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인생에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산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물리적 힘보다도 우레 소리 때문이기 십상이라는 것을 그 일을 겪은 후 알게 되었다. 우레소리에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면서 산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 P8

형상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엄연한 사실과 현상도 은유와 환유로 받아들이고 표현하게 되는 습성은 오랜 세월 문학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며 살아온 탓에 길러진 것일 게다. 어쨌거나 내게 문학은 나름 정황과 사물의 이해방식이고 사유의 틀이자 나와 나를 에워싼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창(窓)인것이다. - P9

미친 듯 퍼붓던 비가 그친 아침 환한 햇빛 아래 지난밤의광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정경을 망연히 바라보며 나는 이러한 아침풍경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쓸 수 있을 듯한 흥분과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재난이 50년 전문창과 신입생 시절 첫 강의 시간에 들었던 이른바 ‘충격을느끼는 소재로 다가온 것이다. 문창과 첫 수업시간에 들은강의 내용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그중 각 작가마다 다르게 ‘충격‘을 주는 소재가 있으니 그걸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 P9

그러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과 이미지나 감각들은 얼마나 쉽게 희미해지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마는지. 글로 써지지 못한 생각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덧없이사라지는지. 부엌 선반과 현관 신발장 위, 화장실과 침대 머리맡 등 도처에 놓인 메모지와 볼펜을 보면 나 자신이 때로구차스럽고 가엾어지기도 한다. - P11

쓰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겪게 되는 우울증은 자기검열의 끔찍함, 글쓰기의두려움을 버텨내기 위한 방어기제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3

글을 구상할 때의 나는 알을 품은 암탉처럼 의심이 많아지고 언행이 굼떠진다. 나만의 대단한 비의 혹은 남모를 힘을품고 있는 듯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 물동이를 인 처녀처럼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진다. 글을 쓰는 과정 중에서 가장 행복할 때일 것이다. - P13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첫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에 이르는 동안 나는 기대감에 들뜨고 쉽게 좌절하고 회의에 빠지는가 하면 비대발괄도 서슴지 않고 행운과 우연에 기대어 보는등 한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감정과 복잡다단한 심리를 다 겪어낸다. 그러기에 작가들은 작품을 하나 끝낼 때마다 인생의 징검돌을 놓았다거나 일단락되었다는 느낌을맛본다고도 말하는가보다. 무엇인가가 내 안의 상처 혹은 무의식과 만나 파장을 일으키면서 쓰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적확한 표현을 얻기 위해 한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최대치를 끌어내고 조심스레 문장을 가다듬으면서 ‘그때까지 내 영혼이 보지 못했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에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분명히 있다. 아니 그것이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전부일 것이다. - P14

내게 있어 글쓰기란 엉클린 실꾸리에서 실마리를 찾는 일이고 문 없는 방에서 문고리를 찾는 일이고 대책 없는 혼란과 혼돈 속에서 길을 내는 일이다. - P15

그래도 내게 남겨진 시간들을 생각하며여전히 책을 사고 읽고 읽다가 밀쳐두고 밀쳐두었던 사실을잊는다.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다만 과장도 과잉도 결핍도 없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P16

잡지 편집자로부터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평생 시인으로 살아왔으나 한동안 발표가 없었던 시인에게청탁을 하니 ‘시 쓰는 법을 잊어버려 쓸 수가 없노라‘는 답변이 돌아와 그럴 수도 있는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해온 일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잊을수 있는 것이다. 말을 잊고 기억을 잊고 평생을 수행해온 일상의 습관과 길들임을 잊고 종내 자신조차도 잊으면서 생의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 - P16

그러나 반석이라 여겼던 발밑이 허방이거나 늪이라 한들배반감이나 실망을 느낄 일도 아니잖겠는가. 인생에 비밀,
비의 따위는 애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떠한가.
없음을 찾아, 잊어버리고 말 것들을 찾아 일생 헤매고 끄달려온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P17

한 줄을 쓰기 위해서 백 권의 고서적을 읽었다, 만일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내 성실성과 완벽성을 설명하기보다 신경증적인 집착을 말하는 것이기 쉽다. - P21

도구에 대해서 말을 했으나, 소설이 자료로 쓰이는 것이아닌 것처럼 도구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없는 사실이다. 종이와 나, 혹은 자판과 나 사이가 바로 소설이다. 그것은 상상력이며, 그 상상력이 품고 있는 진실이다.
그러나 나의 상상력이 진실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다. 내 상상력이 비천하거나, 조금 무지한 것은 상관없다. 나는내소설이 비천하고 무지한 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것은 곤란하다.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저질러져서는 안 될 잘못이다. - P25

소설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면서 또한 나의 이야기이므로, 나의 시간이 달라진 것은 어떻게 해도 복구할 수 없는 일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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