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날 때는 귀부터 깨어난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청력이 사라지듯이.

그러나 진실은 한층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법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죽음이란 더이상 신간을 읽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더이상 읽지 못할 책들이 거기 켜켜이 쌓여 있었다.

책은 어떻게든 구했지만 서가 정리는?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버릴지를 결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게 소득이랄까

거기 쌓이거나 꽂힌 책들은, 모두 남길 수 없다면 모두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 공동체였다.

그는 마치 손차양을 만들기 위해 손을 들었다는 듯 볕을 가렸다.

"말은 잊어버려도 그 뜻은 오래 기억할 테니까. ‘캇땀 호 가야’라는 말은 생각이 안 났는데, 그 뜻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요. ‘캇땀 호 가야’는 인도말로 ‘다 끝났어’라는 뜻입니다. 인도에서는 모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 말을 한다네요. 그래서 언젠가 사막에 가면 나도 그 말을 해봐야지 생각했거든요."

하늘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꿨다. 그것은 조금의 멈춤도 허용하지 않는, 오직 변화할 뿐인 하늘이었다. 붉은색인가 싶으면 푸른색이었고, 여기까지인가 싶으면 무한히 뻗어나갔다. 하늘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시야는 더 넓어졌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이토록 광대한가 싶어 놀랐다. 그건 공간적인 광대함만이 아니었다.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밤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밤은 밤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인간은 백오십 리 높이의 대기권에 짓눌려 그 육체적 기관이 저녁이면 피로하게 된다. 피로해진 인간은 누워 휴식한다. 육체의 눈이 감기는 바로 그 순간, 생각보다 그리 무기력하지 않은 머릿속에서 또하나의 다른 눈이 열린다. 미지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르고 지내던 세계의 어두운 사물들이 인간의 이웃이 된다"라고 빅토르 위고는 『바다의 일꾼들』에서 썼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다. 새로운 바람은 새로운 감각을 불러온다.

"이를 응시하는 우리 앞에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 우리 자신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뤄져 있는 또다른 삶이 응집되고 해체된다. 완전히 통찰하는 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잠자는 사람은 이상한 동물, 기이한 식물, 끔찍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한 유령들, 유충들, 가면들, 형상들, 히드라, 혼란, 달이 없는 달빛, 경이로움의 어두운 해체, 커지고 작아지며 동요하는 두꺼운 층,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형태들, 우리가 몽상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신비를 언뜻 본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에는 말로 채울 수 없는 충만함이 있었다.

"서로 싫어져서 헤어지는데, 어떻게 헤어져야 잘 헤어지는 건가요?"
그가 물었다.
"간단해. 헤어질 때는 헤어지는 일에만 집중할 것. 사랑할 때 그랬듯이."

그 무렵 정미는 언젠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되리라고 믿는 이야기 중독자였다.

바얀자그의 절벽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무른 사암이다. 그건 그 지역이 고생대에는 바닷속이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며 땅이 융기하고 바닷물이 빠지고 나자 퇴적층이 대기에 노출된 것이다. 흙의 입자가 고운 사암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지고 잘 날렸다. 한번 바람이 불면 모래 폭풍이 대지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다시 일억 년 정도가 더 필요했다.

"후지와라 신야라는 사람이 쓴 『인도방랑』이란 책이 있어. 읽어본 적 있어?"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명준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몸이 죽기로 결정하면 그가 계속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태어날 때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것일까?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복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혼자 부르는 노래는 왜 모두 사랑 노래일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학생들의 숫자가 부쩍 줄어든 방학의 캠퍼스를 걸어내려가노라면 바로 옆 고궁 돌담에 기대어 핀 능소화가 어둠 속에서도 여름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으리라는 식의 사고야말로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라며, 서양인들이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를 부각시킨 것은 이집트 여왕이 지략으로 로마 황제에게 맞섰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엄마 없는 아이는 사랑도 없으니까
말없이, 그저 말없이 바람 노래 들어보네.*

* 혜은이의 노래 〈엄마 없는 아이〉 중에서.

그는 기억 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것은 여름의 얼굴이었고, 그가 그녀에게서 사랑의 기미를 느꼈던 얼굴이었고, 여름이 끝나자 사라져버린 얼굴이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고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초는 후쿠다의 생각이었다. 단골 바가 거기 뒷골목에 있다고 했다. 하이랜드라는 이름의 그 바는 열 명 남짓 들어가면 실내가 꽉 찰 정도로 협소했지만, 바텐더로 일하는 중년의 주인이 대저택의 집사처럼 나비넥타이를 매고 서서 손님들의 잔에 스카치위스키를 따르는 곳이라고 그녀는 썼다. 후쿠다에 따르면 "밤마다 인근 출판사의 편집자들과 기자들이 담배 연기처럼 몰려드는 곳"이었다.

今日もほほえみが私を過ぎた 何も 何もなかったように(오늘도 미소가 나를 스쳤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私の心ははりさけそうだ 人を愛せないゆえに(내 마음은 찢어질 듯하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까닭에

아카이도리는 제가 중학교 시절에 꽤나 인기가 있었던 밴드였습니다. 다들 히트곡인 〈다케다의 자장가竹田の子守唄〉나 〈날개를 주세요翼をください〉 같은 노래를 좋아했지만, 저는 나중에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하얀 무덤〉처럼 슬프고 어두운 노래가 좋았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잊어버렸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그 시절의 우리를 우리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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