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사방을 따뜻하게 만드는 기도가 티베트 고산에서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고 짐작한다. 그것이 물위를 걷는 기적의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해주려 했다고 짐작한다. 그냥 짐작만 한다.

우리 안의 그 어떤 높은 것, 궁극의 것에 가 닿고 그것을 간직하는 것에 겨누어져 있었으리라.

이 낮은 곳에서 조금이나마 주변을 따뜻하게 하며 살라는 당부를 새겨듣는 것으로 친구를 놓친 아쉬움을 달랜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미미한 것이라면, 우리의 사랑이 그것을 살리고 키울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미한 나도, 무엇인가를 소중히 할 줄 아는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무언가 큰 것을, 거리를 두거나 실없이 미워하는 대신 사랑한다면, 어쩌면 나도 그만큼 따라서 커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길은 저 귀한 것, 저 가엾은 것, 우리 모두 나서서 바꾸어야 할 것, 저 자라나는 것, 저 푸르른 것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사랑으로 우리는 이룬다. 돌아보면, 마음 아팠던 첫사랑을 통해서만도, 그때는 아무리 마음에 멍이 들었어도, 우리는 얼마나 자랐던가. 아마도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아이가 그렇게 한 그 모든 시간, 내가 그것을 그려보는 이 모든 시간은 사람과 사람이 묶이는 시간이다.

그러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전혀 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글이 독일어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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