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전화하기를 백 번도 더 기다렸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긴장감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마저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더구나 나는 언젠가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나는 고통스러운 미래의 쾌락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일정을 알면 안심이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 사람의 부정(不貞)에 대비했다.

하지만 떠날 날짜가 다가오자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듯했고,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의 침대칸에서 나는 일주일 후에 같은 기차편을 타고 파리로 돌아오고 있는 내 모습을 끊임없이 그려보았다.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이내 불안으로 바뀌었다.

내가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그것이 열정과 관계가 있을 때뿐이었다.

나는 바디아 성당에 다시 갔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반쯤 닳아서 지워진 산타크로체의 프레스코 벽화를 바라보다가 우리의 이야기도 나와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언젠가는 저 빛바랜 그림처럼 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앞에서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남성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여자가 아닌 남자가 그토록 뛰어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같은 경우로 나는 쿠르베의 그림만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여자에 의해 그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다. 〈세상의 근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쿠르베의 그림은 누워 있는 여인을 그린 것인데,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전면에 성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원주)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가 마치 글을 쓰듯이 피렌체에 나의 열정을 새겨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읽으려면 피렌체로 다시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지자, 나는 카드점 치는 사람을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어졌다. 그것만이 내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행위와 환각 사이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과 광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한번은 침대에 누워 자위를 했는데, 그 사람도 내 배 위에서 같은 것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만약 이달 말까지 그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해온다면 자선단체에 500프랑을 기부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고, 보내지 않을 편지에 답장을 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나의 생각, 나의 행동들은 모두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현재를, 행복을 향해 열려 있던 과거로 바꾸어놓고 싶었다.

나는 하루하루를 시간을 헤아리며 지냈다. ‘그 사람이 떠난 지 이 주일째야. 이제 다섯 주가 지났구나.’ ‘작년 오늘에는 내가 거기 있었지. 나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어.’ 쇼핑센터가 새로 문을 열었다거나 고르바초프가 파리를 방문했다거나 마이클 창이 롤랑 가로스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거나 하는 화젯거리가 있어도 내게 떠오르는 건, ‘예전엔 그 사람이 여기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특별할 것도 없었던 그 당시의 순간들을 돌이켜보았다. 소르본 대학의 자료실에 들르고, 볼테르 거리를 거닐고, 베네통에서 스커트를입어보던 그때를. 그렇게 과거를 되새기다보니, 왜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가듯 지금 현재에서 그 시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오직 한 남자에게 엽서를 보낸다는 구실 하나만으로 코펜하겐까지 간 셈이었음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해서는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때 내가 여길 지나갔지’ 하는 구절이 나오더라도 미심쩍은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원고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쓰였으므로 이미 읽을 만한 글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쓴 원고가 아직 내 손 안에 있는 한, 글쓰기의 가능성은 아직도 열려 있다. 내게는 형용사의 위치를 바꾸는 일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덧붙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람들은 연합군의 지상 공격과 화학무기를 이용한 사담후세인의 반격전, 그리고 라파예트 백화점 테러 등 이미 예고되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가슴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랑의 열정을 겪을 때 생겨나는 것과 똑같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욕망과 고뇌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서 그친다. 이런 기다림에는 꿈이나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낭테르에서 퐁드뇌이까지 가는 동안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우리는 뜨겁게 껴안고 애무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