게 멀리 떨어지게 됐네요.

그러니 그때는 혼잣말을 하듯 "그때, 그 바다 말이야……"라거나 "그 사과 있잖아……"라고만 해도 무슨 말인지 당신은 금방 알아차렸지만, 이제는 완벽한 문장을 갖춰서 말할 수밖에요.

당신이 곁에 있을 때 내겐 손이나 발, 혹은 심장 같은 게 없어도, 심지어 나란 사람이 애당초 이 세상에 없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다고 생각했으니. 그럼에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그렇게 자라서 이 세상에는 나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만나고 사랑하게 됐다는 게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나의 쓸모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쓸모는 무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게는 쓸모없는 것들이 넘쳐납니다.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이라도 터진 것처럼 앞다퉈 꽃을 피우던 두 그루의 벚나무가 있는 석촌호수의 잔물결, 연신 불어대는 겨울바람에 질렸다는 듯이 하얗게 김이 서리던 연남동 길모퉁이 오뎅가게의 네모난 유리창, 서늘한 바람이 부는 평일 저녁 동피랑 마을에서 내려다보던 강구안 주변의 반짝이는 불빛들, 뷔페를 먹으러 가는 중국 관광객들로 가득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던 곽지과물의 아침 바다…… 영원히 흔들리고 출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이 모든 것들도 당신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훈은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됐다. 서른다섯 살이란, 앉아 있던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원산 얘기하시는 거 보니까 이북 사실 때 기억인 모양이지?"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구라파에서 온 귀한 보물을 탐내는데, 이 사람들한테는 책이 보물이지, 뭐. 서로 먼저 읽으려고 달려들어 우애가 상할 지경이었어.

리마두의 문장은 깔끔하면서도 젠체하는 태도가 전혀 없거든. 요즘 말로 하자면, 쿨하다고나 할까. 게다가 세속의 물질적 행복보다 우정의 소중함을 말하는 내용도 젊은 그들의 마음에 쏙 들었지.

‘여아가 항행하여 무화하면 기식우지진부재리오如我恒幸無禍, 豈識友之眞否哉’라면 리마두의 그 책에 나오는 문장으로, ‘만약 내게 항상 행복만 있고 불행이 없다면 어찌 벗의 참되고 거짓됨을 알 수 있으리오’라는 뜻인데, 그 몇 년 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승훈이며 이벽이며 정약용 형제들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바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지.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그간 중단했던 내 신앙 공부를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까 해."

추국청의 정약용에 대해 말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을, 마치 눈물 없이 우는 새와 같았던 그 표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대의 창고는 어디에 있는가?"
알렉산더대왕이 말했다.
"벗의 마음속에 있다."

그때 〈페르세폴리스〉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나 일부러 시라즈까지 가서 페르세폴리스를 구경했었다. 『론리플래닛』에 실린 사진을 보긴 했어도 고대 유적지라는 것만 생각하고 갔지, 그렇게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들과 건축물들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입구인 만국의 문에서부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폐허가 된 유적만으로도 그 도시가 얼마나 웅장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 고대에 그처럼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란을 여행하는 정약용 형제들을 상상해봤다. 그랬다면 정약전은 페르시아만의 이색적인 물고기들에 대한 책을, 정약용은 누구도 믿지 않을 여행기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정약종은 그길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니 그들 형제의 모습이 역사책의 갈피를 찢고 나와 또렷해졌다.

"독신주의자는 혼자 살겠다는 거고, 비혼주의자는 결혼 제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에 가깝죠."

"선생님은 역시 좀 다르시네요. 저는 나이가 들면 다들 비관에 빠지는가 싶었거든요. 그게 제게는 또다른 비관이었어요.

나이가 들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진다고 생각하는 노인이 된다면 끔찍할 것 같아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 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바로 그 무렵, 나는 이십팔 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네.

그 신부님에게 할아버지가 어떤 고해성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희로애락이 교차한 육신의 고단한 삶이 막을 내렸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나는 도 정치보위부장이다. 너희 반국가 행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고 외쳤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강의실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한가운데로. 여기 있지만 저기에도 있는 사람. 그날은 내가 소설가에 대한 정의를 얻은 날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 "내가 진정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랑은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사랑의 단상 2014」)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장을 떠올린 지훈처럼 나도 김연수를 생각하면 이 문장부터 떠오른다. 나에게 김연수는 ‘빠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고, 김연수가 쓰는 소설도 언제나 ‘빠진 상태’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해 슬퍼진다는 것. 그러므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 번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첫번째 삶, 과거를 기억하며 거꾸로 진행되는 두번째 삶, 그리고 두번째 삶이 끝나고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세번째 삶.

이 소설집을 흐르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주의 결말」에서 아버지를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데다 방화까지 저지른 혐의로 악마화된 유진주가 범죄심리학자인 ‘나’에게 던진 질문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깊은 시간의 눈 속에는 나에게 들어온 타인이 있고 나를 품은 타인이 있다. 나와 타인이 섞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인생의 행과 불행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시간이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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