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광폭한 하얀 눈보라가 일어서 마차가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대모님을 믿어야지! 한번 초대한 이상 그녀는 반드시 손님을 맞아들이는 분이었다. 여섯시경에 나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 라 떼라스의 정면 계단을 올라가 현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 안에는 여름이 있었다. 두배나 더 추웠더라도 그녀의 친절한 키스와 다정한 악수 앞에서는 온몸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매력은 하얗고 투명한 안색이나 예쁘장한 이목구비나 완벽한 몸매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영혼에서 뿜어져나오는 차분한 광채였다.

그것은 비싼 재료로 만들었지만 불투명한 꽃병이 아니라,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정결한 램프였다.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 시절뿐 아니라 그 하루하루와 그 하루하루의 시간까지도요."

그녀의 눈은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어린 시절이 꿈처럼 사라지지 않고 젊은 시절이 햇빛처럼 사라지지 않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녀는 삶을 방만하게 맥락 없이 받아들여 어떤 시기는 그냥 넘겨버리고 다른 시기로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삶을 소중히 간직할 뿐 아니라 거기에 더 보태는 사람이었다. 종종 처음부터 돌아보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일관성 있고 조화롭게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아늑한 난롯가에 앉아 있으면서도 얼마나 자주 여자와 소녀 들의 마음과 상상은 주위의 안락함을 떠나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고 매몰찬 날씨와 눈보라와 다투며, 아버지와 아들과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외롭게 문이나 문설주에 기대어 기다려야 하는지!

"자, 어머니," 그가 말했다. "이제 타협을 하죠. 몸뿐 아니라 마음도 따뜻해지게 와세일주3를 들죠. 그리고 여기 난롯가에서 예전의 영국을 위해 건배하는 겁니다."

"난 루시 양을 잘 기억해요. 내 기억력이야 믿을 게 못되지만 딸아이가 자주 이름을 얘기한데다 하도 여러가지 긴 이야기를 듣다보니 마치 오랜 친구처럼 여겨지는군요."

"전 교사예요." 나는 이렇게 말할 기회가 생긴 게 다행스러웠다. 얼마간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참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루시 양의 태도와 모습을 곰곰이 뜯어보고 그녀가 다른 사람을 보호할 사람이지 보호를 받을 사람은 아니란 걸, 그리고 나서서 일할 사람이지 섬김을 받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단다. 루시 양이 충분히 나이가 들어 이런 운명 덕분에 아주 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는 신께 감사할 거다.

더욱이 세상에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야깃거리가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교제할수록 친밀해지고, 점점 더 친밀해져서 하나가 된다.

떠날 때 그는 이별의 아쉬움이 담긴, 수줍지만 아주 부드러운 표정, 즉 자신을 감싸주던 고사리 수풀에서 나온 새끼 사슴이나 초원을 떠나는 양처럼 아름답고 무구한 표정을 짓고 떠났다.

여자나 소녀에게서 자제력이나 금욕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일상적인 잡다한 비밀이나 종종 느끼는 시시껄렁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만 있으면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내가 제대로 된 사람들을 사귄다고 인정해주었다. 그 훌륭한 여교장은 처음부터 날 존중해주었는데, 라 떼라스와 대단한 호텔에서 나를 자주 초대하자 나에 대한 그 존중이 특별한 인정으로 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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