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기가 나지는 않았지만 약간 필사적인 심정이 되었다. 종종 필사적인 심정은 용기 대신 나서서 용기가 할 일을 하기도 한다.

선생이 될 수 있고 또 개인 지도를 할 수도 있지만, 가정교사가 되거나 말상대가 되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훌륭한 집안의 가정교사가 되느니 차라리 하녀가 되어 질긴 장갑을 사서 끼고 침실과 층계를 쓸고 난로와 자물쇠를 청소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 편이 더 마음 편하고 독립적이었다. 말상대가 되느니 차라리 셔츠를 만들다 굶어 죽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빛나는 숙녀의 그림자, 바송삐에르 양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내가 침울한 성격이고 가끔 우울해하긴 했지만, 우울해하거나 눈에 띄지 않게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원해서였다.

나는 그때그때 전환되고 나를 맞추는 사람이 못됐다.

"쌩삐에르 양에게야 충실하게 근무해준 데 대해 물질적인 보상을 해야겠지만, 당신에게 그런 보상을 하면 우리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아마 소원해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할 수 있는 일이 한가지 있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혼자 내버려두는 거죠. 앞으론 그렇게 할게요."6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그 순간부터 여태껏 강요하던 모든 미미한 구속을 조용히 없애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녀의 규칙들을 존중했다. 즉, 내게 맡겨진 학생들에게 기꺼이 두배의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일에 만족했다.

그레이엄과 함께 있을 때는 원래 수줍어했는데 지금은 더욱더 수줍어했다. 가끔씩은 그에게 냉담하려고 애쓰고 때로는 그를 피하기도 했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랐고 그가 들어오면 말이 없어졌다. 그가 말을 걸면 더듬거리기 일쑤였고, 그가 떠날 때면 난처해하며 어쩔 줄 몰랐다. 그녀의 아버지조차 이런 태도를 눈치챌 정도였다.

그도 말을 많이 하지는 않던데요. 저를 겁내는 걸까요, 아빠?"
"오, 물론이지! 어떤 남자가 이렇게 조용한 작은 아가씨를 겁내지 않겠니?"

그는 그녀를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고, 몹시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마치 너무 크게 숨을 쉬면 공중에 매달린 행복이라는 거미줄이 망가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몹시 수줍어했지만 우정을 진척시키려는 진지한 태도에 분명히 아주 섬세하고 요정 같은 매력이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아빠의 억양은 에든버러식인가요 아니면 애버딘식인가요?"
"귀여운 아가야, 둘 다란다. 게다가 물론 글래스고식이기도 하지. 이런 억양 덕분에 프랑스어를 잘하는 거란다. 스코틀랜드 말을 잘하는 사람은 그 프랑스어도 능숙하게 하거든."

바송삐에르 씨가 ‘스노우 양’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나는 내적으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때때로 얼마나 상반된 특징들이 우리에게 부여되는가! 베끄 부인은 나를 박식하고 우울한 여자로, 팬쇼 양은 신랄하고 빈정대기 좋아하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홈 씨는 모범적인 선생에다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 즉 다소 관습적이고 엄격하고 편협하며 까다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정교사다운 정확성을 지닌 산 표본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 즉 뽈 에마뉘엘 같은 사람은, 알다시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성격이 불같고 무모하며, 모험심이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대담하다고 암시했다. 나는 그 모든 것에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꼬마 폴리나 메리였다.

그녀와 사귀는 일이 마음에 들고 기분이 좋긴 하지만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는 말상대가 되지 않겠다고 하자, 폴리나는 규칙적으로 계속 만날 수 있도록 같이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자기나 나나 독일어가 능숙하지 못하니 함께 독일어 공부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끄레시가에 여선생을 모셔다 함께 수업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정해지자 우리는 매주 몇시간은 함께 있게 되었다. 바송삐에르 씨는 아주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미네르바 엄숙 부인’9이 자신의 아름답고 귀여운 딸에게 여가시간의 일부를 할애해주는 데 대찬성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뽈 선생만큼 훌륭한 작은 사람도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 심술궂은 작은 독재자도 없었다.

그녀는 독일인답게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이어서 소위 우리 영국인의 신중함이라는 것을 아주 갑갑하게 여기는 듯했다.

사실 우리의 독일어 공부는 진척이 느렸는데도 그녀는 우리의 발전에 놀라는 것 같았다. 좀처럼 스스로 사고하거나 공부를 하려 들지 않는 외국인 여학생들, 즉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거나 사고와 응용으로 풀어보겠다는 생각조차 전혀 없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익숙해 있어서였다. 그녀가 보기에는 우리가 한쌍의 쌀쌀맞은 신동, 냉담하고 자신만만하고 불가사의한 신동이었다.

백작의 딸은 다소 거만하고 까다로운 면이있었다. 그리고 타고난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이런 감정을 가질 자격이 있기도 했다.

그녀처럼 조용한 경멸이라는 갑옷으로 자신을 방어한 적도 없었다

폴리나를 예쁘장한 운디네15 같은 존재로 여기며 반은 두려워하면서도 반은 숭배했고, 인간적이고 좀더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내게서 휴식을 찾았다.

우리가 읽고 번역하기를 좋아했던 책은 실러의 서정시집이었다. 폴리나는 곧 그 시들을 아름답게 낭독하는 법을 배웠고, 선생은 흐뭇한 웃음을 띤 채 듣다가 그녀가 읽는 소리가 음악 같다고 말하곤 했다. 또 폴리나는 그 시들을 아주 쉽고 유창하면서도 시적인 열정에 찬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의 뺨은 발그레해졌고 입술은 떨리며 웃음을 머금었고 아름다운 눈은 빛나거나 옅어지곤 했다. 그녀는 가장 훌륭한 시들을 외워서 단둘이 있을 때면 종종 암송하곤 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시 중 하나는 「소녀의 탄식」이었다. 그녀는 음성에 스며 있는 애조 띤 가락을 알아내고 그 단어들을 되풀이하여 읊기를 좋아했지만, 그 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비판하곤 했다. 어느날 저녁 우리가 난롯가에 모여 앉아 있을 때 그녀가 그 시를 나지막이 암송했다.

"루시, 나는 그녀가 무례한 사람이며, 거짓말을 했다고 믿어요. 우리 둘 다 브레턴 선생님을 알잖아요. 조심성이 없고 거만한지는 몰라도, 그가 비열하게 굴거나 비굴한 적이 있었나요? 그녀는 매일 자신의 발밑에 꿇어앉아 빌고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그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녀가 아무리 모욕을 주며 물리쳐도 사랑을 구걸하는 그에 대해서 말이에요. 루시,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인 점이 조금이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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