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땅에 보슬비가 내리듯이, 건조하고 닫혔던 마음에 조금씩 설렘의 동요가 일어나며 한 편의 글은 시작된다. 마치농부가 대기의 미세한 기운을 감지하면서 농작물과 교감이라도 하듯이. 때로는 한 문장이, 때로는 문단 전체가. 어떤때는, 드물지만, 핵심이 되는 영상이 자리를 잡으며 그 설렘이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음계일 수도 있으며 무엇인지는아직 알 수 없는 하나의 어조(톤)에 멈추기도 한다. - P56

그러나 어느 순간 설렘이 구체적인 기쁨으로 연결된다. 글쓰기라는 희열. 그것은 시작과는 달리 곧장 긴 낙담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글은 일단 이 부인할 수 없는 흥분어린 희열로 열린다. 첫 문장이 놓이고 글쓰기가 시작되면 폭풍과같은 시간대로 빨려들듯 끌려들어간다. 그때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매일 어떤 식으로 글이 진행되는지구분이 가지 않는 시간이 된다. 상당기간 그렇게 머물다 보 - P56

글쓰기의 시간은 자주 무시간이거나, 혹은 질량과 중력이다른 예외적 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글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확실히 객관적이며 선적이고 여일한 그런 시간과는 다른시간의 질을 경험한다. - P57

나이를 먹어가며 많이 완화되었지만 글쓰기의 절대조건은 진공과도 같은 침묵이었다. 마치 내 내면이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무한히 미세해진 데시벨의 비밀스러운교감을 놓치면 다 글러버릴 것 같은 당겨진 신경으로 나는이 순수한 침묵을 갈망했다. 그 갈망은 좋으나 주변을 많이힘들게 했다. - P58

소설 쓰기가 행복한 것은 아마도 소설을 ‘내‘가 쓰지 않기때문에, 소설을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 P59

수 있다. 자아도취적 글쓰기는 내가 늘 기피하고자 애쓰는것 중의 하나다. 세상과의 교감, 삶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마그마들의 어떤 융합,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생성되며 다시 체험되고・・・・・・ 그런 방식으로 문장과 서사가구성된다. - P60

말을 건다.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갈피와 깊이로 종횡무진침투하는 일, 그들의 영혼의 뒤안길에 조명등을 비추고 드러나는 놀라운사실들을 다시 한 번 경험하면서 글쓰기의 과정이 진행된다. 그러면서 사랑의 감정이 태어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진부하다면, 연민, 이해, 용납 때로는 감탄, 감동이라고 불러도 좋다. - P61

나 혼자 쓰지 않기 때문에 소설 쓰기는 수월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고집스러운 삶의 질서가 있기에 ‘그들‘과 공존하는 일은 늘 갈등을 만들어낸다. ‘나‘는 어느 면으로는 ‘대‘필자이다. - P61

소설뿐 아니라 쓰는 자의 삶 또한 삼인칭이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나‘의 것을 포함한, 모든 개인적 삶이 객관화되는 것은 선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민감함이라는 천형을 어느 정도 부여받은 작가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격렬하고 변덕스럽고 무질서하며, 자주 추함에 더 가까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삶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을 길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미리 질려 소설 쓰기를 포기할 수도 있었으리라. - P62

든 쓸 것들이 꼭 써야만 하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쓸 것과 시간 사이에, 시간과 분량 사이에 자기만의 합의점이 찾아진다. 베케트의 합의점이 있는가 하면 필립 로스의 합의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상 이전, 이면, 이후가 좀 더 명료하게 보이는 것은 나이가 누릴 수 있는 매우 큰 복이다. 가시의 것보다 비가시의 것에 더 깊이 글이 쏠린다. 그러한 시선으로 웬만한 것은 이해가 된다. 논리적 이해가 아니라 맥락과 숨겨진 깊이가 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 사랑하게 된다. 사랑할 만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 쉽다. 새벽의잠깬 아이의 눈망울, 빗속의 숲, 아름다운 사람들의 미소. 희생자의 겸손……….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것들을 사랑하는법을 배우게 된다. 사랑이 때로 끔찍한 도전이며 실천임을알게 될 때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생긴다. 궁극적으로 반복되는 인간의 진부한 서사 너머의 것을 조금씩 명료히 바라보노라면, 그에 알맞은 말이 부족하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결여다,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바벨탑 건축은 실추한 인류의본능적인 공허와 결여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 P63

행력과 가능성을 탐험해본다. 어디선가 나는 이러한 언어를유비쿼터스적인 언어라고 불렀다. 편재하는 언어 시공을 넘어서 소통하는 언어라고 불러도 좋겠다. 우리의 각질화된 소설관, 관습화되어 협소해졌으며 이미 소설을 떠나버린 소설의 언어는 그만 그 빈곤해진 틀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이병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소설의 언어는 유비쿼터스적인 화장으로 열려 있다. 그러니 열린 곳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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