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앞을 스쳐가는 삶의 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무슨 전투를 벌이겠다는 생각이 누가 애초에 있겠는가. 그저 삶의 감당이 그토록 어렵고, 외연이 넓어지면 감당할 것도 그만큼 더 많을 것일 뿐이리라. 그런 전투, 삶의 와중에는 이런 힘 있는 필적을 읽는 기쁨의 순간, 아름다운 사치도 있다.

"힘드시지요? 지금 아주 높은 산에 오르는 중이셔요. 많이 힘드신데 저희가 같이 못 가네요. 하지만 저희도 곧 따라갈 거예요. 산에도 늘 혼자 가셨지요. 지금 올라가시는 산은 아주 높은 산이니 올라가시면 장관일 거예요. 높은 산에서 보신 것은 늘 글로 쓰셔서 들려주셨지요. 지금 가시는 높은 곳 이야기도 저희에게 들려주세요."

그 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에서도 나는 특별한 교재가 없다. 교재 대신 학생들이 학기 말에 ‘나의 책’을 만들어낸다. 그 이유는 학생들 스스로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내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때문이다.

또 그들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는 때문이다.

온갖 공부를 다 하면서도 탈북자를 돌보고, 독거노인을 돌보고, 고가의 백혈병 치료제로 폭리를 취하는 다국적 제약사들을 조용히 날카롭게 성토하던 의학도 영수는 언젠가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제 아무리 멋진 말에도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 소리일 뿐’이라는 구절을 그토록 눈여겨 읽었던 갑석이는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어 있다. 세상에 그런 의사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으로 즐겁다.

그런데 그 귀하고 빛나는 이들은 내가 알기 때문에 그렇게 귀하고 빛난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다 그렇게 귀하고 빛날 것이다.
젊은이들은 더더욱.

만만치 않은 직업에 공부까지 하느라 시간이 넉넉할 리 없건만, 내가 부끄러울 만큼 엄청나게 많이 책을 사고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대신 다른 물건 같은 건 안 산다고 했다.(그 어느 온갖 명품을 걸친 사람이 이렇게 빛날 수 있겠는가.)

짝짓기에도 부모가 나서고, 애 낳는 데도 부모가 나서고, 애 엄마가 애 젖먹이는 것도 버거워하고, 밥 먹이는 것도 버거워하고, 한글 가르치는 것도 힘들어 한다. 이러다 국민 전체가 단체로 미성년화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아이고 어른이고 다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국력이 저하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우마저 든다. 무엇보다 그런 약해진 사람들이 과도한 경쟁으로 공격성만 커지는 문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지나치게 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방치되거나 심지어 버려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 귀해지는 길이 없을까. 제도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만들어낼 제도도 없거니와 제도가 다 해결해 줄 일도 아니다.

가끔씩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니나는 유난히도 그런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친구들의 소중함을 좀 더 가르쳐야 할 것 같다. 내가 남을,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나도 자동으로 귀해지는 이 자명한 이치를 마음에 새겨주어야 할 것 같다. 능률화가 가속화되는 미래에는 인구의 8할 정도는 불필요하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고, 빈부격차의 심화도 심각하게 체감된다. 우리가 파멸로 가는 공룡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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